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열왕기 17,5-8.13-15ㄱ.18 마태오 7,1-5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께 단죄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단죄하는 그대로 우리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를 구원에 초대하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또한 이웃을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이웃과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이웃의 부족한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 먼지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기둥,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형제’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세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아닌 ‘형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아주 작은 흠은 쉽게 찾으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형제에게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기막힌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선자야!” 하시며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한 다음, 맑고 따뜻한 눈으로 형제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주변의 형제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전 일을 마치고, 또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매 순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자녀로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해 봅시다.
/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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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열왕기 17,5-8.13-15ㄱ.18 마태오 7,1-5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알 수 없게 하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 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주 특별한 인간이며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이미지들, 거짓된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자신을 대단히 중히 여기는 등등의 생각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인 역시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허구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꿰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그것은 부풀려집니다.
잘못되어 있거나 이상한 것은 언제나 상대방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편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속에서 모든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선해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선하게 존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선한 것, 두 가지 입니다.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잘못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현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이 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토록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함을 과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과장시킨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과장되고 투영된 다른 사람의 악함 앞에서 우리는 마치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비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하면 우리는 입에 힘을 주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방식으로 많든 적든 소위 선한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누구나 타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세계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 변화는 우리가 허구를 떨쳐 버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알게 되면, 우리가 만일 자신의 진실성 없는 삶을 알아차린다면
그런 허구들은 곧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허구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뚜렷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부터 그 들보를 들어내면 우리는 비로소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이상영 그레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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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열왕기 17,5-8.13-15ㄱ.18 마태오 7,1-5
하늘을 무서워하라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총 속에서 잘 살기를 바라서일진대 오늘 독서에서는 온통 ‘넘어지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열왕기 하권에서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 들었다.
(열왕기하권 17,5-8.13-15ㄱ.18)
그리고 복음에서는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7,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다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사무엘 예언자 때 사울을 초대 왕으로 하여 왕국을 세웠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을 거친 후 왕국은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두 왕국도 나중에 강대국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북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남 왕국은 그보다 150년 후인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 의해 망한다.
오늘 제 1독서는 기원전 722년에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어
백성들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이를 성찰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그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열왕기하권 17,7-8)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목이 뻣뻣하였다.
성경 저자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민족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로 엮어진다.
그것은 왕의 역사로서 민중은 왕들 역사에 조연으로 나타난다.
왕의 역사라는 것은 권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영웅이 강조된 역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왕의 능력의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그들에게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는 인간만의 역사가 아니었고, 영웅들에 의한 힘의 역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한가에 따라 성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역사였다.
이 역사는 하느님 편에서도 그러하여 하느님만의 역사란 없다.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펼쳐진다.
이스라엘인들은 한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망하는 것은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흥하는 것은 하느님께 충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읽은 열왕기 후서는 지금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함락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힘이 약하고 아시리아가 강한 때문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한 탓이라고 보며 민족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만이 한 나라의 역사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는가? 언뜻 보기에 그러한 것 같다.
어느 나라도 자기나라 흥망의 역사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찾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러하여 한반도에서 생겨나고 사라진 여러 나라들,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를 거쳐 지금의 남한과 북한도
나라의 흥망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다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의 흥망의 역사가 이웃나라의 침략과 무능한 왕 때문인 것 같지만
나라가 망한 근본원인은 왕이 민심을 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관도 근원적으로는 저 이스라엘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 민족은 하늘을 이스라엘처럼 야훼 하느님으로 숭배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왕은 하늘에 죄를 짓지 않고 나라를 다스려야 했다.
왕이 자연과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아니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뜻에 거슬려 백성을 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라를 망하게 한 왕이나 정치인들은 저 이스라엘처럼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한 탓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아니더라도
자기 힘만을 믿고 백성을 무시하고 종교를 타락시켜가면서까지 정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늘과 우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백제가 망할 때 괴상한 망조가 온 나라에 일어났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왕을 비롯한 백성을 다스리는 고관들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의 힘만을 믿고 정치하면서 사치하고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재물의 신, 향락의 신, 권력의 신)을 경외하다가 나라를 망친 것이다.
고려가 멸망한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로 불교의 타락을 드는 역사가들도 있다. 하기야 종교는 타락할 수 없다.
타락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소위 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종교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위협하며 착취한 까닭이다.
종교를 우상과 미신으로 여기게 하는 일이 고려 말에 일어났던 것이다.
진정 종교인들이 사심 없이 올바른 불심을 발하였다면,
그러한 불심으로 정치인을 조언하였다면 고려가 멸망하는 일을 피해갔을지 모른다.
열왕기 후서의 저자는 이렇게 종교(인)의 타락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아쉬워한다.
그들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다면, 그들이 하느님께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른 잡신들을 섬기지 않았다면...
열왕기 후서 저자의 역사관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위기를 많이 이야기한다. 국민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데에는 부끄럽게도
종교의 타락이 근원적으로 일조하고 있다.
사회에 만연한 위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올바른 대통령, 올바른 지도자를 가지지 못해서인 것 같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이들이 하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자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종교의 본질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종교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회자되는 ‘고소영’에 종교가 끼어 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타락한 종교와 타락한 정치의 결탁를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늘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를 드린다면 올바른 신심을 발하기 위해서이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진정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 모시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7,3-5)
남을 회개시키려고 하기 전에 고소영이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여 고소영의 탈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 마산교구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