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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때꺼리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 최정훈 바오로 신부, 정인준 신부, 오상선 신부

작성자whtjd|작성시간26.06.17|조회수18 목록 댓글 0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열왕기 2,1.6-14     마태오 6,1-6.16-18

 

 

제1독서에서 엘리사에게 이어진 사명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름을 묵상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엘리사에게 넘어가며 주님의 시간과 사업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야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엘리야라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본다면, 그 사명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생애는 하느님의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너무나 짧습니다.

온 생애를 통한 엘리야의 헌신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뜻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불러올리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에서 엘리야의 사명은 엘리사에게 넘어갔고, 구원사는 변함없이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저마다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 보이고, 목적지는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교회와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할 듯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른 이를 통해서, 다음 세대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분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 노고의 열매가 비록 이 시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 속에서 사명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충실하게 실천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합니다.

 

 

/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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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열왕기 2,1.6-14     마태오 6,1-6.16-18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엘리야는 길앗의 티스베 출신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 시기에 살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에언자가 활동하던 역사적 상황은 단순하지는 않았습니다.

북부 오므리 왕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아합왕은

페니키아 이제벨 왕비를 맞아 양국 간에 우호관계를 이루어서 경제적·정치적인 도움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종교가 야훼 신앙을 흔들게 되는 것은 큰 위험 중에 하나였습니다.

가르멜 산에서 야훼 신과 이교신(異敎神)인 바알과의 대결이 주도를 이루고 있었던 엘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신원을 바로 잡는데 큰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는 오랫동안 가믐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으로 부터의 응징으로 나타났습니다.

가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의 학살은 아합과 이제벨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르단 동편에 위치한 크릿이라는 곳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시돈 지방 사렙타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고 주님 말씀대로 후계자를 뽑습니다.

예언자 엘리사가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길갈을 떠나 베텔로 내려갔다가 예리코에 도착합니다.

엘리야는 그곳에서 엘리사를 머물라고 했으나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와 함께 있기를 청해서 함께 갑니다.

 

그 두 사람이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 놓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갑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요르간 강에 서서 강물을 칩니다.

강물이 둘러 갈라지고 엘리사는 그 사이로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모습이 하얗게 변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십니다.

복음에서 이 광경을 보듯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와 함께 엘리야가 대표적인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종말에는 불마차를 타고 올라 하늘에 올라갔듯이

다시 그 불마차를 타고 세상으로 내려오리라는 메시아 사상이 만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삶을 사는데 중요하고 기본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들처럼 칭찬을 들으려 하지말고 사람들이 보이도록 자선을 베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알아주라고 기도하지도 말고 또한 티내면서 단식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보시는 하느님께 향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신앙인이 평생을 닦아야 할 덕이며 과제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말을 이렇게 해도 사실 행동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내면으로 바라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은 놀랍게도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뭐 보듯 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위선자이고

결국 자기 중심이고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에 착각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하다 보면 그 해가 깊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멀리하려 합니다.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이며

이웃에게 진실한 사람이지요. 꾸밈없고 진실한 사람이 아니겠어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고 꾸밀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하느님이 삶의 첫 자리이며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참 신앙인이며

그러고 보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그 모습이 아닐까요?

 

 

/ 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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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열왕기 2,1.6-14     마태오 6,1-6.16-18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을 "봄"에 비추어 가늠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수행 방식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영광 받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 강조하십니다.

타인의 봄, 즉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며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아무리 길게 바치고 많이 희사하고 철저히 절제해도 위선에 불과하다는 걸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갈망하는 바가 곧 사랑하는 바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는 자가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지요.

타인의 눈과 칭찬과 영광에 취하면 매사를 그들 평가에 맡기게 되고,

지향의 순수성보다 돌아오는 칭찬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이제 수행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 6,4.6.17)

 

숨어서 드리는 기도, 남모르게 베푸는 자선, 드러내지 않는 단식은 아버지의 "봄", 그분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자선은 하느님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동행함이며,

단식은 하느님을 더 담아 충만해지려는 자기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하느님과 나와의 내밀한 통교입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예언직 승계 장면입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엘리야가 떠나기 전 엘리사는 스승님 영의 두 몫을 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맏아들이 다른 이들보다 두 배의 상속 재산을 받는 관습이 있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엘리야의 영적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달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2열왕 2,10).

 

엘리야는 "봄"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엘리야가 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엘리사 본인과 주님께 달렸다는 의미 같습니다.

스승의 지상 여정 마지막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본인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맛볼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봄"은 곧 기도, 특별히 관상의 경지를 가리키지요.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2,6).

 

그 "봄"의 첫째 조건입니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 곁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고 열망입니다.

관상기도는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쟁취해 거기서 서로에게 친밀히 머무르는 기도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2열왕 2,11).

 

"봄"의 둘째 조건은 이야기, 곧 말씀입니다.

이 중요한 순간 두 예언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 성경에는 별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뒷담화나 심심풀이 한담은 아니었을 테지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염려와 자비,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의 소명 등

그들은 더 뜨겁게 말씀 안을 걷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관상하는 이는 엠마오 제자들처럼 말씀이 닿으면 뜨겁게 타오릅니다.

 

"봄"의 셋째 조건은 함께 계속 동행하는 지속성입니다.

관상기도는 잘 되는 것 같으면 열렬히 바치다가 메마름이 오면 손을 놓는 일희일비의 감정놀이가 아닙니다.

은총의 희락에 젖을 때나 주님 부재의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다름없이 꾸준하고 항구히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이나 외딴곳을 더욱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머무르는 충만한 고독을 찾아다니지요.

 

관상하는 이는 하느님의 시선 앞에 자신을 두고, 타인의 시선은 물론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봄" 앞에 머물러 그분을 봅니다.

사람이 주는 영광과 칭송이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이 되지 못하듯, 사람의 비난과 공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어계시는 아버지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미 그분은 우리를 보고 계시니 우리는 그분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 눈에 비치고 그분 마음에 들면 족합니다. 그 자체가 그분 사랑 안을 헤엄치는 것이니까요.

사람에게서 오는 대가성 위안들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처럼 "쓰레기"(필리 3,8 참조)에 불과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골방에서

그 "봄"에 취하고 그 사랑에 취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그 골방에서 사랑이 되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진답니다. 아멘.

 

 

/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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