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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때꺼리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심원택 토마스 신부, 정황래 시몬 신부,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작성자whtjd|작성시간26.06.14|조회수17 목록 댓글 0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주님께서 들려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자니 난감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고 하시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똑같은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탈출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싸우다가 …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동태복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은 우리 삶의 윤리로써 자리 잡고 있으며,

은연중에 이러한 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태복수법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무자비한 율법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에게 사사로이 복수할 권리를 주는 법률이 아니라,

법정에서 재판관이 벌을 주되 그 형량이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재판관을 위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의 배경에는 ‘복수의 한계가 거기까지다’라고 하면서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복수를 신중하게 제한한 것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법이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에 손을 드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경우 제한적으로나마

그 댓가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 법을 들어 말씀하시면서,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 만큼만 복수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제한된 복수까지도 금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시면서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손등으로 뺨을 맞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손바닥으로 뺨을 맞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손등으로 뺨을 맞을 땐 그 배 이상의 멸시와 모욕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까지도 참아내면서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라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아날 뺨이나 겉옷이 어디 있겠으며,

두 다리가 성할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겁나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왼뺨’, ‘겉옷’, ‘십리’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평화의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온유함을 닮음으로써 참된 평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시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손해를 손해로 되갚지 않는 의인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받은 만큼 갚아주면 속이 풀릴 것 같지만

오히려 앙갚음은 내 마음을 더욱 망가뜨리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없는 말을 하고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오히려 희생하고 손해 보며 그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의 의로움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현명하고도 공정한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른바

‘동태복수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이가 그것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거나

그 피해자와 화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보복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바로 이 ‘동태복수법’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이 ‘동태복수법’은

기원전 450년경의 로마법의 모체인 열 두 개의 동판에 새겨진 법조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의 고대 사회의 수많은 법 규정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된 법의 집행 방법이 바로 ‘동태복수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는 ‘동태복수법’은 어긋난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 ‘복수’는 악을 악으로 무찌르고, 하느님의 정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의 복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 적용되어 집행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수’는 정의의 궁극적인 실현자인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태복수법’의 근본취지는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난 행위를 한 이에게

그의 행실대로 똑같이 갚아주어 깨어진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이 법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하는 ‘함께함의 법’이었고,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이상으로 보복하여 이른바 ‘복수’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막는

‘정의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함께함’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결국 범죄의 악순환만을 불러 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법의 완전한 폐기를 강력히 선언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네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며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를 ‘용서 한다’는 것,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고 헤아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더욱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 용서를 하는 사람 모두의 얼굴을 밝게 해 줄 것입니다.

 

단순히 나한테 죄지은 사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얼굴을 밝게 해 주는 ‘용서’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를 함께하게 해줍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를 함께 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스스로 먼저 잘못된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 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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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동태 복수법으로 알려진 이 표현은 어찌 보면 가장 공정한 법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와 똑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나 물건으로

그것을 교환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말이 섬뜩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만 갚아 준다면 잘못된 것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갚아 주는 것은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정당하지도 않고, 평화로운 방법도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받은 상처는 크게 새기고,

자신이 입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똑같은 상처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주고받아야만 공정한 계산이 되는 경제적, 법적 관념에서는 한없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사랑은 사랑을 낳고, 복수는 복수대로 확대 재생산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계산기를 가지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보여 주신 죄 없는 수난과 죽음의 모범에서 찾아야 합니다.

 

 

/ 광주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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