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조와 진화론

[스크랩] 초대교부들의 성경 창조기사 해석

작성자생명사랑(주사랑)|작성시간24.04.23|조회수4 목록 댓글 0

초대교부들의 성경 창조기사 해석         

 

 

창조와 타락을 서술하고 있는 창세기 1-3장은 교부들의 글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이 집중된 곳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 볼 때 그 양이 상당히 많다는 면에서 창조에 관한 인식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2) 본 절에서는 교부들의 창조기사(창세기 1장)에 관한 이해들을 창조기사의 순서를 따라 살펴보기로 하고 그 분석된 내용을 종합하여 전반적인 양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태초의 천지 창조

 

초대교부가운데 탁월한 설교로 인해 '황금의 입”이라 불렸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왜 하나님이 천지 즉, 하늘을 먼저, 그리고 땅을 뒤이어 언급하셨을까에 대해 배열된 단어의 순서대로 실제 하늘을 먼저 내시고 그 다음에 땅을 내셨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는 인간적인 상식의 집짓기와는 순서가 다름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기초(땅)를 먼저 내고 그 위에 지붕(하늘)을 덮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과는 반대로 지붕을 먼저 내시고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는 창조주시라는 면을 보여주시려 했다고 강조했다.3) 이토록 교부들 가운데 성경해석을 문자적(literal)이고 역사적(historical)인 방법을 따랐던 이들이 있다. 바실(Basil)과 같은 교부도 은유적, 상징적인 해석을 피하고 가능한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하여 창조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4) 그들은 단어의 순서배열과 그 함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반면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는 궁창위의 물과 궁창아래의 물은 영계와 물질계라는 두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 구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5)

 

 

 

2. 창조사역에 있어서의 성부, 성자, 성령

 

에프렘(Ephrem)과 같은 시리아계열의 교부는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성령을 어미 새에 비교하였다.6) 그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모두 창조사역에 참여함을 강조하였다. 성부는 말씀하시고, 성자는 창조하시고, 성령은 베푸셨다는 것이다.7) 제롬(Jerome)과 같은 라틴계열의 교부는 창1:2의 장면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는 마치 앞으로 임할 세례에 대한 전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질 세례의 한 모습으로 본 것이다.8) 에프렘도 이 장면에 세례의 의미를 부여하여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음으로 인해 생명을 부화시키는 것과 같이 물세례도 그 위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시키는 구속적 의미 이상의 창조적 의미를 바로 이 구절이 전조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9)

 

 

 

3. 빛의 창조: 첫째 날의 빛, 셋째 날의 식물, 넷째 날의 광명의 상호관계에 관한 문제

 

에프렘은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태양으로부터 비롯된 빛이 아님을 말하면서 빛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다.10) 암브로우스(Ambrose)는 첫째 날의 빛은 태양보다 선재하고 태양을 태양되게 한 원초적 빛이요 태양의 전조라고 소개하였다.11)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도 창세기 1:3에 언급된 첫째 날의 빛에 대해 이 빛은 자연의 가시적인 빛이 아닌 보다 근원적이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빛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2) 이러한 어거스틴의 답변은 사실상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고 비꼬았던 마니교도들에 관한 변증이었다. 즉, 이들은 궁창위의 빛인 태양이 넷째 날 창조되었다면 그 첫째 날 나온 빛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어떻게 태양과 지구의 상호주기작용으로 인한 '날”(하루 24시간 개념)이라는 부조리한 말을 쓸 수 있느냐는 식으로 구약의 말씀을 도전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셋째 날 창조된 식물에 관해 에프렘은 설명하기를 풀은 즉시 창조되었지만 이미 성년에 이른 완숙한 풀이요, 나무도 하루 만에 단숨에 창조되었지만 벌써 과실을 맺을 만한 완숙한 형태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13) 바실은 셋째 날 창조에 있어 풀과 채소와 과목과 같은 식물이 이미 넷째 날 태양의 창조이전에 선재한 것을 통해서 이미 지구와 식물계가 사실상 태양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마치 태양을 생명의 기원을 야기한 존재로 보아 이를 예배하거나 숭배하는 행위는 무지하고 악한 우상숭배임을 통렬히 지적하였다.14) 크리소스톰도 이미 셋째 날 식물계의 창조는 가시적 태양광선이전에 이미 성년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생명의 근원을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려하게 함이었던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15) 암브로우스 또한 태양은 사실상 식물보다도 더 어린 존재임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생명력을 주는 근원임을 알게 하려함이라 하였다.16)

 

 

 

4. 새와 물고기의 창조에 관한 이해

 

바실은 넷째 날과 다섯째 날에 창조된 궁창의 빛들(해, 달, 별)과 새와 어류와 같은 생물들을 창조된 공간과 무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식물(ornamentation)로 보았다.17) 그는 문자의 나열과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다섯째 날의 경우 물고기와 새의 출현에 있어서 물에게(만) 명령을 내린 구절(창1:20)을 설명하면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새의 날개가 공통적으로 유체 속에서 유영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유영을 위한 공통적 구조가 곧 공통의 출처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18) 이토록 바실의 경우 이러한 세심한 차이도 빠뜨리지 않고 설명을 부과하려 한 면밀함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초대교회 교부 중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해 가장 맞선 사람이 이레니우스(Irenaeus)였다면, 마니교(Manichaenism)에 대해 가장 맞선 사람은 한때 그것을 추종하고 따랐던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의 경우 창세기 주해는 대부분 마니교도의 성경비판에 대한 변증이었음을 보게 된다. 마니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파생될 수 있는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면을 끄집어내어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려고 하였다. 특히, 다섯째 날의 새의 창조를 물고기가 창조된 물이라는 배경에서 같이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어찌 조류와 어류를 한 통속으로 보느냐는 것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설명하기를 여기서 이야기하는 물은 바다나 강과 같은 물이 아닌 많은 수분을 내포하는 공기라고 설명한다. 물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유영할 수 있는 매질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공중의 새들도 축축한 수분이 내포된 공기가 그들의 날개로 날 수 있도록 매질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 공기 중의 수분은 밤새 이슬이 되어 응축된 자연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19) 반면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으로 유명한 오리겐(Origen)과 같은 교부는 궁창을 마치 우리의 마음에 비유하면서 궁창을 나는 새는 마침 우리 마음속에 어지럽게 날고 있는 악한 생각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으로 설명하였다.20)

 

 

 

5. 여섯째 날 동물의 창조에 관한 이해

 

바실의 경우 여러 동물들의 종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러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이렇게 종류대로 된 것들이 아무리 수십 세대 간을 거치는 동안에라도 변함이 없이 보존된다는 자연현상에서 더욱 입증되고 있다고 설명한다.21) 그러므로 종자의 순종(purebred)은 창조질서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나, 잡종(hybrid)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잡종은 창조질서의 역행으로 인해 사실상 고통을 당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해석함으로 상당히 생물학적인 언어로 종에 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22)

 

마니교도들은 여섯 째날 하나님이 땅을 향하여 명하시되 동물들을 종류대로 내라(창1:24)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마치 광물질인 땅 자체에 유기물인 생명을 낼 수 있는 창조적 장치가 있느냐는 식으로 기독교를 힐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실은 땅이나 물이 자체로 부터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의 궁극적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23) 바실은 이러한 창조행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24)

 

 

 

6. 여섯째 날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해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는 교부들이 좀 더 세심한 이해와 해석을 덧붙였다. 특히,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피조물과 두가지면에서 특이하게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인간의 창조에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간의 논의(Triune consultation)가 있었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위대한 갑바도기아 교부가운데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의 주장이다. 다른 피조물들이 단순한 한 명령어에 의해 존재케 된 반면 인간은 삼위의 하나님의 신중한 논의에 의한 결정체였다는 것이다.25) 크리소스톰 역시 인간은 논의와 협력과 토의를 거쳐 나온 존재라는 면에서 타 피조물과 구별될 수 있다고 하였다.26) 그레고리는 인간의 창조가 순서상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면에서도 그 완성도가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이는 진화를 의미하진 않음)고 주장한다.27)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면에서 더욱 구별된다. 헬라의 교부들은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요소로 보고 애써 이를 구별하여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오리겐은 형상(image)은 선천적 요소로, 모양(likeness)은 후천적 요소로 보아 후자를 인간자신이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으로 획득되어 질 수 있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28) 창1:26절에서 언급된 형상과 모양 중 형상에 관한 것만 한 번 더 그 다음절에 언급되어 있고 모양에 관해서는 침묵하신 이유도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 한다고 보고 있다.29) 또한 헬라교부들의 치밀하고도 정밀한 해석적 시도는 우리의 형상과 모양에서 '우리”라는 말은 복수로 쓰인 반면, '형상”이나 '모양”이라는 말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지칭한 점에서 우리 하나님의 특성 즉, 세 인격(복수)으로 있으나 본질상 하나(단수)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설명하였다.30)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 이를 단순한 내면적 인격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외적인 신체의 모습까지도 이야기하는 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 모두가 있었다. 내면적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이야기한 자는 오리겐으로 그는 우리의 영적인 특성, 즉 내면적 사람, 보이지 않고 비육체적이며 부패될 수 없고 죽지 않는 영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31)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내면적 성정은 반드시 삼위일체적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여 삼위일체에 기반한 인간이해를 도모하였다. 포타미우스(Potamius)같은 교부는 인간의 외적인 신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 발현이라고까지 보았다.32)

 

 

 

7.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관

 

지금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대체로 초대교부들은 창세기1장의 창조기사에 관한 해석에 있어 두 갈래로 나눠짐을 보게 된다. 하나는 문자적(literal)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이다. ‘알레고리(allegory)’라 함은 우의적, 은유적, 풍유적 해석이라 하여 문자가 의도하는 것 이상의 뜻(주로 영적인 의미)이 있다고 믿고 숨겨진 진의를 해석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동방 헬라 교부의 대표적 인물인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서방 라틴 교부를 대표하는 어거스틴의 경우 성경해석에 있어 그 나름대로 합리성과 조화를 시도하기 위해 문자적 해석에만 머물지는 않았음을 보게 된다.33)

 

일례로, 창조기사의 ‘날’(Day)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그 입장이 크게 세 부류로 나눠지게 됨을 본다. 첫째는 ‘하루 24시간’으로 보는 입장이며, 둘째는 ‘긴 연대’적 입장이며, 셋째는 ‘순간적 창조’의 입장이다. 먼저, 첫 번째 부류로 문자적 접근을 시도했던 크리소스톰의 예를 들어보자. 창조기사에 있어서 ‘날'이라는 말을 태양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첫날부터 쓴 것은 그 시간의 정해짐이 넷째 날 창조된 태양에 대한 지구자전주기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러한 시간대(24시간)로 날을 지정하였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하루를 지구의 자전에 의한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말씀의 권위에 의한 의도적 결과로 해석하였다.34) 바실의 경우도 문자적 해석에서 벗어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가는 것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더 과시하는 태도라고 보고 성경은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했다.35) 에프렘도 6일간의 창조를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즉, 문자적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36)

 

두 번째 견해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시도한 오리겐은 물론이고, 순교자 저스틴이나 이레니우스,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은 하루를 천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긴 시간으로 보았다. 그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벧후3:8) 같다는 비유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 아담도 과실을 따서 ”먹는 날” 바로 죽지 않고(창2:17) 930세에 죽은 것(창5:5)으로 보아 ‘날’의 의미를 하루 24시간으로 만 볼 필요는 없다고 유추한 결론들이었다.

 

그러나 초대교부들 가운데에는 특이하게도 또 다른 세 번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암브로우스 같은 교부는 다섯째 날의 창조기사에서 아예 모든 생물의 창조는 순식간이며 동시적이었다고 보았고, 단지 창조기사는 이를 우리의 인식에 맞게 설명하도록 순서적으로 배열된 묘사에 불과하다고 믿었다.37) 그의 회심에 있어 암브로우스의 영향을 받고 세례까지 받은 어거스틴의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창조를 24시간 길이의 하루가 여섯 날에 걸쳐 창조된 것이라 보지 않고 오히려 일순간에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38) 그도 역시 창조기사의 서술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논리적 순서(이때 논리는 과학적 시간의 순서 논리가 아닌 영적인 의미에서의 논리)에 의해 기술되었을 뿐 실제 창조는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창조는 순서적으로 이행된 하나님의 행동으로 보아야 된다고 주장했다.39) 이에 관해 크리소스톰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절차 없이 다 창조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나 우리의 이해와 교훈을 위해서 순서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40)

 

초대교부들의 창조기사 해석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다른 성향이 있음에 관해 통찰력 있게 연구한 샌드웰(Isabella Sandwell)은 두 인물로 위에서 언급되어온 크리소스톰과 바실을 대비시키고 있다.41) 양자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모두가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충실히 따르는 정통 교부들이라는 점과 문자적 의미의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42) 그리고 두 사람 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찬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43) 그러나 상이점이라면 크리소스톰의 경우 좀 더 목회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바실의 경우 좀 더 과학적이고 변증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이다.44)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말씀으로 '선포‘하는 쪽에 섰다면,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납득해야 할‘ 말씀으로 ‘설명‘하는 쪽에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궁창을 설명하면서, 바실은 마치 오늘날 노아홍수의 캐노피 이론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공기가 찬 하늘의 물[즉, 궁창위의 물]이 있어서 위로 올라 온 수증기, 즉 강과 못과 늪과 그리고 바다에서 오른 그 증기가 위로부터 오는 엄청난 열기로부터 [궁창 아래의 땅을] 타는 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다.45)

 

바실은 처음 3일간의 빛도 태양과 상관없이 아침과 저녁을 구분 짖게 하셨으나 오직 넷째 날 광명을 만드신 이유는 이 원초적 빛을 담을 하나의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하였다고 설명한다.46) 마치 이것은 빛과 램프를 비교해 봄으로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빛 자체가 램프와 분명 구별되는 것처럼 등(광명)은 빛을 담기위해 준비된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7) 반면 크리소스톰은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태양을 처음부터가 아니라 셋째 날 식물이 창조되고 넷째 날 만드신 이유는 헬라인들로 하여금 식물을 자라게 하는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근거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이시기 위한 것임을 말하여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48) 바실은 가능한 기존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비유적 방법(analogy)을 사용하여 이해를 돕고자 하였지만 크리소스톰은 오히려 청중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비약적이고 탈 논리적 방법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더욱 부곽 시키려고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49) 한마디로 바실이 그 예리한 지성으로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였다면 크리소스톰은 그 황금의 입으로 우리의 믿음에 호소하였던 것이리라 여겨진다.

 

 

<자료 : 한국창조과학회 / 2012 국제학술대회>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창골산 봉서방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