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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때꺼리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곽용승 요셉 신부,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

작성자whtjd|작성시간26.06.12|조회수20 목록 댓글 0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왜 우리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가?

  

 

특별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1917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 후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인 1942년에 전세계를 성모 성심께 봉헌하였고,

이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1969년 로마 전례력이 개정됨으로써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한 등급 낮추어졌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인 토요일에 성모 성심을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마음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분의 모성적인 사랑을 공경하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온전히 결합된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어머니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영적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비체의 머리이며 만민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원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니다.

 

따라서 성모의 모성적 사랑은 성모의 덕행과 내적 생활, 하느님께 받은 갖가지 은총과 연결됩니다. 

심장으로 표현되는 성모 성심은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음이므로 그에 합당한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더 우리의 삶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곽용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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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

 

 

지난 월요일 청룡산에서 아빠 빠진 꿩 가족을 만났습니다.

엄마 꿩 주위에 병아리 꿩들이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길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털이 보송보송 난 꿩 병아리들이었습니다.

 

나를 마주친 엄마 꿩은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겠습니까?

엄마 꿩은 새끼들이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길 한 가운데 꼼짝 않고 서있었습니다.

엄마 꿩은 “내 새끼들을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애원하는 듯 했습니다.

 

엄마 꿩의 그 사랑을 범할 수 없어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죽였습니다.

이윽고 길을 건너 꿩 가족들은 낙엽을 신나게 뒤적이며 평온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길을 버티고 서있던 그 엄마 꿩의 사랑은 

저에게 참 사랑을 많이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지만,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냥 길 한 가운데 멈추어 선 그 엄마를 어찌 하찮은 날짐승 한 마리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비록 새끼를 보호하려는 한 마리 까투리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저에게 전해진 엄마 꿩의 사랑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꿩 가족을 뒤로하면서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라는 의문표를 저의 가슴에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저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 파묻혀  그 고귀한 사랑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어머님의 고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담을 수 없는 어머님의 마음을 우린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너덜거리는 걸레처럼 찢겨질 대로 찢겨진 통고의 심장을 우린 눈물도 없이 그저 사랑이라 일컫습니다.

아들의 절규에 구멍이 뻥 뚫린 어미의 마음을 얄팍한 감상에 젖어

잠시 눈시울을 적시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서 그 마음에 비수를 꽂는 짓거리를 행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갑남을녀가 된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돌아오길 원하시는 어머님의 절규에 이제 마음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고통이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음을 어머님의 성심을 바라보며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에 담긴 사랑과 고통을 이젠 우리 마음에도 담아야겠습니다.

고통을 밀어내면 사랑이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어미 꿩이 그랬듯이 언젠가 새끼 꿩도 엄마처럼 그렇게 새끼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어미 새가 저에게 전해준 그 메시지를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 대구대교구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함께 당하는 고통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정녕 복되십니다.”

 

성모님께 있어서는 모든 이가 부러워할 정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성경의 어느 곳을 보아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복되다’라고 딱히 드러낼 만한 구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 생애 막바지에 가서는

심지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 곁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성모님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정녕 복되십니다. 고통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함께’하시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제목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모님의 버금가는(함께하는) 고통”

(Passion of Christ and Compassion of Mary)으로 달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낳을 때부터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죽을 때까지 늘 함께하셨기에,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 안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복되다’라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며,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웠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학교’에서 어떻게 ‘주님과 함께’할 것인지를 배울 시기입니다.

 

 

/ 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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