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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때꺼리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박형순 바오로 신부

작성자whtjd|작성시간26.06.18|조회수25 목록 댓글 0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2열왕기 11,1-4.9-18.20     마태오 6,19-2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어조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들추어내십니다.

“목숨”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 생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 삶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염려는 삶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새는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요.

여기서 초점은 노동을 부정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먹이고 입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

라고 물으십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참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6,33)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이 정확히 알려 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신앙은 주어지는 오늘을 건네받는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나의 노력이나 걱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는 문제로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 서로가 챙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지는 오늘을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겠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서로 챙기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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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금요일 

2열왕기 11,1-4.9-18.20     마태오 6,19-23

 

어떻게 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을까?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어떻게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떠나지 않는 우리 삶을 생각할 때 이 문제는 행복의 열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는 즉시 걱정거리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제 생각에 많은 경우 사서 걱정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이고

오늘 주님께서도 비슷한 취지에서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걱정은 내일 것을 앞당겨하는 마음 고생이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괜히 하는 마음 고생이고,

신앙적으로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쓸데없는 마음 고생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특히 엄마는 자식이 집을 나설 때부터 걱정합니다.

이때의 걱정은 물론 사랑이지만 다른 경우,

상당수의 걱정은 욕심의 산물이고 그리고 신앙인의 경우는 불신의 결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은 성인의 대표가 성녀 클라라입니다.

아시다시피 클라라는 가난 특전을 교황청에 청했습니다. 

가난 특전이란 가난 서원을 지키지 않는 특전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가난을 살 수 있는 특전이지요.

 

클라라는 어쩌면 프란치스코의 가난보다도 더 철저한 가난을 살고자 했지요.

프란치스코는 아무 소유없이 그리고 정처없이 가난을 철저히 살고자 했지만 

클라라는 남자들처럼 떠돌아다닐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도원 안에서 살되 

외부로부터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이 없이 그때그때 주어지는 대로 하루하루 살고자

다시 말해서 하루살이를 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 가난 특전이지요.

 

왜냐면 주교들이 그것은 너무 엄격한 가난이고 불가능하다고

자주 클라라에게 완화된 가난을 살라고 사랑과 염려의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클라라는 가난을 끝까지 고수하였는데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인간 애비도 제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고,

풀과 새에게도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간에겐

더더욱 필요한 것을 주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 대한 이 믿음은 고통과 죽음을 주셔도,

지금은 그것이 악이어도 내일의 내게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에 주신 것이고,

내일의 고통과 죽음도 모레의 내게 좋고 필요한 것이기에 주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걱정, 곧 앞당겨 하는 마음 고생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자가 하는 거라지 않습니까?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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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금요일

2코린토 11,18.21ㄷ-30     마태오 6,19-23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목 생활 중에도, 이집트 종살이 시절에도,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선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적 부침을 겪으면서 땅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구약에서 땅은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땅을 향하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삶의 풍요와 안정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역사와 신앙을 담고 있는 보이는 터전이었던 땅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머무시고 마련하여 주신 자리, 곧 하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땅은 사고팔지만, 하늘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은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내지만, 하늘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생각은 우리를 구약의 세계에 머물게 만듭니다.

아무도 욕심내지 않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으며,

아무도 차지하려 하지 않는 하늘의 시민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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