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서신을 읽고 묵상하다보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이나 그 말씀의 교훈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이나 복음서의 복음을 전혀 모르고
바울 서신에 기록된 바울의 복음만으로도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을까 무척 고민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고
사도 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 자체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복음의 진리를 포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위편삼절의 경지로 읽고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바울 서신 가운데 그 어느 한 권도 진리의 복음으로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서신을 위편삼절의 경지로 읽고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공관 복음이나 요한복음과 같은 복음서를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난공불락의 난제와도 같습니다.
한 권으로된 성경을 매너리즘으로 읽다보니
복음서와 서신의 복음적 관점이나 신학적 관점을 간과하고 그 차이의 벽을 일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바울 서신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복음서는 그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시의 헬라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복음서를 듣게 되어도 다른 종교의 경전처럼 아주 낯설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복음서를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게 되면 아주 낯설 것입니다.
구약에 대한 이해는
더욱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헬라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구약의 이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설득력 있게 증거될 것인가는 난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또 바울의 복음을 듣는다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한 예수님의 자기 증거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증거하는 사도들의 증거는
통일성과 연속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또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증거를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의 정체성이 전혀 없는 헬라와 로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사실상 난맥의 난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도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 회당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생활 중심을 이루어
복음 전파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은 세계의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섞여 살면서 보다 넓은 세계관을 가졌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하 각지에 편만하게 전파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한 권으로 된 성경책이 없었던 시대 복음의 세계화는
각 나라와 민족의 문화와 충돌하면서 중세와 종교 개혁 시대를 거쳐
인쇄술의 발달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의 상황과 사도행전의 상황, 그리고 바울 서신의 상황은
보지 않고 예수를 믿는 시대를 위한 함축적인 복음의 서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한 권으로 된 성경책을 손에 들고 예수를 믿는 시대 상황은
어느 시대보다 복 받은 좋은 환경과 터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보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복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을 듣고 믿는 시대를 위한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였습니다.(요20:27-29)
도마의 실증적인 믿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배경이 전제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경험하지 않는 세대는
예수님의 부활을 도마처럼 실증적인 믿음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체험은
도마처럼 공생애의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실증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확실한 영원한 부활 능력을 복음의 광채를 경험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성령의 교회 시대는
사도들이 경험한 부활의 증거를 듣고 믿는 사람에 임하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담은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선포는
믿음으로 역사하는 구원의 은혜를 성령의 충만으로 경험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마음에 새길 때 인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선지자의 글과 복음서의 복음과 사도행전의 역사와 바울의 복음 서신을 깊이 읽고 묵상하면
성령 충만한 은혜의 역사를 마음의 평강과 사랑의 기쁨으로 오롯이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증거가 이교도의 사상과 혼잡되고 다른 복음으로 거짓 증거되면
참된 진리의 복음 증거로 역사하는 성령은 충만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챤은
이 엄청난 복음의 차이를 전혀 낯설게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익숙한 설교의 매너리즘에 빠져.......
성경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표층적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는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대한 연속성과 통일성의 포괄적인 이해 없이
자의적 해석의 왜곡된 시선으로 성경의 그 말씀을 복음으로 선포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펼치면서 아멘을 유도합니다.
성령의 증거를 잃어버린 강단의 설교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진리의 복음 증거와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복음에 대한 궁극의 고민과 깊은 성찰은
깨어 있는 성도의 그 참된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그 말씀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고민을 하면......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터부시 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기 위해
성경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도 않고 질문도 고민도 하지 않는
또 다른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나안 성도, 그들이 교회를 떠날 때......
교회를 떠날 날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의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할 목자가 없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른 갈증으로 고민을 상담할 선생이 없고 목자가 없는 것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가시 울타리로 둘러 쳐져 사이비의 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관과 교조적 패권에 복종하는 자, 그들만의 교회는
고난과 부활로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우리 주님도 들어 가지 못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설교의 특권으로 성도로 하여금
설교로 해석하는 그것만 믿고 따르게 하여 사실상 우민화시켰습니다.
오늘날 기독 청년들은 올바른 복음을 믿지도 전도 하지도 못하고
성경적인 토론이나 논쟁을 전혀 할 수 없는 영적 식물 인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해서 완전 불감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민감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깨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죄악에 대해서는
그것이 죄인 줄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죄의 낙을 아주 즐깁니다.
일만 악의 뿌리라는 돈에 대해서는
맘몬의 신앙을 탐욕적으로 편취하는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누가 선지자며, 사도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의 복음에 깨어 있는 성도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어 주장하고 선포하고 전합니다.
성경의 그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가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그 복음의 전사입니다.
진리의 복음을 마음에 새겨 묵상하지 않으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어둠에 버려지고 방치될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성령의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고
더 더욱 정치적 자아 실현과는 비교를 거부합니다.
정치는 재앙인지도 알지 못하고 소중한 한 표의 권리 행사로 당선을 환호하지만
멀지 않아 마녀 사냥으로 패도 정치를 난도질 할 것입니다.
정치는 필요악일 뿐이요,
권모술수의 정치 행태는 자족의 행복 메뉴가 아닙니다.
다만 종교인 과세로 기독교를 폄하하고
진리의 순전한 복음을 사이비로 매도한 정치 패악질을 개탄할 뿐입니다.
시사 방송을 시청하면 짜증이 나지만
주의 말씀을 묵상하면 생명의 기쁨으로 넘칩니다.
공관복음의 그 복음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성취하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복음서의 네러티브를 피상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메시야를 증거하는 구약의 성경을
신약의 성취된 그 나라의 복음으로 메시야의 실체로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복음서 저자의 시선으로
메시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가질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기가 아니라
선지자의 글이 축약된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메시야 예언이 집중된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나 스가랴서를 알지 못하면
복음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에 능숙한 학자라고 해서
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깨닫는 지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없는데
성경의 하나님을 그 말씀의 수준으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는 것과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믿음과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면서도 끝없는 성경에 대한 고민은
성경의 광맥에서 복음 진리를 찾는 열정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를 깨달은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율법의 대가였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능통하였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복음 전도의 여정으로 기록하되었으며
많은 복음 서신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여 믿음의 터전을 굳게 세웠습니다.
바울 서신의 학문적 가치는
헬라와 동양의 철학을 능가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저작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서설로 구약 성경을 난도질하고 양식 비평으로 복음서를 난도질 하지만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경륜을 복음으로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통치하는 세계로 깨달았습니다.
바울 서신에는 복음서의 내용이나
그 해석이 전혀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서 탄생한 것에 대한 이해도 없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와 관련된 복음적 이해는
바울 서신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복음서의 그 많은 말씀 가운데 기록되지 않은 오직 한 구절 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행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주 예수의 친히 하신 말씀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바울이 직접 받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직접적인 말씀은 복음서에 없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 그 자체이며, 복음서에는 유사한 말씀이 많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였습니다.(눅6:27-31)
비록 바울은 복음서에 기록된 풍성한 예수님의 말씀은 알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인 자기 증거로 말미암아
성경대로 죽음을 당하였으며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는 본질적인 복음의 정수를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롬1:1-4)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증거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성취하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선포하는 복음서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진리의 복음으로 선포하는 바울의 복음 서신은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성경외전과 동,서양 철학의 해박한 지식으로 성경의 복음을 훼손하고 날조하고 왜곡하는 기독교 이야기는
그 많은 학문이 그 자신을 미치게 하는 또라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지성과 학문을 사랑하는 많은 젊은 청년들이 또라이 현상에 감염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와 구속의 세계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참상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을 말하면서 성경의 주장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지성의 도적이요, 학문의 강도요, 오만과 편견의 자아 도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요,
기독교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지성의 고뇌는
또라이 현상의 주화입마일 것입니다.
성경을 말하면서 성경의 주장을 선포하는 사람은 성경의 복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을 복 받은 성도요,
성경을 말하면서 성경의 주장을 훼방하고 날조하고 왜곡하는 사람은
성경의 저주를 하나도 빠짐없이 받을 것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