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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 (영어:Fourth Crusade,1202- 1204년) 전쟁

작성자jssuh7857|작성시간26.06.20|조회수32 목록 댓글 0

제4차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영어:Fourth Crusade,1202- 1204년)은교황 인노 첸시오 3세 의 촉구로 소집된   라틴 크리스토교 의 무장 원정이다.

원정의 공식 목적은   이슬람교 의 본거지인  이집트   아이유브 술탄국  을 격파해 무슬림 지배하의   예루살렘 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신앙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사건들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1202년   자리에 이어  1204년 

이슬람이 아닌  콘스탄티노플리스 를 약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베네치아 공화국 이 개입한 이 십자군은

1204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를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이 도시를 유린했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약탈과 파괴는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을 낳았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는 십자군을 막을 충분한 병력과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도는 고전을 면키 어려웠다.

베네치아 인들은 범선 위에서 해안가 쪽 성벽에 가교를 내려 성 내로 진입할 계획을 짰으나, 프랑크인들은 이를 두려워해 거부했고,

결국 십자군들 중 베네치아인들은 금각만 쪽에서 도시를 공략하고, 프랑크인들은 육지 쪽에서 도시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크인들은 좀처럼 성벽을 넘지 못했고, 베네치아인들은 성벽을 넘어 도시로 침입하는데 성공했으나

바랑인 친위대를 앞세운 동로마 측의 반격에 격퇴되어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심지어 육지 쪽의 십자군은 맞싸우러 달려나온 압도적인 수의 동로마 군대에 자포자기하여,

모든 비전투원을 비정규군으로서 앞세워 최후의 일전을 치를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알렉시우스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수비군을 물렸는데,

아마 금각만 쪽 해안가에서의 패배로 인해 성 밖에서 십자군을 상대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를 패배로 받아들인 동로마인들은 황제에 대해 격렬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에 놀란 알렉시우스 3세는 엄청난 재물을 챙겨 도망갔고,

콘스탄티노플 측에서 알렉시우스 4세를 맞이함으로써 십자군은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십자군 측은 좀더 높은 곳에서 가교를 내림과 더불어, 탑 하나에 두 개의 가교를 동시에 놓는 작전을 구상하고 다시 공성에 들어갔다. 탑에 설치한 가교를 통해 쳐들어오는 십자군 병사들을 동로마 측은 잘 막아냈으나, 한 개의 탑에 진입했던 한 프랑스 기사가 동로마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자, 그가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 생각한 탑 내의 수비군이 모조리 도망치면서 탑은 십자군에게 점령되었다. 탑에 깃발이 들어선 것을 본 십자군은 크게 고무되었고, 일부 십자군이 성벽에 구멍을 내고 진입하는데 성공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어, 동로마군은 모조리 도망치기 시작했고 십자군은 도시 내로 거침없이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알렉시우스 5세는 이에 저항해보았으나 이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트라키아로 도망쳤고, 동로마 측에서는 저항을 포기하고 십자군 영주들을 새 황제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은 오랜 성 밖 생활로 굶주리고 지쳐있었으며, 동로마인들에 대해 격렬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결국 도시에서는 십자군에 의한 무시무시한 대 학살과 화재, 그리고 끔찍한 대 약탈행위가 자행되었다. 곳곳에서 신성모독이 자행되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과 예술작품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프랑크군이 파괴적인 약탈을 저지르는 동안 베네치아인들은 보물을 자신들의 도시로 빼돌렸다. 이때 네 마리의 청동 마상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제4차 성지탈환 십자군은 1198년 8월 15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십자군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하며 시작되었다.

4차 십자군은 무슬림 치하에 놓인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정교회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뜻밖의 결과와 함께 종결되었다.

4차 십자군 원정 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의 동로마 제국의 옛 영토에는 라틴 제국이 건설되었고

십자군의 일원인 베네치아도 여러 거점을 확보하였다.

십자군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망명정부 역할을 한 니케아 제국트라페준타 제국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등이 들어섰다.

이 중 니케아제국이 다른 세력들을 물리치고 60여 년 만인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수복하며 동로마 제국이 재건되었다.

국내 세계사 교육과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의 농간으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고

괴뢰국가 라틴 제국이 성립됐다‘라고 축약된 내용만 등장한다.

 

2. 배경[2.1.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

 

한때 레반트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 이집트 등을 위협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은 비참했다

. 영토는 아크레 등의 해안지대로 쪼그라 들어 이슬람의 바다속에 고립된 상황이었고,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본거지와 그 주변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마누일 1세 시절 혼인 동맹 등으로 이끌어낸 동로마 제국의 지원도 헛되이 날려버렸고

동로마 제국의 상황도 악화되면서 더 이상 지원을 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얼마 전 제3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대규모 지원이 있었음에도 다시 서유럽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2. 동로마 제국의 상황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갈등을 빚었던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을 보다 못해

동생을 끌어내리고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3세가 황제였으나,

이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찬탈과 이사키오스 2세의 등극으로 내부 상황은 물론 외교까지 파탄 나버린 상황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가 필사적으로 수습한 끝에 제국은 간신히 안정되어 가고 있었으나,

이미 하인리히 6세의 협박에 굴할 정도로 국방력이 망가진 제국은

십자군의 결성을 지켜보며 그저 자신들이 마지막까지 보전하고 있던 부(富)와 쪼그라든 영토에 불똥이 튀지 않게 처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과 라틴인 학살로 인해

서방에서 동로마의 이미지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고, 서방인들은 동로마를 불신하며 언제든지 칼을 겨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2.3.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상황

1198년 1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노첸시오 3세는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전임 교황인 첼레스티노 3세는 막강한 하인리히 6세에게 짓눌려 힘겨운 임기를 보냈으나,

인노첸시오 3세에게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하인리히 6세의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섭정이 되는 등 행운이 따라주었다.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독일왕 슈바벤의 필리프는 이탈리아 전역을 다시 확보하고 싶었지만,

막 제위에 오른 데다 대관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그 대관식을 치러줄 교황이 시칠리아 왕국을 등에 업고 있었으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크리스토교 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 군주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뿐더러 자신의 명예도 높일 기회가 찾아왔다.

빈사 상태의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 회복을 외치며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 회복은 전임 교황이 이루지 못한 일이었기에 야심많은 교황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2.4.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

제3차 십자군 원정 때 프리드리히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으나, 본인의 죽음으로 원정을 망쳐버렸다.

뒤를 이은 장남 하인리히 6세는 아버지가 확보하지 못했던 상징적인 땅,

이탈리아를 확보하여 진정한 '로마 제국'으로서 유럽 세계를 주도하고자 했고

실제로 군사력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을 붕괴시키고 황후를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자로 만듬으로써 이를 실현하였다.

 

야심많은 황제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동생과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질녀인 이리니 앙겔리나와 결혼시켰으며,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비라며 동로마에 조공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황제는 1197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불과 3살에 불과하여 그의 후계자 선출을 두고 제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숙부 슈바벤의 필리프가 후임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타협책으로 선출된 그의 황권은 미약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벨프 가문의 오토 4세 또한 반 호엔슈타우펜 제후들,

교황,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하게 제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제국 내부가 혼란스러워지자 십자군 원정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2.5. 프랑스 왕국잉글랜드의 상황

두 왕국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때의 주요한 참가국이었으나, 이번에는 참가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서부 일대에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명목상의 상위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특히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필리프 2세는 주변의 백안시에도 불구하고 3차 십자군 원정 도중에 귀국,

아직 원정 중이던 리처드 1세와 왕세제인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한때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계획이 무산되는 듯하였으나,

1199년 리처드가 어이없게 사망하여 존 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기회로 삼아 1202년부터 전쟁을 벌여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준비 기간은 1198년~1202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양국의 왕들은 원정 참여가 불가능했다.

 

2.6.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황

베네치아는 당시 막강한 부와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알짜배기 강국이었다.

 바실리오스 2세알렉시오스 1세 등 동로마 황제들에게 해군력을 지원해 준 대가로 통상 특혜를 부여받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으로 엄청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고,

한때 상업 공화국으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제노바 공화국피사 공화국아말피 공화국리보르노안코나 공화국 등 경쟁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발판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들은 동로마 측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한 항로와 거점, 상품 등을 쥔 동로마와의 관계도 문제였다.

막강한 부와 해군력을 가진 베네치아는 요안니스 2세의 치세에 해군력으로 동로마 측을 곤란하게 했었으나 

상업 활동 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1171년~1172년간의 해전에서는 재건된 동로마 해군에게 패퇴당했다.

 

이후 1185년~1186년에 해군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다시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업 활동을 지속하고 투자도 재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내심 자신들의 생명선인 상업 활동을 좌우할 수 있는 제국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태생이 해운 도시 국가였기에 타국에 대해 해군력과 자금력 이외의 강제력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력의 근간인 상업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딱히 적대하지를 않고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태도를 십자군 전쟁 시기동안 취했다.

때문에 베네치아 측은 1198년 교황이 4차 원정을 위한 십자군을 외칠 때

동년 동로마 제국 측과 통상 조약 갱신을 알렉시오스 3세의 금인칙서를 통해 확인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서유럽 영주들의 십자군의 수송을 1201년에 받아들였고

이집트를 목적지로 1202년 6월 24일경에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1202년 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알 아딜과 통상 조약을 맺었다.

즉,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서는 양다리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님'이 빚쟁이가 되자, 이후 베네치아는 칼자루를 쥐게 된다.

 

3. 준비

3.1. 모집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회복을 외치며 조서를 발하였다.

그러나 유럽 군주들의 상황이 원정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고,

가장 열성적으로 많은 것을 투자한 리처드 1세 등 2, 3차 원정 참가자들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기에 반응은 차가웠다.

교회가 가라는 대로 가봤자 돈과 인력을 날리고 이득도 못 건질 텐데 왜 가겠는가?

그러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꾸준히 선동을 펼쳤고,

결국 프랑스계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어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상파뉴, 블루아, 아미앵,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 프랑스 동북부계가 주축이 되었고,

추가로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가 신임 사령관이 되면서 몬페라토도 합류하게 되었다.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 보병 2만 등 약 33,500명의 대병력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교황은 기뻐하며 대사, 은사 등을 약속하였다.

십자군 인사들의 회의를 통해, 목표는 아이유브 왕조의 근거지인 이집트가 되었다.

성지 회복을 타이틀로 내걸었으나 성지를 회복하더라도 가까운 이집트에 적의 근거지를 둔다면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고,

또 부유한 이집트는 많은 전리품을 약속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동 경로로는 해로가 채택되었다.

이전까지의 원정을 돌이켜 봤을 때 육로원정은 각종 위험과 원정로 상의 현지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해로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이처럼, 과거의 십자군 규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학습을 통해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원정이 계획 되었다.

그러나 해로를 택하고 보니 탈 배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자체적인 함대가 없었기에 해군력이 강력한 해운 상업 공화국들이 물망에 올랐는데, 제노바 공화국이 이를 거절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하게 되었다.

 

십자군 인사들은 1201년 5월에 베네치아를 방문해 엔리코 단돌로 베네치아 도제를 만나 협상하였다.

33,500명의 병력을 이집트로 실어다 주고 9개월 분량의 보급을 책임지는 대신,

은화 8만 5천 마르크와 점령지의 영토 일부를 대가로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베네치아 측은 상업활동을 축소하면서까지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고 500여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갖췄다.

 

3.2. 돈이 없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인 1202년 6월이 되어도 집결한 병력이 부족하자 문제가 되었다.

원정군 전체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물론,

수송비를 십자군 영주들 각각이 내는 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10월이 되기까지 십자군 지휘부는 집결을 기다렸는데, 그럼에도 당초 예정의 절반에 못 미치는 1만 2천여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협상 당시 허세를 부려서인지 실제로 영주들의 사정이 악화되었던지 간에

전체적으로 비협조적인 분위기로 인해 병력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 운송사업에 거의 국운을 걸다시피 준비를 했다.

1201년 4월에 십자군과 채결한 협정에 의하면 베네치아가 준비해야 하는 선단은

화물 수송선(군마 4,500필, 종자 9천 명) 및 범선(기사 4,500명 및 보병 2만 명) 외에

추가로 베네치아 정부의 비용으로 운영하는 5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되었다.

 

선단의 구체적인 규모는 정확한 사료가 없어 조금씩 추산이 달라지나 최소 200척에서 480척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냐면 이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추진한 7, 8차 십자군 당시 준비된 수송선단이 각각 36척, 39척 정도이다.

베네치아가 준비한 선단에는 선원 1만 4천 명이 필요한데 이 수치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성인 남성의 반에 해당되었다.

선단을 꾸리는 작업은 베네치아의 재정 및 상업 활동 전체를 1년 이상 동결시켜야 하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공화국의 지도자인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선박의 상업활동을 18개월간 중단시키는 한편

해외에 나가있는 선박을 귀환시켰다.

 여기에 십자군과 선원을 먹여살릴 식량 조달 등 부수적인 간접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사업이 나가리 된다면 베네치아의 국운이 휘청거릴 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병력 집결이 당초 계획보다 저조하면서 출항이 기약도 없이 지지부진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손해는 눈덩이 마냥 불어났고 지도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장 초창기 프랑크군이 운송비 대금으로 요구받은 금액은 84000 쾰른 마르크였다.

이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 왕실 수입의 2배에 해당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병력 집결이 지지부진하여 십자군은 자산을 파는 등 돈을 쥐어짰으나 5만 1천여 마르크밖에 모으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십자군 측은 예루살렘은커녕 출항 한번 해보기도 전에 파산으로 해산될 위기에 처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둘 다 궁지에 몰린 이런 기막힌 상황 속에서 베네치아 측은 8월경 십자군에 타개책을 제안하게 된다. 

바로 다른 크리스토교 국가들을 약탈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3.3. 헝가리 보호령, 자라 습격 계획 채택

당시 헝가리 보호령이자 달마티아 해안의 항구도시 자라를 공격하여 부족한 돈을 충당하고, 또 부족한 돈을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십자군 측은 놀고 있는 대병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었으며

베네치아 측은 헝가리 왕의 보호를 받는 데다가 지상 전력이 부족하여 공략하기 곤란한, 요충지의 경쟁 도시를 이참에 제거해서 좋았다.

물론 '십자군'이라는 공개적인 간판을 내세운 주제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같은크리스토교계 도시를 약탈한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개막장 행위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이 떠나기도 하였으나

결국 9월이 되어 베네치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은 집결을 기다린 끝에 10월 8일 출발하였다.

 

4. 진행

4.1. 자라 공략

(1202년 11월 10일~23일)
한 달여의 항해 끝에 1202년 11월 10일, 십자군은 자라에 도착하였다.

복잡한 해안선과 절벽 등 험한 지세가 지휘부를 난감케 했지만,

성벽에 걸린 십자가와 같은 크리스토교인들을 공격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을 쫓아온 교황 특사의 맹비난이 더욱 공격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출병해야 했고, 출병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베네치아 측이 이집트의 해안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한 특수 상륙선을 동원한 끝에

11월 23일, 자라를 함락시켰고 흥분한 십자군은 신나게 약탈을 벌여 필요한 돈을 충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과 영주들만이 전리품을 차지했고

일반 기사나 병사들에게는 전리품이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격분했다.

자라는 엄연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교황인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십자군이 같은 크리스토교계,

그것도 엄연한 가톨릭 도시를 공격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자 교황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라의 보호자인 헝가리 측도 교황에게 파문을 요구하자,

교황은 결국 얼마 전에 대사·은사를 내린 십자군은 물론 공범인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파문을 날렸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측이 반발하며 필사적인 통사정을 하였으나 교황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십자군은 해체되지 않았다.

교황의 서신은 십자군 지도부에 의해 은폐되었고

대신 십자군에 참전한 일선 성직자들이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명백한 월권 행위였지만 이미 십자군 지도부는 돈의 맛을 본 상황이었다.

이제부터는 교황의 통제력이 전혀 듣질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4.2. 뜻밖의 제안

자라를 함락시킨 십자군이 월동 중이던 겨울,

십자군 지휘부와 동로마 제국의 폐위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접선했다.

당시 독일왕 슈바벤의 필리프의 협조 속에 십자군 인사들과 만난 알렉시오스는

아버지와 자신의 제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했으며 대가로 엄청난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다음과 같다.


제위를 되찾아 달라는 요청은 곧 중세 유럽 최대의 도시이자 난공불락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이라는 엄청난 요구였지만

대가 역시 엄청났다.

당시 동로마 제국과 공조하던 교황 측은 이미 이 황당한 제안을 거부한 상황이었으나,

물자도 부족했고 병력 부족으로 이집트 원정을 고민하고 있던 십자군 측은

사령관 몬페라토 변경백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더해져 승낙하고 만다.

베네치아 측 역시 이를 환영했다.

일단 성공하면 손해를 더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이 허약해진 틈에 친 베네치아적인 인물을 제위에 올리고

특혜를 얻어 경쟁자들과의 차이를 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해 관계가 얽힌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연합군은 1203년 4월 자라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황자는 디라히온과 코르푸에서 지지자들과 연합군의 도움으로 알렉시오스 4세로 추대되었다.

 

4.3.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

(1203년 6월 24~8월 1일)


본래 출정일이었던 1202년 6월 24일 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의 대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그 목적 역시 저지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이미 해군이 붕괴해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을 지원받던 동로마 측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측의 입장에서는 금인칙서를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십자군의 방아쇠를 당긴 교황청 측에서 알렉시오스 황자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 언질을 해주었기에

십자군의 침공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한 달 전 즈음인 1203년 5월에서야 알렉시오스 4세라며 디라히온에서 떠들어 댔는데,

디라히온에서 수도까지는 직선으로도 800km 가까이 거리가 있었다.

당시의 통신 기술을 생각해 보면 동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날벼락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칼케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방비가 갖춰져 있어서 결국 교두보 확보에 실패했고,

소규모지만 요격군이 나타나 배후를 위협하자 이를 격퇴시킨 연합군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일면을 차지하는 금각만 너머의 갈라타를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갈라타 공략을 위해서는 금각만을 막고 있는 쇠사슬을 끊는 것이 우선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쇠사슬을 지키기 위해 이를 관리하는 망루를 수비했는데 결국 전투 끝에 물러났고,

갈라타 지구가 점령되면서 금각만과 도시 북쪽 6km에 달하는 지역이 위험에 노출되어버렸다.

그리고 금각만 방향에서 연합군 육해군이 공격하는 공성전이 개시되었다.

7월 11일, 십자군은 도시 북서쪽 끝에 있는 블라케르나이 궁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알렉시오스 4세가 성벽 밖에서 행진하며 모습을 드러냈으나, 시민들은 무관심했다.

 

서방인들의 눈에 알렉시오스 3세는 찬탈자이자 불법적인 통치자였으나, 비잔티움 시민들에게는 수용 가능한 황제였기 때문이다.

1차 공격이 있었으나 격퇴되었고 본격적인 공성전은 7월 17일에 시작되었다.

4개 사단이 육벽을 공격하는 동안 베네치아 함대는 금각만 해벽을 공격했다.

베네치아군은 약 25개의 망루가 포함된 성벽 구역을 점령했으나, 육벽에서는 바랑인 친위대가 십자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직접 지휘하는 등 공방전은 격렬했다.

연합군 측의 상륙선을 동원한 공성 능력은 강력했으나,

난공불락의 성벽과 방어자로서 이점을 가진 동로마 측의 수비력이 이를 능가했다. 

엔리코 단돌로의 격려로 한때 25개의 망루를 점령하는 등 성공적으로 흘러 가는 듯했던 전투는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전 끝에 마지막에는 동로마 측으로 기울었다.

 

바랑인들이 새로운 위협(베네치아군)에 맞서기 위해 이동하자, 베네치아군은 불길을 방어막 삼아 퇴각했다.

화재는 3일간 지속되었고 도시의 약 440에이커(1.8km²)를 태웠으며 2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알렉시오스 3세는 마침내 성 로마노스 문을 통해 17개 사단을 이끌고 공세에 나섰으며, 이는 십자군을 수적으로 압도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알렉시오스 3세의 약 8,500명 군대는 십자군의 7개 사단(약 3,500명)과 마주했으나,

(호니아티스와 라틴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용기는 꺾였고 동로마군은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도시로 복귀했다.

이렇게 아무런 전투도 없이 동로마군이 퇴각한 사이 연합군이 퇴각하면서 지른 불이 대화재로 번지면서

피해가 커져 영 모양새가 좋지 않게 되자, 이에 시민들이 황제를 비난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1203년 7월 18일 아침, 십자군이 도시 공격을 개시하자 악화된 여론을 두려워 한 알렉시오스 3세는

국고를 털어 바로 트라키아로 도주했다.

다음 날 아침, 십자군은 시민들이 감옥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를 석방하고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이사키오스 2세는 통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 눈이 멀게 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위된 것이다.

십자군은 8월 1일 이사키오스 2세가 그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도록 강요했으며, 이로써 공성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악화된 여론으로 인한 낮은 정권 지지율 탓인지 수도의 시민들은 과거 황제였던 이사키오스 2세와 연합군이 내세운

 알렉시오스 4세 부자를 공동 황제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어차피 부자가 공동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표면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고,

동로마 측은 일단 공격받을 여지가 없어서 좋았으며, 연합군 측은 맹인이 된 이사키오스 2세와는 달리

자신들이 추대한 알렉시오스 4세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었으므로 좋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전형적인 동로마 내전의 형식이라 그렇게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했다.(1203년 8월 1일)

 

4.4. 막간

아들덕에 제위를 되찾은 이사키오스 2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멍청한 아들이 다른 사람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감당치 못할 빚을 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 자신을 복위시켰으니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들어주기 어려웠다.

아무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십자군이 옹립한 황제와 그 정부는 고작 수도와 인근 지역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불과했으며

제국 국고를 들고 도주한 전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 밖에서 반격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력 파견은 불가능했고 교회 통합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였고

연합군 측도 가장 원했던 조건인 은 20만 마르크를 지불하려고 창고를 열어 재정 상태를 확인해 보니 아뿔싸, 돈이 없었다.

동지중해를 호령했던 마누일 1세 시절 같았으면 무제한으로 비유될 자금력과 마르지 않는 재정이 실재했겠으나,

이사키오스 스스로가 말아먹고 형이 비축금을 가지고 떠난 뒤였다. 자신도 빚쟁이였던 연합군 측은 체납에 짜증나서 닦달하였고,

이에 못 이긴 황제는 결국 세금을 추가로 물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마련하려 하였다.

 

돈을 긁어모으자 당연히 시민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교회는 재산이 침해되는 와중에 교회 통합에 대한 밀약까지 듣게 되어 분개했다.

게다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의해서 황제가 된 만큼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십자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돈을 추가로 약속하며 자신의 호위까지 맡겼고,

그를 통해 베네치아인이 정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니 귀족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다.

박박 긁어모았음에도 절반인 10만 마르크 정도밖에 못 마련한 것이다.

황제 부자는 일단 모은 10만 마르크를 라틴인들에게 지불하고,

 알렉시오스 4세는 상당한 자금과 병력을 가지고 수도 밖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알렉시오스 3세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동안 폭동이 터져서 수도에 거주하던 라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연합군 측은 보복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무슬림 지구를 목표로 공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시에 거주하던 수많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정교회인들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되거나 약탈당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민병대로 반격에 나서자 열세에 몰린 연합군은 도망치기 위해 불을 질렀고,

이것이  대화재로 번져 수일간 도시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고, 시민과 연합군 측의 갈등은 극심해져갔다.

알렉시오스 4세가 겨울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도시는 대화재와 폭동, 연합군의 약탈로 황폐해져 있었고

황제에 대한 불만은 살의에 이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던 알렉시오스 4세는 사태를 해결도 못 하고 공포에 질려 십자군의 호위하에 황궁에만 틀어박혀

그들에게 줄 돈만 모으는 지경이 되었고, 그런 황제 부자에게 크게 실망한 귀족과 시민들은 대립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버렸다.

그 와중에 프로토스파타리오스(Protospatarios)인 황제 신변 책임자 알렉시오스 두카스[18]가 시민들과 십자군, 황제 사이를 중계하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부자를 구금하는 일이 일어났다. 쿠데타 와중 이사키오스 2세가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고(1204년 1월 27일~28일), 대립 황제도 곧 제거되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2월 초에 스스로를 알렉시오스 5세로 선포하였다.

자신들이 옹립한 황제 부자를 실각시켰기 때문에 연합군(십자군)과 신황제(알렉시오스 5세)의 사이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알렉시오스 5세는 곧 군대를 모집하고 성벽을 수리하는 등 전투 준비를 서둘렀고, 이렇게 모은 군대로 연합군을 공격했다.

사태의 급진전에 연합군은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동로마 군을 역관광시켜 버린다. 

알렉시오스 5세는 1204년 2월 8일, 엔리코 단돌로 원수를 만나 협상하였으나 곧 결렬되었고,같은 날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되었다.

이에 분기탱천한 연합군 측은 재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은 휴식은 그렇게 끝났다.

 

4.5. 2차 공격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204년 4월 8일~4월 13일


다시 겨울을 세는 와중에도 회의감를 느끼고 탈주자가 이어졌던 십자군 측이었으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대표인 엔리코 단돌로가 연합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전리품 분배와 사후 계획 따위를 논하게 되었다.

십자군 측은 돈도 못 받고 성지 구경도 못하게 된 판이었으나,

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전리품을 얻고 빚도 갚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생각도 이때 굳어지게 되었다.

당초에는 계산 착오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탈선을 저질렀지만,

폭주하는 군사력을 주도하게 된 상황에서 본래 동로마에 대한 고민이 결합되자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게 되었다.

주요한 도시와 섬, 항구 등을 가지게 되면 각종 상품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항로도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 경쟁 상대를 동로마에서 쫓아내고 흑해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4월 8일, 9일의 이틀 동안 서전을 벌인 연합군은 생각보다 도시의 방어 태세가 단단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

연합측은 10일, 11일간 갈라타로 물러나 다시 본격적인 공성을 준비했다.

그 즈음 교황이 보낸 특사가 도착하여 크리스토교인의 도시를 공격하지 말라고,

 자라 공격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연합 측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반로마 감정과 전투에 흥분해 있던 연합 측은 전부 계약 불이행으로

동로마 측이 초래한 것이라며 특사를 쫓아버리고 최후의 공세를 가했다.


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시민들도 같이 저항하고 다시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으나, 한번 함락된 성벽은 1차 공격 때 만큼의 역할을 못 했다. 4월 12일이 되자 연합군은 성벽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고, 알렉시오스 5세는 저항 의지를 상실하여 다른 인사들과 함께 황도를 빠져나갔다. 그 와중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가 황제로 선포되었으나 바랑인 친위대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곧 연합군을 피해 탈출하였다. 그렇게 9백 년가량 이어져 오던 동로마의 찬란한 유산을 담은 성지이자 제 2의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상 최초로 기독교인의 손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4.6.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운명의 4월 13일, 성내를 살펴본 연합군은 방어군의 저항 의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동로마 측에서는 십자군 영주를 새 황제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군에는 약탈에 굶주리고 악에 받힌, 동로마인들을 증오하는 2만여의 군대가 관례대로 3일간의 약탈을 바라고 있었다.

지휘부 역시 22년 전 제위 찬탈 과정에서 무관한 서유럽인 수만 명을 학살한 동로마인들에 대한 보복심에다,

자신들을 엿먹인 동로마를 증오하며 약탈을 강하게 욕망하고 있었으므로 약탈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야말로 대약탈이 시작되었다.


눈에 띄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에 대해 파괴, 약탈, 방화가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은 약탈되었고 교황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소 역시 오물이 갈겨지고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녀노소, 귀족, 성직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행, 살해, 강간, 납치 등이 가해졌다.

 

소녀, 처녀, 유부녀는 물론 고귀한 귀족 여성들에 심지어 수녀들까지 끌려나와 능욕당하였다.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도 마찬가지였으며 황제들의 무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들이 끄집어 내져 부장품들이 약탈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조차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햅도몬 궁전에 안장되어 있던 바실리오스 2세의 묘역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길거리에 질질 끌려다녀지다가 내버려졌다.

 천여 년을 이어 오던 성당의 많은 성화들도 이교도가 그렸다고 하여 파괴되고 긁혀져 손상됐다.

그리고 새롭게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로 채워졌다가 나중에서야 탈환한 동로마인들이 이를 다시 지우고 그려야 했다.


3일간의 지옥이 구현된 끝에, 연합군은 은 90만 마르크에 달하는 전리품을 약탈해 본전을 넘어선 큰 수익을 벌었다.

남은 것은 수십 만의 시신과 난민, 폐허만 남은 도시였다. 가장 부유하고 유서 깊은 황제의 도시는 그렇게 몰락했다.

 

4.7. 십자군 국가들의 성립

4.7.1. 라틴 제국

베네치아 측에 3/8의 영토를 분배하고 나서, 나머지 5/8의 영토에는 자칭 "로마 땅의 제국(Imperium Romaniae)"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가 되었으며, 테살로니키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이 왕국과 공국으로 배분되었다.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가 제위를 바랐으나,

비교적 제국령에 가까운 영지를 가진 황제를 바라지 않았던 베네치아 측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를 밀어주었고,

5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러 보두앵 1세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크리스토교 국가들을 턴 인과응보가 왔는지,

보두앵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에게 패사하였고,

그 여파로 4차 십자군 병력은 대부분 날아가버리는, 썩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으며

라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빌빌대다가 의미없이 멸망하고 다시 로마 제국이 부활하게 된다.

 

4.7.2. 아테네 공국4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프랑스인 기사 오토 드 라 로슈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동로마의 영토를 나누어 아테네를 차지하면서 생긴 나라.

이후 1311년 해고된 카탈루냐 용병대가 아테네 공 발터가 이끄는 군대를 전멸시키고 1390년까지 아테네 공국을 지배했다.

 

 

4.7.3. 아카이아 공국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이 테살로니카 왕국의 지원을 받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세운 나라. 코운투라스의 올리브 숲 전투에서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끄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대를 격퇴하였고, 잇따라 독사파트리스, 레온 스구로스, 테오도로스 주교가 이끄는 동로마 잔존 세력을 토벌하여 향후 200년 동안 존속했다.

 

4.7.4. 테살로니카 왕국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지 못한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초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세운 왕국.

 아테네 공국과 아카이아 공국을 봉신으로 삼았으나,

건국 초부터 불가리아 차르국의 침공에 시달렸고 20년 만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4.8. 잔존국들의 성립

4.8.1. 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가문의 테오도로스 1세가 니케아로 탈출하여 세운 로마 제국의 잔존국이며, 

테오도로스 1세와 요안니스 3세라는 걸출한 명군이 등장하여 십자군 국가들과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여서 로마 제국의 정통 정부로 취급 받는다.

 

4.8.2. 트라페준타 제국

옛 콤니노스 왕조 출신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 공격받자 혼란을 틈타 차지한 근거지인 트레비존드에서 자립, 알렉시오스 1세로 칭제했다.

하지만 니케아 제국에 막혀 서쪽으로 더 세력을 키우지 못한 채 지역 소국에 머물렀고 훗날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

 

4.8.3.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옛 앙겔로스 왕조 출신으로 두카스 왕조의 외손인[22] 미하일 1세가 이피로스에서 자립하여 세운 잔존국이다.

초기에는 라틴 제국의 황제 피에르 1세를 생포해 옥사시키고 보니파시오 1세를 전사시켰으며 

테살로니카 왕국을 멸한 뒤 '테살로니카 제국'을 칭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코앞의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점령해 제국의 재건 직전까지 갔으나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크게 패해 세력이 약화된 이후

니케아 제국이 펠라고니아 전투를 통해 패권을 확립하면서 경쟁에서 밀려났다.

 

5. 결과

 

동로마 입장에서는 스스로 초래한 국가적 재앙이고 십자군 입장에서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복수극이다.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최전성기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한 신의 한 수.

같은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를 공격하면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4차 십자군은

뒤이어 알렉시오스 4세의 트롤링과 결합하여 동로마 제국의 권력 싸움에 개입,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는 라틴 제국을 세우고 정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업보였는지 곧장 이어진 불가리아와의 대립에서 탈탈 털리며 병력 대부분이 날아가버리는,

십자군 병력 자체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그나마 라틴 제국 자체는 명군인 앙리가 이으며 국체는 보존했고 이후에도 유능한 섭정들의 등장으로 간신히 버티다

결국 1261년에 니케아 제국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당하며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5.1. 동로마 멸망의 불씨

멸망 자체는 여러 원인이 겹친 결과지만,

그 모든 원인이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여기서부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황실과 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경제력도 박살나 다시는 전성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유럽과 동방 정교회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도 서유럽에서 제대로 된 지원이 오지 않았다.

 

 제국의 중심이었던 아나톨리아 땅을 거의 다 잃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무역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무너졌다.

 

5.2. 정교회와 가톨릭의 관계 파탄

1054년의 동서 대분열을 기점으로 4차 십자군 이전부터 동유럽과 서유럽(정교회와 가톨릭)은 사사건건 분쟁이 일어났다. 

민중 십자군의 깽판이나 1차 십자군 이후

 보에몽 1세와 동로마 간의 격돌, 동로마와 십자군 사이의 이해 관계 갈등까지

4차 십자군 이전에도 양 측 사이에는 수도 없이 많은 반목이 있었고,

 이사키오스 2세부터는 아예 서유럽을 무시하고 살라딘과 외교를 트며 서유럽을 엿먹이는 등 양 측의 관계는 끊임없이 삐걱거렸다.

그 와중에 정말 되돌릴 수 없는 관계 파탄을 만들어 낸 게 4차 십자군이다.

4차 십자군의 병크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많은 문화 유산들이 십자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오죽하면 250년 뒤인 1453년,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로마인들은 그래도 이들(오스만)은 250년 전에 단돌로가 이끈 십자가를 든 크리스토교 악마보단 낫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였다.

과장이 아니라 4차 십자군과 60년 뒤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의 정치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첨예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이 서방한테 신앙이고 뭐고 다 갖다 바친 다음 일단 살고 보자 vs 저 악마 같은 서방 새끼들한테 다시 의존하느니

차라리 이교도의 손에 긍지 있게 죽자'란 식의 친서방 vs 반서방파의 대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이 반서방파에는 에페소스의 주교 마르코스나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 같은

라틴 점령기 서방인들의 오만방자하고 폭압적인 모습에

아주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정교회 고위 성직자, 신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이러한 동로마 제국 내 반서방파들은 새로운 정복자들 또한 기본적으로 세금만 잘 바치고 충성만 하면 관용을 베풀 의향을 보이니 오스만 당국에 협조하여 오스만 제국이 비교적 연착륙하며

동로마 제국의 인구, 지정학적 기반, 국가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오스만 제국이 수백 년간 다양한 종교, 민족을 다스리면서도 국체를 유지할 기원이 될 밀레트 제도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상술한 제국 말기 대표적인 반서방파 신학자였던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가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한 신생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의 정교회 세계 총대주교로 취임한 이후

세계 총대주교가 그리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정교회 신민들을 모두 총괄하는, 오스만 제국의 행정 시스템 전체에서 봐도 굉장히 중요한

지위 중 하나로 그 위상을 유지했던 점만 봐도 이것이 정치적 차원에서 오스만 당국에게 있어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동로마 및 정교회에선 악마 중 악마로 악명을 남겼고,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정교회권에 광범위한 반서방 감정을 맹렬하게 일으켜 점차 지중해 세계 내의 독립된 정치 세력으로서 정교회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자 아예 정교회 내 반서방파와 피정복민의 종교적 자치를 존중하는 무슬림 정복자들 간의 새로운 커넥션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후일 동로마와 치고박고 싸우다 끝내 동로마를 멸망시켰던

오스만이 이슬람임에도 로마의 후예를 자처한 것 역시 이러한 기조에 포함된 일이었다.

5.2.1. 정말 정교회와 가톨릭이 관계가 파탄났나?

 

"4차 십자군 이후 동로마 사회 전체에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반라틴 정서가 형성되으며, 양측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났다"는 주장은 오늘날 학계에서 설득력을 잃은 주장이다. 

물론 니케아 등지로 망명한 일부 옛 동로마 엘리트들 사이에는 강한 반라틴 감정이 존재했다.

그러나 동시에 라틴 제국에 협력하거나 충성을 바친 동로마인들 역시 적지 않았으며,

특히 기존 동로마 체제에서 소외되어 있던 비주류 엘리트나 지방 세력가들까지 일괄적으로 반라틴 정서를 공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라틴 제국과 니케아 제국은 서로 혼인 동맹을 반복적으로 시도했으며,

이런 점을 감안하면 니케아 지배층 내부의 반라틴 의식 역시 단일하고 견고한 것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사회적 관계를 단순한 문명적 적대나 일관된 ‘라틴 혐오’로 환원해 해석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교황좌와의 교회 통합은 4차 십자군 후부터 동로마 멸망까지 꾸준히 거론되었다.

친서방(혹은 친서방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용외교의 일환으로 친서방 노선을 타는 이들)은 멸망하기 전까지도

동로마의 핵심 세력에 속했으며,

이른바 반라틴 정서란 라틴·가톨릭·서유럽 세계 전체에 대한 동로마의 보편적인 혐오라기보다는,

급진적 친라틴 노선과 동서교회 통합 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동로마의 정치·종교적 내부 갈등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동로마 사회 전반에 걸쳐 수세기 동안 지속된 강고한 반라틴 감정이 존재했다면,

친라틴 세력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서방 세계와의 외교·교류가 꾸준히 유지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미하일 8세요안니스 5세콘스탄티노스 11세, 그리고 총대주교 요시프 2세 등등

 동로마의 지도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오스만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교황에게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맞서싸우는 것을 택했다.

마찬가지로 일각의 설명처럼,

이러한 서방(라틴) 혐오 정서가 튀르크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었냐는 것도 이상한 주장이다.

상식선상에서 생각해 봐도 콘스탄티노플을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점만 놓고 본다면,

라틴 세력과 튀르크 세력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또한 동로마 내의 반라틴 성향이 무조건적으로 친튀르크 성향으로 전환되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동로마 사회가 라틴인에게만 200년 이상 일관된 적대감을 품은 반면,

튀르크 세력은 비교적 수용했다는 식의 서술은 대단한 역사적 지식이 없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애당초 반(反)튀르크 성향의 동로마 유민들은 대거 서방이나 다른 정교회 국가로 망명했고,

이주하지 못한 이들은 숙청되었다.

반무슬림파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오스만 충성파들조차 자신들의 처지를

'바빌론 유수'기 이스라엘 백성이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충성하는 다니엘', 혹은 '출애굽을 기다리는 이집트의 히브리인'에 비유했다.

이들은 오스만의 지배를 정상적인 정치 현실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동로마 스스로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로 받아들였다.

즉, 술탄에게 고개를 숙인 충성파들조차 그것이 비정상적인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나름의 정치적·종교적 정당화 논리를 필사적으로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결국 당시 동로마인들의 태도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이해관계, 지역 기반, 사회적 위치에 따라 크게 달랐으며,

후대에 강조된 ‘반라틴 감정’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서사적 구성의 산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차이는 라틴과 오스만 가운데 어느 쪽이 “내부화”되었는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로마 중심부는 서방 세계와의 교회 통합과 정치적 제휴를 반복적으로 추진하며 라틴 세계를 제국 질서 안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오스만 지배 아래에서는 중심부 자체가 붕괴한 뒤에도 친오스만성향으로 재구축된 중심부가

오스만을 어디까지나 외부의 통치 권력, 곧 신의 징벌을 수행하는 타자로 인식하는 경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인의 주교관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루카스 노타라스의 발언은

흔히 당시 동로마 내 반(反)라틴 감정의 확고한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야사에 가깝다.

실제로 노타라스는 교황청 및 서유럽과의 동맹을 통해 원군을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분투했던 인물이다.

이 유명한 발언의 유일한 출처는 제국 멸망기에 활동한 학자 두카스(Doukas)의 저서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정작 두카스 자신도 '제국을 살리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가톨릭과 손을 잡아서라도(교회 통합) 서유럽의 원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철저한 친(親)라틴파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라틴인보단 튀르크인이 낫다'는 식의 기록들과

두카스가 이 발언을 기록한(혹은 지어낸) 진짜 이유를 다르게 해석한다.

 "주교관을 보느니 터번을 보겠다며 고집 부리던 자들이, 결국 나라를 말아먹고 터번을 쓴 술탄에게 목이 잘렸다"고

반라틴파 세력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해 극적인 대사를 연출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로마인들은 엘리트층이든 평민층이든 각자의 이해관계와 생존 논리에 따라 라틴 제국에도,

오스만 제국에도 협력하고 충성을 바쳤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정체성과 충성심이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관점처럼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동서 문명의 숙명적 대립’이나 ‘민족적 증오’ 같은 개념을 지나치게 본질화하거나 과장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니케아 제국 측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수용해

라틴 제국의 ‘로마성’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태도 역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편향된 역사 해석에 불과하다.

 

5.3. 베네치아의 부상: 동지중해의 여왕

(연도를 자세히 보면 전부 1204년 이후다.)

이 전쟁에서 교황과 동로마라는 두 크리스토교의 거두에게 엿을 먹이며 큰 이익을 본 베네치아 공화국

'아드리아해의 여왕' 정도가 아니라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4차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상제국으로 변모한 기점이 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갈라타 조계 지역이 따위가 될 만큼 많은 요지를 분배받았다.

아드리아 해에 접한 코르푸케팔로니아 섬 등은 물론 에게 해에 있는 크레타를 필두로 하는 수많은 섬들이 베네치아의 몫이 되었고

그 외에도 육지의 주요한 항구 및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는 칼리오폴리스 까지 획득하여 흑해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동로마 장인들을 납치해 유리 등 기술집약적 산업까지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기점으로 동로마와 베네치아는 확고한 원수관계가 되었고, 재건되었다가 멸망할 때까지 동로마의 반베네치아 정서는 굳건했다.

그야말로 도박에 가까운 모험 끝에 가장 큰 이득을 보아서 기존의 '베네치아 공화국'이자 '달마티아의 공작'이라는 칭호는 물론,

'로마 제국의 3/8의 주인'이라는 칭호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배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기까지 약 300년간 동지중해의 독점적 지배권을 누렸으며,

더 나아가서는 1669년의 크레타 함락 전까지 해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으로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전후처리 과정에서 무려 황제로 선출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는 점이 있다.

당시 황제 추대 위원회 위원 12명 중 6명이 베네치아인이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꽤 높았다.

이밖에도 단돌로의 후임 도제인 피에트로 지아니의 경우는 아예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사실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 보자는 견해였으나, 다른 세력의 견제가 우려되는 등 현실적인 고려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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