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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의 살롱 출품작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모로는 이후 한동안 작품 발표를 중지하고 자기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재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칩거와 내성의 기간이 끝나고 1876년에 살롱에 출품한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Salome Dancing before Herod]와 [환영 Apparition]은 그의 후기 양식의 시작을 알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그림들에서 화가는 바로크 미술, 특히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명암대비와 임파스토(impasto)가 두드러진 화려한 양식을 선보였다. 인물이 작게 그려져 웅장한 느낌을 주는 배경의 건축물은 이슬람 사원의 정교하고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 비잔틴 교회의 황금빛 광채, 로마네스크 교회의 육중한 기둥, 고딕 성당의 아찔한 높이, 불교 사찰의 신비로운 분위기까지를 다 가지고 있는 무국적, 무시간적인 공간을 만들고 있다. 다시 한번 모로는 신화나 종교 이야기를 빌어 자기만의 환상의 세계를 빚어낸 것이다. [환영]에는 살로메에게만 보이는 세례 요한의 환영이라는 완전히 독창적인 모티브까지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
세례 요한과 살로메 주제는 복음서에 기록된 짤막한 일화를 근거로 하고 있다. 로마 제국 시절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그의 의붓딸 살로메는 춤을 잘 추어 왕을 즐겁게 했다. 이에 왕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소녀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말에 따라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 왕은 내키지 않았지만 맹세를 한 터라 요한을 참수시켰고, 그 머리는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그 다음에는 그 어머니에게 건네지게 되었다.
성서에서는 단순히 춤을 잘 추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던 살로메는 모로의 그림 속에서 이교의 여사제 혹은 관능적인 오달리스크 (odalisque)의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모로의 살로메는 세기말 남성들이 성적 충동과 죽음 충동을 투사하여 만들어 낸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femme fatale)’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에서 헤롯의 자리 위에 있는 에베소의 다이아나(Dianan of Ephesus)상은 수많은 유방으로 여성의 힘을 보여주고, 이에 압도된 듯 두 그림 모두에서 헤롯은 늙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배경의 한 자리에 물러나 있다. 화면에 보이는 표범과 스핑크스 이미지도 유혹자와 파괴자로서의 살로메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모로의 살로메가 유명해지고 세기말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데는 1884년에 조리스-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가 출판한, ‘데카당스(décadence)의 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설 [거꾸로 A Rebours]의 영향도 컸다. 이 소설의 주인공 데 제생트(des Esseintes)는 “상스럽고 비열함으로 가득한 가증스러운 시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으로 자신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탐미적인 엘리트주의자 댄디(dandy)다. “돈을 찾아 길을 헤매고 다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 화폭들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가졌던 그가 “고독을 치장할 요량으로 사들인 그림들”의 대표로 소개되는 것이 바로 모로의 이 두 작품이다.
“현학적 히스테리와 복잡한 악몽들, 나른하고도 잔혹한 영상”을 구하던 주인공은 모로의 그림 속에서 “마침내 자신이 꿈꿔왔던 초인적이고도 기이한 살로메의 모습이 실현된 것을 보았”고 그에 의해 모로는 “진정한 조상도, 가능한 후예도 없”는, “현대 예술에서 유일무이한 화가”로 칭송되며 댄디즘과 데카당의 수호성인, 상징주의 예술의 아버지로 등극하게 된다. 모로의 그림과 이에 대한 위스망스의 주목으로 이후 살로메는 말라르메의 시,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등 각 장르에서 남성을 파멸시키는 요부, 난폭한 아름다움의 화신, 사랑과 폭력의 주인공이 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낭만주의자를 사로잡았던 동방의 화려함과 잔혹함, 관능성에 모로의 [살로메]는 초자연적인 신비감과 불길한 공포감을 더했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극단화한 낭만주의는 사적인 상징과 기호로 가득 찬 상징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의 실패 후 지식인 사회에 퍼진 정치에 대한 환멸과, 천박한 물질주의가 만연한 “끔찍한 상인들의 세계”에 대한 염증이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그 어딘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술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영적인 가치를 지킬 마지막 보루로 신성화되었다. 이들에게 예술은 현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삶보다 예술을, 자연보다 인공을 선호했고 여기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 탄생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