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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는 정치, 경제, 사회적 격변기였던 19세기 프랑스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단순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포착하여 기록한 시대의 증언자이자 ‘근대 생활의 화가’이다.
그가 활동한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의 프랑스는 샤를 10세의 복고 왕정, 7월 혁명과 루이 필리프의 입헌 왕정, 2월 혁명과 제2공화정,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제2제정, 보불 전쟁과 파리 코뮌에 이은 제3공화정이라는 정치적 요동을 겪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자리를 잡고 근대 자본주의가 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산업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라는 계급이 형성되어 대립했다. 인구가 몰렸던 도시를 중심으로 임금, 주거 등과 관련된 사회 문제가 발생했고, 소요와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한편 기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행락 문화가 생겨나고, 시각 예술의 새로운 매체인 사진이 등장하여 보는 방법에 혁신을 가져온 것도 이 시기이다.
이런 시대 속의 사람들 하나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를 발자크, 빅토르 위고, 플로베르 등의 소설이 들려주고 있다면,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도미에의 석판화, 수채화, 유화, 조각 작품들이다.
도미에는 1808년에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유리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아버지는 문학으로 성공하고자 1814년에 파리로 갔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그와 모친도 1816년에 파리로 이주했다. 도미에는 12살 때부터 법원 집달관 사환, 서점 종업원 등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14살이 된 1822년부터는 그림에 뜻을 두고, 부친을 도운 적이 있던 고고학자인 알렉상드르 르느와르(Alexandre Lenoir)에게서 미술을 배우고, 1823년부터는 샤를 쉬스의 미술학교(Académie Suisse)에서 데생의 기초를 익혔다. 1825년에는 벨리아르(Béliard)에게서 석판화(lithography)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동시에 루브르 박물관에 자주 가서 거장의 작품들을 모사하는 것으로 수업 시기를 마쳤다.
생계비를 벌어야 했던 도미에는 21살이 되는 1829년에 주간지 [라 실루에트 La Silhouette]에 석판화를 싣는 것으로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지금은 신문에 시사적인 캐리커처나 카툰을 그리는 사람을 만화가라고 해서 화가와 구별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다. 이런 그림이 주로 선택한 매체인 석판화도 18세기 말에 개발된 최신의 기술이었다. 목판이나 동판화와 달리 그리고 나서 새기는 과정이 필요 없는 석판화는 화가가 직접, 빨리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회화와 가장 가까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정치적 카툰의 새 시대

도미에의 경우는 석판화라는 매체를 일부러 선택했다기보다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지만, 그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고 그에게 화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것은 신문과 잡지에 실린 석판화들이었다. 그의 석판화를 가장 많이 실은 매체는 샤를 필리퐁(Charles Philipon)이 1830년에 창간한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와 1832년에 창간한 일간지 [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였다. 이 매체들은 1830년의 7월 혁명 이후 왕으로 즉위한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에 적대적인 입장을 가졌다. 도미에는 이런 매체의 환경, 공화파 미술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미술 양식을 만들어갔다. | |

[가르강튀아] 1831년
석판화, 30.5×21.4cm, 국립 도서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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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12월 15일자 [라 카리카튀르]에 실린 석판화 [가르강튀아 Gargantua]는 도미에를 유명하게 만든 초기 정치 풍자화의 대표작이다. 라블레(Rabelais)가 쓴 16세기의 소설 주인공인 거인 왕 가르강튀아로 묘사된 루이 필리프는, 헐벗은 사람들이 모은 돈을 먹어 치우고, 의자 밑으로 훈장과 서류들을 배설 중이다. 그의 머리는 서양 배 모양으로 이는 ‘바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어 그를 풍자하는 데 자주 쓰였다. 이 그림은 서민 대중을 억압하고 상층 부르주아 위주의 정책을 폈으며 훈장, 작위 등을 남발했던 왕의 정책을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화가와 편집자는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과 벌금형에 처해진다. 실제로 도미에는 1832년 8월부터 1833년 2월까지 생트-펠라지 교도소 등에 수감되었다. | |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 1834년
석판화, 44.5×29cm, 대영 박물관,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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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관료를 비판하는 글과 그림으로 수없이 재판정에 불려다니던 편집자 필리퐁은 그로 인한 벌금을 감당하기 위해 신문과 별도로 석판화만을 모은 [월간 작품집 L’Association Mensuelle]을 만들어 부록 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1834년 7-8월호로 나온 작품집에 실린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 Rue Transnonain, le 15 Avril 1834]은 도미에 판화 양식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그림이 묘사하는 사건은 루이 필리프의 새 법과 반노동자 정책에 반대해 리용의 견직 노동자들에 이어 파리 노동자들과 공화파들이 일으킨 시위를 정부가 군대를 보내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민간인 희생이다. 바리케이드가 있었더 파리 트랑스노냉가 근처 주택에 한밤중에 침입한 정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가족이 화면에 보인다. 이 작품은 사건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것처럼 강렬한 직접성을 보여주나, 사실 도미에는 이론이 분분했던 언론 보도들을 통해 안 지식으로 당시 상황을 상상했고, 실제로는 여성과 아기는 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완벽한 회화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는 도미에 특유의 ‘경제성’이 돋보인다. 그는 화면에 등장하는 요소를 쓰러진 남자, 여성의 발, 노인의 머리, 깔린 아이의 머리, 엎어진 의자, 배경의 침대로 최소화했다. 그 이전의 풍자화가 중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호가스(Hogarth),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석판화가들의 작품과 도미에의 그림의 차이가 이것이다. 도미에와 비교하면 다른 화가들의 그림은 번잡하고 고졸해 보인다. 이후 사회주의 정치 포스터들이 수없이 인용한, 새로운 시대의 미감을 보여주는 근대적 캐리커처라고 할 수 있는 도미에 판화의 직접적이고 집중된 호소력에 필적하는 19세기 화가는 고야(Goya) 정도가 유일하다. 실제로 도미에는 고야를 존경했고 고야의 판화집 [전쟁의 참상]은 도미에가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만드는 데 참고가 되었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도미에의 판화는 힘있고 절제된 양식이 특징이다. 다소 과장을 할 때는 있지만 기본적인 모델링과 명암에서는 아카데믹한 형식미가 있고, 내용도 아주 노골적이거나 조야하지 않아서 대중과 지식인들까지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이 작품의 희생자는 다비드의 [마라]와 달리 성인처럼 이상화되지 않았다.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입장은 저널리스트의 냉소와 혁명가의 열정 사이에 있는 냉정한 시선이다. 그는 권력을 풍자하고 사람들의 위선이나 어리석음을 꿰뚫어보는 눈이 밝은 관찰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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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캐리커처 조각을 시도한 작가 중 하나이다. 그는 친구였던 조각가 프레오(Préault)의 거칠고 즉흥적인 느낌이 나는 조각을 좋아했는데, 프레오의 권유로 1830년부터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1832년에는 국회의원들의 흉상을 연작으로 만들어 출판업자 오베르(Aubert)의 판화 가게에서 전시했다. 보통 높이가 20cm 안 넘는 이 조각 작품 각각에는 인물의 외형적 특징과 성격뿐 아니라, 이들이 대변하는 가치에 대한 풍자적인 힘이 담겨 있다.
단순하고 솔직하게 기록된 근대인의 일상

생계를 위해 석판화를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지만, 도미에는 역사화를 그리는 ‘본격적인’ 화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34년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기법을 거의 독학으로 익혔기 때문에, 바탕재 준비나 안료 사용이 정통적인 방법과 달랐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은 화가들을 매료시킨 신선한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작품도 많다. 또 예비 드로잉 없이 일필휘지로 완성했던 판화와 달리, 유화의 경우는 많이 고치고 덧그리면서 어렵게 작업한 것이 많다. 또 완성하지 않은 작품도 많은데 이것을 19세기 말에 많은 위조범들이 완성해 버리기도 했다.
1848년의 유화 스케치 [공화국 The Republic]은 그의 유화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선보인 작품이자 유일한 알레고리화이다. 2월 혁명 직후 들어선 임시 정부는 공화국을 주제로 한 그림들의 경연대회를 열기로 하고 화가들의 스케치를 받았다. 도미에의 작품은 최종 20개 후보에 들어 본격적인 회화로 확대해서 완성하도록 주문 받았으나 결국 완성은 하지 못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자선’의 우의로 등장하는 젖먹이는 여성을,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으로 그려내, 강건한 공화국을 상징하고자 했다. | |
[공화국] 1848년 캔버스에 유채, 73×60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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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부] 1864년 패널에 유채, 49×3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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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권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을 많이 그렸으나,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늘 따뜻한 시선을 유지했다. (이는 그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는 1846년에 동거하던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고 결혼을 했는데, 이듬해에 아들이 죽고 말았고 그 후 다른 자식이 없었다.) 그가 그린 일련의 세탁부와 아이 주제 그림 중 하나인 1864년의 유화 [세탁부 The Washerwoman]에도 이런 시선이 나타난다.
센강에 있는 세탁선에서 빨래를 하고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모녀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에서, 어머니 양 팔에 각각 매달린 빨래 더미와 어린 아이는 (이 주제를 다룬 그의 다른 작품 제목처럼) ‘무거운 짐’이기도 하지만,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황혼 빛을 받아 빛나는 센강가 구식 아파트벽을 배경으로, 빨래 방망이를 들고 키에 비해 높은 계단을 힘차게 오르는 아이의 발걸음과, 이를 든든히 바라봐주는 어머니 모습에서 작가의 따뜻하고 예리한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회화 작품에서 보이는 도미에의 힘찬 붓질과 빛에 대한 감각은 당대 누구의 유화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평범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생애 속에 있는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금세 사라져버리는 소중한 순간을 이렇게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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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가 그린 대부분의 유화나 수채화 작품은 말년까지 전시나 판매를 하지 않아 연도 판정에 어려움이 있고, 양식의 변화도 크지 않아, 작품을 특정 시기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도 곤란하다. 도미에는 1849~50년에 우화, 신화, 종교 주제를 가진 작품들을 살롱에 제출했고, 이 작품들에서는 그가 루브르에서 모사했던 루벤스, 프라고나르 등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그 특유의 양식으로 완성된 대부분의 회화의 주제는 판화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과 그들의 일상 생활이다. 도미에는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린 적이 없다. 풍경은 인물의 배경으로 가끔 등장하나, 그 크기가 인물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동시대 화가 쿠르베나 마네와 달리 그가 그린 인물 중에는 창녀나 화려하게 차려 입은 선남선녀도 없다. 화려한 카바레와 같은 대중 문화 역시 그의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많이 그린 것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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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의 그림 속에서는 변호사 등의 전문직 종사자, 소 부르주아, 노동자, 여행자, 상인, 거리의 공연자, 약장수, 좁은 골목에서 노는 도시의 아이들이 그들의 생업이나 취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과 실패, 거짓이 있는 우울하고 비참하고 타락한 세계에 사는 외롭고 누추하고 공허한 인물들이다. 화가는 이들의 위선, 허세, 외로움, 가난, 당혹스러움, 어색함을 단순한 요소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권력자나 많이 가진 자,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 풍자의 시선이 날카로웠던 것은 사실이나, 가난한 서민을 그릴 때도 그는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인물의 심리를 꿰뚫는 묘사를 했다.
도미에는 평생 가난했고 큰 빚도 자주 져서 살림살이를 경매에 넘겼던 적도 있다. 이런 상황을 그의 초기 전기 작가들이 과장해 그에게 예술과 진리만을 추구하다 비참하게 희생된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러나 그는 생전부터 평론가, 화가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말년에는 화상 볼라르, 뒤랑-뤼엘 등이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판매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던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는 1860년대 말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1877년에는 거의 눈이 멀었다. 죽기 일년 전인 1878년에 뒤랑-뤼엘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이 열렸고, 이 기간에 눈 수술을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평소에 그는 자신을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숫자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50여 년에 이르는 활동 기간에 회화 3백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8백여 점, 조각 5십여 점, 석판화와 목판화 5천여 점을 남겼다. 그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처럼 장거리 여행 한 번 한 적이 없이 2~3일에 한 점꼴로 작품을 완성했다. 도미에는 1865년부터 살던 파리 북쪽의 발몽드와(Valmondrois)의 집에서 1879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곳에 묻혔던 시신이 두달 후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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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는 대중보다 미술가들이 더 좋아한 ‘화가의 화가’다. 반 고흐, 피카소, 클레, 에밀 놀데 등의 후배 화가뿐만 아니라 코로, 들라크루아 같은 선배 화가들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연구하여 그들의 작품 제작에 참고했다. 그의 작품이 갖는 의의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진행 중인 면이 많다. 1979년에 서거 백주년 기념 전시가 고향인 마르세유에서 열렸으나,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칭송은 독일과 미국 등의 외국에서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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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