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을 찾아서 8
부처님의 상징(3)-불상
2. 삼국시대 불상(2) - 보살상(1)
보살(菩薩)은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 sattva)의 줄임말로 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모든 이를 총칭한다. 소승불교에서 부처님은 오직 석가모니불과 미래에 성불할 미륵불 뿐이라고 하여 보살도 석가모니불이 성불하기 전의 호명보살과, 앞으로 성불할 미륵보살 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성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 뿐만 아니라,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대승법을 수행하는 이를 모두 보살이라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점에서는 소승불교에서의 아라한과 비슷하다. 그러나 지장보살처럼 모든 중생을 전부 제도할 때까지 스스로 성불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머무는 대비천제(大悲闡堤)라는 점에서 보살은 아라한과 차이가 난다. 보살의 역할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上求菩堤 下化衆生)’라고 하듯이 중생을 부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중간자적인 존재이다. 보살의 종류는 미륵, 관음, 대세지, 문수, 보현, 지장, 일광, 월광, 약왕, 인로왕, 허공장 보살 등 매우 다양하다.
조각으로 표현된 보살상은 그 모습이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자 모습을 형상화한 여래상과는 달리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귀인의 모습을 띤다. 이는 석가모니불이 출가하기 전 싯다르타 태자였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상의 모습은 손에 들고 있는 지물과 머리의 보관, 장신구 등을 보고 각 존명을 구분할 수 있다. 삼국시대 보살상을 천의(天衣)와 영락장식에 의해 분류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천의(天衣) 형식에 따른 분류
(1)X자형 천의
1)시무외인, 여원인 보살상
삼국시대 보살상 중에는 명문이 없어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매우 많다. 보살상은 천의 형식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어깨에서 내려온 천의를 몸 앞에서 X자형으로 걸친 형식이고, 두번째는 몸 앞에서 위 아래로 2단으로 걸친 형식이다. X자형 천의 형식의 보살상은 다시 시무외인, 여원인을 한 보살상과 봉보주보살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手印)은 보살상뿐만 아니라 여래상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특징이다.
<금동보살입상>(도1)은 머리에 세 개의 장식이 달린 보관을 쓰고 몸에는 X자형 천의를 걸치고 있다. 몸 양쪽으로 뻗친 천의의 표현도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인데 특히 이 보살상은 그 표현이 날카롭고 예리하다. 이런 표현은 <년가7년명금동여래입상>처럼 강직하고 힘이 넘쳐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보살상만 남아 있지만 뒷면에 광배를 끼웠던 광배촉이 남아 있고, 발아래 연꽃 받침 아래에도 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일광삼존불의 본존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살상은 원래 주존으로 모셔지기보다는 여래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일광삼존불의 협시보살로 배치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보살이 주존으로 모셔진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좌우에는 스님이 협시로 배치된다.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보살삼존상>이 좋은 예인데 이 <금동보살입상>(도1)도 리움의 예처럼 일광삼존불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살상과 비슷한 수인을 하고 X자형 천의를 걸친 작품으로 청양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소조보살입상>(도2)이 있다.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는 200여점의 소조 보살입상과 여러 점의 선정인 불좌상이 발견되었는데 조각 기법이 부드럽고 옷주름도 얌전하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표정은 금동과 흙이라는 재료상의 차이에서 오는 느낌일 수도 있으나 조형상의 매끄러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 <금동보살입상>(1)보다 시대적으로 약간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1)<금동보살입상>, 6세기, 높이 15cm, 국박, 보물333호
2)<소조보살입상>, 평양남도 원오리 출토, 6세기, 높이 17cm, 국박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보살상도 X자형 천의와 양쪽으로 뻗친 옷자락이 위의 보살상들과 공통된 형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머리 위에 쓴 보관에는 관대가 있고 관대에 딸린 관식이 양쪽으로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머리에 두른 관대와 관식은 백제에서 제작된 보살상의 특징으로 일본 호류지 몽전에 있는 <구세목조관음보살입상>(도21)과 대보장전의 <백제관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백제 아스카(飛鳥) 시대 일본 불교문화에 끼진 백제 미술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충남 부여의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3)과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도4)은 대표적인 예이다.
군수리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3)은 심엽형(心葉形)이라 불리는 하트 모양의 끝이 뾰쪽한 목걸이를 하고 있고, 천의는 몸 앞에서 X자로 교차하여 두 팔 위로 걸쳤는데 양쪽 어깨 위에는 천의를 고정시킨 듯한 둥그런 고리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 모습은 날카롭고 강한 고구려 불상에 비해 조금 더 통통하고 수줍게 미소짓는 표정이 훨씬 더 부드럽다. 옷주름과 천의의 늘어짐도 좀 더 정리되고 차분한 느낌이다. 양쪽 옷자락끝의 펼쳐진 모습이 좌우가 다른 점이나 뒷면이 평면적이고 광배촉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일광삼존불의 협시보살로 추정된다.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도4)은 머리에 두광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군수리 출토 보살상과 거의 비슷한 형식이다. 그러나 군수리 보살상과 비교해볼 때 선이 깊지 않고 입체감이 떨어지며 단순화되어 있어 군수리 보살상을 본 뜬 작품으로 생각된다. 시무외인, 여원인의 손 모양도 오른손과 왼손이 뒤바뀌어 있다. 이 보살상 역시 뒷면의 광배촉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 일광삼존불의 협시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시무외인, 여원인을 하고 X자형 천의를 걸친 보살상이 신라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형식이 삼국시대의 초기 보살상에서 발견되는 특징으로 삼국 중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신라에서 조성되기 전에 고구려와 백제에서 유행한 형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3)<금동보살입상>, 충남 부여군 군수리사지 출토, 백제6세기, 높이 11.2cm, 국립부여박물관, 보물 330호,
4)<금동보살입상>, 부여 신리, 높이 10.2cm, 국립부여박물관
2)봉보주보살
①국내의 봉보주보살
봉보주(捧寶珠)보살은 두 손을 위 아래로 하여 보배구슬로 보이는 보주를 손에 쥐고 있는 보살의 모습을 지칭하는데 현재 열 구가 넘게 알려져 있다. 봉보주보살상은 대부분 X자형 천의를 걸치고 있고 높은 삼면 보관을 쓰고 있는데 특히 백제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비교적 초기에 해당되는 보살상으로는 부여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도5)과 <태안마애불 보살입상>(도6),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소조봉보주보살 단편>(7)과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소조봉보주보살 단편>(도8)을 들 수 있다. <신리 금동보살입상>(도5)은 현재 마모가 심하여 그 형태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지만 두 손에 보주를 감싸고 있는 봉보부보살의 특징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아리에서 출토된 <납석제봉보주보살> 단편(도9)과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납석제삼존불>(10)의 왼쪽 협시보살상도 모두 이 시기에 해당된다. 그 밖에도 서산 용현리에서 발견된 <금동삼존불입상편>(도11)과 <서산마애불보살입상>(도12)도 백제 지역을 대표하는 봉보주보살상이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본존불의 협시보살인 <서산마애불보살입상>(12)은 천의가 X자형이 아닌 U자형인데 이런 형식은 7세기전반까지 계속되는 형식이다. <금동봉주보살입상>(도13)은 백제와 신라 영토 분쟁 지역인 거창에서 출토되었는데 X자형 천의 위에 또 다른 X자형 영락 장식이 첨가된 새로운 형식이다. 그러나 표정이 굳어있고 자연스럽지 못한 신체표현 등은 매우 추상적이면서 관념적이다. 출토지를 알 수 없는 <금동봉보주보살입상>(도14)은 차분하면서도 양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삼국시대 봉보주보살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준다.
5)<신리 금동보살입상>, 부여 신리 출토, 높이 9.7cm, 국립부여박물관
6)<태안마애불 보살입상>, 백제 6세기 말-7세기 초, 보물 제432호, 충남 서산 태안면 동문리
7)<소조봉보주보살 단편>, 부여 정림사지 출토, 백제 6세기 후반, 길이 24.0cm. 국립부여박물관
8)<소조봉보주보살 단편>, 부여 능산리사지, 높이 25.0cm, 국립부여박물관
9)<납석제봉보주보살 단편>, 부여 구아리, 높이 9.0cm, 국립부여박물관
10)<정림사지 출토 납석제삼존불>, 부여 정림사지, 높이 11.0cm, 국립부여박물관
11)<금동삼존불입상편>, 서산 용현리, 높이 7.6cm, 국립중앙박물관
12)<서산마애불 보살입상>, 백제 7세기, 높이 1.7m, 충남 서산 운산면 용현리, 국보 제84호
13)<금동보살입상>, 경남 거창 출토, 7세기 전반, 높이 22.5cm, 간송미술관, 보물285호
14)<금동봉주관음보살입상>, 백제, 6세기 후반, 높이 12.5cm, 국립전주박물관,
봉보주보살상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미래불인 미륵불로 보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태안마애삼존불상>의 중앙에 위치한 보살상에 대해서는 『법화경』의 「견보탑품」을 근거로 좌우의 여래를 현재불인 석가모니불과 과거불인 다보불로 보고 중앙의 보살을 미래불인 미륵불이라 해석하는 견해이다.
다른 견해는 관음보살로 보는 견해이다. 머리에 화불이 새겨진 관음보살의 도상은 중국에서는 수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말기에 확립되었고 그 전에 백제에서는 관음보살이 봉보주보살로 조성되었다는 견해이다. 백제 장인에 의해 조성된 호류지 몽전의 <목조구세관음보살입상>(도21)이 관음으로 불리는 사실도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또한 관음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보주를 들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②일본의 봉보주보살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두 나라 사이에 문화 교류가 있었다는 표현 대신 한국이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파해줬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혹은 552년)에 석가불 금동상 1구와, 번개(幡蓋:의례용 장식깃발), 한문으로 쓴 불경을 보내 일본의 불교문화가 시작된 이후 562년에는 일본인 화약사주(和藥使主)가 백제에 와서 불상을 직접 가져갔다. 584년에는 녹심신(鹿深臣)이 석조미륵상을, 좌백련(佐伯蓮)이 불상을 가져가서 도래 한국인 사마달등(司馬達等)과 소가 우마코(蘇我馬子)가 불전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일본서기』에는 587년 불교를 신봉한 소가 우마코가 배불파(排佛派)와의 전투에서 이겨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法興寺:飛鳥寺)를 짓게 되자 백제에서 건축가, 화가, 금속장인, 기와박사 등의 장인과 승려가 건너오고 불교용품도 다량으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찰건축에 전 부문에 걸친 장인들이 백제에서 건너가게 된 것이다. 596년 법흥사가 완성되고 대웅전에 불상을 안치하게 되었는데 그 불상의 제작자는 사마달등의 손자 도리(止利)였다. 한국 발음으로 ‘돌이’인 도리는 한국인 혈통으로 275.7cm에 이르는 청동대불을 606년에 완성했다.(현재는 화재로 손상을 입어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법흥사의 주지는 소가 우마코의 아들이었지만 실제 업무는 고구려 승려 애지와 백제 승려 예소가 맡았고 점안식 날에는 모든 제신들이 백제옷을 입고 축하의식에 참여했다. 많은 일본 승려들이 백제로 유학을 떠났고 백제의 승려 혜총(慧聰)과 고구려의 혜자(慧慈)가 법흥사에 머물렀다. 특히 혜자는 일본불교를 중흥시킨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관륵(觀勒)은 602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624년에는 승정(僧正)이 되었으며 일본의 비구승들이 백제에 와서 계법을 받고 돌아갔다. 이외에도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 백제가 일본 불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쇼토쿠 태자는 607년 백제건축가들에게 의뢰하여 호류지를 조성했다. 그러나 670년 호류지가 화재로 소실되자 백제인들에 의해 재건축된다. 특히 660년에 백제가 패망하자 백제 출신 건축가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불교 미술을 중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세계 여행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이라고 극찬하는 호류지가 백제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본이 수도를 나라(奈良)로 옮긴 710년까지 일본의 중요한 불교건축은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존하는 일본 아스카(飛鳥:522-645)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 <구다라관음(百濟觀音)>, 몽전의 <구세관음(救世觀音)>, <청동대불> 등이 모두 백제인의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호류지 금당석가삼존불>은 쇼토쿠 태자의 쾌유를 빌기 위해 조성되었지만 태자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623년에 완성되었다. 이 상의 광배 뒷면에는 ‘도리불사(止利佛師)’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도리양식’을 짐작해볼 수 있다. 즉 석가불과 양쪽 협시보살의 얼굴 표정이 매우 근엄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점과 완벽한 좌우대칭, 도식화된 천의의 표현 등이 ‘도리양식’으로 불린다. 특히 양쪽 협시보살(도15, 도16)은 <신리 금동보살입상>(도5)과 <태안마애불 보살입상>(도6)과 같이 관식이 늘어진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전형적인 X자형 천의를 두르고 있다. 이런 특징은 호류지 대보장전의 <금동봉보주보살입상>(도1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관식이 달린 높은 보관의 착용, X자형 천의, 좌우로 지느러미처럼 퍼지는 옷주름 등이 엄격한 도리식 양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15)<금동석가삼존상 우협시보살>, 623년, 93.9cm, 일본 나라 호류지 금당
16)<금동석가삼존상 좌협시보살>, 623년, 92.3cm, 일본 나라 호류지 금당
17)<금동봉보주보살입상>, 아스까 시대 7세기, 높이 56.7cm, 일본 나라 호류지 대보장전
호류지에는 크기가 작은 소형 불상들이 소장되어 오다가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호류지 헌납보물 48체불’이라 불리는 소형불들인데 그 중에서도 보살상 3구가 모두 봉보주보살상이다.(도18, 도19, 도20). 관식이 달린 높은 보관과 천의 표현, 두 손을 모아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 등이 지금까지 살펴봤던 백제봉보주형 보살상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아스카 양식의 보살상 중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도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18)<금동관음보살입상>, 651년, 호류지 헌납보물165호, 높이 22.4cm, 동경국립박물관
19)<금동봉보주보살입상>, 아스까 시대 7세기 전반, 호류지 헌납보물166호, 높이 23.3cm, 동경국립박물관
20)<금동봉보주보살입상>, 아스까 시대 7세기 전반, 호류지 헌납보물167호, 동경국립박물관
삼국시대 봉보주보살상 중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호류지 몽전 <목조구세관음보살입상>(21)이다. 녹나무로 제작된 이 보살상은 높이가 180.5cm로 생전의 쇼토쿠 태자를 그대로 새겼다고 전해진다. 구세관음상이 높이가 큰 것은, 키가 160cm가 안된 일본인과 달리 북방계 기마민족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를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뜨린 관식이 달린 청동관은 7세기 예술품의 화려한 세공기법을 보여준다. 관대는 고구려의 <맞새김인동문 금동관>(도23)의 형식을 연상시키며 광배의 화염무늬와 연당초문은 고구려와 백제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손에 보주를 든 형식이나 옷주름 표현은 지금까지 살펴 본 삼국시대 봉보주보살상 모습 그대로다. 높은 보관 곳곳에는 파란구슬이 박혀 있는데 천마총에서 출토된 <청색유리잔>(도24)처럼 당시에는 유리구슬이 매우 중요한 소재로 여겨졌었다. 이 구슬은 <구다라관음>의 보관에도 장식되어 있다.
『쇼토쿠 태자 전력』『성예초』『부상략기』에는 백제 위덕왕(554-598재위)이 부왕 성왕을 기려 구세관음상을 제작했다고 전한다. 이 구세관음상이 왜국에 건너가 호코지에 안치되고 쇼토쿠 태자를 기려 만든 호류지 몽전에 안치되어 성물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성왕은 죽은 뒤 일본의 쇼토쿠 태자로 환생했다고 전해진다. 성왕의 아들이고 위덕왕의 배다른 동생 아좌태자는 597년 왜에서 쇼토쿠태자와 두 아들 초상을 그려서 남겼다.
한반도에는 불행하게도 7세기 초의 단일품 목조조각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몽전의 <목조구세관음보살입상>(21)은 그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선조가 만든 위대한 예술품이 어느새 일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둔갑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 전통 예술과 불교미술품에 열정을 가지고 연구했던 어네스트 페놀로사(1853-1908)가 일본 고대 절의 소장품 조사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1천년동안 사람 눈이 닿지 않게 몽전에 보관된 <목조구세관음보살입상>(21)상을 보고 감탄한 페놀로사는 곁에 있던 오카쿠라 덴신(1862-1913)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그렇구나, 한국 것이구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본에서 역사왜곡이 본격화되기 전이었기에 가능한 얘기였을 것이다. 그 때 외국학자가 본 느낌 그대로 <목조구세관음보살입상>(21)은 일본 예술품이 아니라 7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계속)
21)<호류지 몽전 목조구세관음보살입상>, 아스까 시대 7세기 전반, 높이 214.5cm, 일본 나 라 호류지 몽전
22)<맞새김인동문 금동관>, 고구려, 높이 27.8cm, 평양박물관
24)<청색유리잔>, 천마총, 높이 7.4cm, 국립경주박물관, 보물 6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