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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에 모인 시민들이 민심… 아이들에게 공정한 나라 물려주고 싶다”

작성자수공, 유성은|작성시간26.06.23|조회수1 목록 댓글 0

“잠실에 모인 시민들이 민심… 아이들에게 공정한 나라 물려주고 싶다”

 

월간조선  202607(입력 2026.06.19) 고기정 기자  

 

 

⊙ ‘투표용지부족’ 사태이후 잠실 개표소로 몰린시민들
⊙ “애국하는 마음으로 나왔다” 2030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봉사
⊙ 정치인 아닌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공간…‘재투표’ 구호만 외쳐
⊙ “청년들아 고맙다”… 세대가 함께 만든 현장, 가족 단위 참석도 많아
⊙ 교대하는 경찰에게“수고했어” 격려도… 자발적으로 질서유지해 마찰 없어
⊙ 누군가에게는 시위대,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민심’
⊙ 부정선거론 세력 개입하면서, ‘변질’ 우려 나와

6월 7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주변에 시민들이 모여 있는 모습. 경찰에 따르면 이날 추산 인원은 약 1만 명이다. 이하 사진=고기정 기자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은 상황에 화가 나지 않을 국민이 있을까요? 잠실에 모인 시민들이 민심입니다.”

 

6·3 지방선거가 치러진 지 이틀 뒤인 6월 5일,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구에서 서울행을 택한 A씨의 말이다. 6월 7일 오후 기자가 찾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주변은 수만 명의 인파로 가득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머릿속에 떠올린 풍경은 흔한 대규모 집회였다. 여러 언론이 이들을 ‘시위대’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이후 탄핵 찬반 집회를 다 경험한 기억 탓에, 확성기 소리가 울리고 단상 위 연설자가 군중을 이끌며 경찰과 참가자들이 대치하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러나 실제 현장은 예상과 달랐다. 경기장 출입문 주변에는 사람들이 삼삼 오오 모여 있었고,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부모들은 돗자리를 펴고 앉아 저마다 “재투표!”를 외치고 있었다. 현장에서 들리는 구호도 대부분 ‘재투표’였다. 손글씨로 직접 만든 스케치북을 든 노인들도 눈에 띄었다. 일반적인 시위 현장이라기 보다 주말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의 모습에 가까웠다. 태극기를 든 시민들은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제작된 피켓보다 직접 손으로 쓴 문구들이 더 많이 보였다.

 

 

이날 잠실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특정 단체에 동원됐거나 정치인의 연설을 보러 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평범한 유권자들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책임을 묻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다. 르포는 그 현장에서 만난, ‘시위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시민들’의 이야기다.

 

“흔한 시위로 볼까 봐 확성기 안 써”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20대 청년 들의 자발적인 봉사였다. 별도의 컨트롤 타워나 조직이 없었지만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민들의 질서 유지를 도왔다. 급하게 나온 탓인지 조끼나 확성기 등 통일된 장비는 없었다. 대신 청테이프를 티셔츠에 붙이거나 흰 셔츠에 직접 매직으로 ‘안전요원’이라고 적어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시급을 받고 봉사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양대 재학 중이라는 봉사자 B씨는 “전부 자발적으로 애국하는 마음을 모아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날씨도 더운데, 어떤 이유로 이렇게 나오게 되었나요?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치려 하는데 시험지가 부족해서 시험을 치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선관위는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를 위한 조직임에도 관리를 부실하게 하고 있고,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좌우를 떠나 평범한 유권자들이라면 화가 날 사안이라고 생각하여 친구들과 함께 잠실을 찾았고, 자원봉사자가 부족하다는 말에 친구들과 지원하여 봉사하고 있습니다.”

 

- 목이 다 쉬었네요.

 

“인파도 많이 몰렸고, 어르신들 중에는 귀가 좋지 않은 분들도 계셔서 계속 안전 유지를 위해 소리치다 보니 목소리가 맛이 갔습니다. 확성기를 쓰면 편하겠지만, 이 인파가 모인 것을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에게 ‘거 봐, 시위잖아’라는 빌미를 줄까 봐 봉사자들 모두 확성기를 쓰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제 목소리가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게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모인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같은 청년들의 봉사 덕분인지 현장은 큰 혼란 없이 운영됐다. 사회자도 단상도 인솔자도 없었다. 대규모 시위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조직적인 통솔 체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정 단체별로 집결한 형태가 아니었음에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닥은 껌 껍질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했고, 화장실을 이용할 때도 모두가 질서 유지를 위해 애썼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본투표가 진행된 2026년 6월 3일, 선거인 수보다 투표용지가 부족해 추가 송부된 투표용지를 사용한 투표소가 전국 140곳에 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역 별로는 서울이 53곳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36곳) ▲인천(18곳) ▲부산(9곳) ▲대구(7곳) 등이 뒤를 이었다. 이 중 실제 추가 투표용지를 사용한 곳은 91곳이며, 투표가 일시 중단됐다가 재개된 곳은 총 26곳으로 확인됐다(이상 6월 13일 발표 기준).
특히 서울 송파구 잠실2동 제6투표소와 가락2동 제3투표소, 잠실4동, 문정2동 등에서는 오후 1시부터 일찌감치 투표용지가 소진돼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부 투표소에선 오후 4시10분쯤 투표가 중단됐고, 선관위는 오후 6시 이전 투표소에 들어온 유권자들에게 대기번호표를 발급해 투표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당시는 방송 3사의 출구 조사 결과가 이미 발표된 뒤였다. 또한 현장 안내가 충분하지 않아 투표소를 찾고도 결국 투표 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있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후 분노한 시민들은 잠실7동 제2투표소로 몰려들었다. 현장에는 경찰 기동대가 투입됐고, 약 1시간 동안 대치가 이어진 끝에 선관위는 두 개의 투표함을 개표소로 이송할 수 있었다. 이후 경찰에 의해 해산된 시민들은 개표가 진행되던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으로 이동해 목소리를 이어 가고 있다. 선관위는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참정권을 보호해야 할 기관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 조치에 따라 검·경 합수본이 꾸려졌으며, 경찰은 선관위 등 7곳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진행했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은 사퇴했고 이후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청년들아 고맙다" 

시민들이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고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동선이 꼬여 큰 사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테이프를 붙여 동선이 구분되게끔 했다.

 

현장 대부분은 2030 청년들이었다. 4050 중장년층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든든하다는 눈빛으로 청년들을 바라보는 노인들도 많았다. 노인들은 ‘청년들7아 고마워’ 등의 손글씨가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청년들에게 응원을 보내기도 했고, 직접 음식을 청년들의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안전·질서 유지 봉사활동을 하던 학생이 땀을 많이 흘리자 노인 여럿이 학생을 향해 부채질을 해 주기도 했다.

잠실에 모인 시민들이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놓은 모습. 쓰레기봉투도 자발적으로 시민들이 기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바닥에서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실에 인파가 급하게 몰리다 보니 깔끔한 피켓이나 플래카드 등을 제작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한쪽에선 분주하게 흰 종이를 나르고, 한쪽에선 펜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재투표’를 쓰는 자원봉사자들도 있었다. 대량 인쇄된 정치 구호보다 개인이 직접 준비 한 메시지가 현장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 청년이 기자에게도 ‘주권회복, 시대혁명, 재투표 실시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 구호인 ‘광복향항 시대혁명(光復 香港 時代革命)’ 문구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듯했다.

 

정치적 이유 아닌 시민들 스스로 만든 공간

 

현장에서 반복된 구호는 대부분 ‘재투표’였다. 일부에서 다른 정치적 구호가 나오면 2030 청년들이 ‘오늘은 그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자제를 요청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다른 정치적 메시지보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길 원하는 모습이었다.

 

국회의원들이 방문해도 시민들은 크게 환영하거나 몰리지 않았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시민의 한 사람으로 현장에 머물렀다. 전 한국사 강사인 전한길씨도 스피커를 잡거나 군중을 이끄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누군가 앞에서 끌고가는 집회가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공간이라는 인상을 줬다.

            2030 청년들이 종이에 태극기와 '재선거' 구호를 그려넣는 모습. 모두 자발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나섰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민경욱 자유와혁신 부대표가 현장을 찾자, 그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막상 민 부대표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1-3 출구 근처에 가자 ‘재투표가 중심인 사안’이라며 그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은 정치인이 메인이 아닌, 시민들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이날 현장 바로 옆에서는 연예기획사 하이브(HYBE)가 개최한 ‘위버스 콘서트’가 한창이었다. 현장에 모인 시민들은 예의를 갖춰 해당 콘서트를 축하했을 뿐, 콘서트를 관람하러 온 시민들과 별다른 마찰도 없었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조용히 선관위를 향해 항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 기말고사 기간일 텐데 과점퍼 (과잠)를 입은 대학생들도 잠실 현장을 찾았다.이들은 구석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저마다 조용히 시험공부를 하면서 간간이 ‘재투표’ 구호를 함께 외쳤다. ‘집중이 잘 안 되어 시험을 잘못 치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대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말했다.

 

“시험은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치르게 될 일이지만, 민주주의 수호는 이번이 아니면 조용히 묻힐 것 같아 잠실에 오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

 

“부끄러운 부모 되지 않으려 참석”

                                           천안에서 온 이지영씨 부부. 아이들도 '재투표'를 외치고 있다.

 

이날 현장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도 적지 않았다. 천안에서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잠실을 찾은 이지영(34)씨는 “투표를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주권이고 기본권인데 이번 지방선거에서 그런 내용들이 침해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며 현장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 멀리서 오셨네요.

 

 

“전혀 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안이면 가까운 거리인걸요. 비행기를 타고 오는 시민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민들 모두 황금 같은 주말을 다 반납하고, 출근을 앞두고 현장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나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 다수의 언론이 현장에 모인 사람들을 ‘시위대’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젊은 청년들과 교복 입은 학생들, 그리고 저희처럼 아이를 데리고 온 30대 부부들이 대부분이라 정말 우리 국민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민심 아닌가, 이게 민심이 아니면 대체 어떤 게 민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위 단체라고 표현하는 언론사가 다수인데, 보시다시피 어떤 시위 단체가 있나요? 모두 국민입니다. 국민이고 민심 입니다. 그런 점을 좀 알아주셨으면 합 니다. 저는 ‘자유는 그냥 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것을 지켜 주고 싶고, 공정하게 선거가 치러지는 나라를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 현장에 오고 싶지만 자녀 때문에 망설이는 부모들에게 한마디.

 

“외면하고 싶지 않고, 침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모두 갖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진심으로 아이들에 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을 겁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 줄 수 있도록”

 

수원에서 왔다는 장모(34)씨는 이날 현장에서 아이들을 위한 간식을 잔뜩 사 와 나눠 주고 있었다. 모두 사비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함께 봉사할 청년들을 모집했고, 그의 뜻에 공감한 신윤종(26)씨와 C씨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 주고,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대신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2030 청년들이 사비로 마련한 과자와 음료 등을 나눠 주는 모습.

 

장씨는 “전날인 6일 현장에 왔을 때 교복을 입은 어린 남학생이 용돈을 털어 더워 하는 시민들에게 아이스크림 40여 개를 사 오는 것을 목격했다”며 “그 학생들이 대견하면서도 미안했다.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어린 학생들이 하게 놔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간식 기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 전부 사비로 준비한 것들인가요?

 

“전부 사비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아이들도 그런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더운 환경에서 ‘재투표’ 라는 말만 계속 듣다 보면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끌어 갈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도 먹여 주고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을 받아 아이들 취향에 맞는 간식을 준비했습니다. 한두 살 아기들에게는 크래커를, 6살 이상 아이들에게는 젤리 등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 또 아이들은 병음료를 마시기 어려워 빨대를 꽂아 마실 수 있는 음료 수로 준비했습니다.”

시민들이 기부한 물품을 현장에서 나눠 주고 있다. 주로 생수나 마스크, 간단한 음식 등이다. 이날 현장에는 의료 지원 부스 등 다양한 부스들이 현장에 나온 시민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 다른 부모들 반응은 어떤가요?

 

“선관위의 행태에 분노해서 온 부모들이 대부분인데, 아이들이 간식을 받고 좋아하면 부모들도 함께 웃으시더라고요. 다들 예의도 바르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라며 예절 교육도 시키십니다. 아이들이 오늘 현장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잖아요. 지금의 아이들도 훗날 부모가 되어 자신의 자녀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좋은 기억을 전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대하는 경찰들에게 “수고했어”

 

한국인은 ‘밥의 민족’이라고들 한다. 안부를 물을 때도 “밥은 먹었어?”라고 고, 약속을 잡을 때도 “나중에 밥 한번 먹자”고 말할 정도다. 이날 잠실에서도 이런 모습은 그대로 이어졌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배달기사들이 하나둘 현장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들고 온 따끈따끈한 치킨과 피자, 도시락, 아이들도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죽까지, 거리와 시간 등의 이유로 현장을 찾지 못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보낸 음식 들이었다.

 

봉사자들은 이를 소분해 시민들에게 나눠 줬고, 배식을 기다리는 줄도 큰 혼란 없이 질서정연하게 이어졌다. 기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자 한 어르신이 기자의 입에 김밥을 넣어 주기도 했다. “청년들이 고생하는데 더 먹어야지”라며 자신의 몫을 청년들에게 양보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음식은 잠실 개표소 안을 지키는 보안요원과 공무원들에게도 전달됐다. 모두 시민들이 사비를 들여 마련한 것이었다. ‘목이 막히지 않게 물도 꼭 챙겨 먹으라’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땅거미가 지자 경찰들의 교대가 시작됐다. 시민들은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스스로 길을 터 주며 퇴근하는 경찰관들을 박수로 격려했다. 곳곳에서 “수고했어” 등 격려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봉사자들이 앞장서 동선을 확보하고 경찰들은 그 뒤를 따라 일렬로 이동했다. 현장에서는 경찰과 시민 사이의 물리적 충돌이나 큰 마찰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주웠고, 누군가는 남은 물을 나눠 줬다. 부모들은 아이 들의 손을 잡고 귀가했고, 청년 봉사자들은 마지막까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질서를 살폈다.

 

누구도 이들을 지휘하지 않았고, 단상 위에서 연설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날 잠실에 모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시위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에서 기자가 만난 이들은 자신의 한 표가 존중받는 나라, 그리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모인 평범한 시민들일 뿐이었다.

 

부정선거론 세력 등장, ‘하이재킹’ 우려

6월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여자 주니어 핸드볼 국가대표팀 선수들 이 경기장 내부에 보관 중인 훈련 장비를 가지고 경기장을 나서다가 일부 시민들에게 수색을 당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하지만 기자가 잠실 현장를 둘러보고 온 날 오후부터 서울 잠실에 모인 시민들의 목소리가 ‘부정선거’를 주장해 온 일부 단체의 ‘숟가락 얹기’ 행태 때문에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2030세대가 자발적으로 형성한 공론(公論)의 장을 일부 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면서, 시민들이 모인 본래 취지가 흐려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2030 시민의 자발적이고 순수한 모임이 부정 선거론 세력에 의해 하이재킹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잠실 현장에서 만난 A씨는 잠실7동 제2투표소 사태 이후 현장을 계속 지켜보면서, 선량한 마음으로 현장을 찾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봉사를 해 왔다. 그는 “처음에는 참정권 훼손에 문제 의식을 느껴 순수한 마음으로 모인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변질됐다. 사람들은 좌파 단체인 ‘대진연(대학생진보연합)’이나 중국인을 색출한다며 이른바 탐정놀이를 하고, 현장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의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SNS)에 올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30세대가 만들어 놓은 ‘판’을 이용하려는 세력 때문에 시민들의 순수한 마음이 짓밟히는 것 같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정치권에서도 이번 시민들의 모임 전체를 ‘극우’로 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아니면 말고’ 식의 마녀 사냥이나 홍위병식 행태는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뒤늦게 현장에 나타난 일부 세력들은 경찰관을 향해 욕설과 조롱을 퍼붓거나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훈련 장비를 꺼내러 온 핸드볼 유소년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소지품을 뒤지기도 했다. 특히 이들이 참정권 훼손에 분노해 거리로 나온 2030세대를 오히려 ‘프락치’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현장에는 참정권 문제 제기와 각종 음모론이 뒤섞인 양상이 빚어 지기도 했다.

 

이재명, “잠실 시위 현장 면밀하게 체크하고 있다”

 

초기에는 정치권에서도 잠실 현장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일들이 이어지면서 거리를 두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6월 10일 자신의 X(옛 트위터)에 “경찰관을 ‘가짜 경찰’로 몰거나 욕설을 하고, 심지어 감금과 폭행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서 “시민의 안전과 인권을 보호하는 경찰에 대한 폭력행위는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민주주의 공론장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정부가) 잠실 시위 현장을 면밀하게 체크하고 있다는 말씀도 드린다”고 덧붙였다. 경찰청은 언론 공지를 통해 “일부 참가자가 선량한 시민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법적 권한 없이 다른 사람의 소지품을 수색하는 등 불미스러운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대화경찰(Dialogue Police)을 늘리고, 서울경찰청 지휘부를 현장에 배치했다고 밝혔다.

 

잠실 현장에 투입됐다가 시위 참가자 들에게 조롱과 욕설을 들은 김민규 서울 경찰청 2기동단 경비과장(경정)은 6월 9일 경찰청 내부망에 올린 ‘경권은 어디로’라는 제목의 글에서 “앞으로 시위 양 상은 어디까지 경찰이 용인해 줄 것인지를 시험하는 수준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잠실 현장에 참여했다가 중국인이나 ‘대진연’으로 몰려 얼굴 사진이 SNS에 게시되는 등 초상권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시민들은 집단 차원의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언론사 간부는 “이런 상황이 계속 되면 투표권 침해와 경찰의 폭력에 분노했던 시민들의 마음은 차갑게 식을 것이고, 결국엔 경찰의 물리력 행사에 노출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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