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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화로 읽기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 (1607) - 카라바조

작성자whtjd|작성시간26.06.18|조회수12 목록 댓글 0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 (1607)

카라바조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과격한 성격 탓에 1606년 5월 28일에 로마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일단 코로나 공작의 저택을 거쳐 1606년 9월부터 1607년 7월까지 나폴리에 몸을 숨겼다.

나폴리는 당시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심리적으로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한 상태에서도 명작을 남겼다.

그는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건축된 피오 몬테 델라 미세르코르디아 성당(Church of Pio Monte della Misericordia)의

대형제단화를 주문받았다.

이 작품을 의뢰한 사람은 보스니아 출신의 비단무역상이자 은행가였던 

니콜로 라둘로비치(Niccolo Radulovici)였다.

1606년 10월 6일자로 되어있는 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라둘로비치는 카라바조에게 <성모자와 천사들의 합창>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 제단화가 놓일 장소에 적합한 주제가 아니어서 주제가 변경되었다.

그곳은 공립빈민구제소의 성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는 무엇인가?

첫째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행위이다.

둘째는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행위이다.

셋째는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는 행위이다.

넷째는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행위이다.

다섯째는 병자들을 돌보는 행위이다.

여섯째는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주는 행위이다.

일곱째는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주는 행위이다.

이것은 최후에 심판 날에 천국으로 갈 의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오 25,36-38)과 장사 지내주는 행위를 합친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곱 가비 자비로운 행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카라바조 자신이었다. 그는 도망자로서 배고프고, 목말랐으며, 따뜻하게 쉴 곳이 필요했다.

또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힐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를 장사 지내줄 자비로운 행위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두 천사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어두운 인간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두 천사의 날개는 십자가를 이루고 있고, 한 천사는 팔을 벌리고 있으며,

다른 천사는 팔을 벌린 천사를 품에 않고 있다.

이것은 사랑의 두 동작이며, 동시에 십자가에서 취한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팔을 벌려 돌아가셨다. 그것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또 팔을 벌리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사랑의 몸짓이다.

성모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않으셨다. 그것으로 사랑을 완성하셨다.

또 품에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보호하겠다는 자비의 몸짓이다.

그래서 성모자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도 자비로운 선행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인간세상은 아직도 어둠에 싸여있다. 그러나 어둡고 악에 물든 인간세상 안에서도 빛이 보인다.

세상을 비추는 선행이 있기에,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구원과 자비의 빛이 사람들 사이로 흐르고 있다.

 

아래 오른쪽 뒤편에는 장사 지내주는 착한 행위가 그려져 있다.

이미 죽은 사내의 창백한 발이 보이고, 그 발을 잡고 흰 천으로 주검을 거두어주는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동료를 도와 흰 천을 잡고, 커다란 횃불을 밝히는 사람의 선행이 보인다.

 

그 앞으로는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주는 행위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행위가 동시에 묘사되어 있다.

한 여인이 눈치를 보면서 쇠창살 안의 노인에게 부푼 젖가슴을 내밀고 젖을 빨게 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 이야기는 일명 ‘로마의 자비’로 불린다.

굶어 죽는 형벌을 받은 아버지 시몬에게 갓 산모가 된 딸 페로가 찾아가 젖을 먹여 연명시켰는데,

딸의 효심에 감복한 법정은 아버지의 죄를 용서하고 석방했다는 내용이다.

이 일화는 로마 시대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가 쓴

<로마인들이 기념할 만한 아홉 가지 언행들>에 수록된 내용으로,

당시 로마에서는 딸의 행위가 부모를 공양하는 가장 고귀한 사례로 여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른쪽 아래에는 모자와 외투를 멋지게 잘 차려입고 칼을 찬 한 사내가

벌거벗고 나뒹구는 두 거지에게 옷을 나누어주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헐벗은 이를 돌보고 병든 이를 보살피는 선행을 묘사한 것이다.

한 벌거벗은 거지는 두 손을 모아 감사하고 있고, 외투를 받은 거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야코부스(Jacobus a Voragine)의 <황금전설>의 내용으로,

로마 군인 마르티노 성인이 아미엥 성을 지나다가

헐벗고 가난한 사람을 보고는 자비를 베푼 일화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르티노는 이 남자야말로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칼을 꺼내 입고 있던 외투를 잘라 한 쪽을 거지에게 주고 나머지 한 쪽으로는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래서 외투를 군인과 거지가 반쪽씩 나누어가지고 있다.

 

그 뒤로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선행이 묘사되어 있다.

여인숙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순례자로 보이는 한 사내를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이 보인다.

순례라는 고행의 여정에서 쉴 수 있는 자리를 기꺼이 마련해 주는 자비의 행위를 그린 것이다.

 

그 뒤에는 반쯤 헐벗은 한 사내가 당나귀 턱뼈로 물을 마시고 있다.

이것은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자비의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판관기 15장 18-19절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삼손이 르히 사막에서 싱싱한 당나귀 턱뼈로 필리스티아인을 천 명이나 죽이고

갈증이 나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제가 목이 말라 죽어서,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들 손에 떨어져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르히에 있는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자 정신이 들어 되살아났다.(판관 15,18-19)

 

카라바조는 신앙과 자선행위를 구원의 두 축으로 보았던 

가톨릭교회의 신학을 그림을 통해 새롭게 해석해주었다.

성과 속이 만나는 순간, 하늘에서는 천사들 뒤로 성모자가 자비롭게 땅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땅에서는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가 일상의 모습으로 행해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처럼 “행동이 결여된 연민은 자비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자비로운 행위로 사랑을 실천해야겠다. 사랑은 팔을 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품어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팔을 벌리고 품어않을 때 모든 행위가 자비로운 행위가 되리라.

십자가에 매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의 행위처럼. 

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않으셨던 성모님의 행위처럼.

 

 

[출처]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 (1607) - 카라바조|작성자 말씀과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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