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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 감상

테마로 보는 미술: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 귀스타브 모로

작성자파랑하늘|작성시간11.01.18|조회수822 목록 댓글 0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는 미술사의 중요한 과도기였던 19세기 후반에 프랑스 미술계에서 다리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화가다. 모로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서양 미술의 주류는 사실주의, 인상주의로 대변되는 ‘동시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 중심의 미술’에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와 멀리는 추상 미술에까지 이어지는 ‘화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표현 중심의 미술’로 이행했다.

 

모로 미술의 바탕이 된 것은, 그가 되살려낸 낭만주의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피코(François-Eduard Picot)의 제자로 미술 수업을 받던 시절, 그가 특별히 좋아했던 화가는 들라크루아였다. 과거와 이국,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중요시했던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는, 미술학교의 아카데믹한 훈련과 함께 모로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다. 모로에게 영향을 준 또 한 명의 화가는 앵그르의 제자였던 샤세리오 (Théodore Chassériau, 1819-56)다. 모로와 마찬가지로 들라크루아의 세계에 매혹되었고 그처럼 북아프리카를 여행하기도 했던 샤세리오는, 앵그르의 드로잉에 들라크루아의 주제와 색채를 더하여 관능적이고 화려한 화면을 구성했다. 사셰리오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모로는 자신과 7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이 화가를 스승으로 생각했고, 둘은 이웃에 살며 가깝게 지냈다.

 

 

되살려낸 낭만주의

모로는 1850년대부터 살롱에 출품하고 정부 주문을 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다룬 주제는 종교와 역사, 신화 등이었고 양식적으로는 들라크루아와 샤세리오의 영향을 보였다. 1895년 살롱에 출품한 [아르벨라 전투에서 도망치다 지쳐 샘에서 물을 마시는 다리우스 Darius, Fleeing after the Battle of Arbela, Stops, Exhausted, to Drink in a Pond]는 이 시기 작품의 하나다. 이 작품에는 알렉산더 대왕과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주하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라는 낭만주의풍의 감상적인 주제가, 샤세리오를 연상시키는 관능적인 분위기로 그려져 있다.

 

활동 초기 그의 작품에 대한 평은 나쁜 편이 아니었으나 모로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낭만주의의 극적인 언어를 고전주의적인 이상미와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했는데 이것이 큰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1856년에 샤세리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모로는 크게 상심했고, 이듬해에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르네상스 때부터 이탈리아는 미술학도를 작가로 만든 ‘유럽 미술가들의 학교’와도 같았는데,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워간 것은 저마다 달랐다.

 

2년여의 이탈리아 체류 기간 동안 모로는 다른 화가들처럼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시에나, 밀라노 등 미술의 성지에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만테냐, 고촐리 등 대가의 작품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가 이탈리아 미술에서 얻은 것은 미술의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열렬한 믿음이었다는 점이 특별하다. 또한 그는 미켈란젤로의 인물이 “자신의 동작을 의식하지 않고” 있으며 “이상적인 몽유병의 자세로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는 ‘무기력의 아름다움(beauty of inertia)’을 창조한 작가의 눈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아르벨라 전투에서 도망치다 지쳐 샘에서 물을 마시는 다리우스] 1895년
캔버스에 유채, 245×165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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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캔버스에 유채, 206.4×104.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고요하고 신비로운 세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모로는, 과거의 거장과 선배 화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여 만든 양식을 선보인 1864년 살롱 출품작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Oedipus and the Sphinx]로 명성을 얻었다. 테베의 길목을 지키고 앉아 지나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가, 그림의 중심에서 오이디푸스 와 대면 중이다. 전경에는 오이디푸스이전에 스핑크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의 시체가 보인다. 후경에는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맞춘 후에 스핑크스가 뛰어내려 자결을 하게 될 절벽이 보인다.

 

그림의 섬세한 윤곽선과 단단한 모델링은 고전적인 미술, 특히 만테냐와 벨리니의 영향을 보여주고, 샤세리오를 통해 영향을 받은 앵그르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그러나 다른 고전적인 기법의 작품들과 달리 작품의 분위기는 뭔지 모르게 불길하고 으스스하다. 신화의 이야기로 유추해보거나 같은 주제를 다룬 앵그르의 [스핑크스]와 비교해 봐도 모로의 그림은 기이한 면이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오이디푸스에게 매달린 스핑크스는, 그를 해치려고 하는 것도 같지만, 유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핑크스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없는 오이디푸스는, 그녀에게 매혹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괴물을 혐오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로가 그린 그림 속 신화, 종교, 역사 주제 이야기는 항상 원래의 모습과 조금 다르게 그려졌다. 모로는 완성작에 비해 예비 드로잉과 미완성 습작이 누구보다 많은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화가였다. 또 작품을 위해 문학, 철학, 고고학뿐 아니라 신지학, 신학, 고대 신화도 공부했고 의상이나 건축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과 자료는 그림의 주제가 된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고증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그는 서로 다른 맥락에 속할 자료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배합하여 지극히 주관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모로는 평생 독신으로, 어떤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고 은거에 가까운 삶을 살며 작업에만 몰두한 개인주의자였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가 서울에 있는 집의 서재 현판으로 ‘문을 닫아 걸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라는 뜻의 글을 써 붙였었는데, 모로가 은거를 했던 장소도 파리 시내에 있던 그의 집 작업실이었다. 그는 정치, 사회적 격변의 한복판인 19세기 후반의 파리에서 태어나 활동하면서도, 집밖의 현실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실주의와 인상파 그림 속에 그려진 시끄러운 일상과 대조되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며 그 안에서 살았다.

 

 

양성구유적 인간, 예술적인 성

모로는 한가지 주제에 오랜 기간 동안 몰두하곤 했는데, 오이디푸스는 1860년대에 그가 탐구한 주요 주제였다. 그는 이 주제를 통해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정신과 물질 등 대립되는 개념을 상징적으로 화면에 담고자 했다. 동시에 그의 그림에서는 관습적인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가 그린 오이디푸스도 그러했지만 1865년 작품 [이아손과 메데이아 Jason and Medea]에는 남성과 여성의 인체가 거의 차이가 없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양성 구유적(androgynous)인 모습의 인간상은, 모로 뿐 아니라 19세기 말의 예술가들이 전통적인 도덕을 거부하는 하나의 태도였다. 확연히 구별되는 남성과 여성, 단순한 이분법은 혼란스런 세기말의 예술가를 만족시키기는 너무 통속적이었고, 이들에게 모호한 성은 곧 예술적인 성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는, 금양모피를 지키는 용을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의 약을 이아손에게 주어, 그가 금양모피를 구하고 고향 테살리아로 돌아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모로의 [이아손과 메데이아]에 양의 머리가 기둥에 묶여 있고, 용으로 추정되는 동물이 이아손의 발치에 보여 이러한 줄거리를 암시하나, 이야기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모로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정교한 세부로 가득 채워진 장식적인 화면의 아름다움이다.

 

[이아손과 메데이아] 1865년
패널에 유채, 204×115.5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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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1865년
패널에 유채, 154×99.5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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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로서의 예술가

금양모피를 구하기 위한 이아손의 모험에 함께 한 아르고호 원정대(Argonauts)의 일원이었던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상과 지옥에서 두 번이나 잃은 후 비탄에 잠겨 세월을 보냈다. 그후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에 혹은 아폴로와 가까운 관계인 까닭에 그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흥분한 여성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사지가 절단되었다. 강에 버려진 그의 머리와 리라는 떠내려 가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모로의 [오르페우스 Orpheus]는 이 머리와 리라를 거둔 트라키아의 처녀를 아련한 죽음, 고통, 그리움의 분위기 속에 보여주고 있다.

 

모로 이후에 오르페우스는 세기말의 상징주의를 매혹한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아폴로에게서 음악을 배운 음악의 창시자인 동시에 신비주의 종교인 오르페우스 밀교의 사제였다. 그의 죽음은 예술가의 자기 희생 혹은 예언자의 순교로 해석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오르페우스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리얼리즘이 그리는 ‘단순한 사실’을 사소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본 상징주의자들에게 작가의 임무는,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그 이면의 의미를 보는 것이었다. 외관 너머의 리얼리티를 보는 이러한 눈, 특별한 통찰력을 지닌 예술가는, 신의 뜻을 이해하고 이를 전달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 맥락에서 상징주의 화가들 일부는 자신들을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말인 나비(Nabis)라고 부르기도 했다.

 

 

댄디즘과 데카당스의 수호성인, 상징주의의 아버지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44×104cm, 해머 미술관, LA

[환영] 1876년
종이에 수채, 106×72.2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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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의 살롱 출품작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모로는 이후 한동안 작품 발표를 중지하고 자기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재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칩거와 내성의 기간이 끝나고 1876년에 살롱에 출품한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Salome Dancing before Herod]와 [환영 Apparition]은 그의 후기 양식의 시작을 알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그림들에서 화가는 바로크 미술, 특히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명암대비와 임파스토(impasto)가 두드러진 화려한 양식을 선보였다. 인물이 작게 그려져 웅장한 느낌을 주는 배경의 건축물은 이슬람 사원의 정교하고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 비잔틴 교회의 황금빛 광채, 로마네스크 교회의 육중한 기둥, 고딕 성당의 아찔한 높이, 불교 사찰의 신비로운 분위기까지를 다 가지고 있는 무국적, 무시간적인 공간을 만들고 있다. 다시 한번 모로는 신화나 종교 이야기를 빌어 자기만의 환상의 세계를 빚어낸 것이다. [환영]에는 살로메에게만 보이는 세례 요한의 환영이라는 완전히 독창적인 모티브까지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

 

세례 요한과 살로메 주제는 복음서에 기록된 짤막한 일화를 근거로 하고 있다. 로마 제국 시절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그의 의붓딸 살로메는 춤을 잘 추어 왕을 즐겁게 했다. 이에 왕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소녀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말에 따라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 왕은 내키지 않았지만 맹세를 한 터라 요한을 참수시켰고, 그 머리는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그 다음에는 그 어머니에게 건네지게 되었다.

 

성서에서는 단순히 춤을 잘 추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던 살로메는 모로의 그림 속에서 이교의 여사제 혹은 관능적인 오달리스크 (odalisque)의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모로의 살로메는 세기말 남성들이 성적 충동과 죽음 충동을 투사하여 만들어 낸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femme fatale)’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에서 헤롯의 자리 위에 있는 에베소의 다이아나(Dianan of Ephesus)상은 수많은 유방으로 여성의 힘을 보여주고, 이에 압도된 듯 두 그림 모두에서 헤롯은 늙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배경의 한 자리에 물러나 있다. 화면에 보이는 표범과 스핑크스 이미지도 유혹자와 파괴자로서의 살로메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모로의 살로메가 유명해지고 세기말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데는 1884년에 조리스-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가 출판한, ‘데카당스(décadence)의 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설 [거꾸로 A Rebours]의 영향도 컸다. 이 소설의 주인공 데 제생트(des Esseintes)는 “상스럽고 비열함으로 가득한 가증스러운 시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으로 자신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탐미적인 엘리트주의자 댄디(dandy)다. “돈을 찾아 길을 헤매고 다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 화폭들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가졌던 그가 “고독을 치장할 요량으로 사들인 그림들”의 대표로 소개되는 것이 바로 모로의 이 두 작품이다.

 

“현학적 히스테리와 복잡한 악몽들, 나른하고도 잔혹한 영상”을 구하던 주인공은 모로의 그림 속에서 “마침내 자신이 꿈꿔왔던 초인적이고도 기이한 살로메의 모습이 실현된 것을 보았”고 그에 의해 모로는 “진정한 조상도, 가능한 후예도 없”는, “현대 예술에서 유일무이한 화가”로 칭송되며 댄디즘과 데카당의 수호성인, 상징주의 예술의 아버지로 등극하게 된다. 모로의 그림과 이에 대한 위스망스의 주목으로 이후 살로메는 말라르메의 시,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등 각 장르에서 남성을 파멸시키는 요부, 난폭한 아름다움의 화신, 사랑과 폭력의 주인공이 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낭만주의자를 사로잡았던 동방의 화려함과 잔혹함, 관능성에 모로의 [살로메]는 초자연적인 신비감과 불길한 공포감을 더했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극단화한 낭만주의는 사적인 상징과 기호로 가득 찬 상징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의 실패 후 지식인 사회에 퍼진 정치에 대한 환멸과, 천박한 물질주의가 만연한 “끔찍한 상인들의 세계”에 대한 염증이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그 어딘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술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영적인 가치를 지킬 마지막 보루로 신성화되었다. 이들에게 예술은 현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삶보다 예술을, 자연보다 인공을 선호했고 여기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 탄생한 것이다.

 

 

보석 같이 장식된 화려한 화면

[유니콘] 1885년
캔버스에 유채, 115×90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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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는 1880년을 끝으로 살롱에는 작품을 내지 않고 이전의 주제들을 변주한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대부분 완성을 하지 못했다. 1879년부터 1886까지는 [인류의 생애 Life of Humanity]라는 제목의 연작에 매달려, 아담 이래 인간의 역사 전체를 그림으로 담고자 했으나 미완성에 그쳤다. 소형 수채화나 유화는 꾸준히 제작, 판매되었고 1883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1884년에는 함께 생활하던 모친이 사망했고, 이듬해에 그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이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렘브란트 작품에 대해 연구를 했다. 1888년에는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890년에는 25년간 연인 사이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진 뒤로(Adelaide-Alexandrine Dureux)가 사망했다.

 

모로가 그린 여성들은 섬세한 무늬로 짜인 옷감으로 치장하거나 반짝이는 보석 장신구를 걸치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1885년 작품인 [유니콘 The Unicorns]은 그런 여성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림 표면 자체가 보석이 박힌 듯한 마티에르(matière)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런 질감을 만들기 위해 물감을 많이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뿐 아니라 캔버스를 긁고 문지르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림에 유니콘과 등장하는 옷 입은 여성과 누드 여성의 대비는 티치아노의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과 같은 사랑의 알레고리화에 등장하는 도상이다. 모로는 알레고리의 전달보다 신비로운 분위기, 보석 같이 장식된 화려한 화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더 기울였다. 신화 속의 유니콘과 우아한 의상을 입은 고딕 시대의 공주가 모여 중세의 기사도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들의 뒤로 펼쳐지는 배경은 비잔틴의 풍광과 고딕 시기 유럽 어딘가를 뒤섞은 듯한 꿈과 같은 이미지이다.

 

 

신적인 것에 참여하고 싶어한 열망의 무기력한 아름다움

말년에 완성한 몇 안되는 작품이자 그의 마지막 대작은 1895년 작품 [주피터와 세멜레 Jupiter and Semele]이다. 주피터의 애인 중 하나인 세멜레는 바쿠스를 잉태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유노의 꼬임에 넘어간 세멜레는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받은 후에 주피터에게 ‘진짜 주피터라면 영광스러운 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 위풍당당하게 벼락까지 차고 와서 안아달라’는 요구를 했다. 헤롯의 경우처럼 뒤집을 수 없는 맹세 때문에 주피터도 마지못해 약속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신의 광휘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세멜레는 타죽고 말았다. 죽는 순간 뱃속의 아기는 꺼내 제우스가 허벅지에 넣고 달을 채운 후 꺼내 머큐리에게 기르게 했다.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신화의 이야기 중 세멜레가 죽어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은 제우스와 그의 무릎에 비스듬히 누워 죽어가는 세멜레는 그림의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모로가 좋아한 바그너의 오페라 무대 같이 꾸며진 화면에는 온갖 양식이 혼합된 화가 특유의 호사스런 건축물 이외에도, 줄거리와 무관한 무수한 등장인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들은 모로가 그리스 신화, 인도와 이집트의 밀교 전통 등을 원천 삼아 창조한 세계에서 슬픔과 죽음, 성적인 능력과 영원한 힘 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이국적인 색채로 신비로움이 더욱 강조된 화면에서 세멜레를 위시한 양성 구유적 형상의 수많은 인물들은 신적인 것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열망과, 동시에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아름다운 무기력(beautiful inertia)’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1892년에 모로는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는 66세로 우리나라의 경우 정년 퇴직을 했을 나이이다.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그에게서 새 세계를 열 미감을 발견했으나, 정부나 아카데미는 그를 고전적인 역사화가로 본 것이다. 모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드로잉은 구식 아카데미즘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모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문학적이라고 하거나 상징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고 끝까지 독립적인 개인주의자로 남았지만, 자신의 과도기적 역할에 대해서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스승으로서의 그는 인기가 많았고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기 방법을 고집하기보다 제자들이 독자적인 길을 찾아가도록 격려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야수파의 마케(Albert Marquet)와 마티스(Matisse), 벨기에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 크노프(Fernand Khnopff) 등 뛰어난 화가들이 많았는데 모로가 특히 아끼던 제자는 루오(Rouault)였다.

 

1895년에 모로는 파리의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자기 기록과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72세가 된 1898년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화가의 집을 개조한 모로 미술관(Musée Gustave Moreau)은 1902년에 공식적인 국가의 미술관이 되었고, 루오가 초대 관장을 맡았다. 이 미술관에 자주 왔던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느끼는 것만을 믿는다”고 한 모로가 창조한, 어디에도 없는 세계는 초현실주의자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말기에 모로는 [색채 연구] 연작을 통해 표현주의적이고 대담한 화면을 선보였는데, 이러한 요소는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와 유럽의 타시즘(Tachisme)의 시각에서 선구적인 업적으로 재평가되었다. 


[주피터와 세멜레] 1895년
캔버스에 유채, 212×118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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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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