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과 글렌 굴드...

작성자굴드|작성시간00.06.29|조회수523 목록 댓글 0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과 글렌 굴드... "모차르트와 베토벤, 쇼팽과 슈만은 모두 이 음악을 매일 연주하였습니다. 휠씬 뒤에 바르톡이나 파블로 카잘스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은 이걸 음악의 구약성서라고 했습니다.(실제로는 19세기의 대 지휘자 한스 폰 뵐로우가 이 곡집을 구약성서에 비유했으며 아울러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전32곡)를 신약성서에 비유했었죠.) 저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저도 평균율 클라비어를 매일 연주합니다. 단지 2개나 4개, 6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매일 다른 걸로 치죠.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방법입니다. 마치 샤워를 하면서 떼를 벗겨내는 듯한 느낌이 들죠. 너무나 순수해서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말이죠. 지루한 피아노 연습곡을 치면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만 쳐도 얼마든지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치고 나면 손가락의 움직임이 부드러워 지고 마치 춤을 추고 난 것처럼 살아있는게 행복해집니다." --------------------------------------------〈안드라스 쉬프〉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즐거움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감화를 주는 작품입니다. 기쁨, 슬픔, 눈물, 탄식, 웃음 등의 모든 것이 듣는 이를 향해 울려오는 듯합니다." ------------------------------------------------〈슈바이쩌〉 위의 두 사람의 말은 제가 평균율을 듣을때의 마음자세와 그 감동을 가장 적절히 표현해 준 말들입니다. 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으로 나누고 그 각 조성마다 장조와 단조로 전주곡과 푸가를 각각 붙인 바흐의 이 단순하며 조화로운 곡은 피아노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바로크적인(달리 말하면 폴리포니적인) 가능성을 그 하나 하나의 궁극까지 추구한 진보와 조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죠. 단순한 화성과 기 교의 연습곡으로 한계지어질 이 작품을 진지하고 철학적인 사색이 가득한 감상곡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로 바흐의 위대함이 아닐까요? 바흐라는 위대한 영혼이 완성시킨 화음과 대위법의 장대한 소우주!!! 연주라는 행위가 역사적 지식과 현대의 감성이나 관습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일 때에만 진정한 '재창조'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임을 상기할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악기로 바흐를 연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바흐를 연주하느냐이다"라는 외르크 데무스(비인 3총사의 한 사람이었던 피아니스트)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연주라는 행위가 단순한 역사적 흥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작품들의 정신을 현재의 시대감각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바흐의 클라비어 작품을 당시 악기와는 다른 발음기능을 가진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을 연주할 때에는 허용되는 표현의 범위에 대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흐가 남긴 '평균율'이라는 건반음악의 성서를 해석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서 가장 논란이 되어왔고 연주 스타일 간에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리듬의 분절에 관한 접근방식입니다. 즉, 단순히 음을 끊느냐 잇느냐는 기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여 각 악구나 선율선, 그리고 각 음형이 어떠한 터치에 의해 아티큘레이션 되는냐는 문제는 악상기호가 배제되어 있는 바흐의 원전판 악보를 대할 때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거의 전적으로 연주자의 주관에 의해 졀정될 수 밖에 없는 스타카토나 레가토, 포르타토 등의 선택은 연주자들에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심사숙고는 그동안 피아노를 통한 '평균율'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평균율'의 대상악기를 쳄발로로 상정하여 악곡전체의 음량을 곡에 따라 구별하거나 뒤나믹을 붙이는 방법, 혹은 대상악기로 클라비코드를 염두해 두고 소극적인 뒤나믹의 사용하거나 레가토에 의한 칸타빌레 주법의 재현 등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평균율'의 대상악기로 추정되는 쳄발로(논 레가토 지향)와 클라비코드(레가토 지향)의 특성을 염두해 둘 때, 뭐니뭐니 해도 '평균율'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하면서도 중요한 출발점은 레가토냐 논 레가토냐를 악보상으로 판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소 거칠게 부연하자면, 이는 리듬의 분절을 음악적 효과를 위한 음향의 재로로 취급하느냐 아니면 대위법적인 효과를 노린 음악적인 표현수단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문제는 해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라는 생각입니다.) 굴드의 '평균율'은 후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평균율은 지금까지의 피아노로 연주되는 바흐의 연주관에 도전장을 던진 음반입니다. 먼저 그는 이른바 '작곡가가 활동하던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와 연주법의 재현'이라는 원전악기 연주가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노선에 대해 의문부호-과연 그것이 유일한 길인가 하는 식의-를 던지게 할만큼 새로운 시도들을 해 왔고 또한 그 가능성을 몸소 실천해 보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작품을 그 때 당시의 악기로 연주해야만 작곡가가 의도했던 음악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 바로 원전악기 연주가들의 공통점인데, 이 논리에는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게 사실입니다. 음악은 계보학이나 역사학이 아니므로 작곡가가 활동하던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와 연주법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발 양보해서 그렇게 해서 설령 작곡가가 의도했던 그대로의 음악이 이끌어내 진다고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어떤 악기로 연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연주하느냐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원전연주의 많은 장점들을 깡그리 무시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클라비어를 위해 작곡된 바흐의 작품들을 하프시코드가 아닌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데에는 많은 난제들이 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봐도, 가벼운 건반 터치와 울림이 짧은 현을 가진 하프시코드란 악기를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 피아노로 연주될 때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굴드는 현대 악기를 가지고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있어서의 이러한 문제점과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작품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악기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피아노란 악기에 잠재된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 아예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를 개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독자적으로 고안해서 가끔씩 사용했던 '하프시피아노(harpsi-piano)'에서 우리는 음색에 대한 그의 실험정신을 확인하였던 바, '평균율' 연주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피아노의 특성과 음색을 들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는데, 건반이 눌려졌을 때 그 힘이 해머와 현에 전달되는 속도가 대단히 빠르고 한음 한음의 굵기 역시 가는 편이며 피아노 자체에서 공명되는 울림의 크기도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만일 굴드가 악기의 개량으로만 이 작품을 녹음하였다면 그다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음악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작품에 투영된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좀 더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음색'의 문제입니다. 즉, 새로운 악기에서 들려나오는 음색은 우리들의 피아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각 곡마다 조금씩 음색을 변화시켜(물론 이것은 라이브 음악회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만) 바흐의 작품에 음색이라는 개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칸타빌레'의 문제입니다. 굴드의 연주를 전통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그의 실험적인 연주는 옹호해줄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신 그에게는 대위법을 '노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 물론 이것이 가끔은 과장된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 하지만 철저히 푸가와 대위법을 위해 작곡된 바흐의 평균율에서만큼은 굴드가 창조해낸 이미지는 철저히 주관화된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이들은 이를 본래 그런 것인양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굴드는 이전에 그 어떤 연주가들도 발견하지 못했던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들이 갖는 자유로움을 깨닫게 해주는 점이며, 그것을 머리가 아닌 손가락(실제로 그의 테크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놀라운 것이기에)으로 재현해 냈습니다. 흔히 듣던 멜로디도 전혀 새롭게 들리게 만드는 그의 연주는, 굴드의 독단적인 산물의 위대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사람들이 부담 없이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설득력, 다시 말하자면 주관과 객관을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악보를 전혀 낯설게 만드는 자유로운 해석, 이것은 분명 굴드만의 상상력이자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 아닐까요?... 결국은 이야기가 굴드 예찬 쪽으로 흘러 버렸네요.^^ 전 사실 굴드의 "평균율" 음반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96년에는 1년 내내 굴드의 평균율 음반만 들은 적도 있죠. 그 이유야 물론 제가 평균율을 좋아하고 굴드의 연주를 좋아해서 였지만... 전 일반적인 경우와는 좀 다르게, 평균율 연주를 통해서 글렌 굴드라는 한 피아니스트의 영혼을 이해하게 되었죠.(일반적으로는 그의 "골드베르크"를 통해서인 경우가 많죠.) 그의 평균율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안따까을 때가 많습니다. '행여라도 건드리면 깨어질 것 같은, 마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유리잔 같은 가녀린 영혼'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특히 평균율 2권의 5번 프렐류드를 듣고 있으면 바흐라는 광대무변한 존재에 대해 너무도 숨가빠하는...-정작 너무나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바흐를 연주해 내면서도 자신이 영원히 도달 할 수 없는 바흐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느끼게 되죠.) 본의아니게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더 길어지기 전에 오늘은 이 정도로 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 기회가 닿는다면 글렌 굴드에 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네요. 사실 다음(daum)의 카페 평균율에는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단편"을 연재 중입니다. 이 글은 그 글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아해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듯 싶습니다. 평균율 가족 여러분 다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하시는 일들 다 잘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전 이만 물러갑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