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까지도 여성이 전업화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살롱전의 모든 심사위원과 대부분의
미술 평론가들은 남자였습니다.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는 카페에서의 교류도 예술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인식
되었는데 여성 화가들에게는 폐쇄적이었죠. 결국 결혼을 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림을 그리는 소위 ‘일요일
화가’가 대부분의 여류화가에게 주어진 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뚫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전업 화가로
생을 마감한 여성이 있는데, 미국의 엘리자베스 너스 (Elizabeth Nourse / 1859~1938)입니다.
모성애 Motherhood / 87.63cm x 66.68cm / 1897
아이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그 동안 많이 봤지만 저의 숨을 잠시 멈추게 했던 작품은 이 것이
처음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을 때는 항상 엄마와 눈을 맞추죠. 저는 그 것이 영혼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늘 가슴이 뭉클한 까닭도 거기에 있겠지요. 젖을 잡고 있는 엄마의 동작이나
아기의 손과 발의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이 모자 앞에 제가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뽀얀 젖가슴과 대비되는
엄마의 검붉게 탄 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손이지만 가정 부드러운 손이기도 합니다.
너스는 신시네티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은행가였던 그녀의 집안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너스는 10남매 중 막내였는데 쌍둥이였습니다. 1865년 미국의 남북전쟁 와중에 너스의 아버지는 막대한 재정적인
손실을 입는 바람에 식구들은 각자의 길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쌍둥이 언니와 함께
등록금이 싼 맥미켄 디자인 학교에 입학합니다. 학교에는 노예들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그렸던 토마스 노블이
선생님으로 있었는데 너스는 그가 개설한 반에 입학한 최초의 여학생이었습니다.
최초라는 말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테네시 지방의 여인 Tennessee Woman / 94.62cm x 64.77cm / c.1885
고양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느라 베틀 앞에 앉은 여인이 잠시 하던 일을 멈췄습니다. 제가 아는 베틀은 방에
설치가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곳은 사방이 훤히 트인 곳이군요. 바느질과 베를 짜는 일은 지난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대표적인 노동이었지요. 서양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노동의 고단함에 지친 여인은 비록
짐승이지만 몸이 자유로운 고양이가 부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너스는 파리로 떠나기 전 여름이면 테네시를 찾곤
했는데 아마 그 때 그려진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7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난 후 교사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너스는 뉴욕에 가서 공부를 더 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쌍둥이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이 계획은 잠시 연기됩니다. 그 다음 해
가을, 너스는 뉴욕으로 가서 국립 디자인 학교에 몇 달 적을 두었지만 다음 해 고향 신시네티로 돌아오고 맙니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녀는 자신의 화실을 열고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비를 버는 한편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합니다.
엄마와 아이 The Mother and Child / 115.57cm x 81.28cm / 1888
잠이 든 아이를 내려다 보는 엄마의 모습이 고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잠자리는 아마 엄마의 무릎일
것입니다. 아이를 내려다 보는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시절과 사는 곳이 다르니 지금의 기준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잘 커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만은 확실할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도 무릎에 잠든 저를
저렇게 내려 보시며 많은 말씀을 가슴으로 전해주셨겠지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1887년, 스물 여덟이 되던 해 너스는 신시네티 산업 박람회에 수채화 4점을 출품하고 그 해 7월 언니 루이스와
함께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파리에 도착한 그녀는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 블랑제와 르페브르의 지도를
받는데. 훗날 평론가들 중에는 그녀가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더 배울 것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랑스 아카데믹 트레이닝은 누드부터 시작하는 드로잉에 중점을 두었는데 파리에 도착한 너스는 이미 확실한
드로잉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느질 수업 The Sewing Lesson / 119.38cm x 78.74cm / 1895
허리에 손을 척 얹고 엄마가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을 유심히 보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진지합니다. 19세기 화가들
작품 중에는 바느질 하는 작품이 유난히 많은데 바느질이 정숙한 여인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부모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기능만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태도도 함께 배우는 것이지요.
요즘은 바느질이 따로 배워야 할 특별한 기능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웬만한
것들은 직접 꿰맸었는데, 딸이나 아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은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지요. 연필 깎는 법처럼 바느질 하는 법도 잊어 버리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카데미를 떠나면 더 빨리 성장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던 너스는 몇 달 만에 아카데미 줄리앙을 떠났는데 그 해
살롱에 그녀의 그림이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살롱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는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이미 미국 중부의 일상적인 시골 모습을 그렸던 그녀는 그림 그리는 기술뿐 아니라 주제에 대해서도 밀릴 것이
없었지요.
튀니지의 모스크 The Mosque, Tunis / 66.5cm x 86.4cm / 1897
멀리 모스크의 둥근 지붕이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모스크 앞 공터에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그림을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림에서 흔히 말하는 원근법과 소실점이 마구 적용된 듯한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앞서 본 ‘엄마와 아이’의 작품 표현 기법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너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웅성거리는 시장의 생명력과 넘어가는 햇빛 속에서 말없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스크의 신성함를 대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러면 신성함 보다는 생명력이 펄펄 뛰는 곳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매리 커셋과 달리 너스는 다른 수입원이 없었습니다. 오직 작품이 팔려야 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중심이
된 화단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추는 것과 그림을 사 주는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너스는 일하는 여인들의 초상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모성애의 중요성과 아주 간단한 일상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런 주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녀의 작품을
구입하는 ‘팬클럽’같은 것이 만들어 졌습니다. 신시네티 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55년간 직접 생활비를 벌어 언니까지
부양했으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 개인의 치열함이 주변을 끌어 당기는 경우가 많지요.
명상 Meditation / 1902
아이를 나무 그늘로 데리고 나와 놀아 주던 엄마가 생각에 잠겼습니다. 손을 턱에 괴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나타내지요. 얼마나 깊은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지 아이와 놀기 위해 손에 쥔 풀꽃이 아이
눈 앞에 있는 것도 잊은 듯 합니다. 그런 엄마가 이상했는지 아이는 엄마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 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지내고 보니 아이들이 꼭 그렇게 크는 것은 아니더군요.
아주머니, 지금은 그냥 아이와 같이 놀아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1893년, 쌍둥이 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 너스는 미국을 찾습니다. 신시네티 미술관은 그녀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102점의 유화와 수채화, 파스텔화 등 다양한 작품이었는데 이 중 10점이 파리 살롱전에 걸렸고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는 3점이 메달을 받았습니다. 파리로 돌아 온 그녀는 그 후 미국을 찾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너스는 1895년 프랑스 미술가 협회 준회원이 되고 1901년 정회원이 되었는데 미국 여류 화가로는 그녀가 처음
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도 수 많은 상을 받았으니까, 그녀의 이야기를 뒤따라가는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새 신발 The New Shoe / 62.23cm x 51.44cm / c.1910
야, 신발 참 예쁘구나!
신발을 신기는 엄마의 표정도 좋지만 만져 보고 싶은 손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아이의 표정도 참 좋습니다.
그림을 보다가 같은 사물을 보고 함께 보고 있는 장면을 만나면 그냥 웃음이 납니다.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가지
여러 사람과 같이 걷게 되지요. 그 길 위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나란히 걷고 싶었지만 서로의 시선이 닿을까 봐
몸을 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하고 사는 법이 다르니 같은 방향을 보자고 윽박지를 일도 아니지요.
그래도 저렇게 시선을 같은 곳으로 향하며 살고 싶습니다.
자, 이제 새 신발을 신고 열심히 걸어 봐야지?
알아 듣지는 못하겠지만 꼭 이야기 해주고 싶습니다.
너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영예 중의 하나는 프랑스 정부가 뤽상부르 박물관 영구 소장품으로 그녀의 작품을 구입
했다는 것이겠지요. 당대 화가 중에서는 휘슬러와 윈슬러 호모, 존 싱어 서저트 정도가 이런 대접을 받았거든요.
파리에서 살았지만 너스는 러시아, 이태리, 네덜란드, 튀니지 등을 여행하면서 그 곳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풍경도 있었지만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그 곳의 시골 농부들과 엄마와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피카르디의 고기 잡는 소녀 Fisher Girl of Picardy / 118.7cm x 82cm / 1915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부는지 동생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어망을 든 누나는 고개를 들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짙은 구름과 부는 바람을 염두에 둔다면 바다의 모습이 어떨지 충분히 상상이 되지만 그녀의
몸 전체에는 바다로 향한 굽히지 않는 의지가 가득 차 있는 듯 합니다. 이제는 저에게서 자꾸 사라져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충만하군요. 동생의 손을 잡은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혹시 그림 속 소녀가 화가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을 남자들 중심인 화단에서 여성 전업 화가로 살아 왔던 길은 늘 저렇게
바람 부는 모래 언덕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곧추세우는 일이었겠지요.
겸손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너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후배 화가들은 그녀의 작품에 열광
했습니다. 확고한 신념과 주제를 보았던 것이죠. 시력이 나빠지면서 너스는 그녀가 추구해왔던 주제에 더욱 깊이
몰두합니다. 1920년, 너스는 예순 한 살의 나이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는데 1937년 다시 암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일흔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촛불에 비유한다면 그녀는 단 한 번도 사윈 적이 없는 늠름한 불꽃이 아니었을까요?
키스 The Kiss /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