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도자기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서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시기로 이시대의 문화는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신라토기는 신라 영역내에서 출토되는 회청색의 경질토기와 적갈색의 연질토기를 가리킨다. 토기의 형태로는 목이 길거나 짧은 항아리와 굽다리접시가 기목항아리는 가야토기가 곡선미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목과 어깨의 이음새가 각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고, 굽다리접시는 대체로 굽이 날씬하다.
그리고 가야토기와 구별되는 보다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가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굽에 나 있는 구멍으로 가야토기는 아래위 일렬로 배치되는 경향이 많은데 비해, 신라토기는 네모난 구멍을 서로 엇갈리게 뚫은 것이 많다.
또한 가야토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토우장식토기와 상형토기가 신라토기에도 많으나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뚜껑에 동물이나 인물을 조그맣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 신라토기만의 특징이다.
가야토기 562년 대가야의 멸망이후 가야지역은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급격히 신라문화를 수용하게 된다. 신라의 지방제도인 군(郡),성(城),촌(村)으로 편제되고 신라양식의 토기와 굴식돌방무덤이 유행한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어 갈 무렵 가야의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토기들은 신라양식으로 완전히 통일되면서 같은 토기문화로 바뀌어 간다.
통일기양식토기란 6-7세기경 신라가 자신의 영역으로 넓힌 한강이남과 강원도지역 및 가야의 전 지역에 걸쳐 출토되는 같은 모양과 세트의 토기를 말한다. 이 토기들은 굽다리가 짧고 무늬도 단순하며 규격화된 같은 모양을 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껴묻히는 양상도 비슷하여 낮은굽다리접시와 목꺾인항아리를 주된 조합으로 하여 출토된다.
백제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나 원삼국시대의 회색토기(와질토기) 등을 만드는 전통적인 제작방법의 바탕 위세 낙랑(樂浪)과 고구려의 토기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이룩하여 고구려,신라와는 구별되는 토기공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제토기는 중국의 한나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 전후 원삼국시대부터 경질토기의 제작이 이루어졌고, 금강이남 지역은 가야와 신라의 영향을 받아 가야.신라식 토기가 만들어진다.
백제토기는 색상 및 경도에 따라 적갈색연질토기, 회색토기, 회청색 경질토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적갈색 연질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에서부터 발전 변화해 온 것으로 바탕흙이 거칠고 질이 좋지 않으며 화분모양의 그룻이 비교적 많으며 대체로 두드림 수법에 의한 삿무늬가 많이 남아있다. 회색토기는 백제토기부터 말기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경도는 다소 약하고 흡수성이 강하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위 토기보다는 약간 늦게 나타나지만 1000oc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진 토기로써, 금강이남지역세서는 형태적으로 가야토기와 비슷한 기종도 있다.
백제의 도기
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 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기에 나타난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器臺)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 복원작 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 라 할 수 있다.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 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선진적이었다.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施釉術)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陶瓷器)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다. 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것 말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다.
고구려는 지리상 북방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독특한 창조력과 강인한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 배부른 단지, 갚은 바리모양이 대표적인데 대부분 납작밑이다. 서기 3세기 이전, 초기단계에는 모래섞인 바탕흙으로 빚은 어두운 갈색 또는 검은색 토기 등이 있고, 그릇형태로는 단지, 항아리. 잔이 있다.
중기인 4-5세기 경에는 고운 점토질로 제작되며 회색, 황갈색에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있으며 병, 독, 뚜껑있는 대접, 손잡이 달린 잔, 솥, 화덕 등의 실용품이 있다. 또 한 6세기 이후에는 더욱 다양해져 벼루, 베게, 등이 출토 되었는데, 도자기처럼 유약이 발려 지기도 하였다.
고구려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사이호 四耳壺), 배부른 단지, 깊은바리, 시루가 대표적인데 거의 납작밑(평저 平底)이다. 고구려 토기는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물레를 써서 만들고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회색,황갈색,검은색을 띠며 토기의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베풀어지거나 마연한 암문(暗文)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구려토기는 실견할 수 없어 그 윤곽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기존 유물에 대한 연구 또한 부진하여 삼국 가운데서 가장 모호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지만 몇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
① 토기에는 연질 종류와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가 있다. 항아리 종류가 많으며 어깨에는 네 귀가 달리고 간단한몇 줄의 횡선이나 점렬이 시문된다.
② 중국의 영향은 받은 연유가 시유된 황갈유 도기가 있다.
③ 기형은 다양하며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여 항아리가 많고 아가리는 넓고 밖으로 벌어지며 밑은
편평하다.
④ 무늬는 돗자리무늬나 타날무늬 계통은 거의 없고 항아리 어깨부분에 무늬대를 만들고 간단한 물결무늬,
톱니무늬, 노끈무늬 등이 음각되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계가 깊은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도 발견되었다.
6세기 중엽이후 (진흥왕대)에 고구려, 백제의 돌방무덤이 경주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짧은 다리에 넓은 굽이 달려 있고 네모,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유개합 有蓋盒)이 나타나는 것이다. 통일신라토기의 특징은 도장무늬로그릇에 도장무늬를 찍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나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도장무늬만으로 그릇의 표면을 장식하고 굽다리가 낮아지는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의 구멍 뚫린 높은 굽다리는 진흥왕 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하고 굽다리의 구멍도 작아진다.그리고 그릇의 표면에 녹색 유약을 바르는 녹유(연유)토기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토기들을 통일신라의 토기와 구분하여 통일양식의 토기라고 부른다.
통일신라의 도자기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는 불교문화가 그 중심이며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구현한 불국사, 석굴암이 그 대표라 하겠다. 이밖에도 상원사종과 봉덕사종은 공예기술에서뿐만 아니라, 소리의 극치라는 점에서도 공예문화는 절정기에 이른다. 도자기공예에서도 여러가지 변화와 발전을 보인다.
통일신라신대의 토기는 몇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① 횡혈식 석실분토기가 연구의 대상이 되며 통일 전기양식을 대표한다.
② 통일 이후 왕들이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는 화장법을 사용했으므로, 장골용기로서의 뼈항아리(골호骨壺)에대한 연구이다. (뼈항아리는 시대에 따라 형식의 변화가 비교적 뚜렷하다.)
③ 생활용기로 1975~76년에
발굴한 안압지 출토유물과 대중12(858)년 명토기편이 출토된 미륵사지 출토
토기로 알수 있다.
④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생산했던 가마터 출토 토기편에 대한 조사이다.
▶ 무덤 출토 토기
경주지방에서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 무덤인 석실무덤이 조사된 예로 충효동 무덤 10기, 서악동 석실무덤, 정래동 방형무덤, 장산 토우총, 황성동 무덤등이 있다. 경주 이외의 지역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에 속하는 울릉도에 20여 기의 무덤이 있다. 석실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를 종류별로 보면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 뚜껑있는 합, 완, 울릉도 천부동 출토 토기 등이 있다. 신라시대의 석실무덤은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사실상 석실무덤으로부터 출토된 토기의 변천 과정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어렵다. 뼈항아리 뼈항아리는 불교식으로 화장을 한 후 그 재를 담는 장골용기이다. 통일신라의 뼈항아리는 대체로 기형, 무늬, 제작 기법등으로 미루어 보아 다음과 같이 3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형식 :
통일신라 초기의 뼈항아리로 삼국시대 양식이 많이 남아 있으며 탑모양뼈항아리, 각선무늬뼈항아리
돌대무늬뼈항아리등이 이에 속한다. 이형식은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많이 유행되었다.
제2형식 : 8세기에
유행한 각종 인화무늬뼈항아리를 말한다. 8세기의 통일신라는 조각, 공예, 건축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 준 시기이다. 뼈항아리 표면이 더욱 화려
정교하여져 역시 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인화무늬 뼈항아리에는 황갈 혹은 황록의 연유계통의 유약 쓰여진
예가 많다.
제3형식 : 대체로 9세기에 유행한 뼈항아리로 인화무늬는
사라지고 민무늬가 되며 뚜껑에는 돌대선이
부착되는 경우도 있으나 뚜껑과 몸에 1~2줄의 음각 횡선이 돌려지는 것이 특색이다.
▶ 생활용기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용기에 대해서는 안압지 출토 토기편, 미륵사지 출토 토기편, 그리고 최근발견되고 있는 경주 월성 해자 부근 건물자리에서 출토된 토기편 등을 들 수 있다. 안압지(雁鴨池) 임해전의 정원이었던 안압지의 발굴은 통일신라의 일상용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안압지 출토 토기의 특징과 종류를 보면, 태토는 정선된 흙을 사용했으며 대체로 소성 온도가 높은 흑회색의 석기질이고 표면장식은 음각무늬, 인화무늬, 그리고 민무늬 등의 종류가 있다. 기형의로는 굽다리접시, 사발, 접시, 항아리, 병, 등잔, 벼루등의 생활용기가 대부분이다. 통일신라말이 되면 도장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어지고 입큰병 등 청자와 유사한 것들이 주로 제작되어 고려토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고려의 도자기
청자토기에서 자기로의 이행은 커다란 혁신이었다.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만드는 바탕흙이 점토에서 자질(磁質 ,白土)로 바뀌고 유약은 회유(灰釉) 대신 장석계 유약이 쓰이게
된다. 또한 높은 온도로 환원염 번조를 하기 위한 등요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반여건들은 이미 통일 신라말에 축적되었으며 그런 기반 위에 중국 청자 기술의 영향을 받아서 9세기 중엽 이후 청자가
만들어지게 된다.
고려청자는 주로 서남 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가마에서 만들어 졌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 많은 가마가
밀집되어있다.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은 청자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부안에서는 청자뿐 아니라 세련된 고려백자도 다량
출토되었다. 이 두가마에서 생산된 청자는 양질(良質) 청자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양질 청자는 정선된 바탕흙에 비취색의 유약을 입힌 청자로서 초기에는 중국 당 오대 송나라의 도자기나 금속
그릇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 절강성의 월주요 청자의 푸른 유약색과 장식 의 섬세성 월주요 청자의 인각부조를 모방한 반양각무늬 하북성 정요와 자주요의 문양이나 기형등과 유사한 양식이 고려청자에도
나타난다. 양질 청자 가마는 전라도 강진, 부안외에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충남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양질 청자에 비해 인천시 북구 경서동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는 '녹청자'로 불리는 거친 청자도
제작되었다. 이것은 통일 신라시대의 토기 바탕흙을 정선하여 그 위에 고화도의 회유를 입힌 것으로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띤다. 녹청자는 통일 신라시대 말부터 지방 수요층을 대상으로 하여 지방가마에서
구워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청자로 평가되는 것은 색깔 형태 문양 등이 매우 아릅답고 제작기법이 정교한 양질
청자이다. 양질청자는 초기에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2세기부터는 고려적인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를 지니게
된다. 11세기말에서 2세기 전반에 걸쳐서는 이러한 특징을 갖춘 상형청자(象形靑磁 동물이나 식물및 인물모양의 청자)가 널리
제작된다. 이처럼 다양하고 세련된 기형을 지니면서 푸른색의 유약은 광택이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을 띠게
된다.
기형과 유약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고려자기를 대표하는 상감청자가
등장하게 된다. 상감기법은 처음에는 나전칠기와 금속공예에 사용되던 기법으로서 고려사기장인의 창의에 의해 최초로 고려도자기에
이 기법이 응용된 것이다. 상감청자의 출현으로 고려청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 하였고 유약은 얇고 투명해져서 파르스름한 유약을 통해 상감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청자는 대체로 아무 무늬도 없는 소문이거나 음각 양각 투각퇴화 등의 무늬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12세기전반기에 상감무늬가 나타난 이후에는 상감청자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진사채가 곁들여 지기도
하였다. 무늬의 소재는 연당초, 모란당초, 운학, 포류수금
등이다. 또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릇모양으로는 표주박모양병 주전자.참외모양 병,향로,탁잔,꽃병, 매병,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정병, 연적 등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용기인 대접접시 등이
있다. 고려자기는 동양 도자사에서 매우 독자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231년 몽고의 칩입이후부터 쇠퇴하여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로
계승된다.
▶ 순청자
순청자는 상감이나 다른 물질에 의한 장식무늬가 들어가지 않는 청자를
말한다. 음각,양각,투각기법으로 장식된 청자들과 동,식물 등을 모방해 만든
상형청자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순청자는 고려시대초기부터 점차로 세련되어 12세기초에는 그 정점에 이르며 12세기 중엽이후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때에도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 절정기인 12세기 초 중기의 순청자는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었으며 유약속에 작은 기포가 가득차 있어 반투명하며, 이러한 유약과 바탕흙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표면이 비취색이라고도 일컫는 청록색을 띠며 유약에는 빙렬이
없다. 또 경직된 윤곽선을 지닌 중국 고동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부드러운 선을 띠는 단정한 고려적인 형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 상감청자
청자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을 상감청자라 한다. 상감청자란 바탕흙으로 그릇모양을 만들고 그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나 글자 등을 파낸 뒤 그 패인 홈을 회색의 청자 바탕흙 또는 다른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표면을
고른 후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운 청자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구워내면 회색을 바탕으로 흑,백의문양이 선명하게 돋보이게
된다.
상감기법에는 정상감과 역상감의 두가지가 있다. 정상감은 앞에 이야기 한방법으로 상감무늬를
나타낸 것이며 역상감은 이와 반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외의 여백을 파고 백토나 자토로 상감하는 방법이다. 상감기법은 청공기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처럼 도자기에 상감한 것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이다.
고려시대 청자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대략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가장 세련미를 보인 시기는 12세기
중엽무렵이다. 특히 1159년에 죽은 문공유의 무덤에서 출토된 상감청자는 정교한 기법과 짜임새 있는 문양의 구도 맑고 투명한
유약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절정기 상감청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감청자는 1231년 몽고 침입이후 서서히 퇴락하여 문양이 도식화 되어
버린다. 고려말에는 보다 간편하게 무늬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늬를 찍어내는 인화기법까지
생겨났다. 상감청자의 인화기법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게
된다.
▶ 철화청자
고려청자의 일종으로 청자 바탕흙으로 그릇을 빚고 표면에 흑색의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한 안료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위에 청자 유약을 입혀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환원염 번조의 고려청자와 는 달리 대개 산화염 번조였기 때문에 일부의 예를 제외하고는 황갈색인 경우가
많다. 또 대개의 경우 유약이 얇고 바탕흙속에 모래 등의 불순물이 섞인 것이 많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다. 철화청자는 중국 송, 원나라의 자주요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1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번조 수법이나 기형 문양에서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말까지 계속된다.
초기의 청화청자는 조그만 접시나 바래기 등의 안쪽면 사방에
세로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성기(盛期)에는 병종류에 당초무늬를 주로 하여 모란 무늬, 이형 초목무늬, 새무늬, 버들무늬, 시명 등이 그려지며 말기에는 간단한 당초무늬가
그려진다. 그릇모양은 매병과 광구장경병 주전자, 기름병 등이 많으며 발색이나 문양 등에도 전형적인 고려청자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드물게 중국의 매병모양이지만 무늬가 간결하고 필티가 활달하거나 아니면 중국적인 문양이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구도에서 고려적인 특징이 엿보이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