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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말인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 사이 서양미술에서는, 장식적인 우아함을 특징으로 하는 ‘국제 고딕(International Gothic)’ 양식이, 전유럽의 봉건 궁정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15세기 미술은 국제 고딕의 비현실적인 양식화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흐름은 알프스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발달했는데, 남쪽은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가, 북쪽은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가 그 중심지였다. 이탈리아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미학을 선보이며 황금기를 구가했던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미술의 토대를 만든 제1세대이자 대표작가이며, 북유럽 회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화가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경~1441년)다.
얀 반 에이크의 출생 시기, 장소, 교육 및 초기 작품 활동에 대한 자료는 확실한 것이 없다. 오늘날 벨기에 동부, 랭부르(Limburg) 지역의 마세이크(Maaseik)에서 1395년경에 태어나, 필사본 화가(illuminator) 수련을 받고, 1425년경까지 덴 하흐(Den Haag, 영어 표기는 Hague)의 홀란드 백작 궁정에서 일한 적이 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형제인 후베르트(Hubert)와 람베르트(Lambert), 누이 마르가레테(Margarete)도 화가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플랑드르는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1363년에 필리프 2세(Philippe le Hardi)가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 지방을 봉토로 받으면서 시작된 부르고뉴 공국은, 그가 플랑드르 백작의 딸과 결혼하면서 플랑드르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디종(Dijon)에 있던 부르고뉴 궁정이 플랑드르의 산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 브뤼헤(Brugge)로 옮기는 15세기 초부터 플랑드르 미술은 ‘궁정 귀족’과 ‘부르주아’라는 두 계급의 든든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얀 반 에이크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화가인 동시에, 새로 탄생해 세력을 키워가던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취향을 대변하는 화가였다.
얀 반 에이크는 1425년경부터 필리프 3세(Philippe le Bon)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공작의 초상, 공작이 계획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세계 지도 등을 그렸다고 하나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의 손으로 그린 것이 확실한 작품 중 전해지는 것은, 1432년부터 사망한 해인 1441년까지 10년 동안 제작한 25개의 그림뿐이다. 남아있는 그림의 주제는 종교화 특히 성모상과 초상화가 대부분이고, 이 작품들의 제작 기간에 차이가 별로 없어 양식의 변천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조화로운 구성, 빛과 그림자의 효과에 대한 정밀한 관찰에 기반한 극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 완벽한 마감은 전설적이어서, 후대에 그는 유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당시 패널 회화의 주류는, 광물이나 식물에서 추출한 안료를 달걀 노른자에 개어 그리는 템페라화였지만, 안료를 기름에 섞어 사용하는 유화도 시도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를 유화의 발명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프레스코, 템페라화 등과 구별되는 유화 특유의 깊고 풍요로운 색채, 섬세한 입체감, 생생한 질감을 완벽하게 구현한 화가로는 얀 반 에이크가 선구적이고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실적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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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트 제단화] 열었을 때 1432년 패널에 유채, 375×520cm, 신트 바프 성당, 헨트, 벨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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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의 사실주의와 새로운 플랑드르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15세기 플랑드르 제단화 중에서 가장 큰 헨트(Ghent)시 신트 바프(Sint-Baafs, 영어 표기는 St. Bavo) 성당의 [헨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다. 이 제단화는 헨트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대성당의 가족 채플에 걸 목적으로 주문하여, 후베르트 반 에이크가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1426년에 사망했다. 얀 반 에이크는 공작의 거처가 있던 릴(Lille)에서 궁정화가로서의 업무를 하는 중이어서 곧바로 이 작업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1428~9년에는 공작이 맡긴 임무 때문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을 하기도 했다. 1431년에야 그는 브뤼헤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작품 제작에 들어가 1432년에 완성했다.
후베르트와 얀이 정확하게 어떤 부분을 그렸는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고 논쟁이 많은 문제다. 사실 양식의 차이와 전체적인 부조화는 제단화 전체에서 발견된다. 중앙 패널, 경첩으로 연결된 좌우 날개 패널이 있는 세 폭 제단화(triptych) 형식인데,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패널 네 개가 모여 각각의 폭을 구성하고 있어 다소 복잡해 보인다. (이 시대 화가는 액자 디자인과 제작도 직접 했는데 현재의 것은 본래 화가가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쳤을 때 하단 가장 왼쪽에 있는 패널도 원작이 도둑맞아 대신 채워 넣은 모사본이다.)
평일에 볼 수 있는 닫은 화면 하단에는 주문자인 요스 베이트 부부와, 조각의 느낌이 나게 단색으로 그려진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이 있다. 세례 요한은 본래 이 교회의 수호 성인이었고, 사도 요한은 주문자의 수호 성인이다. 중앙 네 패널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을 담은 수태고지, 그 위에는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스가랴, 미가, 이교도 무녀들이 그려져 있다.
주일과 축일에 볼 수 있는 펼친 화면의 상단 중앙에는 하나님(혹은 예수)이 교황의 삼중관을 쓰고, 세속 왕의 왕관은 발치에 두고 앉아 있다. 그 좌우로 성모와 세례 요한이, 그 옆에는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이, 그 옆에는 아담과 이브, 아담의 위에는 가인과 아벨의 번제, 하와 위에는 가인의 아벨 살해 장면이 있다. 하단 다섯 패널은 이어지는 장면이다. 중앙에는 희생양 예수를 상징하는 피 흘리는 어린 양, 그 주위에는 예수 수난 도구들(Arma Christi)과 향을 들고 둘러선 천사들, 그 앞에는 생명수 샘을 상징하는 팔각형 우물이 보인다. 사방에서 어린 양에게 경배를 하기 위해 사도, 예언자, 순교자 등이 모여들고 있다. 하단 좌측 두 패널에는 말을 타고 이 경배에 참여하러 오는 기사와 판사, 우측 두 패널에는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오는 순례자와 은둔자가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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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화 전체의 주제는 인간 구원의 역사다.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된 원죄와 타락이 예수 탄생의 예언, 수태고지, 예수의 희생, 신자의 순교, 최후의 심판을 거쳐,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 나무가 우거진 천국에 이른다는 것이다. 상단 패널을 가로로 보아 최후의 심판 장면으로 해석하면 중앙의 인물은 데이시스(Deësis: 심판자 예수,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중재자 역할의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나란히 등장하는 도상)의 예수가 되고, 하단 중앙 그림의 세례반, 예수, 비둘기 모양의 성령과 연관해서 수직으로 연결된 세례 도상으로 해석하면 성부 하나님이 된다.
양식으로 봤을 때 인물들이 한 화면에서도 크기가 다르고 일관성이 없는 것은 중세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그림에서는 크게 두 가지 중세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 있다. 첫째는 중세 회화 배경에 주로 보였던 금색 대신 사생에 근거한 자연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중세 그림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을 나타내려 했다. 중세 그림에서 즐겨 사용한 황금색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 금색은 거리감이나 공간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색이다. 인간 구원의 모든 역사가 한 화면에 축약되어 담긴 얀 반 에이크의 천국 풍경에 아직 구체적인 시간은 나타나지 않는다. (회화에 담기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인상주의의 ‘찰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장소는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공작을 대신해 알프스를 넘나들고 예루살렘까지도 여행을 한 것으로 알려진 화가는, 북유럽의 자연에 더해 여행 중에 보았던 이국적인 식물과 건축물도 그림 속에 사실적으로 그려 넣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마리아, 천사들조차도 타일이 깔린 바닥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속에 존재한다. 새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원경의 건축물과 그 너머 산의 표현에는, 후에 레오나르도가 말하는 공기 원근법이 사용되어 흐리고 푸른 모습을 띠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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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트 제단화] 닫았을 때 | |
중세 회화와의 두번째 큰 차이점은 인물이 이상화되지 않고 개성을 가진 존재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도 그렇지만 닫힌 화면에 그려진 주문자 부부의 실물크기 초상은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제단화의 일부분으로 등장한 주문자 초상은 이후 독립 초상화로 발전하여, 중세의 익명성에 묻혀 있던 개인이 천년만에 이름과 개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얀 반 에이크는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천년 만에 등장한 이름과 개성을 가진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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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자의 초상] 1432년
패널에 유채, 34.5×19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2 [붉은 샤프롱을 쓴 남자] 1433년 패널에 유채, 26×19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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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트 제단화 이후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 중 서명과 제작 연도가 적힌 최초의 작품은 1432년의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a Man]이다. 모델은 짙은 녹색 샤프롱(chaperon)을 쓰고 모피로 옷깃과 소매 끝을 댄 붉은 의상을 입은 남자이다. 화가는 개인 초상화에서 3/4 각도의 상반신이 보이는 형식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 사람 역시 그런 자세를 취하고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실제 같은 착각을 주는 눈속임 효과(trompe-l’oeil)로 그려진 돌 난간에 ‘충실한 기념’이라는 뜻의 큰 글씨가 보이고, 그 위에는 희랍어로 ‘티모테오스’라는 이름, 맨 아랫 줄에는 ‘우리 주의 해 1432년 10월 10일에 얀 반 에이크에 의해서 그려짐’이라고 씌어 있다.
당시 화가 주위에는 티모테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일종의 환유(metonym)로 생각되었다.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절 고대 그리스에 이 이름을 가진 음악가가 있었기 때문에, 모델은 부르고뉴 궁정 음악가이며, 그가 말아 들고 있는 종이는 악보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티모테오스는 부조로 유명했던 조각가라며 이 그림은 궁정 조각가를 모델로 한 것이고, 그가 쥔 종이는 조각의 계획을 메모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모델이 법률가이며 이 그림은 사후에 그려진 묘비명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모델의 신원이 어떠하든, 이 인물의 짧고 뭉툭한 코와 올라간 윗입술, 초록색 눈이 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요한 표정의 냉정하고 세밀한 묘사는, 그려진 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봐도 그를 눈앞에 대하는 듯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이 작품처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이 1433년의 초상 [붉은 샤프롱을 쓴 남자 Man in a Red Chaperon]의 주인공이다. 앞의 남자와 달리 머리에 쓴 천을 말아 올린 이 남성 역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침착한 표정이다. 액자에는 새겨 넣은 듯한 눈속임 효과를 내는 글씨가 그려져 있는데, 하단의 글씨는 ‘1433년 10월 21일에 얀 반 에이크가 나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서명과 제작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상단에 씌어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라는 글씨로, 화가가 다른 작품에도 사용한 적이 있는 자신의 좌우명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겸손과 자부심이 동시에 읽힌다.
이 작품은 모델이 관람자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헨트 제단화] 펼친 화면의 하단 좌측 패널에서 화면 밖 관람자를 바라보는 사람 역시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측되었던 적이 있다. 화가는 아내의 초상화와 짝(pendant)으로 자화상을 그린 적이 있으나, 현재는 아내 초상만 남아 있고 그의 자화상은 도둑 맞아서 행방을 알 수 없다. 얀 반 에이크의 초상화 속 인물이 특별한 감정을 표시하는 경우는 없다. 화가는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모델의 개성과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 |
숨겨진 상징, 빛나는 사물의 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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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 The Arnolfini Portrait]은 얀 반 에이크의 대표적인 초상화이자 다양하고 흥미로운 의미와 논쟁거리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반짝이는 황동 샹들리에와 붉은 침대, 예수 수난의 열 장면이 들어간 둥근 거울로 꾸며진 화려한 방 안에 두 남녀가 서 있다. 남자는 긴 모피와 큰 모자를 썼고, 여자는 모피로 목과 소매 둘레를 댄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폭이 60cm밖에 안 되는 작은 화면에 금속, 모피, 동물의 털, 다양한 옷감, 유리와 벽 등 서로 다른 재질을 가진 물건을 극도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재현한 화가 특유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두 모델의 신원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많은 해석이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이들이 이탈리아 루카(Lucca) 출신으로 브뤼헤에서 활동하던 무역상이자 금융업자인 지오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Giovanni di Arrigo Arnolfini), 지오반나 체나미(Giovanna Cenami) 부부이고, 이 그림은 이들의 결혼식 장면이라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림 안의 모든 사물은 ‘숨겨진 상징’이 되어 ‘그려진 혼인 증명서’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벗어놓은 신발은 이곳이 신성한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하고, 강아지는 부부가 지켜야 할 정절, 창가의 오렌지는 다산과 풍요 혹은 원죄와 구원, 샹들리에의 촛불과 방 전체가 비치는 거울은 이들의 생활이 전지한 하나님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부부 외의 두 명의 인물은 혼인 서약의 증인인 화가와 신부의 아버지이며, 거울 위에 씌어진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는 말도 이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유부녀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고, 남자도 통상 결혼식에서는 쓰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으며, 12세기부터 성사의 하나가 된 결혼이 교회가 아니라 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신랑 신부가 서로 오른손을 맞잡아 성사되는 결혼 형식(dextrarum iunctio)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이 그림이 결혼 장면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이럴 경우 방안의 사물들은 종교적인 상징이라기보다 세속적인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한 대상이 되며, 모델은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과시하고, 경건한 결혼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를 주문한 것이 된다. 또다른 해석으로 이들의 손 동작은 남편이 아내에게 그의 부재시 사업을 관장할 법적 권한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이들이 지오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 부부가 아니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그는 1447년에야 결혼을 해서 그림이 그려질 당시 미혼이었고, 모델이 된 것은 그의 형제인 지오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Giovanni di Nicolao Arnolfini)와 코스탄자 트렌타(Costanza Trenta) 부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코스탄자가 143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림은 아내 사망 일주기를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샹들리에에서 타고 있는 초가 남편 쪽에 있는 것 하나 뿐인 것도 이것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되는 그림의 의미도 흥미롭지만, 거울을 도입하여 그려진 화면 너머 관람자가 있는 곳까지 그림의 공간으로 담고 있는 대담하고 기발한 구성은, 17세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나오기까지 능가할 만한 작품이 없는 이 그림만의 혁신적인 면모이다. 또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실내의 한 구석을 배경으로 빛의 효과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은 베르메르의 회화에 그대로 이어지는 요소이다. 이 그림은 이후로 그려질 전신 초상화, 실내 정경을 담은 장르화, 정물화라는 세 가지 분야 회화 모두에서 큰 영향을 끼친 선구적인 작품이다. | |
플랑드르 사실주의적 풍경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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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의 종교화는 대부분 성모자상을 그린 것인데 그 가운데 1435년경에 제작된 [니콜라 롤랭 수상의 성모 Madonna of Chancellor Nicolas Rolin]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걸작이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남성이 이 작품을 주문한 니콜라 롤랭으로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부르고뉴 공국에서 선왕 장(Jean sans Peur)에 이어 필리페 3세를 위해 봉사하며 신임을 얻어, 공작으로부터 수상의 직위와 귀족의 작위를 하사 받은 공국 최고의 실력자이자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 그가 고향인 프랑스의 오텅(Autun)에 있는 교회의 가족 채플에 보낼 목적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도 그는 실제 생활에서처럼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 이전에 주문자는 [헨트 제단화]의 시장 부부처럼 성인들과는 구별되는 공간에, 성인보다 작게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롤랭은 성모자와 같은 공간에, 이들과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으며, 중재하거나 소개하는 수호 성인도 없이 홀로 성모자를 대면하여 예수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을 그가 기도 중에 본, 내면의 눈에 비친 환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얀 반 에이크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한 묘사가 주는 실물감은 그러한 해석을 감각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종교화에서 주문자 초상화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이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화면 중앙 아케이드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가지는, 사실주의적 풍경화와 관련된 가치이다. 서양 미술에서는 고대부터 인물이 중심이었고 풍경은 인물의 배경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졌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종교화 등에서 배경인 풍경의 의미가 커지기 시작해서, 16세기에 관념적인 풍경화, 17세기에 사실적인 풍경화가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케이드는 풍경화의 액자 역할을 하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독립적인 풍경화로 가는 과도기 단계를 보여준다. | |
강을 사이에 두고 수상의 뒤쪽으로는 그가 부르고뉴에 소유한 포도원을 연상시키는 언덕, 작은 성당, 광장 등이 보인다. 아기 예수 뒤편으로는 고딕 대성당과 첨탑이 밀집한 대도시가 펼쳐져 있다. 화가의 다른 그림처럼 이 작품에서도 일상적인 사물은 종교적인 상징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수상 뒤 풍경은 물질적인 지상의 세계, 예수 뒤편은 정신적인 천상의 세계를 의미하며 이 둘이 강 중앙의 다리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은 이러한 의미에 맞추어 했을 수도 있으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화가는 관찰과 사생에 근거한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선 원근법에 따라 사물은 멀수록 작아지고, 공기 원근법에 따라 원경의 사물은 흐리고 푸른 기운을 띠는 것으로 묘사되어 깊이감과 거리감을 전달한다. 강에 비친 그림자 표현에서는 수면에 비치는 광선을 효과적으로 포착한 인상주의적인 면모도 발견할 수 있다.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한 북유럽 미술의 원근법은 이탈리아 미술의 수학적 원근법과 비교하면 정확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그는 모눈종이 위에 정확한 비례로 작아지는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직관에 의한 원근법을 구사했다. 이는 인물의 표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해부학에 의거한 구조를 파악해서 인물의 현실감을 만들어내려고 한 데 비해, 그를 비롯한 북유럽 미술가들에게 사실성은 정확한 세부묘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에서는 화가의 붓으로 짠 옷감, 화가의 손길이 지문을 만들듯이 촘촘히 지나가 만들어진 피부, 만지면 뽑힐 듯한 모피 등이 살아서 저마다 다른 파장의 빛을 발하고 있다.
얀 반 에이크는 생전부터 이탈리아에서도 유화의 발명자로, 사실적인 초상화가로 높이 평가되었고, 그에게서 유화를 배워 이탈리아에 소개했다고 바자리가 기록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나 보티첼리, 기를란다이오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16세기 들어 영향력이 감소했다. 이 시기에는 북유럽 회화 전반이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 침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플랑드르에서 얀 반 에이크의 이름이 잊혀진 적이 없고,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의 기록에서 그는 북유럽 미술 전통의 설립자로 추앙되었고, 북유럽의 화가 대부분의 미술 수업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상해석에 집중되었던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최근 들어 기법, 후원, 사회적 기능 등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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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