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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석과 이제마

작성자제주운풍|작성시간08.12.16|조회수152 목록 댓글 2

한동석과 이제마



이제마는 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였던 한동석 외할머니의 오빠가 “그 비방은 언제나 보여주실 겁니까”하고 물으면 “내가 죽을 무렵에 주겠다”고 답변하고는 하였다. 그 비방을 얻기 위해 외할머니의 오빠는 이제마 선생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잡아놓고 살았다. 임종이 가까이 오면 곧바로 이제마 선생에게 달려가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제마 임종후 도착해 비방을 입수할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씌여진 한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한자들은 이제마가 새로 창안한 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야기가 묘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마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를 미리 보아놓고, 자신이 죽으면 관을 깊이 파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9자(270㎝) 가량 깊이 파서 관을 묻으라는 당부였다. 왜 그렇게 깊이 묻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제마는 “말 발굽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였다. 과연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할 때 바로 그 묘의 옆길로 소련군 탱크들이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이를 목격한 후인들은 “이제마가 과연 명인은 명인”이라는 이야기들을 하고는 하였다. 해방 이후 함흥 일대에서 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한동석은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이제마에 대한 전설을 들으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제마와 얽힌 또 하나의 인연은 전처의 죽음이다. 한동석은 20대 후반에 함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하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인이 폐병을 앓아 1942년에 사망하였다. 부인이 죽기 전 폐병 치료를 위해 이제마의 이전제자(二傳弟子) 중 하나라고 하는 김홍제라 한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김홍제가 부인의 폐병을 치료해 주면서 “다음에 다시 재발하면 그때는 손을 쓰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다. 결국 처음에는 치료가 되었으나 나중에 부인의 폐병이 다시 재발하면서 사망하고 말았다.

한동석은 이 일을 겪으면서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후일 한동석이 이제마의 저술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의 주석서를 남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마와 한동석의 한의학적 연결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모두 이북 사람이라는 점이다.

앞장에서 ‘사주첩경’을 쓴 이석영 선생을 이야기할 때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이북 사람들은 이남 사람들에 비해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풍수·사주·한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이 방면의 대가들의 출신지를 보면 이북 출신이 아주 많다. 그 이면에는 이북 사람들이 받았던 지역 차별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 시대에 이북 사람들은 정부 고위직에 올라가기가 어려웠고 정치적으로 차별당했다. 이북 출신인 백범(白凡) 김 구(金 九) 선생이 ‘삼남’(三南)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에도 이러한 정황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西村)에서 태어난 것을 늘 한탄했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三南)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西北)이로다. 내가 해서(海西) 상놈이 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의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라는 소회가 바로 그것이다.


계룡산파 인물과의 교류

이북 출신들은 과거공부를 해보았자 미관말직이나 전전할 뿐, 출세를 못하니 실생활에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풍수·사주·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방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남에 비해 이북이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녔던 성싶다. 그러니 이제마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나올 수 있었고, 한동석·이석영과 같은 한의학과 사주의 대가들이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이남보다 이북에서 훨씬 급속하게 퍼진 사회적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든 외래종교나 신흥종교는 소외 받는 지역에서 먼저 수용되게 마련이다.

한동석의 사상적 뿌리 가운데 또 하나는 계룡산파다. 그는 사색을 하고 도인을 만나고 싶을 때는 수시로 계룡산으로 내려가고는 하였다. 그에게 계룡산은 영감의 원천이자 정신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휴식처이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할 무렵에도 수시로 계룡산에 가서 동학사 근방에 한 두 달씩 여관을 잡아놓고 장기체류하고는 하였다.

그가 계룡산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장소는 계룡산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香積山房)이었다. 향적산방은 충남대 총장을 지낸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선생이 정역(正易)공부를 하기 위해 1950년대 후반에 지어놓은 토굴이자 일종의 아카데미였다. 향적산방 바로 옆에는 19세기 후반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토굴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사가 배출된다는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은 좌우로 청룡·백호가 바위 맥으로 내려와 야무지게 감싸고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은 두부처럼 평평한 토체(土體) 안산이다.

토체 안산에서 제왕 나온다는 것 아닌가. 여기는 당대 우리나라에서 주역이나 풍수 또는 사주를 연구하는 마니아들의 아지트였다. 자기가 공부한 바를 서로 주고받고 때로는 밤새워 논쟁하기도 하였고, 국사봉 정상에 올라가 국운 융창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김일부 선생 이후 근세 계룡산파를 형성하던 일급 멤버들이 득실거리던 장소이기도 하다. 천학비재한 필자를 정역의 광대한 세계로 이끌어준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 선생도 이 시절 향적산방에 장기체류하면서 학산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한동석도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계룡산파의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골간을 이루는 내용이 지구의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음에 주목하는 정역사상(正易思想)이고, 정역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업이 한의사인 그가 전공을 벗어나 정권교체가 어떤 방식으로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는 사실은 계룡산파의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종합하면 인체라는 미시세계와 정역이나 주역이 갖는 거시세계 양쪽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의와 주역을 연결해 주는 공통 고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음양오행이지만, 이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근취저신(近取諸身) 원취저물(遠取諸物)’ 사상이다.

가깝게는 자신의 몸에서 진리를 구하고, 멀게는 사물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사상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사상이다. 따라서 거시적 우주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인체라는 소우주를 연구하면 굳이 멀리 우주까지 가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는 논리다. ‘우주변화의 원리’에는 ‘근취저신 원취저물’의 명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근취저신과 원취저물을 연결하는 고리가 음양오행인 셈이다. 이는 곧 ‘하늘의 이치는 땅에 나타난다. 고로 땅을 보면 하늘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역추적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동석은 동생인 한박사가 주역 공부의 비결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기(天氣)보는 방법을 배워라. 하늘을 쳐다보면 천기를 보는 거냐? 아니야. 땅을 봐라. 땅에 이렇게 보면 풀이 있고 돌멩이가 있고 이렇게 흔들리지? 지렁이·털벌레·딱정벌레 요거로 천기를 보는 거야. 딱정벌레가 많이 있는 거는 이 지상에 금기가 많이 왔다는 거야. 이제 발이 많은 돈지네가 많이 끓을 때가 있다면 화기가 왔다는 거야. 땅에 지렁이가 많으면 토기가 많다는 것이고. 이렇게 천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이른 봄인데 금기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대답하였다.(권경인, 28쪽)


‘황제내경’一萬讀한 한동석

딱정벌레는 등껍질이 단단하니 금기로 본다. 지렁이는 땅속에 사니 토기로 본다. 이처럼 지상에 어떤 기운을 많이 받은 생물이 나타나면 그 해에 거기에 해당하는 하늘의 기운이 우세한 것으로 추론하였던 것이다. 천기를 보는 것은 일상사 사물에 대해 세심한 관찰을 요한다. 도사의 자질은 세심한 관찰력이 필수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은 관찰력 외에 한동석이 전념한 수도(修道)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이다. 방법은 독경(讀經)이었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 ‘운기편’(運氣篇)을 일만독(一萬讀) 가까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불교 수행자들이 ‘천수경’(千手經)을 수만독(數萬讀)하듯 그도 운기편을 1만번이나 외웠다. 이는 놀라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소문나 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한의원이 있던 인사동 주변 골목에서는 길을 걸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한동석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앉으나 서나 중얼중얼 운기편을 외웠다.
처음에는 3,000독을 목표로 하였으나, 3,000독을 해도 신통찮다고 여기고 다시 6,000독 9,000독에 이르렀다고 한다. 9,000독에 가니 약간 보이더라고 술회하였다. 마지막 1만독을 채우면서 활연 관통했던 것 같다. 한동석이 필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소의경전(所衣經典)은 황제내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황제내경만큼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니 무식하게 막고 품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사실 무식한 방법이 정공법이다.

무조건 외우는 방법이 막고 품는 방법이다. 변화구나 체인지업 말고 무조건 강속구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꿈에서도 경전을 외울 정도면 도통한다고 한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지사지 귀신통지’(思之思之 鬼神通之)라는 말이다. ‘밤낮으로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활연(豁然)하게 깨닫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몽중일여(夢中一如:꿈에서도 낮에 생각한 마음과 같음)가 바로 이 경지다.

조선 후기의 유가의 도인이었던 이서구(李書九)가 ‘서경’(書經) 서문(序文)을 9,000독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라고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잔 잡아 권할 사람 없으니 이를 슬퍼 하노라”고 절창을 읊었던 임백호(林白湖)가 속리산 정상의 암자에서 ‘중용’을 5,000독 하고 나서 한 경지 보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한동석이 보여주었던 파워의 진원지는 ‘황제내경’ 1만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주 공부에서도 마찬가지 방법이 적용된다. 막고 품어야 한다. 명리학에 관계되는 고전들을 수백번씩 읽다 보면 영대(靈臺)가 열린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술회다. 필자가 명리학에 관한 고전들을 공부하면서 모르는 대목이 나오면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등명(登明) 서정길(徐正吉·50) 씨다.
등명은 ‘궁통보감’(窮通寶鑑)에 조예가 깊다. 명리학의 고전을 보면 ‘연해자평’ ‘명리정종’ ‘적천수’ ‘궁통보감’ 등을 꼽는데, 이 가운데 ‘궁통보감’은 명리학의 가장 진화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진화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도 된다. 컴퓨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연해자평’이 386이고, ‘명리정종’은 486, ‘적천수’가 586, 그리고 ‘궁통보감’은 686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궁통보감’의 특징은 사주의 격국을 기존의 이론에 비하여 몇 배로 세밀하게 나누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등명은 10여 년에 걸쳐 ‘궁통보감’을 달달 외우다시피 탐독하였다. 그동안 어느 정도 읽었느냐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약 400독을 하였다고 한다. 가지고 다니는 책갈피를 보니 손때가 시커멓게 묻었다. 어떤 때는 꿈에서도 ‘궁통보감’의 내용들이 나타나는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는 고백이다.
100독을 넘어서자 그 어렵던 격국론이 대강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는 1,000독을 목표로 요즘도 시간만 나면 열심히 읽는다. 책장이 너덜너덜하게 될 때까지. 이것을 보면 사주 공부에도 왕도는 없다. 자나깨나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다. 도사 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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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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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준구 | 작성시간 09.01.06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작성자해암 | 작성시간 09.03.16 자료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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