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집회서 48,1-14 마태오 6,7-15
오늘 우리가 들은 주님의 기도는 바치면 바칠수록 그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이 기도는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바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모임을 시작하면서 먼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 안에 원해야 할 것과 원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반부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우선 하느님을 최상의 위치에 놓은 다음 자신의 필요와 소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나보다, 내 원의보다 하느님의 원의를 찾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순서여야 합니다.
후반부는 우리 인간의 필요에 관한 것이지만, 그 역시 하느님을 향하는 간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는 것이며,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봉헌하는 것이고,
유혹에서 보호하여주실 것을 청하는 것은 위로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전 존재를 나의 모든 생활 영역 안에 모시는 기도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효석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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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집회서 48,1-14 마태오 6,7-15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아도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 청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청원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청원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청원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청원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분과 나는 이 기도로써 어떤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답받지 못하는 청원 기도는 없습니다.
청원 기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로 하느님께 바람을 아룁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들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다른 것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청원이 정말 옳고 합당한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청하여야 할 올바른 것을 알게 됩니다.
청원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뜻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기쁨도 함께 느낍니다.
주님의 청원에 내가 응답하면서 주님 사업의 협력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청원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
/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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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집회서 48,1-14 마태오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집회서 集會書,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는
유대교 얌니야 공의회에서는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그 칭호도 ‘교회의 책’이라는 뜻으로
‘에끌레시아스티꾸스 ecclesiaticus'라고 붙여졌습니다.
그전에는 책 말미에 붙여진 저자의 이름을 붙여서 ‘벤 시라의 책’이라는
‘세페르 벤 시라 ספר בן סיר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BC 180~175경에 유대교 율법과 관습에 정통한 저자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있는 유대인들이
조상의 믿음과 관습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용이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아 사고적(思考的)인 것 같으면서도
사람의 일상생활의 세세한 지혜의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집회서 저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대표적인 인물인 엘리야 예언자의 업적에 대해서 칭송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엘리야는 삶의 위로와 희망이고 메시아였습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집회 48,10-11)
당시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가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은 낯선 고국을 떠난 낯선 이국의 생활에서 삶을 살아가는 버팀목이이었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엘리야의 제자 엘리야에 대해서도 훌륭한 예언자임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빌론 유배 후의 자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집회서를 통해서
고국을 떠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나마 볼 수 있습니다.
‘다아스포라’는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왔는데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해외 교포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저자의 입장에서 더 자세한 이 말의 의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동포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하겠지요.
그들의 말은 이스라엘의 말인 히브리(hebrew)였는데
그들의 후손 세대는 당시 통용어 였던 희랍어(greek)여서 이 성경도 희랍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의 국수주의(國粹主義)에서 히브리 말이 아니라는 이유와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함께 쓰고 있다는 배타적인 이유로
디아스포라에서 이미 쓰고 있던 소중한 이 집회서를 성경의 정경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사해문헌과 알렉산드리아 에즈라 회당 창고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발견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드러났습니다.
희랍어 성경만 있는 줄 알고 성경에서 배제 시켰던 그들의 편협된 사고가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집회서의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
지금도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정통성’ ‘아집’ 때문에 단절된 세계를 만드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의 기도들이 길고 산만한데에 비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간결하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구원된다고 믿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사상과 연결되면서도 또 새로운 기도라는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구약 시편의 기도를 따르면서도 인간의 실존에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빵을 청하는 기도,
인간으로서 참으로 어려운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힘으로만 도와 줄 수 있는 유혹과 악의 세력에 대해서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너무 세력이 커서 율법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낯선 타향의 땅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즐겨 읽고 힘과 위로를 받았던 집회서의 기도를 되새기며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시도록 청합시다.
우리도 낯선 땅에서 주님을 향해 걷는 순례자의 삶을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우리가 어떤 악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주시도록,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오늘의 빵만을 청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주시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오시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좋으시고 사랑이신 주님께 우리의 발걸음을 기쁨과 평화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