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양회화사의 서두를 조토로부터 시작해도 조토가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쉽게 수긍할 것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치마부에의 명성은 사라지고 대신 조토가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적었는데, 당시 일개 화가가 얻은 논평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른 피렌체 사람들도 비잔틴 화풍에 의존하는 구시대 미술을 개혁한 조토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조토 디 본도네(Giono di Bondone,1267년경-1337)는 자신의 진보성을 당대에 이미 인정받은, 역사상 몇 안 되는 운 좋은 화가였다. 후세에도 여러 화가들이 혁명적인 변화를 모색하지만 대부분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그가 추구한 미술 방식이 비잔틴 계통의 평면적 회화 이후에 등장한 삼차원적 사실주의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도 행운이었다. 사실 그의 회화는 동시대 조각과 모자이크의 영향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것일 뿐 중세미술 전통에서 혁명적으로 벗어났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2년째가 되는 1228년,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성당이 그의 고향 아시시에서 착공되었다. 이 성당은 예배 공간임과 동시에 많은 화가들이 모여 재능을 겨루는 각축장이 되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일찍부터 화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주제였지만 성인 자신은 미술과 신앙은 어울리지 않으며 성전(팰)도 청빈한 건물이면 족하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 성당이 성인의 업적을 기린다고는 하지만 성인의 가르침을 구현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성 프란체스코의 제자 한 사람이 이 성당을 방문해서는 '수도사들이 아내만 빼고 가질 것은 다 가지고 있구나!"하며 개탄했다고 한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 벽화 장식은 조토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피렌체, 남쪽으로는 로마에 이르는 지역의 화가들이 상하 양층으로 나눠진 성당 안에 벽화를 그리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아시시로 모여 들었다. 대부분 무명이었던 화가들이 그린 이 초기 벽화는 상당수가 파손되었거나 덧칠된 채 이제 파편만이 남아있다. 초기 벽화 중 일부는 성당 설립 때 제작된 것인데, 양식적으로 조토에 비해 매우 고루하다. 이보다 조금 후대에 속하는 벽화는 조토의 스승으로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치마부에(Cimabue, 1240년경-1302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심하게 파손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도1)치마부에 Cimabue, Madonna & Child in Majesty
치마부에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 주는 제단화 왕좌에 오른 [성모와 아기 예수]도1를 조토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도2와 비교해 보면 사실성이 크게 떨어져 유행에 뒤떨어져 보인다. 이 두 작품은 시간적으로 10년밖에 차이가나지 않아 여기서 보이는 양식상의 격차는 시대 차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세대가 달랐기 때문인 것같다. 그러나 치마부에의 작품에도 그 이전에는 없던 엄숙한 '웅장함'이 있기 때문에, 치마부에의 업적은 조토가 성장해 나가는 데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도2)조토 Giotto di Bondone, The Madonna in Glory
유럽 회화 역사에서 조토는 창조력과 함께 개성을지닌 최초의 화가라 할수 있다. 그에 대해서는추한 외모와 재치 어린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의 교우 중에는 단테도 있었다. 단테는 나폴리에서 조토의 작품 활동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조토의 성 모자상을 소중히 보관한 바 있고 '청렴결백'을 풍자한 시를 조토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조토가 쇠락한 미술을 회생시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이 지난후 로렌초 데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조토의 무덤에 흥상을 세워 주며 폴리차노의 시 구절에서 조토가 자기자신에 대해 언급한 문구, "소멸한 회화가 나에 의해 되살아 났다." 를 따와 새기도록 했다.
치마부에의 성 모자상이 지닌 특징이 종잇장 같은 옷주름, 평면적 왕좌, 달걀형 얼굴이라면, 조토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하나의 단단한 독립적 형상으로서 입체적인 왕좌에 다부지게 앉아 있다. 두 그림의 배경은 모두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편금(片金) 기법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치마부에는 등장인물을 겹겹이 카드장 쌓아놓은 것 같이 배치해 공간감을 거의 배제했지만, 조토의 그림에서는 깊이가 느껴진다. 전면에 무릎을 꿇은 두 천사는 진짜 무게를 가진 형상으로 나타나고 이 천사들과 그 뒤의 성모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한다. 치마부에의 화풍이 선적(線的)이라면 조토는 조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서양회화사에서는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이 계속 나타나지만 오랜 돋안 조토의 받식이 인정받고 채택 되었다.
전통적인 비잔틴적 상징물 대신 중량감 있는 극적인 인간을 창조해 낸 미술가는 조토보다 한발 앞선 세대의 조각가인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와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였다. 사실 조토 미술의 핵심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강조이다. 조토는 티에폴로까지 면면이 이어지는 이탈리아 미술의 주제를 명쾌히 보여 준 것이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풍경, 하늘, 바다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여기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미술은 대체로 인간을 영웅화시키고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고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인물은 북유럽 회화처럼 실내 공간속에 갇혀 있지 않고 대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한다.
(도5)[새들에게 설교하는 성프란체스코] Legend of St Francis: 15. Sermon to the Birds
1297-99, Fresco, 270 x 20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성 프란체스코 자신은 자연을 서정적으로 대했다. 성인의 일대기를 담은 아시시 성당 프레스코 벽화 연작 중에서 조토가 그렸다고 하는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도5에는 예술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서정성이 표현되어 있다. 자연주의가 조토의 필치로 신중하게 조절되어 나타나고 이 점은 사진이미지로 찌든 현대인의 눈으로보면 훨씬 분명하게드러난다. 또한 세부 묘사가 부피감에 종속되도록 공간을 완전히 재정비했다. 조토가 1306년경 작업했다고 알려진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Arena Chapel)은 조토의 미술 세계를 담은 거대한 기념비로서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내려왔다. 이러한 예는 서양 회화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예배당은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으로 묘사한 파도바 고리대금업자의 아들 레지날도스크로베니 (Reginaldo Scrovegni)가 발원해 건립되었다. 삭막한 예배당 바깥 모습만으로는 프레스코 벽화로 채워져 있는 예배당 내부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안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3단으로 구획된 벽면에 예수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이렇게 프레스코 벽화를 염두에 두고 건물을 설계한 예는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도3)[수태고지] No. 15 Annunciation: The Virgin Receiving the Message
1306, Fresco, 150 x 195 cm
Cappella Scrovegni (Arena Chapel), Padua
(도4)[현관에서 실을 잣는 소녀] No. 3 Scenes from the Life of Joachim: 3. Annunciation to St Anne (detail)
1304-06, Fresco, 89,5 cm (full fresco: 200 x 185 cm)
Cappella Scrovegni (Arena Chapel), Padua
(도4)[도4의 원래 그림]
높이 솟아오른 대성당과 난해하고 불안한 기쁨을 주는 중세의 신비주의는 조토의 고전적이고 정돈된 시각 세계에 견주어 보면 단정치 못하고 어색해 보인다. 조토의 프레스코화에 나타난 사람들은 단순하지만 섬세하게 채색된 옷을 입고 있고 명쾌하게구획된 공간 속에 자리잡았다. [수태고지]도3에서 무릎을 꿇은 성모 마리아의 배경이 되는 집은 세부는 생략된 채 핵심적인 구조만이 강조되었다. 다른 프레스코화 [현관에서 실을 잣는 소녀]도4에서 장르화적 요소는 장중함으로 승화되었다. 조토의 그림에 나타나는 단순하고 견고한집, 바위. 나무는 인간만큼이나 존엄성을 지니며, 움직임도 장식도 억제되어 있다. 이것은 아이스킬로스(Aeschylus, 기원전525-456, 그리스의 비극 시인)적 세계로, 이곳에서 다양한 톤으로 연주되는 것은 기독교적 운명이다. 외로운 요아힘은 삭막한 돌투성이 풍경을 배경으로 홀로 꿈꾸고 있으며 도6, [십자가에서 내리심]에서는 슬픔에 싸인 몸집 큰 인간들과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날아오르는 상처 입은 새 같은 천사들이 강하게 대조를 이룬다.도8.
(도6)[꿈꾸는 요하임]Scenes from the Life of Joachim
격앙된 분위기, 억제된 몸짓, 엄숙한 인물군도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방해하지 않는다. 실을 잣는 소녀처럼 모든 이미지는 단테의 시구같이 평범하면서도 인상적이다. 파리떼를 쫓는 개, 잠시 쉬기 위해 서리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양치기소년, 벌거벗은 채 아기를 안고 불을 피하는 여인이 그것이다. 시인과 화가 모두 이미지의 핵심만을 간결하게 잡아 내는 능력을 공유한 것이며, 이미지는그 간결성에 의해 더욱 생생해졌다.
조토는 토스카나지역 이외의 사람들도 감동시켰다. 그는 파도바뿐만 아니라, 나폴리, 로마에서 활동했고 볼로냐와 아비뇽에서도 활동한 것 같다. 그는 고향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예배당에도 벽화를 그렸고, 비록 지금은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도 디자인했다.
조토가 죽은 뒤 그의 미술은 제대로 전수되지않고 그의 미술의 외형에만 극도로 충실했던 추종자들에 의해 섬약하게 복제되었다. 타데오 가디(Taddeo Gaddi, 1366년 사망)는 오랫동안 조토 아래서 조수로 있으면서 일을 배웠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그의 벽화는 스승의 양식에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도7. "조토가 여전히 이 분야(회화)의 최고이다." 라고 단테를 연구하던 한 학자가 1376년에 적었다. 마사초가 등장한 이후에야 비로소 조토는 그의 진정한 후계자이며 나아가 그와 견줄 만한 경쟁자를 만나게 된다. 이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정국은 정치 집단의 알력으로 불안했고, 두개의 주요 은행 가문의 갑작스런 파산과 1347년의 기근, 그리고 이듬해의 지독한 전염병으로 사회적으로 어수전한 상태였다.
(도8)[십자가에서 내리심]No. 36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20. Lamentation (The Mourning of Christ)
1304-06, Fresco, 200 x 185 cm
Cappella Scrovegni (Arena Chapel), Pad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