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190905]검정고무신과 고무장화 그리고 일상
지난 7월 중순, 본채 리모델링 공사에 앞서 5일장이 열리는 오수장에서 검정고무신(8000원)과 고무장화(10000원) 그리고 햇빛가리개 모자(5000원)을 샀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가 선물이라며 사준 것이다. 별것도 아니라면 진짜 별것은 아니겠으나, 왜 그렇게 좋았을까? 기분이 우쭐우쭐. 오죽했으면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이라는 동요가 생각났을까? 참말로 별일이 다 있다. ‘60대 초보 농부(農夫)’의 첫 출발일까? 이른바, 나의 고향(故鄕) 정착이 시작된 셈이다. 무더운 삼복더위에 나의 탯자리인 본가 본채를 기와지붕만 남겨놓고 다 털었다. 벽과 천장 그리고 모든 문틀과 창틀을 뜯어내니 초라한 우리집 ‘해골(骸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장 베니어판에 달라붙은 십수 마리 쥐들의 덫에 걸린 시체라니? 끔찍했다. 20평도 채 안되는 이 집에서 일곱 총생(자식)을 낳아 길렀으니, 얼마나 북적였을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된다.
전주에서 23일 동안 달려온 업체 사장(오야지)와 유일한 직원인 사장의 사위. 애 참 많이 썼다. 그리고 가장 많이 출근한 대목아저씨. 30년 된 미장의 달인, 전기시설 공사팀, 싱크대와 화장실 타일공, 페인트 아줌씨 그리고 입주청소 아줌마들. 소금을 먹어가면서까지 더위와 싸운 3주간. 참 애들 많이 쓰셨다. 집을 짓거나 고치거나 뭐 하나 콜래보레이션(collaboration)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건축을 ‘종합예술’이라고 하면 좀 지나친 말일까? 요즘 한옥 리모델링의 트렌드라는 ‘노출 상량과 노출 써가래’. 완공후 보신 아버지는 아무래도 신기한 모양이다. 안방을 터 마루와 통합시킨 거실. 한옥(韓屋)에도 거실(居室)문화가 분 지 오래이다. ‘물주(物主)’이신 아버지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앞담장과 녹슨 철제대문도 뜯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앞이 탁 트여 들판이 환히 보이고 들판 넘어 2km쯤 멀리 있던 산(내가 작명한 이름이 문필봉文筆峰이다)이 눈앞에 바짝 다가온 것이다. command a fine view. 장관(壯觀)이 따로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헛간(허청)을 헐어내니 남쪽의 소나무동산이 우리의 정원(庭園)이 되어 버렸다.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오매, 오매, 좋은 거! 이런 경우를 보고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하는구나. 그냥 매겁시, 하염없이, 아무 생각없이 앉아 앞과 옆만 바라봐도 나는 이미 금수저 부자(富者)가 되었다. 동네 끝집의 프리미엄까지 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 누구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어 죽겠는데, ‘이놈의 글’의 한계에 부닥쳐 속이 상했다.
이렇게 좋은 고향을 놓아두고, 나는 대체 대처(大處)에서 무엇을 하며 40여년 동안 아등바등, 전전긍긍, 애면글면 살았단 말인가? 이번에 새로 만든 현관옆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도 한잔 기울여본다. 동산에 보름달이 두둥실 솟아오른다. 가객(歌客) 장사익의 농익은 노래가락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컴퓨터 책상에 앉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루는 첫새벽에 뒷산에 올라 저수지에 새우망을 몇 군데 놓아두고 온다. 다음날 건져보니 비싼 민물새우가 가득이다. 날씨가 화창하려는지 저수지 물가에 엄지손가락만한 우렁이 수두룩.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호박 썰어놓고 된장을 푼 새우매우탕, 우렁된장국이라니, 언제 이렇게 내 입이 호사(豪奢)를 누려본 적이 있던가? 고산 윤선도의 시조가 생각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건방지게 뜻도 모르면서 걸핏 하면 도사(道師)처럼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들먹인 적이 있었다. 이제사 알겠다. 무념무상, 이런 어려운 불교 한자용어는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그냥 정말로 ‘아무 생각 없는’ 그것이 무념무상인 것을 왜 몰랐을까? 흐흐.
민족의 명절이 가까오니 착한 일도 해보자. 선산 묘지에 올라가 5기 봉분을 낫으로 6시간 동안 깎다. 나머지는 예초기로 깎아야지, 마음 먹다. 아무리 ‘똥손’이래도 고향을 지키겠다고 내려온 몸, 누구는 처음부터 잘 했을까? 조심스레 예초기에 시동을 켜고 둘러메니 ‘쇠뭉치 일자 날’이 흉기처럼 무섭다. 여차직하면 다리도 잘릴 판. 톡톡 튀는 돌멩이를 조심해야 한다. 안전모를 썼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 땅이 팍팍 파이기만 하고 도무지 진도가 안나간다. 긴장한 팔뚝이 뻐근하다. 보다 못한 친구가 자기가 해주겠단다. ‘끈 날’은 누구의 발명품인지 정말 기발하다. 안전하기도 하고 재미까지 있다. 진입로부분의 풀 깎기엔 제격이다. 조상님들의 머리를 깎아주고나니 시원해 하실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얼마나 갑갑했을까? 역시 벌초(伐草)는 미풍양속(美風良俗)에 틀림없다. 사자(死者)나 산 자나 모두 흐뭇한 일이다. 오전을 보람차게 보내다.
오후엔 할 일이 또 있다. 유제(이웃) 아주머니가 텃밭 옥수수를 심은 고랑을 다듬어 무를 심어보란다. 무을 어떻게 심느냐부터 고랑 다듬는 법, 옥수수 뿌리 캐내는 법 등 하나에서 열까지 질문을 한 후에 십리 길을 달려가 무씨, 분사, 퇴비(거름), 복합비료를 사오다. 막내매제는 고들빼기를 심어보라며 씨를 사왔다. 고랑 3분의 2에 무를, 나머지에 고들빼기를 심은 오후는 몸은 극심하게 피곤해도 아, 아, 행복했다. 이웃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내 손으로 처음 심어온 작물, 무와 고들빼기. 인증샷을 한 후 아내가 없는 커다란 빈집으로 들어와 저녁을 먹다.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면 얼마나 좋을까. 유일한 흠. 일주일치 반찬이 동나간다. 판교집에 갈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가기가 싫으니, 이 노릇을 어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