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댐 만드는 것 이번에는 꼭 성사 시켜
감천의 홍수 예방도 하지만
국가예산으로 할 수 있을 때
나도 고향이 감문면 대양리인데
사람들 농사 짓는 논 상당수가 소유가 타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이 나이가 70-80 대가 되니 농사 짓기도 거의 기계로 합니다
모내기 드론으로 약치기 탈곡 등등
김천에 물을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참고로 나는 감문면 대양리 출신으로
울산(10년) 부산(1년)을 거쳐 김해에서 28년간 살다가 2014년 김천으로 이사 왔어요
김해의 수돗물은 냄새 나서 보리차 같은 것을 넣고 끓여 먹어야 했어요
구성 댐 말고도 물을 준비 하면 좋아요
이철우 국회의원 할 때
조룡 근처 지례댐 만들자 하니
반대하는 사람들 몇이
시청까지 와서
난리 쳤지요
1954년 생인 내가 감천 둑이
배시내 아래에서 2 번 터지고
1960 년대 당시 당시 배시내 사는 몇명은 비가 많이 오면 감천물이 많아서
곡송 국민 학교로 피난 왔다고 이야기 들었어요
지금은 배시내는 옛날 길 옆에서 50미터 옮겨서 선산 가는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감천 냇가는 바닥도 준설하고 둑도 잘만들어 놓았어요
2000년 이후에 외현천의 배시내 근처 방천이 터져서 빛내 앞들 물바다가 되었지요
1936년 병자년에는 지금 감문 농협 바로 아래 외현천 방천이 터져서
1970년 후반 경지정리 하기전 까지 우깨 들녁에 모래 무더기가 군데 군데 있었지요
아쉬운 점을 습례에서(중부내륙도로가 지나가는 근처) 배시내 쪽으로 약 500 M 는
둑도 없이 산 밑으로 밭으로 되어 있어요
그 근처에서 감천 냇가 폭이 줄어 지는데
그 곳도 쌓인 모래도 파내서 잘 정비해서 길이 ( 김천 감천- 낙동강 합쳐 지는 약 20 킬로 미터의
도로를 만들면 됩니다
그런 곳은 감천 지도를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개령 근처에서 2번 터졌다고 이야기 들었아요
배시내 - 아포 다리는 2024년 10월 현재 새 다리를 건설하고 있어요
감천 홍수 대배해서 아포쪽으로 제방둑을 확장하여
을축년 대홍수(乙丑年 大洪水)는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여름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홍수다.
한반도 전역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한강과 낙동강 일대가 특히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을축년 장마' 또는 '을축년 홍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진행
1차 홍수
대만 부근에서 생성된 태풍(2559호 태풍)이 7월 11일부터 12일에 걸쳐 한반도 중부지방을 관통했는데
이 때문에 황해도 이남 지역에 무려 시간당 최고 3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한강, 금강 및 낙동강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주요 강들이 대부분 범람했다.
2.2. 2차 홍수
7월 16일, 1차 홍수로 생긴 피해를 채 수습하기도 전에 타이완에서 생성된 또다른 태풍(2560호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특히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누적 강수량 650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한강 수위가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였고
피해도 막심했다.
한강에 쌓았던 제방이 무너지면서 경성 전역이 물바다가 되었는데
숭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하며, 경성의 교통과 통신도 마비되었다.
당시 경성 전역에서 익사자만 400여 명에 가옥 1만 2천여 호가 유실되었다.
특히 고양군 한지면 이촌리 둑도면 일원과 잠실리 일대·
심지어 송파구에는 홍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자
이듬해인 1926년에 이재민들이 세운 비석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정도.
얄궂게도 2차 홍수가 뜻밖에 가져온 이점도 있었다.
지층이 쓸려가는 바람에 땅에 파묻혀 있던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발견되었고
풍납토성 서벽이 유실되면서 각종 유물이 확인되어 주목받았던 것.
그러나 이때 풍납토성의 서쪽 성벽은 완전히 쓸려나갔고,
2017년 조사에서 서벽과 성문 흔적이 확인되었다.
2.3. 3차 홍수
이렇게 한동안 잠잠한가 싶었는데 양쯔강 일대의 저기압의 영향으로 8월 초
관서 일대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이번에는 북부의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했다.
2.4. 4차 홍수
8월 말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생한 2563호 태풍이 북상하여 9월 초에
한반도 남부를 관통 했고 이로 인해
남부 지방에 들이닥친 호우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이 범람했다.
3. 피해 및 영향
홍수가 한 해에 모두 4차례나 닥쳐 논 3만 2천여 단보, 밭 6만 7천여 단보,
가옥 6천여 호가 유실되었다.
그 외에 붕괴된 가옥은 1만 7천여 호, 침수된 가옥은 4만 6천여 호에
사망자가 647명이나 발생하여 피해액만 당시 돈으로 1억 300만원에 이르렀다.
이 액수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60%에 맞먹었으니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총독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본류는 물론 안양천과 같은 한강 지류에까지도
제방을 엄청나게 건설하여 복구 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골재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선유봉(오늘날의 선유도)을 폭파했다.
이 홍수의 영향으로 잠실섬 주변의 한강 본류가 바뀌었다.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석촌호수)에서 북쪽의 신천강(잠실새내역 이북)으로 바뀐 것이다.
20세기 초반 이래 이 지역에서 한강의 직류화 경향이 자연적으로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즉, 기존의 송파강이 아니라 새로 생긴(新) 하천(川)인 신천으로
유량 유입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이 대홍수를 계기로 아예 신천이 본류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로 인해 송파강으로 먹고 살았던 송파나루는 급격히 쇠퇴했다.
송파나루는 유량이 풍부해서 배가 정박하기 좋았기 때문에
원주, 춘천, 단양, 영월 등 한강 상류의 물자가 이곳으로 집결했고
이곳을 통해 영남, 강릉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했고,
그 덕에 조선시대 전국 15대 상설장터였던 송파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송파진이라는 군영이 설치되어
강 건너 뚝섬, 동잠실, 삼전도, 광나루까지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철도 개통으로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이더니
을축년 대홍수의 직격탄을 맞아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을축년 대홍수의 여파로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에 자리잡던 주민들도
인근 석촌, 가락 등지로 이주하여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18년 송파나루역이 개통하여 이름만 남았을 따름이다.
이후 중대면 일대의 주거지가 현재의 백제고분로 남쪽으로 크게 후퇴했다.
그리고 잠실 일대의 양잠도 홍수로 뽕밭이 다 쓸려나가고 토양이 척박해짐으로써 쇠퇴해 버렸다.
양잠으로 번성하였던 잠실, 신천 일대와
송파나루로 번성하였던 광주군 중대면 일대는
1971년 한강공유수면사업으로 인한 잠실택지지구 개발,
1985년 가락시장 개장,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최,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1989년 롯데월드 개장까지 약 50년 동안 버려진 땅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안양천의 물길도 바뀌어 지금의 영등포구 양화동 지역이
영등포 생활권에 편입되어 버렸다.
또 이 홍수 때문에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 논의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1936년에야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그 외에 성수동 뚝섬의 유래가 된 사당 둑신사(纛神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뚝도공립보통학교(현 서울경동초등학교)의 교사가 유실되었으며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이때 발견되었다.
남한산성 행궁과 북한산성 행궁, 그리고 성벽 일부가
당시 홍수로 인해 발생한 산사태에 매몰되었다.
산성은 1975년부터, 남한산성 행궁은 2002년부터 복원을 시작해서
2014년에 마무리되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정비, 복원 중이다.
&&&&&&&&&&&&&&&&&&&&&&&&&&
감천둑양쪽으로 김천에서 구미까지 길이 약 20 킬로 도로를 만듭시다.
구미 쪽은 습례-선산 까지 왕복 2차선 도로를 만들어 농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24년 10월 현재 배시내에서 개령까지
아포 쪽 재방 둑은 폭 3 미터로 콘크리트 포장하여 승용차나 1 톤 트럭이 자주 다닙니다
감천을 관리하는 곳으로 부터 허락만 받으면 따로 도로용 땅을 구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구미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이 김천으로 올 때 그 도로를 사용하면 됩니다
기술자는 몇년 만에 만들지 못합니다
훈련된 기술자가 구미 공단에서 김천으로 출퇴근 자기차로 운전하면 됩니다.
그리고 비만 많이 오면 감천교 수위가 위험하다고 하는데
감천교 아래를 잘 준설 하던지 다리를 새로 만들어만 합니다
부산의 낙동강 옆의 도로
서울의 한강 옆으로 난 도로
울산의 태화강 옆의 도로
1990 년 대 무렵 만든 김해의 해반천 냇가(폭 약 50 미터) 옆으로 만든
왕복 6차선 도로 처럼
&&&&&&&&&&&&&&&&&
경부선 철로가
직지역을 거쳐 터널 지나는 것을
이번 남부내륙 철도 만들 때
현재 김천역을 지나서 고속 철도로 연결(길이 약 1 킬로) 할 때
복전리 근처에서 추풍령역으로 바로 연결 할수 있도록 하면
경부선 철도가 상당히
직선화 되어 경부선 철도 아용객 들이 시간 단축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국가적으로 좋습니다
검토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재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지역은 다른 용도로 검토하면 좋겠습니다
&&&&&&&&&&&&&&
고성산 봉수대, 감문산 봉수대, 감문면 속문산 봉수대(김천 요양 병원 옆산)
봉수대를 나름대로 복원하여 교육용을 활용 하였으면 합니다
내가 김해 있을 때 2010년 즈음
김해 분성산 봉수대 복원해 둔것 보니
그렇게 비용도 많이 들 것 같지 않아요
그곳은 가덕도 연대봉 봉화를 받아 전했는 지 몰라도
가덕도 연대봉도 가 보았지요
대구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2010 년 즈음그곳에 산행 왔으니
2017년 2월 7일 문무가는 버스를 타고
남곡리에 가다
감문 요양 병원에서 내렸다
감문 요양 병원은 옛날 도명 국민학교 자리였다
남곡리로 가서
70 대 아저씨에게
봉수대가 어디 있는냐 물으니
내가 지도에서
예측 하였던 곳 과는 달리 남곡리 앞쪽의 산을 가르 키면서
그곳이 봉수대라 그랬다
그곳에 가면 무덤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하여 9시쯤 능선을 타고서 그곳에 도착 하엿다
별로 높지 않은 곳이라서 1 시간 정도 걸렸다
바로 감문 요양병원 옆 산의 능선 이었다
감문 요양병원에서 산 꼭대기 까지
1 킬로 가까이 되려나?
그런데
그곳에 가서 조금 실망 하였다
봉수대 있엇던 자리에 누군가 크다란 산소를 만들어 놓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봉수대이면 분명히 개인 소유가 아니었을 것인데
어떻게 그곳에 개인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을까?
무덤 주인에게 이야기 해서 이장 하도록 하고
봉수대를 어느 정도 복원하여 교육용으로 사용하였으면 한다
감문 요양 병원
감문 요양 병원
남곡리 뒷산
봉화대 있었던 축대
지금은 무덤 축대로 변하였다
무덤 축대 치고는 모양이 좀 그렇다
봉수대 축대 위의 무덤
무덤 둘러 있는 곳에서 주운 기와 쪼가리
봉수대에 구조물이 있었고
그 구조물의 지붕의 기와 같다
&&&&&&&
울산의 3대 산업인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산업 단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울산대교 전망대의
층별 시설에 관한 안내문
높이 63m에 이르는
울산대교 전망대
해발 120m의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
천내 봉수대
천내 봉수대에 관한
안내문
천내 봉수대 노선에 관한
안내문
봉수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설치한 통신 수단으로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되었다.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두어,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써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로 각각 신호하여 상황을 알렸다.
봉수의 간선은 직봉(直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서북 내륙 지방은 강계, 해안 지방은 의주,
서남은 순천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착점으로 하였다.
이 밖에 간봉(間烽)은 전선의 초소로부터 직봉선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거나 전선에서 직접 본진이나 본읍에 이르는
단거리의 보조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약 120년 전까지 사용하였던 봉수는
과학적으로 잘 갖추어진 통신 방법입니다.
봉수대에서는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정보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신호가 전달하는 내용은
봉수대의 굴뚝에서 올리는 연기나 불꽃의 수에 따라 달랐다.
이렇게 연기나 불빛을 이용하여 만든 신호는 인근의 봉수대에
차례대로 전달되어 한양(현재의 서울)까지 전달하였다
봉수대는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높은 산꼭대기에 세웠다.
평상시 연기나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봉수대를
세웠는데, 이렇게 설치된 봉수대는 전국에 600개 이상 되었다.
높은 산의 정상에 세워졌던 봉수대 자리는
지금의 전파 중계소가 있는 곳과 거의 같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때까지 사용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 제도가 도입·정착되자 폐지되었다
감문산성(취적봉)
&&&&&&&&&&&&&&&
그리고 속문산성
고소 산성을 복원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문산성(俗門山城)’에 대해
‘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
(석축 길이 744m, 높이 2.1m, 샘 2곳과 연못 2곳, 군용창고가 있다)’라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속문산성은 감문국시대에 축조된 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군영과 봉수대로 이용된 석성으로
해발 600m지점부터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쌓았다.
정상부에는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대형 주춧돌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의 둘레는 2천455자이고 높이는 일곱 자인데
성내에 우물 두 개와 저수지 두 개, 군창이 있다”라고 수록돼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도“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2천540자이고
성안에는 두 개의 샘과 저수지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백제장수 의직(義直)이 속문산성과 고소산성을 공격했다가
김유신에게 패해 혼자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구전이 전한다.
교육용으로 사용 하였으면 합니다
부산의 동래 산성은 복워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속문산성은 역사가 오래 됩니다
역사 기록으별로 없지만
속문산성을 복원하고
조금 아래 해신방구 쪽으로 소방 도로를 만들어
고소산성과 연결하면 화재 예방에서 좋아요
임도는 숲속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조성된 도로다.
평소에도 임산물 운반 등에 활용되지만 산불 발생 시 진화 작업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임도만 있으면 진화 차량과 인력이 언제든 화재 현장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임도가 없어 헬기만 동원할 경우 날씨가 좋지 않거나
해가 저문 후에는 진화 작업을 이어가기 어렵다.
실제 2025년 울산 울주군 산불에서 임도 설치 여부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다.
임도가 정상까지 개설된 언양읍 화장산 산불은 발생 20시간 만에 진화됐지만
임도 개설이 미미한 온양읍 대운산 산불은 잡는 데 5일 이상 걸렸다.
산림청 역시 임도 확충을 주요 정책 과제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은 2021년 발표한 ‘제5차 전국임도기본계획’에서
당시 3.5m/㏊에 불과했던 임도 밀도를 2030년까지
5.5m/㏊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임도 밀도는 4.1m/㏊에 불과해
여전히 미국(9.5m/㏊), 일본(24.1m/㏊), 독일(54m/㏊) 등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임도 확대가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로는 환경단체의 반발이 꼽힌다.
임도가 산사태 등 다른 자연재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법적인 문제도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임도 설치 시 반드시 산림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사유림 비중이 전체의 70%에 달하는 데다
하나의 산에도 여러 명의 산주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합의가 쉽지 않다.
해신 방구
해신 방구
해신 방구
백운산에서 바라 본 감문면 문무리(여모)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은 김천시 가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에 자리잡은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백운산(해발 618m)이라는 이름은 정상 부분이 흰구름에 가려있어서 붙여졌다.
옛날에는 속문산(俗門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속문산성은 해발 400m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 축성됐다고 전해진다.
산의 북쪽만 큰 바위를 쌓아올린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무너져 버린 상태다.
이 지역은 신라의 영토였으나 백제에게 빼앗겼다 찾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백운산 옆의 고소산(姑蘇山)에도 성터가 남아있는데
주민들은 속문산성을 숫성, 고소산성을 암성으로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등산로도 사용하고
내가 김해 있을 때 김해 천문대 아래에서 구산동 쪽으로
소방 도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어요
김해 만장대 꼭대기에 봉수대 복원한 것이 있어요
만장대에서 김해 공항이 잘 보여요
물론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맑을 때
김해 공항은 주위 김해 평야가 있어서
김천으로 치면 김천에서 구미 까지 산이 없고 논만 있다고 보면 되요
시간 되는 분들 만장대 가보면 됩니다
산성도 잘 복원해 놓았고
속문 산성도 문무리 옆의 고소 산성- 해신 방구-속문산성을 거쳐서
현재 백우산 정상 보다 약간 노은 안송문 뒷산- 우태산 옆 금효 왕릉 쪽으로
등산로를 만들어 비상시에는 소방 도로로 사용하고
등산로를 만들어 놓으면 등산로 길이도 약 4-5 킬로 되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동래산성( 혹은 금정산성)이 오른편으로 전개된다.
산성 규모는 예상밖으로 별로 였다.
높이 2-3 미터의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길을 만들어 놓은것 같았다.
동래산성 남문
남문 밖에 서있는 안내판에 보니
동래 산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1700년 초에 축조 되었으며
성둘레 길이가 17 킬로
면적이 83,000 제곱 킬로 (약 250만평) 의
넓이로는 국내성중에 최고라나.
실제로 성이 최초로 축조된것은 삼국 시대 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에 남문, 동문, 서문, 북문을
다시 복원 하였다.
산성중앙에 산성 마을이 있다.
&&&&&&&&&&&&&&&&&&
고소산성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365미터의 고소산(姑蘇山),
일명 성산(城山) 정상부로부터 50여미터 아래에는
남북으로 길이 7백미터에 달하는 허물어진 석성이 남아있는데
멀리 속문산성과 마주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석성의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성벽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골짜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정밀하게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성인 감문산성, 토성과 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 달리
고소산성은 거의 대부분을 석재로 축성되었으며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옹성(甕城)이 있었을 가능성 등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이전의 축조방식과 달리 가공한 석재를 이용해 한층 견고하면서도 세련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김천시 감문면 홈페이지>
상여, 하여, 장전(긴밭사래) 등 세 마을로 이뤄진 문무리(文武里)는
마을 주변으로 속문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으로 둘러쳐진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이 마을은 여무(余武), 여산골(余山谷) 등으로도 불렸는데 예로부터
길이 험하고 산이 깊어 마을 주민들은
김천장보다 빈천고개 너머의 상주 공성면 옥산장을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삼한시대에 문무국(文武國)이라는 소국이
상여마을을 중심으로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이를 고증할만한 관련 자료가 없다.
다만 마을 주변으로 산재한 무수한 고인돌과 고분,
성곽의 흔적들을 통해 미뤄 짐작 할 따름이다.
특히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빈천고개의 도로변에는
지석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마을 앞 고소산으로 가는 성산골에는 도굴로 인해 파헤쳐져
석실을 드러낸 채 수많은 고분들이 방치돼 있다.
마을 앞산인 고소산에는 감문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하는 석성이 있는데
많이 훼손하기는 했으나 일부 구간은 완벽한 형체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김천신문,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5> 감문면 편, 문무국의 기상이 서린 문무리,
권숙월 기자>
문무리에서 바라본 백운산 전경
산성기행(경상도)/김천,구미,칠곡
김천 속문산성(백운산성)
하늘도깨비 2020. 11. 30. 16:32
<2019년 2월 17일>
송북리(松北里)는 감문면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8㎞ 거리에 있는 산간오지로 북쪽은 삼두봉, 서쪽은 속문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송북(松北)이라는 지명은 1914년 송문과 성북마을을 통합하면서 등장했는데 송북의 송(松)자와 성북의 북(北)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라고 한다. 송문(松門)은 마을주변으로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 숲에 들어가는 입구 즉, 대문에 해당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성북(城北)은 속문산성의 북쪽에 마을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북1리는 송문과 안송문으로 나눠져 있는데
조선중엽까지는 속문산성(俗門山城) 아래에 마을이 있어 산성이름을 따서 속문리(俗門里)라 했다.
안송문 ( 필자의 외가 동내), 중기리, 외송문 등 세 마을로 나눠져 있었는데 중기리는 폐동이 됐다.
1971년 송북2리로 분동한 성북골은 1590년(선조23년) 경주이씨 이종성(李鍾聖)이
안동에서 이주해 처음 살았다고 전해지는 백운산 아래 첫 마을이다.
성북골(城北谷)이라는 지명은 속문산성으로부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성성(城)자에 북녘북(北)자를 써서 성북골이라 했다.
속문산성은 감문국시대에 쌓은 이래 조선시대까지 군영과 봉수대로 이용된 성이었으며
속문산 해발 600미터 지점부터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돼 축조됐고
성북골 마을 방향으로는 자연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했다.
<김천신문,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5> 감문면 편, 백운산 아래 첫 마을 송북리, 권숙월 기자>
&&&&&&&&&&&&&&&&&&&&&&&&&&&&&&&&&&&&&&&&&
&&&&&&&&&&&&&&&&&&&&&
#고대 감문국의 왕릉들
현재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를 중심으로 감문국이야기나라가 건설되어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감문국 복원의 중심센터인 셈이다. 역사문화전시관 등이 들어서고 금효왕릉 등이 복원되어 있다.
먼저 감문국시대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세 개의 무덤 중 가장 중요한 금효왕릉은 발굴과 복원은 끝났지만 주차장과 제대로된 안내판이 없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을 확장하고 주차장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 지금은 사라진 장부인릉의 1917년 사진/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금효왕의 왕비 혹은,총희로 전해지는 장부인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처의 사자사석탑과 함께 주차장 확보와 포도밭으로 변한 강씨 문중 땅을 사들여 장부인릉을 복원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발굴기록과 사진이 남아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양천리고분은 금제귀걸이 등이 나온 굉장히 중요한 유적이다. 김천에서 유일한 벽화에 채색의 흔적이 있는 고분이다. 마찬가지로 주차장확보와 주변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 고대 감문국 관련 선착장(접안시설) 유적 |
#선착장의 정교한 복원
감문국이야기나라 건설 중 지하에 있던 통일신라시대 선착장 유구가 발견됐다. 배수와 민원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다시 묻혔다. 대신 감문국이야기나라가 완성되면 지상에 복원될 예정이다. 감문국 관련 가장 중요한 유적중의 하나다. 정교하게 복원될 필요가 있다.
| '감문국역사문화전시관'조감도 |
#유물의 환수와 전시의 효율화
'감문국이야기나라'에 건설중인 감문국역사문화전시관에는 국립경주박물관,대구박물관과 협의해 개령면과 감문면 출토유물 253점을 대여해 전시할 예정이다.
국내 박물관에 보관중인 김천에서 출토된 삼한시대 유물들의 소재를 파악해서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은 돌려받고,환수가 불가능한 유물들은 영구임대형식으로 전시하고,매입이 가능한 감문국과 삼한시대 지역의 가치있는 출토유물은 외지로 유출되기 전에 매입 해야 한다. 기증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
'감문국역사문화전시관' 3층에기획전시를 계획중인 김천출신 세계적 바이올린 제작자 진창현 선생의 유물을 사명대사 공원내의 김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감문국 역사문화전시관에는 순수하게 감문국과 삼한시대,개령,감문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 차별화시키는 것이 '감문국이야기나라'의 건설의도와도 합치되고 장차 관광자원화에도 더 도움이 될 수 있을것이라 생각된다.
| 문무리 고인돌 |
#감문 문무리 고인돌 유적정비
삼한시대 문무국이 있던 감문면 문무리 주변에 산재한 약 300여개의 고인돌 유적을 지금이라도 조금씩 정비해야 한다. 이곳을 탐사했던 사학자들이 고인돌 공원을 제안했을 만큼 국내 최대의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다.
주변의 잡목들을 정리하고 일련 번호와 안내판을 제작해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돈이 되지는 않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다. 고인돌을 연구하는 국내외 학자들과 관광객을 불러들일 미래의 먹거리다.
| 문무리 고인돌 |
#감문국시대의 산성 등산로와 표지판 정비
향토사학계가 감문국시대 성이라고 추정하는 감문산성,고소산성,속문산성에 대한 등산로를 정비하고,표지판을 설치해서 시민들과 외지인들이 쉽게 찾아 김천의 역사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해야한다.
다음은 감문국 관광자원화에 대해서 그동안의 생각을 적는다.
#감문국 유적지 QR코드 설치
감문국 주요 유적지에 안내판을 세우고 QR코드를 설치해 일정코스를 답사한 사람들에게 상품권이나 선물을 준다면 김천을 알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비석/인터넷 캡처 |
#渡江碑(도강비) 설치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아포가 배반을 해서 대군 30명을 일으켜 밤에 감천을 건너다가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는 기록과 감문국을 노래한 詩를 새긴 비석을 아포가 보이는 '감문국이야기나라' 근처 감천변에 세워 역사의 기록을 현실로 복원시킨다면 새로운 볼거리와 역사성을 보강할 있다
&&&&&&&&&&&&&&&&&&&&&&&&&&&
버스 노선 변경 의뢰 건
상주 옥산에서 김천으로 오는 버스는 2 시간마다 한대 있는가 그렇다
김천에서 감문면 개자 가는 버스도 2 시간에 한대 있는 가 그렇다
이참에 옥산에서 무을을 거쳐
개자- 감문중학교 - 배시내-공쌍- 아포- 혁신도시 김천구미역
노선을 만들어
김천 구미역 사용하여
좀 더 많은 사람이 고속철을 쉽게 사용 할 수 있는 방향 좀 검토해 주세요
2025년 1월에 집사람 조카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는데.
옥산에 사는 집사람 이모는 옥산에서 혁신 도시 까지 택시 대절해서 왔어요
옥산에사는 택시 운전사와 올때 갈때 택사 기사와 계약을 했대요
배시내에서 감천을 건너는 다리도 2 차선으로 새로 잘 만들어 놨어요
&&&&&&&
남부 내륙철이 구미르 거쳐서 김천으로 오게 만들어
김천에서는 김천역을 거쳐서 복전리 쪽으로 고속 철과 같이 가도록 하고
경부선 국철은 복전리 근처에서 추풍령 역으로 가게 만들고 존 경부선 철도는 없애 버리면
김천 발전에 참 좋을 것 같습니디
그리고 삼성 조선 대우 조선에 근무 하였던 기술자들이
구미 김천 쪽으로 올 수 있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술자 는 교육 시키는데 사간이 10년 이상 걸립니다
&&&&&&
아천 냇가 다남리 근처에 보를 만들어
김천 공단의 물을 사용 하도록 합시다
아천 냇가는 물이 조금 씩 감천 냇가로 흘러 갑니다
보를 만들어 물을 퍼올려서 공단 근처에 조그마한 저수지를 만들어
공단에 필요한 물을 사용 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