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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이론

추사를 만든 붓 천 자루와 벼루 열개

작성자별빛|작성시간11.04.16|조회수284 목록 댓글 0

대한항공 기내지 『beyond』5월호 "추사 김정희 특집'에  실린 글입니다.

혹시 5월에 비행기 타실 분 있으신가요?

편안하게 앉으셔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편안하게 살지 못했던 김정희의 삶이지만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알려 주는 듯 합니다.

원고 매수의 제한때문에 삭제했던 원문을 싣습니다.

멋진 영화, "My way" 기억나시죠?

독불장군처럼 살았지만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

마치 추사 김정희 같아서 선곡했습니다.

누가 뭐라든 자기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뒷모습은 어떤가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조정육 

Frank Sinatra - My Way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추사를 만든 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

                                               

1) 허련, <김정희 초상화>

 

1.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고 금석학자이며 고증학자인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호가 완당·추사·예당·시암·노과(老果) 등이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두뇌가 명석했다. 학문적 성취 또한 두드러졌다. 7세 때 그가 대문에 써서 붙여 놓은 <입춘대길>이라 쓴 글씨를 본 박제가는 그의 스승이 되길 자처했다. 채제공은 그가 장차 명필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8세 때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서울의 월성위궁으로 온 그는 15세 때 한산 이씨와 혼인하지만 20세 때 사별하고 3년 후 예안 이와 재혼한다. 그 해에는 스승 박제가도 세상을 떠났다.

 

 1809년, 24세의 김정희는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맞이한다.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나는 친부 김노경의 자제군관으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자제군관이란 사신들이 자기의 동생이나 아들을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데려가 견문을 넓혀 주는 제도로, 국경이 폐쇄되고 사신만 국외를 드나들 수 있는 조선시대에 일반인이 합법적으로 외국에 갈 수 있는 제도였다. 그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학계의 양대 축이었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필담을 나누며 학문에 대해 묻고 답한다. 특히 78세의 옹방강은 조선에서 온 젊은 학자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에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조선에도 이런 영특한 인재가 있었단 말인가?” 평소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던 옹방강이었지만 추사에게 반해 자신의 막내아들 옹수곤을 불러 추사와 의형제를 맺게 할 정도였다. 추사를 만나던 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올 정도로 반겼던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했다. 연경에서 만난 수많은 학자들과의 만남은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서신을 주고 받으며 계속된다. 연경에서의 체험은 추사의 일생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2)김정희, <잔서완석루>, 종이에 먹, 31.8×137.8cm, 개인 소장

 

2.연경을 다녀온 후 제주도로 귀양가기까지의 활동기

 

조선에 돌아온 김정희는 고증학과 금석학을 바탕으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연경 학자들과 계속 교류를 하면서 수많은 책과 탁본과 그림과 글씨를 주고 받으며 자극을 받았다. 연경에 가는 조선 학자들이 있으면 그곳 학자들과 만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삶 속에서 실증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사구시설>이란 논문을 통해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진리 탐구 방법을 주장하여 북학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고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고 그의 인생은 승승장구할 것처럼 보였다. 그의 주변에는 권돈인이나 조인영같은 양반 사대부에서 신위, 오경석, 강위 등의 중인 계층,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과 백파 스님까지 수많은 문인묵객들이 포진해 있어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의 학문 세계는 날로 깊어졌는데《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의 세계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누구보다 실력이 출중한데다 앞길이 훤히 트여 있는 능력있는 한 남자를 생각해보라. 그의 태도가 어떠했을 것인지를. 규장각 대교를 시작으로 40세 때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떠났다. 이 때 비인현감이었던 김우명을 파직하게 된다. 김우명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집안 출신이었는데 그를 파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이었는 지는 몇 년 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의 귀양으로 확인하게 된다. 남다른 실력과 명문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에 중국 학계와의 연관을 가진 김정희의 강직함이 반대파들에게는 오만하면서도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던 것이다. 김정희에 대한 경계와 의심은 김노경의 유배로만 끝나지 않았다. 좀 더 확실한 희생이 필요했다.  

 

3)김정희, <단연죽로시옥>, 종이에 먹, 81×180cm, 영남대박물관

 

3.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두루 거친 김정희는 54살에 동지부사가 되어 연경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김정희와 평소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 대신 안동 김씨가 다시 집권하자 일이 불거졌다. 안동 김씨 일파의 중심 인물 김홍근이 10여 년 전 ‘윤상도 옥사 사건’을 꺼내 들어 김정희를 물고 늘어졌다. 김정희의 친한 친구 조인영이 우의정이 되고 권돈인이 이조판서가 된 마당에 김정희까지 중국에 다녀오면 용이 여의주를 얻는 격이 될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김정희와 그의 아우 김명희는 관직이 삭탈됐고 감옥에 갇혀 심한 문초를 받았다. 결국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조인영과 권돈인의 적극적인 변호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대신 제주도에 위리안치한다는 명령을 받아 유배길에 오른다. 위치안치란 죄인이 유배지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죄인이 있는 집 주변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가두는 것을 뜻한다. 그 때가 1840년 9월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연경에 가서 꿈에 그리던 벗들을 만나고 있을 시간에 그는 제주도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당시 제주도는 지금처럼 비행기만 타면 한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휴양지가 아니었다. 죽음의 섬이라 여겼다. 한양에서 제주도까지 의 길은 해남에서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족히 한 달은 걸리는 험하고 고달픈 길이었다. 게다가 작은 쪽배에 의지해서 가야 하는 뱃길은 언제든지 세찬 물살에 뒤집힐 수 있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김정희는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떠나는 유배길이 기막히고 서러웠다. 그러나 ‘추사체’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제주도 유배가 필수코스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제주도 유배를 떠나 전까지 김정희의 글씨는 그저 잘 쓴 글씨에 불과했다.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의 양아버지, 스승 박제가와 청나라 고증학을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학자들의 헌신적인 지도와 가르침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스승 옹방강에 대한 흠모는 지나칠 정도여서 글씨체까지 스승의 글씨를 본받으려고 열심히 따라했다.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는 박규수의 지적처럼 아직 자신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 김정희가 유배가기 전과 유배 후에 썼던 <무량수각>이라는 글씨를 대조해 봐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유배 가기 직전인 1840년에 쓴 <무량수각>은 글씨가 살지고 기름기가 흐른다. 고생을 모르고 살아 온 귀족 김정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6년을 보내고 나서 쓴 <무량수각>에는 불필요한 살집과 기름기가 빠지면서 뼈만 남은 듯한 단단함이 느껴진다. 글씨 속에 그 사람의 삶과 고뇌가 담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4)(왼쪽)김정희, <무량수각>,1840년, 해남 대둔사. 

 

5)(오른쪽), 김정희, <무량수각>, 1846년, 예산 화암사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귀하게만 자란 한양 양반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다리를 제대로 뻗을 수 조차 없는 좁은 방안에는 거미와 지네가 기어 다녔고, 먼지처럼 자잘한 벌레들이 날카로운 독침으로 쏘아대지만 피할 수조차 없었다. 제주도의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쉬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든 날,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아야했다. 이럴 때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공부와 글씨 쓰기였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던 그는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했으며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 속 필체를 연구했다. 추사체가 ‘괴이한 글씨’라는 평을 받으면서도 서법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개성이 느껴지는 것도 이런 단단한 공부가 뒷받침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는 화가 날 때에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에도 붓을 들었다.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었으며 어쩌다 한 번씩 받게 되는 반가운 편지와 소식이 올 때에도 지체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고 억지로 쓸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 그대로, 쓰고 싶은 대로 솔직하게 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로소 인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아도 몸부림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고통의 시간을 삭히고 삭혀 온전히 글씨 속에 쏟아 부었으며 포기하고 싶은 세월을 붓질로 버텨 나갔다. 그렇게 지탱해 온 고통스런 세월을 곰삭히고 곰삭혀 자신의 붓질 속에 담아냈다. 그 세월 속에서 부서질지언정 휘지 않는, 탱자나무보다 단단하고 꼿꼿한 글씨가 탄생했다. 자신의 날카로움을 더 날카롭게 갈고 닦아 한라산 고목처럼 뼈대만 남게 만든 글씨. 죽었으되 죽지 않고 물기만을 빼버린 채 천년을 버티고 선 주목 나무같은 글씨. 그것이 유배지에서 탄생한 김정희의 추사체였다. 추사체는 오랜 세월동안 익혀 온 대가들의 가르침에 자신의 처절한 체험이 녹아들어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한 자재로움을 얻었다. 유배를 오지 않고 인생의 밝은 면만 봤더라면 결코 쓸 수 없는 글씨였다. 오늘날의 추사체는 그렇게 탄생했다.  

 

6)김정희, <불이선란>, 종이에 수묵, 55×30.6cm, 개인 소장

 

4.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없애고 붓 천 자루를 닳도록 써

 

유배지에서의 거친 바람과 고독한 시간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탄생한 추사체.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른 추사체는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 도달했다. 촉나라의 예서법으로 썼다고 밝힌 <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매화와 같이 한 산에 머물기를 좋아한다)>를 보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추사체의 자유스러움을 엿볼 수 있다. ‘명(明)’자는 한 사람이 창문 커튼 사이에 서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 같고, ‘화(花)’자 대신 쓴 ‘화(華)’자는 매화꽃이 입을 크게 벌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듯하다. <죽로지실(대나무 화로가 있는 서재)>은 어떠한가. ‘죽로(竹爐)’는 글씨 속에서 손잡이가 달린 대나무 화로를 보는 듯하고, ‘실(室)’은 팔각 창문이 달린 방문을 보는 듯하다. 그림이 글씨고 글씨가 그림임을 보여준다. 

 

 7)<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 종이에 먹, 135.7×30.3cm, 간송미술관  

 

 8)<죽로지실>, 종이에 먹, 30×133.7cm, 리움미술관

 

물론 그는 글씨 쓰기를 결코 가볍게 하지 않았다. 한번은 친구 김유근이 자신의 벼루 뒤에 새기기 위해 김정희에게 글씨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친한 벗에게 글씨를 써 주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가지 글씨체를 연습했다. 특히 ‘발(發)’자는 마뜩치 않았는 듯 특히 여러 차례 연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예서를 좋아했지만 붓을 들기 전에 대상에 맞는 적합한 글씨체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사찰의 ‘대웅전’ 현판이나 ‘반야심경’같은 경전 혹은 비석의 묘비명을 쓸 때는 반듯반듯 행서를 선택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글씨를 쓸 때는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예서나 초서를 선택했다. 그는 한나라 때의 비석 글씨 309개를 베끼고 베끼면서 고전을 공부했고,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없애고 붓 천 자루를 닳도록 썼다고 고백한다. 후배 윤정현한테 호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은 후 윤정현이란 인물에 걸맞는 글씨체를 찾기 위해 고민하다 무려 30년 만에 글씨를 써서 주었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끈질겼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추사체를 만든 밑거름이었다.

 

 

 9)김정희, <김유근 벼루를 위한 글씨 연습>, 종이에 먹, 22.5×20.6cm, 보물 547호, 예산 김정희 종가

 

5.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8년 유배생활을 견딘 후 풀려난다. 그동안 제자 허련이 몇 차례 다녀갔고 초의선사도 다녀갔다. 제자 이상적은 김정희가 부탁한 책이라면 중국에까지 가서 그 책을 구해서 보내주었다.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한 자신에 대한 제자의 마음씀을 보고 감동한 김정희는 붓을 들어 <세한도>를 그렸다. 그런 시간들이 녹아 가슴속에 울분과 분노를 담고 떠난 유배길을 담담함과 평정심을 담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한양에 돌아온 그의 영향력이 여전한 것을 본 안동 김씨측에서는 궁중의 제례와 관련한 사소한 실수를 들어 65세 노인을 북청으로 유배 보낸다. 그의 친구 권돈인도 함께였다. 유배에서 돌아 온 김정희는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일흔한 살 되던 해는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으며 그해 10월에는 과천으로 돌아와 71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죽기 3일 전에 쓴 봉은사 <판전>을 보면 죽음을 앞 둔 사람이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않고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이 느껴진다.

 

10)김정희, <판전>, 77.0×181.0cm, 화엄경 경판 보관 전각의 현판, 서울 봉은사

 

누구보다 화려한 인생 편력을 거쳤으며, 금석학 연구의 지평을 넓힌 김정희. 그는 추사체뿐만 아니라 도서, 시문, 전각, 묵화 등에서 개성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불이선란><난맹첩>등의 불후의 명작도 남겼다. 그렇다면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으로 그가 쓴 문장을 감상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하자.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대련 옆에는 작은 글씨로 부연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이것은 촌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큼 큰 황금도장을 차고, 먹는 것이 사방 한 길이나 차려지고 시중드는 사람이 수백 명 있다 해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1)김정희,<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 종이에 먹, 129.5×31.9cm, 간송미술관

 

(/조정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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