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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샘통문 Ⅲ-19]돈주머니, 전대(錢袋) 단상

작성자알록달록|작성시간26.06.19|조회수177 목록 댓글 0

[찬샘통문 Ⅲ-19]돈주머니, 전대(錢袋) 단상

 

 

 

이번 여행에서 큰 아들이 제 동생에게 선물한다고 한국에서 사온 것이 마침 전대(錢袋)였다. 예전에 큰 돈을 현금으로 갖고 이동할 때 허리에 차던 돈지갑, 돈주머니가 전대 아닌가. 호주 호텔에서 저녁 식사후 거실에서 이런저런 한담(閑談)을 나누다 아들이 이 선물을 꺼내자 갑자기 내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제 백 살이 되신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눈물까지 왈칵 났다. 사연인즉슨,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년이 다 되는 1977년의 일이다. 어쩐 일로 이 ‘어리석은 인간’이 좋은 친구들의 강권으로 보게 된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편입시험에 덜컥 합격을 해버린 ‘희한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어, 영어 두 과목을 보는데 모두 100점을 맞았다던가. 2명을 뽑는다는데 150명이 지원했다던가. 위로 형님 세 분은 모두 국립대인 전북대학교를 다녔으므로, 사립, 그것도 서울지역의 사립대는 처음인지라 아버지는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예 기겁을 하고 쌍수를 들어 반대를 하셨다. 다니던 원광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여 ‘아들 중 누구나 선생 한 명 됐으면 좋겠다’는 당신의 평생소원을 풀어달라며 밤새 우셨다. 그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사실 학교 같지도 않은 그 학교 때려치우고 부모와 고향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오래 전부터 결심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 게, 1976년 겨울, 1년 다닌 대학에서 사귄 좋은 친구들이 우리집에 내려와 편입시험을 보러 가자고 꼬신 것이다. 내가 싫다고 하니까 아버지께 강권, 강추를 했다. 그 결과, 웃긴 것은 억지로 올라가 한 달 정도 <영어의 왕도>를 공부하고 간 나만 되고, 그 친구들은 몇 군데 모두 떨어졌다. 이제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합격 소식을 전하려 고향에 내려간 날, 아버지는 마당에서 “오늘 대문앞에 까치가 울더니 좋은 일이지만, 그놈의 학비(學費)는 어떻게 헌다냐?”고 하셨다. 그날밤, 어머니는 “송충이는 솔낭구(소나무) 잎을 먹고 살아야 헌다”며 밤새 만류하고, 아버지는 한 말씀도 안하시고 돌아누워 끙끙끙 한숨만 쉬셨다. 나는 어차피 이 마당에 서울로 가겠다고 작정해 “좀 도와주면 되지 아들 앞길을 가로막냐”고 대들었다.

 

호주는 코알라와 캥거루의 천국. 아예 "캥거루 밭"이 있을 정도. 브리즈번의 어느 동물원은 코알라의 숲이 있다. 엉덩이 한번 만지고 인증샷 찍는데 1인 35달러(3만5천원). 마냥 신기해 하는 손자에게 그 기분을 맛보게 해주는데 10만원인들 아까우랴. 사진을 찍고 있는 제 아빠나 옆에서 지켜보는 작은엄마(최근 회임을 한 나의 둘째 며느리)도 행복했을 듯하다.

다음달엔가, 아버지는 어떻게 마련했는지 나의 등록비(35만원쯤으로 기억.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1학기 15만원이 채 안됐을 것이다)를 신문지에 둘둘둘 싸 책보(보자기)로 허리에 꿰찮고 명륜동의 성균관대를 물어물어 찾아갔다는 것이다. 접수창구에서 현금을 일일이 세어 내는데, 어느 사람이 ‘종우때기’(종이) 서너 장을 제출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수표(手標)라는 것을 당신 인생에서 처음 봤고 알게 돼 머리를 쳤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학비만 내야 된다면 다행이지만, 먹고 잘 곳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돈암동에 사는 아버지 친구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한 달에 쌀 한가마(당시 3만-5만원?)를 주기로 하고 하숙을 시켰다. 지금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도,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돈이 없어 걸어다닌 기억밖에는. 막걸리는 무슨 돈으로 마셨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생각으로 3년을 그렇게 다녔을까.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지금은 말끔하게 천으로 고급스럽게 만든 돈주머니, 그 전대를 보고 '사람의 아들'인지라 어찌 아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최근의 불효, 불경스런 언행까지 겹쳐, 먼 타국 호주의 어느 고급 호텔에서 나는 두 아들 앞에서 그저 쩔쩔맬 수 밖에 없었다. 책보를 아시리라. 초등학교 시절 국어책 등 몇 권을 보자기로 싸서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허리까지 메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후진국이었나? 개발도상국 초창기였나? 지금은 대한민국이 유엔이 공표한 어엿한 선진국이다. 참 다행한 일이다. 우리 손주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시기에 선진국이 됐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춤이라도 못추겠는가. 아무튼, 그 돈주머니, 전대를 선물로 내놓자, 작은 아들은 지난해 유럽여행을 하면서 이탈리아가 소매치기가 많다고 해 샀다며 또다른 전대를 보여줬다. 나는 “전대 풍년”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들들이 전대를 보며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나를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얘기한다해도 그 정황을 짐작도 할 수 없으리.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는 걸. 불쑥 왕년에 “세월은 잘도 간다. 아이 아이”어쩌고 부르던 미국 팝송 한 소절이 떠올랐다. 흐흐.

 

덧붙임 1: 그렇게 시작된 나의 성균관대 영어영문학과 3년의 시절(세월)도 기억이 희미한데, 분명히 생각나는 일화 한 토막. 1학년때 F를 맞은 ‘영어회화’(2학점) 한 과목 때문에 자칫 졸업을 못할 위기를 자각한 게 4학년초. 영어회화는 영문과이니 전필(전공필수과목). 학점을 150점을 넘게 취득했어도 전필 1과목이 F이니 졸업 불가. 당시 맥퍼슨이라는 회화교수 가회동 자취집에 찾아가 울며불며 당신이 그 과목 점수를 주지 못하면 나는 죽게 됐다며 되지도않는 영어로 하소연. 오죽했으면 회화 가능한 친구를 데리고 갔을까. 그때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당신은 우리나라 사정이나 상황을 모르지만, 내가 졸업을 못하면 나는 자살이라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가 알탕갈탕 보내주는 ‘향토장학금’(Country Scholarship)만 받고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맥퍼슨 “상황은 알겠는데, 출석하지 않으면 절대 학점을 줄 수 없다”. 하여 4학년 2학기때 난데없이 2학점짜리 영어회화 과목을 신청, D를 맞았다는 슬픈 전설같은 얘기.

 

덧붙임 2: 성균관대만의 좋은 점, 잘한 점으로 되는 것은 편입생들에게 동창회비 가입비를 의무적으로 받은 것인 듯. 77년 나의 기억으로는 동창회비 가입비가 5만원이었던 듯. 77년 편입을 했어도 누구나 당연히 76학번으로 인정하는 분위기. '옆문'으로 들어왔다는 어떤 자괴심이나 위화감 등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던 것으로 기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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