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
2. 미니멀아트 - 절제의 미학
2-1. 미니멀아트의 발생의 배경
2-2. 미니멀리즘의 개념
2-3 미니멀아트의 특성
2-4.주요 작가와 작품의 특징.
3. 미니멀리즘 이후(Post-Minimalism).
4.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한국의 70년대 모노크롬 회화와의 관련성.
4-1.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한국적 변용
4-2. 일본 모노파와의 관계
4-3. 1970년대와 모노크롬의 관계.
5. 한국 모노크롬회화의 성과와 의미
5-1. 한국적 모더니즘의 출발로서의 모노크롬 회화와 백색
5-2. 평면으로의 환원
5-3. 동양적 환원의 미학
6. 결론
Ⅰ.서론
추상표현주의의 物性과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이론적 지원을 등에 업고서, 모더니즘 미술의 중요 사안으로 등장한 평면성과 사물성으로 인해, 회화만의 본성인 화면의 평면성과 환원주의(Reductionism)로 인한 물성의 강조는 이후 미니멀리즘(Minimalism)으로 치닫게되며, 이는 프리드(Michael Fried)와 같은 비평가에 의해 反예술로 규탄을 받게 된다. 이 글은 미니멀리즘 등장을 앞두고의 당시 배경과 미니멀리즘의 특성과 그에 반대하여 미니멀리즘을 예술이 아닌, 단순한 "사물-object"로 규정하고 비난했던 당대의 비평들을 고찰할 것이며, 또한 미니멀리즘이 항상 비난을 받게 되는 소위 연극성과 과정의 중요성이, 이후 과정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제 양상으로 연계되는 과정을 살필 것이다.
더불어 국내 화단의 경우, 동시대의 미술맥락에서 동질성과 변별력을 진단함으로써 모노크롬회화의 한국성 정립에 초점을 맞추며,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비평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모노크롬회화와 미니멀리즘의 관계를 고찰할 것이다.
나아가 형식주의 측면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가 갖는 당대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 상응관계는 어떠했는지 진단해 보려고 한다. 일본의 모노파와의 관계도 짚어 보고 모노크롬회화의 아이덴티티에 거론되는 동양적 세계관 및 한국적 정서에서의 백색을 통한 이념화도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모노크롬이라는 동일 패션으로 보아 "한국 현대미술의 획일화" 현상이이라고 비판해온 부분에서 작가들이 어떠한 기틀에서 출발되어 모노크롬이라는 공통된 범주를 지니게되었는지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단색 평면회화를 진단함에 있어서 〈19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전〉 (갤러리 현대, 1996년) 및 〈한국 현대미술, 평면회화 주소찾기전〉(성곡미술관, 1996)등 일련의 전시와 1996년 3월의 《월간미술》에서의 논의를 주요 텍스트로 삼고 있다.
2. 미니멀아트 -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은 둘 다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까지의 미국미술에서 나타났던 예술사조이다.
미니멀아트는 최소한의 조형수단을 사용하여 제작된 회화, 조각 등을 가리킨다. 1964년을 전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회화와 조각 사이의 모호한 영역에서 시작되어, 그 원리와 특징상 회화보다는 조각이 주를 이루었으며, 여기서의 조각은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이 아닌 사물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주장되었다. 형태 또는 그 제작과정이 지극히 단순하며, 작품의 배열과 작업원리에 있어서 개념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똑같은 단위체를 반복하여 구조와 형태에 있어서 환원성을 드러내는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술작품이 제시되는 사회적 상황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의 조각이 어떠한 사회적 상황 아래에 있는가를 분석하고, 사회적 상황이 생성하는 의미가 어떻게 예술작품의 의미에 관계하는가를 생각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념을 부정하고, 가장 객관적이며 동시에 가장 단순한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1)
이와 같이 예술이라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예술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특히 당시 미국화단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던 추상표현주의가 초자아를 표현하여 관객에게 호소하는 입장을 취했고, 팝아트가 문명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띠었던 데 반해, 이들은 엄격하고 비개성적이며 소극적인 화면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미니멀"이란 명칭은 영국의 비평가 리처드 월하임(Richard Wollheim)이 1965년 《아트매거진》지에 발표한 〈미니멀아트〉론에 처음으로 쓰여진 이래 보편화되었다. 미술에서 이 용어가 60년대 중후반의 미국미술의 일반경향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된 것도 윌 하임이 그 당시의 작품을 일컬어 "예술적 내용을 최소화"하는 것과 "예술작업을 최소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뒤샹의 레이디메이드 작품과 애드 라인하르트의 검은 그림들 같은 작품에서 예술내용들이 최소화되었다는 것과 예술가가 작업 혹은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평한데서 비롯되었다.2)
2-1. 미니멀아트의 발생의 배경
모더니즘의 몰락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를 분기하는 시점으로 보통 1967년을 상정한다. 어빙 샌들러(Sandler) 역시 67년을 전후로 하여 그 전을 사물성의 시대, 그 후를 비사물성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즉 67년 이후에는 모리스(Robert Morris)같은 미니멀리즘 작가들에 의해 과정미술(Process Art)등 일련의 비사물성이 두드러지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기점 위에 미니멀리즘이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까지의 미국 미술을 살펴보면, 1960년대 초 한편에서는 후기 회화적 추상 혹은 색면 추상, 다른 한편에서는 팝아트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1964년을 전후로 미니멀아트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칼 안드레(Carl Andre), 댄 플래빈(Dan Flavin)을 중심으로 미니멀 아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동안 미니멀리즘 내부로부터 탈 미니멀리즘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른바 포스트 미니멀리즘으로 불리운 다양한 경향들의 미술들은 미니멀리즘의 단순함, 엄격함, 재료의 단단함을 벗어나 1970년대에 다양하게 전개된다. 여기에는 과정미술, 개념미술, 대지미술(Land Art), 환경적 설치미술, 개념적 퍼포먼스 등이 포함되며, 이러한 경향들은 모두 "개념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2 미니멀리즘의 개념
이러한 미학의 개념은 본래 카시미르 말레비치(Malevich)와 마르셀 뒤샹에게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1913년경 절대주의의 대표자 격인, 말레비치의 최소화된 구성, 문자 그대로 미니멀한 작법 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모든 것은 모두가 회화가 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것은 공리적인 목적들로부터 이탈하고 재현적 요소가 최소화, 3차원의 요소가 배제된 예술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뒤샹의 레이디메이드는 "어떠한 오브제라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그는 예술적인 공예정신의 가치뿐 아니라 예술가의 손의 역할도 축소시켰던 것인데, 다시 말해서 수공적인 기술의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정신적 선택에 의해서 순전히 기능적인 물체들에 심미적 가치를 할애한 것이다. 이처럼 미술에 있어서 관습적으로 중요시 다루어지는 작가의 수공적인 기술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작가의 사고와 개념을 앞세운 것은 미니멀리즘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인 만큼, 뒤샹과 미니멀리즘과의 관계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제시한 것은 예술 제작이 형태들의 임의적이고 감각이 뛰어난 배치가 아닌 다른, 정신적인 것에 기반을 둘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정신성과 관련하여 미니멀리스트들은 몬드리안처럼, 예술은 제작실시 이전에 정신에 의해 완전히 고안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예술은 힘이며, 그 힘에 의해 정신이 그것의 합리적인 질서를 물건에 부여할 수 있었다. 미니멀리스트들의 이론이 명백함, 개념상의 엄격함, 꼼꼼함, 단순성에 대한 전념들이었던 반면에 "자기표현의 거세"는 뒤샹이 보여준, 표현보다는 내용과 작가의 개념을 대두시킨 것과 같은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추상표현주의의 독주를 견제하던 네오다다이스트들과 팝아티스트들은 주관의 배제와 획일화(팝아트의 경우), 추상표현주의 보다 기계적으로 균질화된 평면성을 앤디 워홀의 〈192개의 1달러 지폐 192 One-Dollar Bills 〉나 죤스의 〈깃발 Flag〉을 통해 제시하였다. 이들의 작업을 보면, 주관이 배제되었으며 기하학적 규격화와 반복 및 기존 이미지의 병치로 인해, 미술품과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즉 이와 같은 작품의 사물성 부각은 곧바로 미니멀리즘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된다.3)
미니멀리즘은 이렇게 사물성의 개념이나 비조각의 개념들을 이용하면서, 시각적으로 단순한 대신 이론적으로, 知的으로, 언어적으로 점점 더 복잡해졌으며, 미술의 범주에 도전함으로써, 미니멀리즘 이후 미술에 있어서 개념적 성격의 深化와 재료 및 조각영역의 확장, 탈모더니즘의 가능성 등을 열어주었다.
한편 개념미술은 예술의 창조적 과정이 예술가의 사고 그 자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예술가의, 그리고 인간의 개념 그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 될 수 있다는 이념의 예술학파이다. 개념미술에서 개념은 궁극적으로 대상물로서의 미술작품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미술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속해 있는 미술가의 개념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미술가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대상으로서의 미술이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 미술의 비물질화, 비시각화가 가능해지며, 이에 따라 양식이나 작품의 질 따위도 사라진다.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은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이 서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개념미술은 궁극적으로 작품의 사물성을 강조함으로써 미술대상의 제거 즉 미술의 비물질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배열과 작업원리에 있어 개념적인 면을 지닌 미니멀리즘과는 구별된다.4)
2-3 미니멀아트의 특성 - 조각을 중심으로
미니멀리스트들은 예술을 보다 정확하고 엄밀하며 체계적인 방법론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를 바랬다. 그들은 그 이전 세대인 추상표현주의의 가치를 전복하려 했다. 추상표현주의에선 조각양식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미니멀리스트들은 조각을 일련의 새로운 시각적 기준을 가진 것으로 대치하려는 목표를 전개한다. 미니멀아트는 회화와 조각사이의 모호한 영역에서 시작되어 그 원리와 특징상 회화보다는 조각이 주를 이루었으며, 여기서의 조각은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이 아닌 사물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대다수의 미니멀리스트들은 3차원적 물체를 구성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미니멀 조각이 활발하게 제작되고 그것이 논쟁의 초점으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1965년 조각가 도널드 저드의 〈특수한 사물들Specific Object〉과 영국 철학자 리처드 월하임(Richard Wollheim)의 〈미니멀 아트〉, 1966년에 로버트 모리스의 〈조각에 관한 노트 제 1,2부〉, 1967년에 미니멀 아트를 비판하는 미술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의 〈미술과 사물성〉이 각각 발표되었는데, 이러한 와중에서 미니멀아트는 그것이 모더니즘미술과 연계성을 지니는가 혹은 모더니즘의 극단의 현상인가, 아니면 단절인가 하는 논쟁에까지 휘말린다.
내용의 최소성, 작업의 최소성 등 미니멀 아트의 특성을 "ABC아트"라고 부른 바바라 로즈(Barbara Rose)는 "공허하고도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비 개성으로 인해 낭만적이고 자선적인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격렬하게 대립되는 양식"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밖에 마이클 프리드가 미니멀 조각을 가리켜 "리터럴리스트 아트" 라고 부르거나 루시리파드(Rucy R. Lippard)가 "거부의 미술" 이라고 부른 것 등 은 미니멀 아트의 특성 일부를 말해준다.
특성을 정리하면, 미니멀 조각은 첫째, 더 이상 나뉘어 질 수 없는 기본적인 기하학적인 형태들로 이루어진다. 입방체가 주를 이루며 단일한 형태의 경우 즉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형태"로서 이해되어 전체성과 통일성이 강조된다.
둘째, 작품내에서 동일한 단위들이 복수로 쓰이는 경우에는 대칭적이고 반복적이며 연속적인 배열을 갖는다. 이것은 작품내의 균형을 중시하고 각 구성 요소들간의 조화를 꾀했던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 즉 몬드리안식의 관계적인 구성방식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프랭크 스텔라와 도널드저드가 주장했던 비 관계적인 구도를 말한다.
셋째, 미니멀 조작들은 바침대 없이 바로 바닥에 놓이거나 벽, 천장 등 실제 공간을 이용한다. 도널드 저드는 1965년에 "3차원은 실제 공간이다. 3차원은 일루저니즘과 즉자적인 공간사이의 문제를 없앤다...실제 공감은 본질적으로 평평한 표면 위의 물감보다 더 강렬하고 더 특별하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필연적으로 관람자의 경험을 새롭게 하였다.
넷째로 미니멀 조각은 산업 및 공업적인 재료를 사용하며, 표면상의 굴절이나 작업의 흔적을 지니지 않는다. 비 미술적이고 비 전통작인 재료는 20세기초 콜라주가 시작된 이래 꾸준히 사용되어 왔으나 특히 미니멀 조각의 경우 재료의 물리적 속성과 그 것이 지닌 비개성적 특징이 강조되었다.
다섯째, 모두 작품에 자체의 즉자적인 사물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작품은 관찰되어지거나 비교되거나 서로 분석되고 사색되어져야 하는 많은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전체로서의 사물, 그것들의 특성이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모두 현존성이나 구체적 존재성에 의존하는 기본적인 형태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물은 그 자체말고는 무엇으로든지 제시 될 수 없었던 것으로 개념미술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여섯째, 종래의 미술이 문학적 혹은 심리적 이미지를 미술대상 안에 내재시켜 전달하는 것과 달리 , 미니멀조각은 그 내용을 미술대상의 밖에 위치시킨다. 그것은 단순한 형태의 사물을 물리적으로 배치하고 거기에서 관람자의 반응을 유도해내기 때문이다.5)
비판적 시각
사물성과 현존성은그린버그와 프리드같은 형식주의 비평가들이 미니멀 조각을 비판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현존성(presence)은 비 미술적인 것이고 사물성을 택한 것은 바로 연극이라는 다른 종류를 끌어들인 것이며 연극은 미술의 부정이라는 것이다. 프리드의 대표적 평문,「예술과 사물성 Art & Objecthood」(1967)은 제목 그대로 예술이 사물화 되어가는 성향에 대한 위기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이 사물화 되어간다는 것은 이미 모더니즘이 대두한 이후의 진전된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회화에서 평면을 수호하기 위해, 작업 방식에 있어서 기존의 일루저니즘을 제거하는 와중에서 자연히 평면화가 구축되어 가게 되었고, 그러한 평면주의는 이후 추상표현주의라든지, 그것에 대항하여 등장한 네오-다다나 팝아트에서도 엿보이는 성향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면자체의 평면성으로의 환원주의가 곧 사물자체로 둔갑했다는 비난이 프리드를 비롯한 평론가들이 내세우는 주장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사물자체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지지하는 프리드는 추상표현주의나 스텔라의 그림은 엄연히 회화적 관습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것은 예술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예술(art)은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모더니즘을 지칭하는 말이고, 사물(object)은 다름 아닌 미니멀리즘을 이르는 말로 쓰인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비평용어 중, 연극성(theatricality), 현재모더니즘 미술(presentness)과 그 반성, 현존성(presence)은 바로 작품들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이해하면 틀림이 없다.
먼저 현재성과 현존성에 대해 살펴 볼 때 그에 의하면 모더니즘 미술의 속성은 현재성인데, 그것은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감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둘은 물리적 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통해서 만난다는 것이다. 반면 미니멀리즘은 거리감을 중시한다. 말하자면 예술로서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작품을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작품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역할이 중요하고 작품이 놓인 상황을 읽어낼 시간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린버그나 프리드는 그러한 시간의 지속(duration)에 반대하여, 순간성(instantaneousness)을 중시한다. 그것은 순간을 통해서 작품을 총체적으로 경험하고, 그 작품에 대한 확신을 얻는 순간이며, 이것이 바로 현재성(presentness)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미니멀리즘의 현존성은 지속(duration)을 표출하며, 작품이 놓여진 상황에 대한 현존성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 프리드의 입장이며, 그처럼 현존성과 지속성의 강화로 인해,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상황과 관객의 역할이 강조되는 연극 같은 성격으로의 전향을 프리드는 못 마땅해 했던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작가들이 "회화의 위기"를 조장하게 된 것은 그들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띄는 조각적 속성 때문이기도 한데, 우선 최초의 미니멀아트의 성격을 보여준 스텔라의 초기 작품들 중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의 경우는 그 조각적 성격이 두드러진 경우일 뿐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강조된 물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스텔라의 경우는 이후 미니멀리즘 이후에는 공간적인 깊이감을 드러내는 평면도 입체도 아닌, 수학에서 말하는 프랙탈(fractal)이라는 "2.7 차원"의 공간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외에 이 부류의 대표작가들은 예외 없이 회화와 조각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칼 앙드레(Carl Andre)나 돈 저드(Don Judd)의 작품들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6)
2-4. 주요 작가와 작품의 특징.
미니멀 조각의 효시가 된 것은 1961년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 〈기둥〉이다. 이것은 베니어판으로 마들어 회색을 칠한 속이 빈 단순한 입방체로서 틀림없는 미니멀 조각이다. 이 작품이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무대 위에서 연기했던 퍼포먼스 도구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미니멀 조각이 연극적이라고 비난받은 것과 관련해 시사하는바가 크다. 1964년 그린화랑에서의 개인전 작품들도 베니어판으로 만들어 회색으로 채색한 7개의 단일한 형태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한 형태의 작품들은 다리처럼 놓여지거나 구석에 꼭 맞게 끼워지거나 바닥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화랑 공간 전체에 널려있어서 장소로서의 공간과 관람자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전시였다.
댄 플래빈의 〈블라디미르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는 형광등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대칭과 수열적인 조합을 선호하였다. 일정한 단위 혹은 길이의 차가운 형광등들은 여러 가지로 결합되어 벽의 구석이나 가운데 부착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고정된 형광튜브에 부여되는 배열질서 뿐 아니라 둘러싼 공간을 통해 확산되거나 근처의 표면을 비추는 빛에 의하여 특징지워진다. 미니멀리즘 중에서도 빛을 통한 정신성을 구현한 특이한 사례로서 평가받는데, 이러한 정신성에의 영향은 보통 미니멀리즘의 대선배로 추앙받는 아그네스 마틴(A. Martin)의 정신성을 계승한 경우로 들 수 있는 것이다.
칼 안드레(Carl Andre)의 경우는 작품〈등가물〉(1966)에서 상품화된 120개의 동일한 벽돌들로 8개의 조합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벽돌들은 서로를 대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분들간에 위계적인 관계를 전혀 지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는 실제 공간 뿐 아니라 장소를 점유한 것으로 1970년에 "장소 그 자체로서의 사물과 사물이 존재하는 장소사이의 관계가 항상 나의 작품 안에 있다. 그리고 나의 조각 작품은 하나의 길이다."라고 말 한 것처럼 〈등가물〉을 비롯한 벽돌작품들이나 〈동판과 알루미늄판들〉과 같은 금속판들은 모두 "길"이나 "장소"와 같은 수평성의 특징을 지닌다.
미니멀리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 에너지를 지겨운 예술 생산의 수공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다. 모흘리 나기(Moholy-Nagy)는 공장에 전화로 지시하여 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화가로서 미니멀리즘의 사물성을 구현한 모범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도널드 져드 는 자신의 〈무제 Untitle]〉연작들을 통해 공간적인 환상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형체와 배경의 관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드는 자신의 작품에서 "실제의 공간"이 "묘사된 공간"보다 더 힘차고 특정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더 이상 현실을 위한 대역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반영이라기 보다 하나의 "현존"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새 작품들을 새로운 이름, "특정한 물체들"이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저드가 동일한 기본 단위들의 반복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전체성"을 원했던 반면, 모리스는 자기 자족적인 전체들, 즉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형태들의 개념을 가진 작품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즉 "분리된 부분이 없는 물체들"을 구성했다. 저드와 모리스는 "하나의 작품" 즉,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될 수 있는 단순한 형태로, 입체주의가 만들어낸 연속적이고 관계적이며, 죽 둘러보고 알아내는 종류가 아니라, 동시 다발적인 경험으로서 효과적인 것으로 보여져야 된다는데 관심이 있었다. 바바라 로즈(Barbara Rose)에 따르면, "입체주의적 동시성"을 형태에 기반을 둔 "즉각성"으로 대치시킴으로서 입체주의의 핵심적인 명제를 뒤집었다는 것이다.
3. 미니멀리즘 이후(Post-Minimalism)
그린버그가 미니멀리즘을 모더니즘의 마지막 단계로 규정한 만큼, 미니멀리즘은 형식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작업 양상을 띄고 있다. 그리고 미니멀리즘은, 미니멀리즘 이후 즉 포스트 미니멀리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행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다원주의에의 토양이 되어준다. 보통 과정미술, 개념미술, 바디아트(Body art)등을 脫미니멀리즘(Post-Minimalism)으로 정의하는데, 샌들러(Sandler) 의 경우 67년이후의 대지미술을 포함한 위의 성향들이 미니멀리즘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여, 말기 미니멀리즘(Late Minimalism)이라고 명명한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다수가 이러한 성향의 작품으로 이동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런 전향으로의 이론과 실천을 병행한 작가의 대표로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를 들 수 있는데, 모리스의 작업은 시간성 안에서 계속적인 의미의 변화를 겪도록 함으로써 결국 비결정성과 불확실성이라는 내용이 강화된 특유의 "과정"개념을 도출한다. 이들 과정미술을 비롯한 비물질화 미술의 선구들은, 추상미술의 물질성이 미니멀리즘에 와서는 프리드의 말대로 사물 그 자체로까지 비약하자, 이에 반하여, 극도로 정신적인 활동을 주도 면밀히 진행시킨 미술 형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개념적 미술과 미니멀리즘이 공유하는 대목은 다름 아닌, "관객의 참여"이다. 즉 미니멀 아트의 현존성으로 인해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작품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공간"의 개념이 중시되는 것처럼, 프로세스 아트도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제 3자로서의 관객이 참여하는 것이 작품 이해의 관건이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점은 미니멀리즘에서 배제해왔던 "작가의 존재"가 과정미술에서는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점이다. 또 미니멀 아트가 상황으로서의 경험을 중시하지만, 그것은 작품이 전시되는 전시장이라는 국한된 공간안에서의 문제인 반면, 과정미술이나 대지미술과 같은 "脫 미니멀리즘"에서의 열린 공간은 거대할 뿐 아니라 관람자의 신체가 체험과 인지의 핵심이 된다. 즉 여기서도 그 열린 거대한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현존성"의 개념이 다시 적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이 이후 장르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면, 회화, 조각뿐 아니라, 음악 무용에도 영향을 준다. 글래스(Philip Glass)와 라이히(Steve Reich)는 기본 단위적 구조를 가진 음악을 작곡 즉, 반복에 기반을 둔 음악을 만드는데, 이러한 "기본 단위의 구조"야 말로 미니멀리즘이 지향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뉴욕의 져드슨 댄스 시어터(Judson Dance Theater)의 경우는 중립적이고, 비표현적으로 공연하는 무용을 선보였다. 무용수들의 기술적인 묘기가 거의 필요 없는 최소적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무용 양식을 발전시켰다. 7)
4.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한국의 70년대 모노크롬 회화와의 관련성
미니멀리즘이라는 장르는 분명 서구 미술사의 문맥에서 시대상황과 결부되어 자생적으로 도출된 서구만의 미술 사조이다. 이러한 양식들을 똑같이 동양의 미술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 등이 수반된다. 요컨대 서구에서의 각 미술운동, 가령 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입체주의-야수주의-표현주의-미래주의-추상-초현실 등등...이 등장하게 되는데는 당대의 상황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서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로 고희동을 들고 있지만 그는 불완전한 서양화 전통을 갖고 있던 근대기 일본 유학을 통해서이기에, 정통 서양화의 정신을 체득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을 학습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국내의 양화의 전통은 부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전면적 영향을 벗어나 해방공간을 지나는 과정에서 한국미술계는 많은 그룹활동과 이념적 실천을 시도했지만, 외양과는 달리 별다른 성과와 다양성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 당시 화단의 무기력한 상황을 뛰어넘고자 하는 열기는 마침내 1968년「AG(한국 아방가르드 협회)」그룹의 출범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조형 이념과 논리의 빈곤이라는 당시 한국현대미술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표방하고 왕성한 실험을 시도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젊은 세대들의 잇따른 그룹활동이 붐을 이루었고, 전국적인 규모의 현대미술제가 열리는가 하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회고하는 전시회가 개최되는 등 1970년대의 한국미술은 좁게는 1950년대 말부터 파생된 앵포르멜 추상이라는 획일화된 조형이념을 극복해 가는 움직임으로서, 넓게는 한국 현대회화의 본격적인 정체성 찾기라는 의미로서 한국미술사에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모노크롬회화는 1970년대 초반의 새로운 실험열기 속에서 잉태하여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그 윤곽을 드러내었다. 단색파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6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다섯 개의 흰색전〉이다. 비록 나카하라 유스케라는 일본인에 의한 발견이었으나, 한국 현대미술계가 비로소 모더니즘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 이어 77년 도쿄 센트럴 미술관에서의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은 한국현대미술에 분포되는 한 특징적 현상으로서 단색에 주목하게 한 더욱 분명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국내의 모노크롬회화를 추구한 작가로는 국내에 일본의 모노파의 사상을 전파한 이우환의 미니멀리즘적 시도와, 한지에 스며드는 효과를 노린 정창섭, 균일적인 화면의 흔적을 남기는 박서보, 곽인식, 하종현 등이 있다.
4-1.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한국적 변용
한국에서의 개념미술은 1970년대〈AG〉그룹과 〈ST〉그룹에 의해서 개념적인 사고성이 강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브제예술을 도입하여 회화와 조각사이에 상호 침투현상을 야기시킴으로 脫회화, 脫조각이라는 개념을 활발히 사용하였다. 이를 계기로 회화와 조각이라는 말이 점차 의미를 상실하고, 평면과 입체라는 새로운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회화영역의 확장으로써 비물질화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AG〉의 김구림, 심문섭, 〈ST〉의 이건용, 김장섭 등은 오브제를 중심으로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사물을 사물로서 있게 하는 오브제는 일루젼을 조작하지 않은 사물의 객관화를 드러나게 해준다. 또한, 구조물은 개별적 사물보다는 사물이 있게 되는 구조에 보다 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오브제라는 통로를 통하여 무목적적인 지점에 대한 탐구를 진행했다. 무목적적인 것은 예기치 않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며, 자유로우며, 직관에 의해 끝없이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오브제는 인간과 자연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의 예술형태를 지향하고 곧 장소와 배치, 상태성, 사물의 신체성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이들의 개념적 성향의 미술은 70년대 중반 이후 집단적 미술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면서 미니멀적 성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초대전 형식의 대단위 미술제가 개최되어 개인의 독자적인 작업에 관심이 옮겨가고 있었고, 때를 같이하여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우환과 개념미술을 추구하던 작가들이 친교를 맺으면서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형식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합리주의적 사고의 산물이었고, 분석적이고 체계적이며, 엄격한 조형의 논리에 근거한 미술형태였던 반면, 한국의 경우 접근방식에 있어 직관적이고 선험적이며, 정신적인 면이 강조되어, 그 정신세계는 우리 고유의 자연회귀라는 동양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미술형태였다. 서구의 개념미술이 인간중심주의나 근대주의를 붕괴시킴으로써 중성적이며 구조적인 표현의 세계관을 정립시킨 것과는 달리, 70년대의 한국 현대미술은 이미 체질화된 소박한 자연관을 바탕으로 작위를 싫어하고 현실 이외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추구한 것은 존재에 대한 원리적인 측면이었으며, 미술가들은 사물의 현재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 자연에 가깝게 살고자 하는 열려진 세계로서의 표현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독자성을 지니게 된 근본적인 배경이었다.
최소한 구조란 점에서 미니멀리즘의 전체적 부류 속에 들어 갈 수도 있으나 물질을 통해 비 물질화를 유도해 가는 독특한 정서체계의 이해에서만이 우리의 단색파가 갖는 독자성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4-2. 일본 모노파와의 관계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19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회화는 분명 서구의 개념미술이나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한국적인 변형이었다. 그러나 모노크롬 초기에 일본에 거주하면서 "모노파"의 이론적 지주였던 이우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모노톤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일본 모노파의 추이와 단색파의 전개양상에 특별한 관계를 추측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모노파란 자연적인 물질, 물체를 소재로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 자체로 등장시키면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예술언어로 끌어들이려 했던 경향을 가리킨다. 일본의 70년대를 장식했던 모노파에 참여한 작가들은 다마미술대학, 동경예대, 일본대학 미술학부 졸업생들이었지만 그것을 주창한 사람은 이우환이었다.
이우환의 이론은 "신체성"과 "장소성"에 대한 특별한 해석에 기초하였는데 이때 신체성이란 "인간이 세계를 대상으로 인식하기 전에 이미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따라서 신체의 이러한 능력으로 인해 세계가 직접경험의 장소로 열리고 그 지각의 자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만남을 실현시키는 개념이 "장소성" 즉, "無의 장소"이다. 이때 세계와 인간의 만남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객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만남, 그래서 "무의 장소"에서 만남이 된다. 따라서 주객의 구분이 미분화된 상태에서의 궁극적인 실재를 발견하려는 의지를 함축한다는 측면에서 모노파는 미니멀리즘의 일본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의 의식작용의 단념, 예술의 지나친 관념화, 그로 인해 파생된 예술의 현실 분리와 신비주의에의 매몰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는가 하면, 작품내용이 단조롭고 형식 논리적이긴 하지만 그 수법에 있어서는 대단한 완벽성과 정교성을 담아내는 지극히 일본적인 미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기도 했다. 8)
모노파와 한국의 모노크롬과 다른 것은, 모노파가 물질 자체가 지니는 원래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한편 물질을 조작하여 작품으로 고정시키는 대신 그것들에 최소한의 손길을 가해 단순한 질서감을 부여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의 모노크롬은 평면 자체를 자연과의 친화관계로 꾀하는 합일의 공간으로 여기며 대상 세계와의 대립보다는 흡수와 동화의 측면을 더 강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의 모노파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나 미국의 미니멀리즘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는 데 반해, 한국 모노크롬은 미니멀한 사고유형이란 표면적 인상에서는 닮은 점이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일본과 서구와는 다른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철저한 물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는 모노파와 종내는 정서의 회귀성을 지니고 있는 단색파는 그것의 외피상의 어떠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으로 다른 출발과 귀결에 의한 다른 종의 발현이다.
4-3. 1970년대와 모노크롬의 관계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논하면서, 미니멀리즘을 통한 물질성/비물질성의 분기점으로 1967년을 상정했었다. 그에 반해 국내의 모노크롬화의 경우, 1970년경에 본격적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개되었다.
"모노크롬회화"라는 용어가 한국작가 5인의 일본전〈다섯개의 백색전〉에서 대두되어 우리나라 모노크롬회화 전개의 본격적 계기를 이루었다. 이전에 이미 60년대에 풍미했던 앵포르멜의 열기가 식어가던 즈음 색면추상을 비롯한 다양한 실험작업이 진행되는 한편, 평면작업에 관한 새로운 틀의 모색이 꾸준히 지속되는 가운데 이미 일련의 모노크롬 경향의 출현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이후 75년 〈에콜드 서울전〉이 탄생되고 〈서울 현대미술제〉가 결성되어 젊은 작가군에 의해 회화의 구심점으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한 시대 또는 한시대의 미술상황이 어떠했는지 사회적 또는 사회학적 요인들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의 "이중억압에 의한 일원적 표면화"에 대한 주목은 미술평론가 김복영의 〈70년대 단색 평면회화의 기원 그 일원적 표면양식의 해석〉을 주로 하였다.
70년대는 우리 나라의 전기 산업사회의 종착점이자 80년대 중반이후 새로 부상되기에 이른 후기 산업사회의 발아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70년대를 그 이전의 50~60년대라는 닫혀진 세계와 그 후 80~90년대의 열려진 공간의 중간적 특성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의 한국미술, 특히 단색 평면 미술은 60년대식의 추상을 이것이 순수조형의 시각에서 서구로부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간주된 이래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문제를 직접 던지기 시작한데서 문을 열었다.
80년대를 70년대의 후기 양상으로 명명하고 70년대가 평면주의라는 닫혀진 공간의 엄격한 규범을 일단 준수했다면 80년대는 열려진 공간으로서의 사회 역사 현실의 구조에로 평면을 확산시키고 해체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수한 요인하나는 사회상황의 "이중 억압"으로 인한 "집합적 의식"의 특성을 들 수 있다. 이는 가장 혹독한 금욕주의나 이와 맞먹는 강방적 정치체제가 지배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위로부터"의 지배와 힘, 그리고 능률중심의 사고가 권위의 중심을 차지함으로써 그 밖의 가치들과 행위들이 억압당하거나 내면화되는 상황이 초래된다고 평론가 김복영은 말한다.
앞서의 논의대로 단색평면은 작가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발언하며 부각시키려는 의지를 총체적으로 정지시키고있을 뿐만 아니라 표명하고자 하는 것들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전쟁세대로서의 박서보에 있어 전후의 삶은 다시 말해 70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삶의 정황은 "살아남으려 무진 애를 썼다" 는 그의 한마디로 요약 될 수 있다.
그는 "이미지의 표현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만은 너무도 자명하다....탈이미지 또는 탈표현을 강조하는 까닭은 행위의 무목적성을 통해 행위 그 자체에 살고자 함이며 이 무위 순수한 행위 속에서 크나큰 해방감을 맛보고자함이다." 이리하여 단색평면은 개인적 수준에서 이미지들을 일체 억압하고 궁극적으로는 이것들을 은폐해야할 상황에서 발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창섭의 다른 업급을 보면 "70년대에 들어 한지를 만났는데 그때 그 느낌은"요걸 한번 써보자"가 아니라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속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른바 닥의 작업은 완제품으로서의 종이를 사용한 인위적 조형이 아니라 종이의 물적 실존성에 나의 감수성을 동화하여 물(物과) 아(我의) 일원적 합일을 체험하는 쪽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닥이 가장 적합한 물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후 내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물성"과 "인간"의 문제가 되었다." 자연으로 돌아가 근원적인 물성과의 만남을 시도했다는 것은 사회전체로부터의 억압에 대한 정면대결을 피하고 물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최상의 자연에 귀일해서 물성의 자연적 결정체로서의 단색평면을 성취하고 단색평면으로 하여금 자연의 "권화(權化)"라는 지위를 갖게 함으로써 사회현실로부터의 억압을 공격하고자 했다.
위와 같이 박서보가 단색평면의 배후를 논했듯이 탈이미지는 작가의 "자기해체"의 목적을 위한 과정이고 "물성의 권화"는 물질성을 해체하고 소멸시킴에 있어 물성을 상징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성의 획득에 있어서 물질성의 해체와 소멸은 주체 또는 자아의 해체 내지는 소멸과 동일한 시간에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원성"의 계기는 따라서 해체의 시각적 "동일화"로 설명된다. 일체의 존재하는 것들의 해체와 소멸을 향한 의지는 이들 전쟁세대만이 갖는 독자적 의식의 표명이었으며, 그들이 이를 객관화하기 위해 시도했던 기법과 방법의 모색은 그들을 독자적인 양식의 창조자로서의 자리를 굳혀주리라 믿었다. 이를 절차로 옮기는데 우선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화포와, 화포의 대안으로서 종이나 닥, 물감, 그리고 약간의 필획(스트로크)들과 미미한 도상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가지고 일원화를 상징적으로 구조화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표면양식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고 만들고 꾸미기 위한 논리적 작위성을 일체 배제했으며 조형의지 일체를 거부했다.
그대신 물질의 비 물질화를 위한 온갖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이 도달했던 세계는 우리의 선조들이 창조하고 면면히 계승해온 범 자연성의 문화적 맥락을 오늘의 시점에 재발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김복영은 말한다. 더불어 70년대의 단색평면회화가 갖는 "일원적 표면"의 양식은 자아와 현실간의 갈등과 투쟁의 결과였으며 긴장의 축적과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독자적인 산물이었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9)
5. 한국 모노크롬회화의 성과와 의미
서구의 환원주의적 형식주의의 잣대로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를 논할 수는 없다. 미니멀리즘이 순수하게 서구적인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한국의 70년대 모노크롬 회화는 物我一體라는 동양적인 사상이 배어있는 미술의 한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객체로서의 오브제의 상태에 주안을 두고 대상의 물리적 배경이나 관찰자의 반응에 주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성향이며, 대상 자체 즉 물성의 고유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현상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일본의 모노派와도 또 다른 것이다. 오광수도, 일본의 모노파는 철저한 물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했던 반면에, 국내의 모노크롬 회화는 정서의 회귀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한국의 경우 미니멀한 화면구성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하기에 적합한 사고의 틀을 오랜 세월동안 면면히 내려온 동양적 자연관 및 조선시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적 사회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금욕적인 유교정신이나 문인화가들이 견지했던 여기적 정신이 연루되어 현실을 초월하여 자기수련에 몰두한 결과가 모노크롬인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 또는 예술인들은 회화의 독자적 경지를 이루기보다는 회화를 정신적인 수양의 수단이나 여기로 생각하여 도를 향해 의를 잃지 않는 성실인으로, 신념을 가진 지조인으로, 그리고 예술을 아는 풍류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외적인 형태보다는 영적인 형태를 더 중요시하며, 그 표현된 개성이 우미하고 맑고 고상하며 청아하고 고고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작가의 높은 인격과 사상으로 기교에 구애됨이 없이 맑은 정신상태로 대상을 표현한 전통에서 모노크롬회화의 정신성과 단색표면양식의 일원화, 나아가 백색양식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양식상의 전형을 이루어내고 고도의 정신세계를 암시하는 세련양식에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대표적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주의와 "無"의 개념에 따라 한국인들은 청색과 백색에 강한 선호를 보이고 있다. 노자가 말하고 있는 "無爲自然"으로서, 억지로 꾸미려 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과 동화되는 無技巧, 無計劃, 無華, 無飾으로서의 "自然美"인 것이다.10)
모노크롬회화의 형성요인을 "자의식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볼 때 새로운 출구를 동양적 자연관에서 찾고자 하는 작가들에 의해 한국의 모노크롬은 선조들이 창조하고 면면히 계승해온 범 자연성의 문화적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는데서 그 나름의 독자성을 띌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서구의 문명비판을 위한 대안으로서 동양적 세계관을 제시하고자 한 결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양적인 의식의 흐름이 가장 잘 집약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모노크롬회화이다. 즉 모노크롬회화는 현대회화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교묘히 동양 특히, 한국의 전통정신과 접목된 모델로 한국적 시각으로 현대회화를 소화시킨 첫 모델이었다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서성록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모노크롬을 평가하고 있다.
"70년대 단색화는 단순한 서양식 그림이기 전에, 동양의 유서깊은 의식체계 위에서 가능할 수 있지 않았나 본다. 서구인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성싶은 측면들, 즉 바탕/형상의 관계를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나, 주체로서의 형상을 없애고 그것을 세계로서의 바탕에 귀속시키거나 모든 색을 포함할 수 있는 흑, 백색 중심의 색깔을 선호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보다 원초적인 것, 즉 자연에로의 회귀, 자연의 동화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평면은 단순히 그림의 바탕이 아니라 범 자연의 소우주로 치환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무난히 대상의 비대상화, 평면화를 추진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미니멀리즘과 결과는 유사하지만 발상과 경로는 사뭇 다른 셈이다."
5-1. 한국적 모더니즘의 출발로서의 모노크롬회화와 백색
96년 갤러리 현대에서 기획한 < 1970년 한국의 모노크롬전 >을 두고, 《월간미술》이 3월호에 특집으로 수록한 좌담에서, 미술평론가 김영순은 모노크롬의 중요성을 "30년대 일제의 식민상황에서 추상미술이 도입된 시기를 모더니즘의 여명기로 잡는다면, 70년대는 해방 이후 다양한 모색과정을 거쳐 한국적 모더니즘이 바로서 정착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 한국미술사에서 1970년대는 "모더니즘에로의 본격적 진입"이라는 평가로 요약되는 것으로 70년대의 모노크롬회화는 모더니즘과 일정부분 상응하는, 즉 미적인 자율성, 순수화의 의지, 평면성의 확대 등이 미적 가치로 부상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미술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모노크롬이 같은 시기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었을 뿐 아니라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작품에 담아내었다고 평한 이일, 김복영, 오광수 등 일련의 영향력있는 비평가들에 의해 한국 현대미술사의 정설처럼 되었다. 이들의 시각은 고희동 이후 서양 모더니즘미술의 기법이입에 급급했던 한국미술계가,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모더니즘의 회화기법과 방법론, 이념을 포괄하는 왕성한 실험과 약진의 과정에 이르고 있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개최된 한국작가 5인의 < 5개의 백색전>에서, 당시 일본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국내 모노크롬회화의 공통점으로 "백색"을 꼽은 것은 일본인들의 정서와는 다른 백색에 대한 감정이 선명히 지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색 이외에도 1974년 명동화랑의 재불 작가인 김기린의 작품전에서 그는 전면을 흑색으로 일관했으며, 한국의 추상의 선구로 알려져 있는 김환기의 경우도 "청색"은 그의 고유색으로 자리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백색=한국의 모노크롬" 이라는 공식을 지우는 것은 7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서 단연 백색톤이 단색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 연유되었음에 다름아니다.
백색에 대한 한국인들의 특별한 기호는 도처에서 발견 할 수 있으며 우리들의 정서속에 자리잡고 있는 "백색"에 대한 집착은 유다르다. 따라서 백색에 대한 감정의 진폭 또한 넓은 것으로 70년대 일련의 백색파로 지칭되었던 작가들의 화면도 단순한 순백색이 아닌 다양한 뉘앙스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들 대부분의 화면이 색료로서의 흰색이기보다 화학적인 색료의 부단한 극복으로서 어느 중성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즉 백색은 백색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색료를 무화시켜나가는 어느 단계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경우에 흰색은 이미 색료로서의 흰색이 아니라 정서의 체계에 편입된 흰색이며, 따라서 정서의 구조에서 접근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11)
5-2. 평면으로의 환원
1970년대 후반기의 작가들은 방법상의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조형요소들을 평면의 2차원성에 환원시키고 동시에 그린다는 행위마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같은 본질주의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제로지점에의 환원 내지는 평면으로의 환원작업이 선험적인 조형의식에의 환원과 대응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한국현대미술이 도달한 가장 놀라운 성과의 하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선험적인 조형의식은 다름 아닌 그린다는 것과 평면과의 일원화를 말하는 것이다. 평면과 그 위에 그려진 것의 이중적 구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면 자체가 그려진 것으로부터 부단히 환원되어져 버리는 상태, 다시 말하면 그리는 것이자 동시에 평면인, 그것은 바로 그린다는 것 자체를 평면이라는 구조 속으로 부단히 함몰시켜버리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은 평면의 자기 목적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성에 도달하기 위해 조형, 구성, 이미지, 형태, 색상 등은 자취를 감추었다. 즉 표현적인 일체의 요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며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엄격성을 띤 미니멀 아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화면에서 남은 것이란 물질 뿐이요, 텅빈 공간뿐이었다. 그리하여 회화의 절대조건인 평면으로 모든 것을 축소시키는 일이야말로 절대절멸의 과제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색채를 통해 색채를 지워가기란 일종의 물질을 통해 물질을 지워가기에 다름 아니다. 김기린이 보여주었던 "검은 안료로 수 십번 칠하기에 의해 종내는 검은 색료가 갖는 물질성이 바래지고 거기 남은 것은 어떤 심연과도 같은 부유공간"이 그것이었다. 최병소의 신문지위에 선긋기작업도 같은 맥락으로 끝내는 신문지 고유의 물성이 탈각되고 중성구조만이 남는 것이다. 이것은 단색파가 보여주었던 또 하나의 특성인 반복성으로, 같은 색을 반복하거나 같은 행위를 반복함에 의해 고유한 물질성을 걸러낸다. 또한 같은 형의 반복은 화면의 전면화를 의도한 것으로 화면은 세부보다 전체성에 의해 결정되며, 어느 주어진 화면에서 완결되기보다 그것을 벗어나 확대하려는 심리구조체계를 지닌다.
단색파에서 두드러지게 파악되는 표면구조로의 환원작업은 서양의 회화와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12) 70년대 한동안 캔버스의 올과 날의 직조를 다시 그대로 그리고 있는 신성희의 작업도 표면을 표면으로 되돌려 준다는 일종의 환원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다. 박장년이 시도한 일련의 천그림도 바탕의 천과 그려진 천의 관계를 부단히 무화시킴으로써 표면으로의 환원을 이룬 예이다.
이와는 달리 주로 심리적인 면에서 표면과 이미지를 일체화시키려는 작업을 보여준 것은 김창열이다. 이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들 나름의 표면구조로의 환원작업을 시도해 보였는데 흥미 있는 것은 이처럼 표면으로서의 환원작업이 단색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색과 표면구조의 환원은 묘한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서구의 색면파나 쉬포르슐파스의 다양한 질료와의 다른 점으로 한국미술이 갖는 독자성에서 이해될 수 있다.
70년대 중반이후 한국미술에서의 통일된 집단의식이 단색파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것은 최초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집단개성이란 집단속에 편재하는 문화적 일체성에서 먼저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며 동시에 민족의 정서 속에서 발현되는 어떤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것은 회화가 회화 자체로 환원되다는 의미이며 색채 또는 선, 형태 등의 형상이 캔버스와 꼭 같은 차원에서 실재성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1970년대 후반기의 한국현대미술은 "무표정", "무감각", "무감동한 공간"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 미술 중에서도 입체와 개념미술, 그리고 조형어휘의 동어반복을 강조하는 회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산업적 물질성과 기계적 효율성, 논리적 구조성, 지각적 대상분석, 표현적 금욕성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13) 이와 같은 개념과 구조 중심의 미술은 1960년대, 70년대의 서구 모더니즘의 흐름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일본의 모노파와 미니멀리즘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나온 결과라 여겨진다. 특히 한국의 모노크롬회화는 위와 같은 화단의 상황에서 평면의 실재성과 한국인의 세계관을 동시에 담아낸 한국적 변용이라는데에 의의가 있다
5-3. 동양적 환원의 미학
모노크롬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1910년대에 말레비치의 백색 모노크롬회화, 그리고 1960년대 이브 클라인의 청색 모노크롬, 1970년대 로버트 라이만 등의 모노크롬화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모노크롬이 어떠한 색면을 드러냈을지라도 그들의 화면은 색채 고유의 물질성을 물질 자체로서 인식하는 場이었을 뿐이다. 색채를 회화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본연의 청색이나 붉은 색이라는 존재 자체로 환원시키려 했던 것이다. 곧 물질로서 색채의 존재를 획득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모노크롬회화의 경우 결과로서 서구의 모노크롬과 같은 모노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서구미술의 모노크롬이 이미지에 관련되며 물질화된 공간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한국의 것은 물성으로서의 색이 아니라 정신화된 공간으로서 내재된 의미의 모노크롬이라고 작가 최명영은 말했다. "평면"이라는 대상은 회화 이전의 단계에서 가장 순수한 대상으로 존재하고, "모노톤"이라는 것은 이미지를 배제시키고 회화라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색채였던 것이다. 이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색채의 차원을 넘어선 색채주의이며, 수묵화처럼 모든 색채의 잠재성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정신성의 세계이다.
이러한 한국 모노크롬회화의 특징은 자연을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장 원천적이고 본연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고유의 정신세계와 닿아 있었다. 그러므로 작가들에게 있어 예술행위 그 자체도 자연을 닮은 가장 원천적인 행위로 회귀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예술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작가의 행위 본질에 대한 물음, 즉 예술행위에 있어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색채를 포함한 모든 인위적 일루저니즘을 회화에서 배제함으로써 한국 고유의, 더 나아가 동양 고유의 탈미니멀회화를 정립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 모노크롬의 특징이 단순한 자연주의에 속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이를 넘어 자연에의 귀의를 추구했기에 평론가 이일의은 "汎자연주의"라고 명명했다. 14)
19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이 이러한 정신 혹은 자연으로의 환원의식에 바탕을 둔 결과였음은 당시 모노크롬에 참여했던 이동엽의 말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작가로서의 체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노크롬회화의 형성요인을 "자의식의 회복"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한국적 모노크롬이라 했을때 서구의 그것과 공유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2차원의 평면과 순수물질로 환원된 회화는 종말에 이른 것이라는 바로 그 지점을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출구를 자연관에서 찾았다. 동양의 전통사상의 뿌리가 자연관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동양적 자연관이란 고대 동양으로의 양식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동양의 사상이나 관념이란 서구의 그것과 달리 동양의 실존적 세계, 즉 세계와 현실을 보는 눈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화 또는 전통회화란 사의화, 즉 뜻 그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상적 세계였고, 이러한 사유적 태도가 정서적 문화적 혈맥을 통해 면면히 내려온 것이다. 미니멀아트에서의 사유란 우리가 말하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식적이고 체계적인 정반합의 종합으로서의 사유가 되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나와 너가 혼동된 것으로, 물아일체라는 말이 독특하고도 전형적으로 베어나온 것이 모노크롬이라고 평론가 서성록은 말했다.
정리하면 미니멀 아트의 경우, 프랑크 스텔라의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로 요약되고, 모노파의 경우 이우환이 "있는 그대로"로 정리하고 있으며, 우리의 경우 박서보의 말인 "나의 행위와 물성이 만나는 합일의 장이며 끊임없이 반복하여 그리다보면 내가 없어진다"로 정리된다.
환원적 방법의 모색이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 실체에 도달 가능케했으며 마침내 범자연의 세계를 열었다는 진단은 모노크롬회화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했다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점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정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모노크롬은 앵포르멜의 전형을 밟았다. 양식의 걷잡을 수 없는 획일화, 작가들의 맹목적인 집단화 등으로 인해 타성화, 경직화, 무개성화에 직면했다. 70년대 초의 아방가르드적인 움직임들이 70년대 말 모노크롬의 등장으로 인해 "주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면서 한국 기성 미술계의 지배세력이 되어 박물관과 강의실 속의 박제화된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의 여느 미술사적 전환기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지만, 한국 모노크롬의 경우 순수예술지향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성상화된 언어, 삶과의 단절, 소통의 단절을 야기했고, 나아가 엘리트주의와 한껏 부풀어 오른 기법에 대한 편집증 등으로 인한 결과였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회화로부터 여하한 이미지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충동 속에서 삶을 확인하려 했다. 정창섭, 김창열,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명로, 조용익 등 앵포르멜을 이끌었던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화면에서 일체의 조형적 요소를 배제하고, 대신 마티에르의 중시와 함께 화면과의 "신체적"인 맞부딪침이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우연한 질서와 조화를 선호하면서 서정성과 감성에만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렀기에 모방이나 재현, 환영 등을 벗어나 모더니즘의 이론적, 양식적 탐구가 뒤따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앵포르멜을 이끌었던 세대가 기성화단의 중심에 자리잡고 사회가 점차 안정되자 충만했던 도전의식이 매너리즘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의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앵포르멜이라는 단일양식 만이 화단을 지배했고 한국미술계 전반에 정체를 가져와 새로운 미술을 향한 움직임이 요구되기에 이른다.
1970년대 말엽에 이르자 역시 20대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마티에르의 남용에 대신하여 기본적인 조형 질서를 재확인하고, 추상표현주의로 응집된 폐쇄적 사고의 틀을 넘어 풍부하고 다양한 양식실험과 조형의식이 추진되었다.
6. 결론
미니멀리즘은 전술했듯이 모더니즘 회화론이 비등하던 1960년대 서구화단에 몰아닥친 회화에 있어서의 위기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미술사의 한 흐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미니멀리즘은 당대 회화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실험의 결과였던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사물성의 극대성으로 인해, 70년대 말부터는 죤 케이지(John Cage)나 라우젠버그(Rauschenberg)같은 이들에 의해 실험적인 전위무대가 꾸며졌으며, 미술 자체의 사물성이 탈각된 개념적인 작업의 작가군이 등장하게 된다. 또 미니멀리즘의 현존성과 관객의 역할 증대 역시, 이후의 과정미술에의 영향을 준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사물성과 아울러 작업 이전에 고려되는 일종의 작가의 정신성은 뒤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단순미는 구성주의를 생각하게 한다. 이로서 우리는 서구의 현대미술사가 결국은 부단히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성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국내에서 흔히 미니멀리즘으로 평가받곤 하는 70년대 모노크롬 회화는 분명히 외국의 사조유입으로 인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대 한국의 시대상황에 의한 산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는 점을 이미 살폈다. 미니멀리즘이 정신성보다는 사물성 자체가 부각되는 반면, 우리의 모노크롬 회화는 작가의 정신이 녹아든 동양의 여백의 효과와도 상응하는 전혀 독창적인 차원의 미술양식임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영순, 서성록, 최명영, 이동엽이 참여하였던 모노크롬회화에 대한 좌담의 말미에 있는 글을 통해 한국적 모더니즘의 정착으로서 모노크롬회화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70년대 모노크롬회화에 나타난 특징과 성과를 요약해보자면, 첫째 당대의 객체에 대한 환원적 사유방식과 자문화에의 자각이 과거지향적인 반모던정신을 촉발시켜 동양의 자연관에 이르게 했으며, 둘째 당대의 물성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기후나 풍토성에 천착되어 촉감적인 피부감과 투명성이라는 조형적 성과를 표출해내었고, 셋째 물성에 반복적인 행위를 축적해가는 과정에서 획득한 무위의 획득은 곧 물질의 정신화를 이루어내었으며, 결국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모더니티의 정착이라는 성과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층미술세력이 되어버린 모노크롬 세력들은 80년대 초 <현실과 발언전>을 통해 역사와 시대와의 관계모색을 꾀했던 민중미술과의 대립구도로 이어졌다. 이것은 이미 60년대와 70년대의 경계에서 있었던 과정과 별로 틀리지 않는 상황으로, 70년대와 80년대를 회고하면서 꼼꼼하게 반성해 볼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 1970년대가 한국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크나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모노크롬회화는 한국미술의 주체성과 서구현대미술의 시대적 흐름이 동일한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성과였다. 80년대의 미술이 비록 생명력을 상실한 모노크롬에 대해 제기되었던 질책과 반발로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흐름이 수용가능했던 배경은 70년대의 실험미술과 모노크롬의 성과가 마련한 것이었다는 데서 한국미술사에서 1970년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전혜숙 〈미니멀아트와 개념미술〉《월간미술》 1997년 3월
2) 황현자, 최원주 〈미니멀리즘〉발표문《경희대교육대학원 현대미술론-이승건》
3) 한만수 〈미니멀리즘 ( Minimalism )의 제 양상과,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
4) 전혜숙 〈미니멀아트와 개념미술〉
5) 전혜숙 〈미니멀 아트와 개념미술〉
6) 11. 강태희 저 《현대미술의 문맥읽기》 미진사, 1997.
7) 강태희 저 《현대미술의 문맥읽기》
8) 박성환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서 모노크롬회화의 특질에 관한 小考 -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서 〉
9) 김복영 〈70년대 단색 평면회화의 기원과 그 일원적 표면양식의 해석〉《월간미술 3월》, 1996
10) 김원룡 저 《한국미의 탐구≫, 열화당, 1996, 서울
11) 오광수 〈모노크롬은 이념인가〉
12) 70년대의 쉬포르슐파스운동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쉬포르슐파스는 표면과 이미지를 일체화시킴으로써 이원구조를 극복하려 하였다. 단색파의 일부가 표면자체를 곧 표면으로 인식하려고 했던 방법과 유사성을 드러낸다.
13) 박성환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서 모노크롬회화의 특질에 관한 小考 -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서 -〉
14) 박성환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서 모노크롬회화의 특질에 관한 小考 -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