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피부에 와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고통 속에서 배운 말, 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 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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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일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두려워하지 마라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으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오 10,26-31 참조)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는 원하지도 않은 예언자의 길을 걸으면서
조국의 멸망과 동족들의 쓰라린 미래를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죽을 고생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믿음의 갈등은 특별히 억울한 고통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벗어나려고 믿음을 찾는데, 그 고통이 믿음 안에서도 없어지지 않기에
믿음의 벽에 부딪히고 냉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이시고 핵심이시며 목적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은총과 축복의 샘물이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지 못하는 축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애는 참으로 불행하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하셨으며,
“하실 수만 있다면 쓴잔을 거두어 달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 믿음의 발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점지하신 사람은 십자가도 많고 눈물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성모님도 그러셨으며 성인 성녀들도 비슷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은 이들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만, 못난이들은 도망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와 자유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한 이들의 길은 험난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수많은 이들이 투쟁했습니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애처롭게 바쳤습니다.
그들이 권력과 타협했더라면 더 편한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핍박받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갔습니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들 덕분입니다.
여러분, 밀알이 열매를 얻으려면 몸부림치고 괴로워하고 썩어야 합니다.
신앙도 민주주의도 행복도 평화도 마찬가집니다. 고통을 감수하고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만일 시련을 외면하고 배척한다면 그는 죽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서 고생해서 천국에서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와 죽음의 굴속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확고하다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박해와 시련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 전주교구 박병준 필립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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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일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달력을 보니 하지(夏至)입니다. 일 년 중 가장 해가 긴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새벽 5시 정도가 되면 해가 뜨는데, 저는 해뜨기 전에 일어나니 꽤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왜 일찍 일어나는가? 잠이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배가 고파서? 해가 뜨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얼마 전 “인간극장”이라는 방송에서 우연히 본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칩니다.
다섯 살 된 외동딸 다은이에게 아빠가 묻습니다.
“다은아,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응, 아빠가 보고 싶어서”
다은이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다고 대답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딸입니다.
그 옛날 신학교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아침 기상 시간이면 ‘주님을 찬미합시다’ (Benedicamus Domino).
‘하느님 감사합니다!’ (Deo Gratias)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참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는데 이제야 답이 나왔습니다.
나는 왜 일찍 일어나는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함이라고….
요즈음 이른 아침이면 사제관 뜰과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냅니다.
한두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아침 식사가 맛있습니다. 겁나게 좋습니다.
남도 사투리 중에 ‘겁나게’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가끔 이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너무너무’ , ‘아주’ , ‘매우’ 등등의 표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말 그대로 ‘겁난다’ , ‘두렵다’ 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행하신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29)고 하시면서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0,31)
정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살아가는 귀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그분 섭리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 안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인식한다면
나는 정말로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지닐 때 삶의 모든 두려움과 걱정은 그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내용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하루를 시작하며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 춘천교구 김명식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