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보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후기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어렵습니다.
그림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다고 조금 고급스럽게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제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런 작품들 중에 간혹 이야기가 듬뿍 담긴 것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용기를 내 봅니다. 폴 세뤼지에 (Paul Sérusier / 1864~1921)의 작품도 제게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시골길의 역마차 The Stagecoach Road in the Country with a Cart / 1903
산 모퉁이를 돌아 역마차가 나타났습니다. 길을 따라 세워져 있는 전봇대 사이로 느릿느릿 오고 있는 역마차는
급할 것이 없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전신줄을 타고 달리는 소식에는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요? 화가의 눈에 산비탈의 땅은 붉은 포도색으로, 마차가 달리는 길은 노란색으로 다가 왔던 모양인데,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땅이라고 다 같은 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한 가운데 서 있는 전봇대가 시선을 아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봇대를 중심으로 화면이 나뉘는 느낌인데,
아마추어인 제게는 전봇대를 뽑아 버리거나 한 구석으로 몰았으면 훨씬 더 좋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화가의 속마음을 도대체 알 길이 없군요.
세뤼지에는 파리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향수 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는데,
아버지 덕분에 그는 금전적인 어려움 없이 미술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럴 때 보면 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돈이 문제입니다. 열 한 살이 되던 해 그는 리세 꽁도흐세에 입학, 고전 철학과 그리스어, 라티어, 과학을
배웁니다. 여려서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까 이때까지도 미술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 짜는 사람 The Weaver / 1888 / 72cm x 58cm
베틀의 모양은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베 틀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르군요.
예전 사진을 보면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베 틀에 앉아 계셨는데 이 작품 속에는 모자를 쓴 남자 어른이 앉아 있습니다.
직물을 짜는 것도 기능이고 보면 잘 하는 사람이 베 틀에 앉는 것이 맞지만 왠지 낯섭니다.
창 밖의 날씨가 어떻게 되어 가든 베 틀에 앉아 한 뼘 두 뼘 늘어 나는 천을 보는 것은 보람이겠지만,
답답한 가슴은 괜찮을까요?
열 아홉 살에 학교를 졸업하면서 세뤼지에는 대학에서 철학과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졸업 후 잠시 아버지 친구의 회사에서 근무를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2년 뒤,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합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었던 것 같은데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나이 때는 정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요.
퐁타방의 집안 풍경 Interior, Pont-Aven / 1888 / 92.08cm x 73.03cm
넋이 나간 듯한 여인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서 있습니다. 남자의 표정도 참담한 모습입니다.
주머니에 찔러 놓은 손은 그렇다고 쳐도 으스러질 듯 의자 모서리를 쥐고 있는 손에서는 분노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실내는 밖에서 들어 오는 빛으로 어둡지 않지만 벽난로에 타오르는 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실내 공기는 아주 차가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막막한 분위기는 무엇 때문일까요?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있고 남자가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는
광주리에 담긴 흰 천으로 싸 놓은 것, 혹시 그 것 때문일까요? 상상은 간혹 불길한 곳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이런 작품을 끝으로 세뤼지에의 화풍은 급격하게 변합니다.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세뤼지에는 선생님과 학생들 양쪽으로부터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의 기질이 사랑스러웠다고
하는데 남자에게는 사랑스럽다는 말보다는 뭔가 매력이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요.
1887년 세루지에는 브르타뉴를 여행, 자연주의 화풍의 작품들을 그립니다. 그 작품들 중 한 점이 1888년 살롱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888년 여름, 스물 넷의 세뤼지에는 브르타뉴에 있는 퐁타방을 찾습니다.
이 방문이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요?
브르타뉴 풍경 속의 엄마와 아이 Mother and Child on a Breton Landscape / 1890 /73.2cm x 60cm
아이를 안고 엄마는 얕은 언덕을 돌아 나가는 길 위를 걷고 있습니다. 녹색의 동산과 평원이 펼쳐진 곳, 모자가 가는
길은 붉은 색 길입니다. 초록과 붉은 색, 붉은 색과 검은 색의 대비가 강렬합니다. 엄마가 지나온 길은 넓지만
엄마 앞에 놓은 길은 좁습니다. 엄마가 지나가면 길이 반듯하고 넓어졌던 기억은, 그림 속 원근법으로 묘사된 이 길과는
별개입니다. 아이를 위해 길을 넓히는 엄마의 뒷모습이 아련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당시 퐁타방은 2년 전에 그 곳에 자리잡은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낭을 중심으로 화가들이 모여 들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퐁타방파’라고도 불렸는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구획주의 (클루아조니즘) 기법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면 외곽을 검은색으로 두르고 그 안에 원색에 가까운 색을 넣었는데, 그 기법을 그림으로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가로등이 있는 광장 Square with Street Lamp / 1891/ 47cm x 38.1cm
밤이 되자 가로등에 불이 들어 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은 별처럼 떠 있습니다. 어떤 별들은 나무에 앉았지만
또 다른 별들은 점차 멀어져 숲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그 별들은 더욱 노랗게 빛이 나겠지요.
여인은 숲으로 향한 길로 접어 들었고 남자는 또 다른 길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겼으니
표정이 보일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것이 더 편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밝았다면, 그래서 얼굴까지 다 보였다면,
그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 보는 눈동자까지 보였다면, 견디기 힘들었겠지요.
여름이 끝나 갈 무렵 퐁타방에 도착한 세뤼지에는 곧 이미 터를 잡고 있던 화가들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그 해 10월 초, 고갱은 특별히 그를 지도하면서 ‘베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서 원색을 사용, 자신의 감정을
키우는데 주저하지 말라’는 지도를 받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을 부수라는 조언이었죠. 세뤼지에는 고갱의
지도 아래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작은 작품을 하나 완성합니다.
고독 Solitude /1891/75cm x60cm
금방이라도 울 것 같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고인 모습이고 처진 입 꼬리에는 슬픔의 신음이 달려 있는 모습입니다.
언덕 풀 섶에 앉아 있는 여인은 고독하다기 보다는 슬픔을 안고 있습니다. 고독하면 슬퍼지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고독은 혼자라는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혼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죠. 주변의 풍경이 여인의 심란한
마음처럼 아무렇게나 널린 것 같지만, 화려한 색상으로 인해 여인의 외로움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인을 보는 저의 마음도 많이 안타깝네요.
마음 둘 곳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우선 일어나 조금씩 걸어 보세요. 같이 걷기도 하지만 혼자 걷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람 사는 것인데요 --
퐁타방에서 그린 작품을 가지고 세뤼지에는 파리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며 고갱으로부터 배운
새로운 이론에 대해 열성적으로 친구들에게 소개했는데, 새로운 이론에 동의하는 친구들과 격렬한 논쟁을 걸어 온
친구들로 반응이 나뉘었습니다. 사실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죠.
Laita 강변의 세탁부 Laundresses at the Laita River / 1892 / 73cm x 92cm
강 건너 밭의 모습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떠 올리게 됩니다. 추수가 끝난 밭은 붉은 색으로, 그렇지 않은 곳은
노랗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탁을 끝낸 여인들의 표정은 극도로 절제 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삶이 편안 하지 않은
여인들이 감정은 확실히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여인의 복장은 마치 ‘붙여 넣기’를 한 것처럼 닮았습니다.
빨래가 끝났으면 같이 걸어 갈 만도 한데 여인들의 방향은 각각입니다.
아주머니들, 혹시 빨래하다가 싸우셨어요?
세뤼지에가 고갱의 지도 아래 그린 그림을 친구들은 ‘부적’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가 외견상의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과 고갱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모여
모임을 만듭니다. 그들은 히브리어에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라는 말을 가져와 스스로를 나비파라고 불렀습니다.
나비파의 탄생입니다.
르 폴뒤에서의 석양 The Seat at Pouldu, Sunset / c.1889~1890
르 폴뒤(Le Pouldu)는 퐁타방 근처의 해안 마을입니다.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잔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의 반대편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몇 개의 바위섬들 위에
내려앉은 마지막 햇빛은 푸르고 푸른 바다를 건너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바위 속에 녹아 들어가
오늘 밤을 보내야겠군요. 바다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육지들 위에도 어둠이 내려 앉았습니다.
석양은 모든 것들의 호흡을 느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느려짐이 있기 때문에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을 석양에서
배웁니다.
나비파 멤버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이야기를 담았고 정기적으로 모여 미술 이론의 문제점, 상징주의, 초자연 과학 등을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돌아보면 20대 후반에는 세상을 새롭게 열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피를 먹고 산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끓는 피로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녹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역사는 조금 더 굴러가게 되지요. 나비파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캔디 장수 The Candy Merchant / c.1894
어렸을 때 집으로 오는 골목 입구에 센베 과자를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과자를 만드는 주인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면 집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과자 만드는 모습과 다 만들어진 과자가
유리창 너머 바로 앞에 수북이 쌓이는 모습을 지켜 봤습니다. 군것질이 쉽지 않았던 시절, 유리창 너머 센베 과자가 있는 가게는
제게 천국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은 비가 오는 데도 판을 걷지 못하고 캔디를 팔고 있습니다.
왕방울만한 코와 처진 눈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 느껴지는 여인의 삶이 그리 녹녹해 보이지 않습니다.
비는 떨어지는데, 캔디를 사는 사람은 없고 점점 더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습니다.
문득 쓰디 쓴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캔디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아주머니, 그 캔디 모두 얼마죠?
1889년과 그 다음 해 여름, 세뤼지에는 고갱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퐁타방을 찾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브르타뉴 사람들의 바쁜 일상에 많은 흥미를 갖게 됩니다. 1891년 고갱은 타이티로 떠 납니다.
갑자기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자 나비파의 활동도 지지부진 해집니다. 결국 나비파는 해체의 길을 걷게 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들은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하거나 직물 디자인, 테피스트리 작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비파의 미술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뜨개질 하는 사람 The Little Knitter / c.1896
뜨개질 하는 모습이 유럽에서는 정숙한 여인의 상징인 적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주 잘 차려 입은 여인이 뜨개질 하는 모습으로 있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뜨개질은 가난한 여인들의 몫이었습니다. 양을 돌보는 소녀나 바닷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손은
늘 뜨개질을 하고 있었죠. 그림 속 여인은 마치 기도를 하는 모습입니다.
바닥과 벽이 붙어 있는 것처럼 배경이 처리되면서 여인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감긴 두 눈은 깊은 기도에 잠긴 그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뜨고 있는 옷을 건네 줄 사람에 대한 기도일까요?
아니면 고단한 삶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간구일까요?
고갱이 떠나고 나자 세뤼지에는 브르타뉴에 화실을 마련 그 곳에 눌러 앉습니다. 그리고 점차 그의 작품에도 변화가
찾아 옵니다. 겨울에는 잠깐 파리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친구였던 루이 포의 극장에서 상영되던
연극의 의상 디자인이나 무대 장식 일을 했습니다. 친구들과의 전시회는 1890년대에 계속되었는데 가장 성공적인 전시회는
1899년에 개최된 것이었고 이 것이 나비파의 공동 전시회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가장 화려했을 때 문을 닫아 걸은 셈이죠.
저녁 Evening / c.1906 / 60cm x 72.7cm
건물 뒤로 해가 졌습니다.
언덕 위 건물들은 노란 하늘 밑 윤곽으로 남았고 그 위에 떠 있는 구름은 보라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가는 사람들 손에는 광주리가 들려 있는가 하면 손수레를 미는 손도 있고 곡괭이를 어깨에 걸친 손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대지를 상대로 했던 그들도 짙은 색으로 덮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 옆, 역시 우두커니 서 있는 무채색 건물 건너로 가로등에 불이 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어두워지기 전인데도 이미 사람 사는 곳은 어둠이 윤곽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녁은 빠르게 쓸쓸해 집니다.
가을은 더욱 그렇죠.
1895년 세뤼지에는 독일에 있는 친구로부터 독일 보이론 베네딕트 수도원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수도원에 도착한 그는 그 곳의 수도사로부터 새로운 미술 이론을 배우게 됩니다. 이미 신께서 모든 것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신께서 정한 비율과 크기를 인식하는 화가들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었죠.
제가 써 놓고도 참 어렵군요.
미망인 A Widow / 1919 / 92.5cm x 71cm
미망인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원 뜻은 좋지 않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저도 그렇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장식이 많지 않은 그림이지만 여인의 얼굴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우자를 떠나 보내고 혼자 남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힘 없는 퀭한 눈과 무릎에 놓인 책을 보면 그녀의 마음이 아직도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인이 앉아 있는 곳은 혹시 세상을 떠난 남편과 자주 왔던 곳은 아닐까요?
공동의 추억이 있는 곳을 혼자 찾아가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마치 건너편 산 속으로 흘러가고 있는 길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새로운 이론에 흠뻑 빠진 세뤼지에는 파리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 이론을 소개했지만 누구도 이 이론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세뤼지에는 친구들과 스스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학교에서 철학을 배웠던 그는 고갱에게 심취할 때도 그랬고 나비파 모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확고한 이론을 믿었고
그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수산나와 장로들 Suzanne and Elders / 81.1cm x 54.2cm
구약에 실린 수산나와 장로들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담았던 인기 있는 주제입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 보는 남자들의 관음증도 있고 위기에 처한 수산나를 다니엘이 구하는 극적인 장면도 있으니까
이야기로, 그림으로 묘사하기에 더할 나위 없습니다. 시기마다 화가마다 수산나와 장로들의 묘사가 다른데,
세뤼지에의 작품을 보고는 웃고 말았습니다. 수산나가 물에 발을 담그는 자세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제가 웃은 이유는 숨어서 보는 장로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우뚝 묘사된 장로와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장로의 모습은 여간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숨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나 여기 있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못된 장로들 이전에 멍청한 장로들처럼 보이거든요.
넘볼 걸 넘봐야 하는데 사실 멍청했지요.
그 후 세뤼지에의 작품 주제로 종교적인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계산과 측정 결과를 기초로 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미학 이론은 가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을 당황 시키기도 합니다.
1908년부터 파리에 있는 랑스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한 세뤼지에는 1921년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을 근거로
‘회와의 ABC’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합니다.
Laita강의 낚시꾼 Fisherman on the Laita / 1890.
언덕에 앉아 흐르는 강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잔잔한 강은 거대한 캔버스가 되어 하늘과 강 건너 아득한 곳을 한꺼번에 담았습니다.
간혹 잔 물결들이 캔버스를 흔들면 하늘과 산이 동시에 흔들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해가 산 너머로 졌고 물 너머 세상은
점차 한 가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빛이 남아 있는 하늘을 담은 물은 작은 원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몸은 이렇게 앉아 있지만 마음을 그 원에 얹는 것은 일도 아니죠.
어차피 낚시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앉아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세월을 보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1921년, 쉰 일곱의 나이로 세뤼지에는 모흘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현대미술로 넘어 오는 길 하나를 새로 만들었던 세뤼지에를 화가보다는 미술 이론가로 그의 업적을 평가하는 자료도
읽었습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그가 남긴 그림 속 이야기들이 더 좋더군요.
그림 보는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는 용기를 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