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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다 빈치 Leonardo da Vinci 연표와 생애

작성자5060|작성시간06.10.31|조회수488 목록 댓글 0
레오나르도 다빈치 ( Leonardo da Vinci : 1452.4.15~1519.5.2 )

작가연보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 서쪽 빈치 마을에서 출생. 부친 피에로는 피렌체의 공증인이며, 레오나르도는 서자로 태어나 조부의 집에서 자랐다.
1472년 (20세) 피렌체의 화가 조합에 등록.
1473년 (21세) 코페르니쿠스 출생 / 레오나르도 화가 조합에 받아들여짐.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풍경 소묘화에 「8월5일」기입.
1476년 (24세)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제단화가 스승인 베로키오에게 의뢰되었는데, 레오나르도는 클레디와 합작 <受胎 告知>를 그림.
1480년 (28세) 마젤란 출생 스승 베로키오가 3년에 걸쳐 계속해 온 피렌체 본당 은제단의 부조 <세레 요한의 참수>제작에 협력. 또한 <콜레오니 騎馬像> 구상도를 만들어 베로키오에게 제공.
1481년 (29세) 3월, 스코페트의 성 도나트 수도원 주제 단호를 의뢰받음(동방박사들의 경배). 이 그림이 <3王來朝>인데 완성시키지 않음
1482년 (30세) 밀라노의 섭정 스포루차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감. <스포루차公 騎馬像>제작에 관한 협의.
1483년 (31세) 4월25일, 밀라노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신심회 예배당 제단화 <岩窟의 聖母>를 의뢰받음. 라파엘로, 루터 출생.
1487년 (35세) 8월8일, 9월30일 두 번에 걸쳐 밀라노 대성당의 설계료를 지불받음. 1488년 티티안 출생.
1489년 (37세) 4월과 5월에 그림 데상에 인체해부학을 연구한 흔적이 보임.
1490년 (38세) 6월8일, 파비아 대성당의 설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파비아에 들르도록 로드비코 공의 명을 받음 레오나르도, 자신의 공방 만들다.
1493년 (41세) 레오나르도의 생모 카테리나, 밀라노에 옴. 11월 30일, 독일 황테 맥시밀리안과 비앙카 마리아 스포루차의 결혼식 날 레오나르도의 <스포루차 騎馬像>이 성내 광장에 공개됨.
1495년 (43세) 이 해부터 <최후의 만찬>제작에 착수. 스포루차성의 작은 방 장식을 제자들과 함께 함. 생모 카테리나 사망. 이 장례비 메모가 남아 있음.
1497년 (45세) <최후의 만찬>거의 완성. 파치올리의 「神聖 比例」저술에 협력. 1498년 (46세) 파치올리의 「神聖 比例」 로드비코에의 헌사가운데, <최후의 만찬>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레오나르도의 재능이 걸출하다는 등이 기록되어 있음.
1499년 (47세) 프랑스 루이 12세 베네치아, 피렌체와 동맹, 밀라노를 침공. 이때 스포루차 기마상 모형이 파괴됨. 연말경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 향발.
1500년 (48세) 피렌체로 가는 길에 만토바에 들러 이사벨라데스테의 초상화 고(稿)를 그림. 3월에는 베네치아에 체류 8월 전에 피렌체에 도착.
1501년 (49세)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세르비티가에서 일행과 함께 거주. <성 안나> 畵稿를 그림. 또한 소품 <紡車의 성모>제작. 과학연구에도 몰두.
1502년 (50세) 제잘레 보르지아, 로마냐 공이 됨.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군사토목기사로 로마냐 지방에 출장, 여러 곳을 순방.
1503년 (51세) 3월, 피렌체로 귀환. 7월 24일, 알르노 강 수로 변경 계획서를 제출.
1504년 (52세) 1월25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설치 장소를 결정하는 위원회에 참석.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10남 2녀를 남기고 사망.
1506년 모나리자 완성
1506년 (54세) 6월6일의 일기에 <앙가리의 會戰>을 위한 칼튼이 악천후로 인해 조각났다고 씀.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실패. 가을에는 완전히 단념.
1506년 (54세) 4월27일, <岩窟의 聖母>를 다시 그리기로 약속. 4월30일 부친의 유산 상속인 가운데 레오나르도가 빠졌음. 6월1일 밀라노 향발.
1507년 (55세) 5월,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왕의 화가가 됨. 9월 피렌체에 일시 귀환.
1508년 (58세) 피렌체의 피에로 마르첼리가에 머물면서 물리, 수학 노트를 하기 시작함. 7월 밀라노로 돌아옴.
1510년 (58세) 이때 해부학 연구에 열중, 해부학자들과 자주 접촉.
1512년 미켈란 젤로, 시스틴 성당 천장화 완성. 1513년(61세) 밀라노의 비올라가에서 거주. 9월24일 메르시, 사라이 등과 함께 로마로 향발. 교황 레오 10세가 제공한 바티칸 궁의 별실에서 수학과 과학을 연구.
1514년 (62세) 9월, 바르마, 산탄젤로 등지를 여행. 「원의구적법」, 「굴곡면의 기하학」 등 집필.
1515년 (63세) 레오나르도는 19일자 일기에서 그의 후원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결혼을 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는 것과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기숙. 프랑소와 1세 즉위.
1516년 (64세) 3월17일, 줄리아노 데 메디치 사망. 로마에서의 후원자를 잃음. 이탈리아를 떠나 앙브와즈로 향함.
1517년 (65세) 5월 프랑소와 1세의 별장인 프랑스 앙보와즈 교외 클레성에 체재.
1518년 (66세) 5월3일~16일까지 앙보와즈에서 열린 축전에 그가 고안한 기계 등을 전시. 또한 프랑스 왕의 여러 건축에 관여.
1519년 (67세) 4월 23일, 유언장 작성. 메르시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하고 그의 작품과 수기들을 건네줌. 5월 2일 사망.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피렌체 근교의 빈치 출생. 공증인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사꾼의 딸 카테리나이다. 그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전쟁을 경멸했던 친절한 채식 주의자이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 생각한다면, 어떤 개념도 그를 규정짓기에 충분치 못하다. 그는 특정 시대와 관련지을 수 도, 일정한 범주로 묶을 수도 없는, 알아갈수록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레오나르도는 바타칸의 아첨꾼과 떠버리, 연설꾼 그리고 궁정 안의 독선적인 지식인을 조롱했다. 그들의 빈약한 재능을 경멸하고, '자기 생각도 없이 단순한 기억력에 의존해 선례만을 차용한다.'며 비웃었다. 반면 레오나르도의 동료들은 그가 단순한 발명가일 뿐이며,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그의 지식은 순전히 관찰과 독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조금씩 습득해 나간 것이다. '화가는 자연에 대해 대화와 경쟁 관계에 있다.' 레오나르도가 한 말이다. 그는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자로서 회화를 과학으로 간주하고 그 영역을 단순한 재현 이상으로 확대시켰다.

자신의 회화와 소묘속에서 인간 지식의 미개척 분야를 역전시키고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레오나르도는 소묘를 통해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결국 과학적방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가지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면 즉시 또 다른 문제를 향해 돌진하는 탐구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등 어는 명칭에도 해당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한계도 훌쩍 뛰어 넘어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인체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는 새의 비행이나 지질, 지지학, 식물학, 입체 기하학을 거쳐 슈류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등에 이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많은 업적을 이룩한 것은 그의 뛰어난 창조성에 기인한다. 창조성이란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거기에는 유동성, 유연성, 준비성, 그리고 독창성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유동성은 수많은 생각들을 안출해 내는 능력이고, 유연성은 서로 다른 원천들로부터 유래하는 매우 다양한 응답들을 제공하는 능력임에 반해, 독창성은 뻔한 것,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은 생각들을 인출해 내는 능력이고, 준비성이란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개선하는 능력을 뜻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를 그린 단순히 위대한 화가로 불리우진 않는다. 레오나르도 자신 역시 '로도비 코스포르자공'에게 보낸 36가지 안건에서 볼 수 있듯이 판화, 대리석, 금속, 미술 분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과학의 한 분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레오나르도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보면서도 한편, 그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 어떤 개념으로도 그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며 시대의 대표작을 배출해 낸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동시에 규정불가의 위대한 인물 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선배들의 구도상의 전통등을 따르면서도 조형 수법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형태를 실현시켰다. 인물 하나하나의 포즈와 동작 및 표정에 되도록 많은 변화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의 동요를 보는 사람으로하여금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즉, 레오나르도는 그전까지의 이야기 중심에서 벗어나 화면의 조형성과 인물들의 심리적 표현에 역점을 둔 것이다. 일종의 불완전 유채를 씀으로써,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채색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안타까운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제1피렌체 시대(1466∼82)】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14세 무렵 피렌체를 떠나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에 입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20세 때 피렌체의 화가조합에 가입하였는데, 그 뒤에도 계속 스승의 공방에 남아 수련하다가 1479년에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동문에 페루지노·보티치니·크레디, 친구에 보티첼리 등이 있었으나,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히 스승의 공방에서 기초수업을 닦았다. 그가 일찍부터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엄격한 사실기법(寫實技法)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은 73년경의 《성고(聖告)》(우피치미술관) 및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좌단(左端)의 천사뿐만 아니라 스승이 작업한 그리스도나 배경 등에도 훌륭한 유채화법으로 정성껏 가필하였다. 그 정교하고 치밀한 사실기법은 후의 《지네브라 데 벤치》(워싱턴 내셔널갤러리)와 《마돈나 베아노》(에르미타주예술관) 등에서 명암법에 스푸마토(Sfumato:그 특유의 바림)를 병용함으로써 이미 완성의 경지에 달했다. 81년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의 대작으로 제작한, 산 도나토 아 스코페토 수도원의 위촉으로 그린 《삼왕예배(三王禮拜)》(우피치미술관)와 그 직후의 《성(聖)히에로니무스》 (바티칸미술관) 등은 모두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엄격한 사실(寫實)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제1밀라노 시대(1482∼99)】 30세경에는 피렌체보다도 넓은 활동무대를 찾아 로도비코스포르차(통칭 일 모로)가 지배하는 밀라노로 이주했다. 이 최초의 밀라노 체재는 그의 생애 중 가장 길었던 17년 간의 정착시기이며, 그 동안 축적된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이기도 하다. 우선 그림에서는 83년 4월 위촉받은 산 프란체스코 성당을 위한 제단화 《암굴(岩窟)의 성모》(루브르미술관)와 98년에 완성된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성당 식당의 벽화 《최후의 만찬》 등을 그려,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시킴으로써 다음 세기의 고전양식을 이미 달성하였다. 조각에서는 장대한 프란체스코 기마상(騎馬像)에 착수하여 93년 11월 그 모델을 완성하였으나 일 모로가 주조를 위한 청동(靑銅)을 펠라라공(公)에게 주어버려 주조하지 못하고, 그 후 모델도 없어졌다. 건축가로서는 밀라노 대성당의 중당(中堂) 원개(圓蓋)의 모델 제작과 스포르차성(城)의 개축설계, 디자이너로서는 성내(城內)의 사라델레아세와 그 밖의 장식이 있으며, 일 모로의 호사스런 궁정생활의 연출가 겸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인체 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수학자 L.파치올리와 친교를 맺었으며, 《회화론》을 포함한 각종 저술에 힘썼다.

【제2피렌체 시대(1500∼06)】 1499년 10월의 프랑스군의 밀라노 점령으로 일 모로는 몰락하고 레오나르도는 L.파치올리 및 제자들과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 그리고 1500년 2월 만토바에서 공비(公妃)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을 그렸다. 피렌체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산티시마아눈치아타 성당으로부터 제단화를 위촉받고 이를 위한 화고(畵稿) 《성(聖)안나》(현재는 없어짐)를 그려 01년의 부활제에 공개했으나, 대단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회화로 완성시키지 않았다. 이 무렵 그의 과학적 관심은 02년 여름부터 약 8개월 간 이탈리아 중부에서 체자레 보르지아군(軍)의 군사토목기사로서 종군하게 하였다. 보르지아의 실각으로 03년 3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의 제작에 착수하였는데, 같은 해 10월 정청(政廳)으로부터 팔라초 베키오 안에 있는 대회의실 벽화 《앙기아리의 싸움》 제작을 위촉받았다. 이를 위한 밑그림을 끝내고 05년 6월 6일부터 제작에 착수하였으나 불운하게도 폭풍우로 밑그림은 파괴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피렌체를 떠나게 되자 벽화는 그대로 버려졌다. 지금은 벽화를 위한 많은 습작소묘와 루벤스의 중심부 모사(模寫:군기쟁탈의 장면)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에도 과학연구는 착실히 진행되어 새의 비상(飛翔)이나 지질·지지학(地誌學)·식물학·입체기하학 등을 연구하였다.

【제2밀라노 시대(1506∼13)】 1506년 프랑스 치하의 밀라노에 초빙되어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겸 기술자로서 6년 남짓 머물렀다. 이 때 숙부 프란체스코의 유산상속으로 이복동생과 소송사건이 일어나 07년 9월부터 약 반 년 동안 피렌체에 돌아와 있었다. 밀라노 재방문 기간 동안 제자인 암브로조 디프레디스를 지휘하여 1506∼08년 《동굴의 성모》 제2작(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을 완성했고, 자신은 트리불초의 장군 기마상과 《레다》(제자의 번안화만 현존) 《성(聖)안나》 (루브르미술관) 《세례자 요한》(루브르미술관)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성 안나》는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수류(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공동연구를 하고, 알프스를 탐색한 것도 이 시기이다.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9)】 1513년에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 네무르공(公) 주리아노 데 메디치를 섬기기 위해 로마에 가서 같은 해 말에는 바티칸궁에 체재하였다. 그러나 3년 후 후원자인 네무르공이 죽어 로마에서는 구체적 업적을 거의 남기지 못하였다. 수학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과 산파오르 성당의 측정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16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가서 17년 5월 제자인 멜치와 함께 앙부아즈의 클루관(館)에서 살았다. 이 곳에서는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으며, 운하설계나 궁정설계 등을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의 방대한 수기는 평생에 걸친 여러 과학(圖學·물리학· 역학·광학·천문학·지리학·해부학·기계공학·식물학·지질학·造兵學·水理學·토목공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기록된 것으로, 유언에 따라 멜치에게 보내졌으나 현재는 그 일부(약 5,000장)가 서구 각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상(科學史上) 그 선구적 의의가 크다. 전분야에 걸친 지칠 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전인(全人:워모우니 베르살레)’의 최고 전형(典型)이라 할 만하다.


모나리자의 모델이었던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의 데상이다. 얼굴 이외에는 레오나르도 자신의 필치 라고 인정되었으나, 옆 얼굴은 이사벨라라고 하는 메달의 옆 얼굴과 같은 것 으로써 그 둘의 다루어진 인물은 동일 하다고 추정되었다. 목탄으로 그려져 있으나 머리나 피부는 쵸크로 그리고, 의복은 황색의 파스텔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과 이른바 <모나리자>라고 하는 그림을 세워 보면 그 이마의 넓이, 콧등의 아래쪽이 두드러진 형, 작은 입 그리고 쌍꺼풀 밑의 맑은 눈동자 등이 닮고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레오나르도의 일생은 그렇게 주홍빛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노년에 그린 자화상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인생의 역경을 간직한 듯한 그의 잔주름과 무엇에 대한 또렸한 응시가 없는 그의 눈빛처럼 그의 일생은 그렇게 자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다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빈치'라는 마을에서 공증인 세르 피에로 다빈치(Ser Piero davinci)와 농부의 딸 카테리나(Caterina)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같은해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16세의 알비에라 아마도리와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빈치는 다섯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세금 신고서에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태어나서 다섯살이 되기전 까지의 어린 그의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의 가계는 대대로 공증인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있었다.

다빈치의 출생도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메모속에서 발견된다. 발견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내게 손자 한 명이 태어났다. 내 아들 세르 피에로의 아들로.' 하지만 이 단 한줄의 기록으로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집과 그가 성장한 장소, 그가 태어날때의 상황이나 그의 출생이 어떻게 받아 들여 졌는지에 대하여는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후에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들과 그시대에 관한 폭넓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어린시절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짐작해 볼 수 있다.

먼저 레오나르도의 출생에서 부터의 엇갈림은 그의 어린시절을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했으리라.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장남이며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이미 공증인의 길에 접어들어 출세하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피사나 피스토이아, 아니면 피렌체에 가 있을때가 많아서 집에는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에 첫번째 정식 결혼식을 올린 이 젊은 공증인과의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카테리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생아의 어머니인 이 농부의 딸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아직까지 여러가지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모 카테리나에 관한 것들이다. 다만 기록이 남아있는 것들은 다빈치를 출산할 당시 스물 두살이었는데 레오나르도가 두 살되던 해 1454년 안토니오 아카타브리가라 불리는 남자와 결혼했다. 아마 태어나서 어머니 품에서 자라던 레오나르도가 이때쯤 할아버지 집안으로 입적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세르 피에로가 결혼전에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던 카테리나는 매우 아름다웠으리라는 짐작이 드는데 아들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의 미모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훗날 어머니를 생각하며 레오나르도가 남긴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초라한 누더기를 걸치고 치장도 전혀 하지 않은 두메 산골의 농사꾼 아가씨들이 멋을 부린 도시의 아가씨들 보다 더 아름답다는 걸 너는 아는가?' 그렇다면 아버지 세르 피에로와 생모 카테리나의 사랑은 어떠했을까? 각자 결혼을 하고나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그때의 시대적 배경과 여러가지 정황으로 이를 추측해 본다. 그 시대는 신분이 다른 계급의 결혼이 사회 통념상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기이다. 농부나 소작인의 딸이거나 여인숙의 하녀 였을지도 모를 스물 두살의 여자와 잘 나가는 공증인 신분의 청년이 그시 대에는 그렇게 일반적인 결혼상대자는 아닌 것 같다.

다빈치가 태어나던해에 세르피에로의 아버지 안토니오는 급하게 이 큰아들의 결혼을 서둘러 열여섯살의 부르주아 아가씨인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마도리와 혼인을 시키게 된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젓을 땔 무렵 그러니까 두살이 되던해에 생모 카테리나는 어느정도 형편이 되는 농사꾼의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된다. 이런 시간적인 타이밍이 그냥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위적인 냄새가 다분히 배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인지 인위적인지 인위적이라면 누구의 처사에서 계획된 것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생각이었는지 아버지 세르 피에로의 계획인가에 따라 세르 피에로와 카테리나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하던 의붓 어머니와 어린 레오나르도의 관계는 제법 원할 했던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 어린 의붓 어머니는 스물 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첫째부인에 이어 둘째 부인에게도 자식이 없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제법 관심을 보여 그에게 알맞은 직업을 찾아 견습생으로 넣음으로써 아버지의 최소한의 의무는 감당해낸 셈이다.

레오나르도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막내 동생인 프란체스코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특히 프란체스코는 조카 레오나르도보다 고작 여섯살 위여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란체스코는 농토를 가꾸며 즐거워했다. 다빈치와 함께 올리브 수확을 지키고 포도밭을 감독하며 어린 레오나르도는 독립적이며 사색하는 성격의 이 조용한 남자의 본을 뜨게 된다.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이 프란체스코는 풀들의 이름과 효능, 비를 몰고오는 구름이며, 동물의 습성, 생활에 영향을 주는 미신이 섞인 전설등을 물론 알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와 접촉하며 드넓은 벌판을 사랑하고 자연현상 에 대한 호기심을 같게 되었다.

1507년, 프란체스코가 자식도 없이 죽으며 당시 관습과는 달리 이 삼촌이 재산을 물려준 사람은 정식 조카가 아닌 레오나르도 였다. 레오나르도가 14살이 되던해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열다섯살의 프란체스카와 결혼을 하게된다. 이 프란체스카는 레오나르도보다 겨우 한살 많았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서 그녀는 어머니이기 보다 같이 노는 친구 또래 였다. 그리고 이 둘째 부인은 레오나르도가 스물 한살이 되던 해에 스물 두살의 나이로 인생을 접게 된다.

그 후로 새로운 두 의붓어머니 마르게리타와 루크레치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의붓 어머니가 그 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편지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귀하'라고 쓰고있다. 그러면 그의 생모에게는 어떠했을까? '거기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말해다오. 그리고 그 카테리나라는 여자가 무얼 하기를 원하는지 내게 말해다오…'라는 구절이 그의 수첩에 적혀있다. 특히 '그 카테리나란 여자가'라는 경멸조의 문구가 눈에 띈다. 카테리나를 '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일까? 이 호칭은 의붓 어머니를 위해 남겨두어서 일까? 아니면 카테리나가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서일까? 가끔씩 마을에서 카테리나를 마주칠때면 레오나르도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밭일을 하는 카테리나 부부와 마을에서 성공한 세르 피에로 부부를 어찌 비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세르피에로와 어떻게든 결혼을 할 것이지 왜 농부 아카타브리가를 따라갔느냐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레오나르도의 유년기는 사생아라는 굴레속에서 지나가게 된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이런 암울한 어린 시절과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의 관계를 1910년에 간행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의 한 추억]에서 재구성 하려 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러한 가설이 반드시 정답일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한 위대한 천재의 어린 시절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할것이다.

1469년 피렌체는 이탈리아 상업의 중심지로 되면서 여러가지 상업활동이 왕성하게 번창하는 도시가 된다. 그리고 이 활기찬 도시 피렌체에서 세르 피에로는 시골출신이라도 이제 피렌체의 의젓한 대표자가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레오나르도 가족은 희망의 도시 피렌체로 이사를 하게 된다. - 1470년 세르 피에로가 작성한 세금신고서 에서 레오나르도 이름 발견됨. 이때 레오나르도 나이 열 일곱 살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도제로 입문하게 된다.

아버지, 의붓 아버지 아카타브리가. 프란체스코 삼촌, 조부 이들 네 남자는 제각기 소년 레오나르도에게 만은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기 청년기의 레오나르도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게될 한 사람이 추가된다. 이 사람이 바로 아드레아 디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테 치오니인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고 불리거나 아주 짧게 베로키로 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보다 겨우 열일곱살 더 많은 나이인데 레오나르도의 스승이 되어 청년기의 레오나르도에게 정신적인 아버지가 된다.

공방에 도제로 입문하게 되면 여러 제자들은 스승의 지휘아래 실제 업무를 통하여 교육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마을에 어떤 공사가 있으면 어느 공방에서 그 작업을 수주하게 되어 도제들은 스승의 지도아래 여러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방에서 하는 작업들이 어떤 분야가 없어 보인다. 다시말해 건축, 회화, 조각, 연금술, 도색, 토목, 세공, 조소.. 등 공방에서 하지 않는 작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기술들이 청년 레오나르도에게 다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레오나르도는 건축학, 물리학, 역학, 야금학등 여러 분야에 대한 개념을 터득하게 된다. 특히 베로키오의 여러 제자 중 레오나르도만이 스승의 다양한 재질을 물려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피렌체에는 여러가지 각종 행사들이 연일 펼쳐지면서 베로키오 공방은 이 작업들을 도맡아 하게 되어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창 활발한 시절의 레오나르도는 엄격한 분위기의 시골에서 올라와 이런 화려하고 기쁨에 넘치는 분위기에 황홀해 하며 이제 어엿한 일꾼이 되어 간다. 그렇게 두 해가 쏜살처럼 지나가고 레오나르도는 견습을 다 마친 후 1472년 그의 나이 스무살에 장인이 된다. 그의 이름은 동창생인 일 페루지노와 보티첼리와 함께 이 시기의 '성 누가 상사의 채무자, 채권자의 붉은색 장부' 다시 말해 화가조합 장부에 오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당장 공방을 열지 않았다. 아직 개인적인 명예를 좇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베로키오 옆에서 일을 거드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실력을 더 연마해 나갔다.

그 시절 레오나르도의 회화작품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소작인 한 명이 시골에 와 있는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를 찾아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무화과 나무로 방패를 하나 만들었는데 레오나르도를 시켜 여기에 장식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세르 피에로에게 그가 잡은 짐승이며 물고기를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여 그 소작인은 혼쾌히 승락을 얻어 내었다. 세르 피에로는 이 방패를 아들에게 맡겼다.

레오나르도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이 작업에 대단한 심열을 기울였던 것 같다. 아마 아버지의 부탁이라 더더욱 그러했으리라. 방패는 잘못 잘려졌고 뒤틀려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불을 쬐서 이것을 바로잡고 선반공에게 주어 윤을 내고 자기가 조제한 도료로 겉칠을 다시 했다. 그는 여기에 무엇을 그리게 될까? 방패에 그련진 형상은 옛날 메두사의 머리처럼 적을 무섭게 해야 한다. 이 원칙에 따라 레오나르도는 그만이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방(창고를 개조한 공방)에 '크고작은 도마뱀, 귀뚜라미, 뱀, 메뚜기, 박쥐와 그외 괴상하게 생긴 동물'을 모았다. 그는 무서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한 괴물을 만들기 위해 이것들을 약간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하던 방식으로 사지를 잘라서 이리저리 꿰어맞췄다. '아가리를 벌려 독을 뱉으며 눈에서는 불길이 솟구치고 콧구멍으로 독김을 뿜으며 컴컴한 바위 틈에서 나오는' 악몽 같은 동물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가 모아놓은 시체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작업을 계속했다. 작업을 마치자 아버지에게 이것을 가지러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세르 피에로가 방문을 두드리자 그는 겉창을 닫아 극적으로 한 줄기 빛이 받침대 위에 잘 보이게 전시해 놓은 방패 위를 비치게 했다. 방으로 들어오던 세르 페에로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둠속에 방패가 있는지도 몰랐으며 그림이 그려진 것도 보지 못했다. 자기 눈앞의 것들이 정말 악마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을질을 쳤다. 레오나르도가 그를 붙잡았다. '바로 이 물건이 이렇게 쓰일 겁니다. 가져가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한 미술 작품에서 기대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라고…

1478년 화가로서의 레오나르도에게 정식 주문이 정부로부터 들어온다. 시뇨리아 궁의 성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화 제작의 의뢰가 서면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선금 25 피오리노라는 상당한 선금도 받게된다. 하지만 이유는 알수없지만 레오나르도는 이 작업을 마무리 하 지 못하게 된다. 그 이듬해에 레오나르도는 또 하나의 공식적인 작업의뢰를 받게 된다. 그것은 포르투갈 국왕을 위한 장식융단의 밑그림인 [원제를 짓고 낙원에 있는 아담과 이브]이다. 이 작업을 계기로 레오나르도는 아버지 세르 피에르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제 화가로서의 직업을 인정받게 된것이다. 그리고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1481년3월 레오나르도는 아주 커다란 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피렌체 부근의 스코페토에 있는 산 도나토 수도원의 주제단을 위한 [동방박사의 경배]를 묘사한 큰 제단화였다. 이 그림은 폭이 거의 2.5미터에 달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업을 계기로 레오나르도는 마침내 '대 장르'의 작업에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완성에는 이르지 못하게 된다. 후세에 미술사가들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중단 이상으로 이 작품에 대한 중단을 어리둥절해 한다. 그리고 이 [동방박사의 경배]는 미완인 상태로도 그 세기의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1482년 초엽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 밀라노에서 이제 삼십대를 맞이한 레오나르도는 다양한 재기를 펼치게 된다. 각종 무기를 고안, 비행기구의 고안, 장수정 고안, 건축구조물을 설계, 인체의 각종기관 연구, 토목 설계, 여러가지 악기 고안 및 제작 그리고 여러가지 잡다한 장치를 고안하고 제작하게 된다. 또한 회화작업도 계속 그의 여러 재기중의 한 분야였다. 이 무렵 레오나르도는 수많은 공상과 구상과 연구로 그의 머리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리라.

진리와 공상은 서로 연계성이 있어 마치 톱니바퀴처럼 하나의 생각은 또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자연에 대한 끈임없는 통찰력과 분석력은 그의 머리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주체할 수 없는 공상들이 그의 머리속을 어지럽게 했으리라. 발 밑을 기어가는 풍뎅이를 보고 장갑차를 구상했을 것이며 눈앞을 아른거리며 떨어지는 민들레 홀씨를 보고 낙하산을 구상했을 것이며 머리위에서 선바람을 일으키며 선회하는 제비를 보고 비행물체를 구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이되면 잠들기 전에 낮에 본 사물들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이것들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했으리라. 그리고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다. '새벽부터 공기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고 눈은 이것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쓰인다.' 그의 이러한 여러가지 구상들은 오늘날 거의 실용화가 되었다. 어떤 것들은 그의 구상과 똑같이 또 어떤 것들은 그의 구상을 능가하는 것들이다.

1490년대 초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하늘의 비행하는 새에 관하여 자세히 연구하게 된다. 먼저 새의 해부를 통하여 이것들의 뼈와 근육 및 깃털의 구조를 연구한다. 또한 공기의 움직임과 상태를 분석한다.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해서는 레오나르도가 청소년기때부터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 그리하여 1498년 첫번째 실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늘날 낙하산에 해당하는 비행기구였다. 그리고 1505년 초로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비행기구에 관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낙하산, 헬리콥터, 행글라이더에 해당하는 비행기구 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레오나르도가 15세기 말에 쓴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긴 '예언' 중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 '오만함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바랐으나, 그들의 신체가 너무 무거워서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오만함과 헛된 자부심을 고백한다. 그가 걸었던 희망과 노고를 생각할 때, 실망과 모욕감에 빠져 의기소침해진 그를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뒤에 피렌체로 돌아와서 그는 다시 비행기구에 더욱 더 열심히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어느정도 명예를 가진 인물이 되어 왕실 작품과 제작하거나 여러 작품의 감수를 맡을 정도의 덕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무렵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와 밀라노를 오가며 두 도시의 미술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05년경 레오나르도는 후세 미술평론가에게 수많은 극찬을 받게될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를 그리게 되는데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것은 이 모나리자의 모델에 관한 것들이다. 16세기중반의 건축가이자 작가인 조르즈 바사리의 인용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를 위해 그의 부인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맡아 4년 동안 노력을 바쳤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내버려두었다. 그는 당시에 프랑스 왕의 화가였다.'고 한다. 이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 부부는 그무렵 비단 무역으로 부유해진 재력가로 알려져있다. 그는 몇몇 공직도 맡게 되었는데 이미 두번이나 홀아비가 되었던 그는 1495년에 리자 디 게라르디나라는 비천한 출신의 아가씨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조콘도의 부인이 모나리자의 모델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들력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는 [라 조콘다](La Gioconda), 프랑스에서는 [라 조콩드](La Joconde), 영어권 나라에서는 [모나 리자](Mona Lisa)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 하지만 또 어떤이는 이 추측을 반박하고 나선다. 그것은 바사리가 지적한 '완성하지 못한 채 내버려 두었다.'라는 부분이다. 루브루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은 완전히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것을 레오나르도가 계속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보수를 받기 위해서 그렸을 터인데 말이다.

현세까지도 모나리자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녀가 '얇은 베일을 쓴 고급 매춘부' 라는 의견도 있으며 또 어떤이들은 모델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며, 그녀가 레오나르도와 상당한 부분 닮은점에 기인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신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카테리나를 상상하여 그렸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추측들은 비밀스레 살포시 머금은 그녀의 미소처럼 앞으로도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 두 부분이 이상해

-미술사가 노성두 -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1485~90년. 잉크 24.5cm x 34.3cm

독서광이었던 레오나르도는 어느 날 낡은 책갈피를 뒤적이다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한다. 카이사르의 공병대장을 지냈던 비트루비우스가 제정 초기에 쓴 <건축 10서> 가운데 인체 비례를 설명한 대목이었다.

“이처럼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원에 붙는다… 정사각형으로도 된다. 사람 키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잰 길이는 두 팔을 가로 벌린 너비와 같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군침을 삼키며 책장을 넘겼다. 사람의 손가락과 손바닥, 발바닥과 머리, 귀와 코의 크기 따위를 숫자로 셈한 계산들이 쏟아져 나왔다. 낯선 사상이었다. 뼈와 피, 힘살과 피부로 이루어진 사람 몸뚱이를 기하학의 도마에 올려놓고 수학의 칼로 토막내어 계량화하는 고대의 사상은 르네상스의 영혼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레오나르도는 지체 없이 컴퍼스와 자를 집어들었다.


레오나르도가 실수를?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설명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비례론을 그대로 받아 적지 않았다. 그 대신 실제로 사람들을 데려다 눈금자를 들이대면서 실측한 결과를 덧붙여 써두었다. 원문에서 미심쩍은 곳은 고치고, 애매한 부분은 추리했다. 이를테면 키가 발바닥 여섯이 아니라 일곱의 길이라는 것도 새로운 주장이다. 그러고 보면 비판적 고전문헌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에서 엉뚱한 오류를 두 가지 저질렀다. 우선 원과 사각형이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또 비트루비우스의 ‘누운’ 인체를 일으켜 세웠다. 고의적인 실수였을까?

누워서 팔 다리를 뻗었을 때 배꼽에서 사지 끝마디까지의 길이가 일치하려면 어떤 자세가 좋을까? 레오나르도는 키의 1/14만큼 짧아질 때까지 두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은 정수리 높이까지 올리라고 했지만, 만약에 서 있는 사람이 눕는다면 발 길이가 더 늘어날 테니 곤란하다. 비트루비우스는 틀림없이 다른 자세를 생각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생각했던 것처럼 바람개비처럼 팔 다리를 사방으로 휘두르는 대신, 물 속에 뛰어드는 수영선수처럼 곧게 뻗은 자세가 아니었을까? 이때 배꼽에서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까지의 길이는 꼭 맞아떨어진다.

레오나르도는 두 도형에 내접하는 인체를 낱장 종이 위에 겹쳐서 그렸지만, 비트루비우스라면 달랐을 것이다. 여기서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가 ‘신전 건축’ 편에 실렸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원을 둘러친 누운 인체를 신전의 평면도, 사각형으로 에워싼 서 있는 인체를 신전의 입면도라고 바꾸어 읽는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인체와 맞붙은 원과 사각형은 신전 건축 가운데 가장 고귀한 형식으로 손꼽히는 원형 신전 ‘톨로스’의 품격을 갖춘다. 화가였던 레오나르도는 입체적인 그림을 떠올리는 건축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울고 갈 일

1998년 삼십대의 신진 미술사학자 이를레와 쉬뢰어 형제가 레오나르도의 그림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레오나르도가 비트루비우스를 곡해한 것은 오독이 아니라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사각형을 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기원전 430년께 태양이 불타는 쇳덩이라고 떠들다가 독신죄로 감옥에 갇힌 아낙사고라스가 풀었다고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그후 아르키메데스가 원에 내외접하는 다각형을 쪼개는 방법으로 π의 근사값을 구한 다음에도 보다 완전한 해결을 찾으려는 천재들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던 문제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어깨선이 실마리가 되었다. 턱과 가슴 사이 목우물을 스치는 어깨선은 양쪽에 점을 찍어서 마무리했는데, 수기기록에는 왜 그랬는지 까닭을 밝히지 않았다.

먼저 사각형과 같은 면적을 가진 원은 쉽게 구해진다. 머리에서부터 신장의 1/6 길이만큼 떨어진 어깨선을 수평 연장하면 가로로 펼친 팔의 가운데 손가락을 관통하는데, 배꼽 아래에 컴퍼스 중심을 두고 손가락 끝을 스치도록 조금 작은 원을 그렸을 때, 사각형과 새로 그린 원의 면적은 1:1.003.

두 번째는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사각형을 구하는 방법. 사각형의 밑변 모서리에서 배꼽을 지나는 사선을 둘 긋고, 사선이 원의 어깨와 만나는 접점을 찾는다. 접점을 수평으로 지나는 직선을 윗변으로 삼으면 새로 그린 큰 사각형은 원과 면적이 같다. 새로 그린 사각형과 원의 면적은 1:1.000373.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500년 넘게 습기와 세월의 공격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정확도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원에 달라붙은 96각형을 그려서 소수점 세 자리까지 오차를 줄였던 아르키메데스가 알았더라면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무수한 방법을 시험한 끝에 나는 원을 사각형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또 사각형과 꼭 같은 면적을 가진 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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