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늘 때꺼리

남궁민 루카신부님 / 연중 제11주일 가해

작성자whtjd|작성시간26.06.13|조회수19 목록 댓글 0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자기 정체성"은

삶을 지탱하고 방향을 잡는 데 필수적인 기초다.

정체성이 명확해질 때 인간은 내면의 평화를 얻고,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며,

타인과 깊은 연대를 맺을 수 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를

"주님, 제가 주님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을 알게 하소서(Noverim te, noverim me)."라는 기도로 정리하였다.

토마스 머튼도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안에서 나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덕(Sanctitas)이다.

자아의 발견은 곧 성인이 되는 과정이다."라는 통찰을 전한다.

오늘의 성경 말씀들은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첫 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신 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전하신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 계약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었다. 이것이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이었다.

계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봉헌된 민족, 곧 "사제들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뜻했다.

사제란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도록 "따로 구별된" 이들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 정체성은 열두 지파로 구성된 유다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시킨다.

그러나 그 구별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사제직에는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 곧 중개자가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풍요로운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는 뜻이다.

오늘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는 장면이 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열두 지파로 구성되었던 옛 이스라엘의 재구성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하느님 백성을 다시 세우신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세우시는 동기를 복음 첫머리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시달리고, 낙담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습이 예수님께 비친 인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엾은 마음", 인간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새 계약의 동기이자 새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의 바탕을 이룬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신할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데,

그들은 "사도", 즉 "파견된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의 그리스어는 exousia다. 이 말은 "권위"로도, "능력"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들의 exousia, 곧 권위는 구약의 열두 지파처럼 야곱과의 혈통적 관계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권위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온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족보와 무관한 권위를 주셨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고 이르신다.

예수님께서 유다 민족만 구원하시고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는 듯 들리는 의아한 대목이다.

성경의 전체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런데 그 사명에는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즉 어디에선가 시작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새 백성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이 사명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 가족, 공동체 안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안으로 향하는 사명(missio ad intra)이다.

그런 다음 이 사명은 다른 이들에게로 확장될 수 있다(missio ad extra).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는 사랑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다.

나아가 이 구절은 하느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 정체성의 본질을 암시한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이르신다.

사도들과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거운 짐을 진 인류를 향한 치유와 섬김의 직무를 나누어 받아 수행하게 될 사람들이다.

첫 독서에서 이스라엘이 "사제들의 나라"라는 말은 그 특권적 지위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지닌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이들을 위하여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었다.

그처럼 새롭게 구성된 하느님의 백성도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의 선익을 향해야 한다.

거기에 신앙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정체성을 살아 낼 수 있을까? 제2독서인 로마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온갖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는 변함없이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곧 "원수"였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고난받고 죽게 하실 만큼 크신 사랑과 너그러움을 보여 주셨다면,

이제 우리가 "벗"이 되었고 의롭게 되었으니,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이끌어 주시리라는 것은 얼마나 더 확실하겠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출처] 연중 제11주일 가해 -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작성자 말씀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