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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연구 일반

오얏리(李

작성자장세덕|작성시간12.04.17|조회수887 목록 댓글 0

오얏리()

 

글자의 뜻

①오얏리(果名似挑)

②선비천거할리(桃李薦士)

③역말리(行里關驛)

④행장리,보따리리(行裝)

오얏이()자는 나무목()자 아래에 아들자()자를 합친 글자이다

 

글자 그대로 나무()의 아들() 또는 나무()의  씨()라는 글자이다

나라는 뒤숭숭하고  난리와 난리소문 속에서 원[
]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끼어서 어느편을 들어야 우리의 올바른 살길을 찾을것인가에 우왕좌왕하는 가운데서도 요승신돈(妖僧辛旽)은 정치개혁을 한답시고 온통 정부 고관대작들(政府高官大爵)의 사유재산을 하루아침에 몰수하는 일대수라장(一大修羅場)의 혼란상황을 가열(加熱)시키고있었다
곧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목자위왕(
木子爲王)의 변화의 큰 흐름이 코앞에 닥아선 느낌을 온나라가 체감(體感=몸으로 부딛쳐오는 느낌)하고 있었다
 
일대혼돈의 민심을 가눌수가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풍수도참설의 위력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개경의고려왕씨 왕조에서는 


송도의 민심이 한양쪽으로 밀리고있는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지기(地氣=
땅기운)를 눌러버리는 벌리사(使=오얏나무를 짤라버리는 정부의 관리)를 보내놓고도 안심을 못하는형편이었다

 

이성계는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이씨왕조건설)이라는 하늘의 뜻을 굳게믿고 드디어 정부를 둘러엎어버리고 왕씨500년 고려의 대통(大統=나라를 다스리는 )을 꺾어버리고말았다
 ---------------세월은 흘러흘러 이씨왕조500년의 한양도읍도 사융칠월이화락[四隆七月李花落=융희황제 4년 7월달에는 오얏꽃이 땅에 떨어질것임]이라는 또하나의 도참설에 의하여 한일합방(韓日合邦=일본이 한국을 집어 삼켜버림)의 망국의 길을 걷고있었다

참고사항---벌리사에 얽힌 서울의 동네이름

1. 벌리사(伐李使)=한양에 오얏나무를 도끼로 찍어없애버리라는 고려의 왕명을 받들고 개경에서 내려와 상주하면서 이씨조선의 발아(發芽싹이움)를 싹둑 끊어버리려던 정책적인 관리의 관직이름
2. 예리동(刈李洞)=당시 오얏나무를 베어도베어도 자꾸만 무성하였던 동리로 오얏나무벌채를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던 동네이름
3. 종리동(種李洞)=예리동을 나중에 이씨왕조가 창건되었을 때 이름을 바꾸었다
이씨왕조가 더욱 번성하도록 오얏나무를 많이 심으라는 동네로 이름을 바꾸고  또 그렇게 하였다
4. 벌리(伐李)=벌리사가 상주하였던 동네 이름
5. 번리(樊李)=벌리동네를 나중에번(樊울타리번)리로 아예바꾸어 버리고 오얏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얼마든지 오럇도따먹고 집울타리도 아름답게 꾸미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민심을 설득하였다
매년 오얏나무를 자르기 위하여 설치한 자리가 벌리사(伐李使)라는 벼슬이었다. 하지만 십팔자득국을 굳게 믿은 이성계가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왕조를 세웠다. 말이 씨가 된다는...

효제동 동쪽에도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베어내곤 하였으므로 이곳을 예이동(刈李洞)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반대로 종이동(種李洞)이라 하였다한다. 또 도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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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⑴이능(李陵)=<人>前漢의 武將. 李廣의 孫.武帝때 兇奴와 싸워 敗하고 兇奴의 首領 鮮于의 딸을 아내로 삼고 그곳에서 20년을 지내다가 病死함.親舊 蘇武와의 暢和의 詩는 五言 古詩의 起源이 됨

⑵이두한유(李杜韓柳)=唐의 李白 杜甫 韓愈 柳元宗의 네사람을 일컫는 말.

李白과 杜甫는  에 뛰어나고, 韓愈와 柳元宗은 에 뛰어났음

⑶이사(李斯)=<人>秦의 政治家.始皇帝의 天下 統一後 丞相이됨.荀子에게 배우고 韓非子의 法治主義를 實行함.또 焚書 坑儒 에 依하여 思想統一을 强行하고 郡縣制를 實施하였으며,文字를 統一하여 小篆을 制定하는 等 秦의   覇業과 그 政治는 그의 政策에 基因한바 至大함

⑷이생규장전규장전(李生窺墻傳)=<書>漢文小說 李朝 世祖때 金 時習이 지음

⑸이세민(李世民)=<人>唐의 제 2대 임금.廟號는 太宗.高祖 李淵의 둘째 아들.房玄齡 杜如晦등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임금이 된후 律令의 解釋등 內治에 힘씀

⑹이순신(李舜臣)=

 

 

 

▒☆ 중국 일본에서 보는 이순신 ☆▒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다.
책은 1990~1998...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 그리고 일본 사관학교(육사. 해사) 장교 중국 인민박물관장. 한국 해군사관학교 장교들의 도움으로 32권으로 발권된 책이다.



책은 크게
-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 장수가 이순신 2- 명나라가 이순신1.
- 1500~1600 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
- 이순신과 임진왜란 5.- 토요토미 이순신 2.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 7권으로 나누워진 책이다.
중에서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 것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 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
특히 사람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한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1.일본의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있을지 의문이 간다.'라고 적었다.



2
천의 군사로 5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한다.

그리고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내용에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이 이순신장군 탄생일에 오는가 보다.



2. 명의 사신이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은 후일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하루는 어두운 눈이 몹시 내리고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 으로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게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두사람을 보면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두사람은 조선 장수대 왜군이 아닌 아버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 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소서..

() 이순신은 지략이 매우 튀어날 뿐만아니라 성품과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 탄생 한국을 방문한다.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군을 알게 것은 한산대첩때 부터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 보는 차이가 있겠지만...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하고,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전적은 2천의 군사로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 이라고 ) 정도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이란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 하고 있으니 충격은 대단했을 같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거라 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국의 화근인 오랑케(훗날청國) 견제할 있을뿐 아니라, 오昊땅 모두를 우리 ()국으로 귀속 시킬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 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덕목이라 하지 않을 있겠나이까.!!
조선 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 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 견제케 하소서)."



4.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이순신

1990 3 하북에서 1 . 합동 연구회(이순신)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장수였던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 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

이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게 달랐다..
더군다나 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 라는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일본 교수진들은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
.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 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은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인데. 나는 7권을 하루만에 읽고 말았다.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 으며,
조선의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학술회에선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 10.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 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 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한명도 대답이 없다.

역사학자인 나도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거북선을 자세히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기회를 주고난 ..
질문을 바꾸어서 청나라가 망할 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웅 청일전쟁 당시 누가 있었으면 ( 사람만)청나라를 구할 있었을까?"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 동안 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 는지 학생들은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 일거라고 답해주자..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역시 학생중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 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되는 군사와 50 척도 안되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워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 이끌어 조선을 구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승리의 안에는 바로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는자들 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 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순신이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 었으나 허약한 병사를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강의가 끝났을 처음으로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면서....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쟝웨이린 교수는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 한분이셨으며,
1990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1995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는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 것이다.
히틀러가 200 유태인을 죽인것 보다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진실을 숨길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 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 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 징키스칸도 그러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 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였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전의 청년이 그래했듯이..
이순신 장군은 처절한 전쟁속에서 . . . . 가르치신 분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장군"



7.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 4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 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 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 ()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3 5천여명에 다다르고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 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있을 것이며.
혁명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끝나기도전에 한번 강력한 이순신 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 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 후환을 없애 줄것이라 ()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이에 ()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시키자.
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 있었음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선조에게 우리 ()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
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 (훗날 청나라)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이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잡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아셨는지도 모른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장군을 도와주면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 선조와 조정대신 (이순신의 반대파 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 되고 비밀협약을 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 ...
우리들은 드라마를 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 지만...
이순신장군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다.

400년이 지난 지금 장군께 질문을 던져 본다.
장군 당신은 다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 ?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 거라는 걱정이 그리도 두려우 셨읍니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신 건가요?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장군님도 홀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모든일을 주관 하셨지만 미약한 인간의 몸이셨던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 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당신 앞에서 한줄기 눈물을 흘립니다...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이 32...
그것도 한국 학자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만은 알아야 하지 않을 까요 ?..
우리는 얼마나 분에 대해 알고 있는지...
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 무엇이 었는지?...

 

 

 

 

 

⑺이이(李珥)=이조 宣祖때의 德水사람.康平公明晨의 五代孫.小字는 見龍 ,字는叔獻 號는 栗谷 또는 石潭 諡號는 文成,東西黨爭의 調整에 힘씀.海東孔子라 稱하였음

⑻이임보(李林甫)=<人) 唐玄宗代 後期의 宰相. 子는 哥奴 號는 月堂 性稟이 柔獰하고 狡猾하여 權術이 있어서 宦官 妃嬪과 結託하여 임금의 動靜을 살펴 迎合하고 在任19年에 政事를 마음대로 弄奸함.

天下가 모두 怨讐로 여기어 마침내  安史亂을 釀成함

⑼이조오백년(李朝五百年)=

 

※조선왕조 500년 가계도※

 

 

 

 

조선왕조 500년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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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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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⑽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면 도둑으로 오해받기 쉬우므로 그런 곳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남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은 아예하지말라는 말

⑾이홍장(李鴻章)=<인> 1823~1901淸末의 정치가.호는 점보,북청사변과 청일전쟁의 외교관으로 공을 세우고 北洋大臣, 내각태학사등을 역임. 그의 문하에 袁世凱등 정치가가 많음

이화(李花)=ⓐ오얏꽃<劉銑>北窓淸雨裏 一樹李花明

                    ⓑ李朝末에 官吏들이 쓰던 徽章

                    ⓒ帽標

⒀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제>李朝末, 太極章을 받은 文武官가운데 특별한 공로가 있을때 내리던 훈장의 하나 

조선왕조 역대 왕, 수명과 사망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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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대 태조

인물사진 src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에승하(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안에 있다.

 

 



* 제2대 정종
오복(五福;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에승하(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제3대 태종

<dt style="TEXT-ALIGN: center">이미지 썸네일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승하
부인민씨도 학질로 56세졸 능은 헌릉

*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 제6대 단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 제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 제8대 예종
20세에 복상사 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

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 제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에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능은 선릉이며,임진왜란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 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제11대 중종

<dt style="TEXT-ALIGN: center">이미지 썸네일 </dt>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dt><dt style="TEXT-ALIGN: center">재위 39년
능은 정릉

*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승하(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없다.
능은 효릉

*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 로 성장 하였으며,무수리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dt><dt style="TEXT-ALIGN: center">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dt><dt style="TEXT-ALIGN: center">능은 강릉

*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재위 능은 목릉

*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유배 생활 중에 시중 드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 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있으며,재위중 늘 그것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의실수로 출혈사로 41세에승하
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하지못하고 승하했으며,능은 영릉

*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
'하멜'에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 제19대 숙종
어릴적천연두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음으로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인현왕후, 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니리고 큰잔치 별러다한다
능은 명릉


*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 제21대 영조

이미지 썸네일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한후 뒤주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일과
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 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가져왔다. 능은 원릉

* 제22대 정조

이미지 썸네일 

이미지 썸네일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쓴임금 능은 건릉

* 제23대 순조
매독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제24대 헌종

이미지 썸네일 

</dt><dt style="TEXT-ALIGN: center">23세에 술과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제25대 철종

이미지 썸네일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살았다. 능은 예릉

* 제26대 고종

이미지 썸네일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에승하
능은 홍릉

* 제27대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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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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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 6.25전쟁 중에 걸린 영양실조로 79세로 서거

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의민황태자 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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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거

능은 홍유릉 내의 영원(합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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