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미술의 특징
사실주의 [寫實主義, realism]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태도.
추상예술 ·고전주의 ·낭만주의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미술 ·문학에서 이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A.콩트가 주창한 실증주의의 영향과 함께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중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예술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프랑스의 G.쿠르베가 당시의 아카데미즘 화풍에 반항하여, 돌 깨는 작업이나, 목욕하는 여인 등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을 사생(寫生)하였으며, 특히 유명한 《오르낭의 매장(埋葬)》(1850)과 같은 작품으로 사실주의를 주장하였다.
사실주의미술 [寫實主義美術, realistic art] 실재하는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G.쿠르베와 H.도미에, F.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
1855년 쿠르베가 당시의 관학적인 살로에서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였다. 이미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J.A.앵그르와의 천사(天使)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즉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E.졸라나 콩쿠르 형제의 예술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정신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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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유채/129×149㎝/1854년 작)
종류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29×149㎝, 제작연도 1854년
소장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안녕하세요?》라고도 한다. 사실주의 회화의 대표작이다. 셔츠 차림에 배낭을 등에 진 채 한 손에는 모자를 벗어 들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수염 난 구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가 자기 후원자와 친구를 시골길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비록 품위 있는 포즈나 유려한 선과 현란한 색채는 없으나 사물을 객관적·시각적으로 파악하는 구스타프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잘 드러나 있다.
길을 덮은 큰 나무의 그림자와 구스타프 쿠르베의 그림자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를 후원해 준 부유한 은행가 출신의 브뤼야는 고개를 약간 숙여 구스타프 쿠르베에게 존경을 표하는 자세이고 구스타프 쿠르베 자신은 고개를 바짝 치켜들어 자존심을 세운 듯한 분위기가 묘사되었다. 일상적인 삶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화가의 자존심과 자기 세계를 은연중에 보여주어 이채롭다. 그런 면에서 구스타프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경박하지 않다.

구스타브 쿠르베(Courbet, Gustave/1819.6.10~1877.12.31 /프랑스)
주요작품 《오르낭의 매장》(1849)
쿠르베가 그의 후원자인 브뤼이아스로 하여금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게 해서 예술가의 면목을 의기양양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한다. 연장을 짊어지고 있는 화가의 모습은 쿠르베가 리얼리즘을 세계에 전파하는 사도로서 길을 떠나는 뜻이 담겨 있다. 쿠르베는 일상적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사실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프랑스 오르낭에서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브장송의 데생학교, 1839년 파리아카데미쉬스에서 그림공부를 하였습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였고, 특히 1847년 네덜란드 여행을 계기로 렘브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화가의 아틀리에’ ‘사슴의 은신처’ ‘샘’ 등이 있습니다.
“회화는 반드시 그 시대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며 통렬하게 기성체제를 비판했던 혁명가 쿠르베.그의 이런 강한 저항 정신이 그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작품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들》(1849),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아틀리에》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센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 Breakers]
돌을 깨는 가난한 두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린 G.쿠르베의 작품.
작가 귀스타브 쿠르베
종류 유화 , 크기 1.6x2.59m, 제작연도 1849년
소장 드레스덴 국립박물관(제2차 세계대전 중 소각)
그림은 모자를 쓴 노인이 뙤약볕 아래서 무릎을 꿇은 채 도끼로 힘겹게 돌을 깨고 있다. 조끼는 낡아 너덜너덜하고 양말은 구멍이 나 있다. 뒤에 서 있는 소년은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찢어진 셔츠와 멜빵도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지를 입고 무거운 짐을 한쪽 다리로 받치고 있다.
J.F.밀레도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쿠르베는 종교적 경건성이라든가 낭만주의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당시 미술계의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쿠르베의 친구인 사회주의자 P.J.프루동은 이 작품을 자본주의와 잠재적 탐욕을 저주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오르낭의 장례식》이 있는데 시골 들판에서 거행되는 소박한 촌사람들의 장례식 풍경이다. 장례식 참석자들은 일하다가 막 온 모습으로 남루한 차림이며 집례자들도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쿠르베는 파리 코뮌의 혁명가이자 사실주의의 선도자였다. 그는 J.A. 앵그르와의 논쟁에서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고 하여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1855년 파리 국제전에서 작품 전시가 거절되자 전시회장 근처에서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부터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화가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미술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했다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후세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밀렵꾼 [密獵-]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102×122.5㎝
제작연도 1867년
소장 개인 소장
쿠르베는 1866~1867년에 고향인 프랑슈콩테주(州)의 오르낭에서 보냈는데, 그해 겨울에 눈이 매우 많이 내려 수렵을 소재로 한 설경(雪景)의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2명의 사냥꾼이 2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걸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사냥꾼은 등 뒤에 잡은 짐승을 메고 있다. 새하얀 눈 위에 두 인물과 동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남으로써 물체의 입체감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눈의 표현인데, 눈 위에 비친 인물의 그림자를 청색으로 처리하여 빛의 색가(色價)에 대한 감각을 두드러지게 나타냄으로써 쿠르베 특유의 새로운 시각적 감성을 보여주었다.

마을 처녀들 [Young Women from the Village]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194.9×261㎝
제작연도 1852년
소장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도시에서 온 세 여인들이 소를 돌보고 있는 시골 소녀들에게 자선금을 주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의 여인들은 쿠르베의 누이들이며, 배경은 쿠르베의 고향인 프랑슈콩테주(州) 오르낭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쿠르베가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에 유럽은 대부분 농촌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쿠르베는 이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사회성 있는 발언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여인의 삶을 주로 그린 쿠르베의 일련의 작업 중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센강변의 처녀들 (원어명 Les Demoiselles des Bords de la Seine )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174×200㎝
제작연도 1856∼1857년
소장 파리 프티팔레미술관
1857년 쿠르베는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그림 속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곧 인상주의 화가인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으로 이어지는 전조이며, 동시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룬 행락적 정경의 시초이기도 하다.
파리 센강변의 나무 그늘 풀밭 위에 2명의 여인이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한 여인은 엎드린 자세로 눈을 감고 낮잠을 자는 듯하며, 다른 한 여인은 상체를 약간 세우고 비스듬히 누워 강쪽을 바라보고 있다. 강가에 매어 있는 보트로 미루어 근처에 데이트 상대인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두 여인의 모습은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쿠르베는 이 작품에 대해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듯하며, 1850년경에 그린 모자를 쓴 처녀들의 모습을 다룬 일련의 습작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가의 아틀리에 [畵家-] 원어명 L'Atelier du Peintre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361×598㎝
제작연도 1855년
소장 파리 오르세미술관
쿠르베가 이 그림에 붙인 제목은 '화가의 아틀리에:7년간의 예술 생애의 추이를 결정한 현실적 우화'이다. 그려진 지 26년 뒤인 1881년 12월에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팔려나갔고, 1920년 루브르미술관이 구입하였으며, 그뒤 오르세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이 작품은 1855년 제1회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지만, 너무 크다는 이유로 입선조차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쿠르베는 몽테뉴가(街)에 자비로 가건물을 짓고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작품 44점을 전시하는 한편, 사실주의 선언을 담은 프로그램을 판매하였다.
이 그림은 화가의 상상력을 통해 하나의 화폭에 자신의 생애 동안 받은 모든 영향들을 담으려 한 작품이다. 무대처럼 펼쳐지는 화면의 가운데에 고향 마을인 프랑슈콩테주(州) 오르낭을 그리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그 옆에는 누드 모델이 그려져 있고, 농가의 한 어린이가 천진난만하게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지켜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인 프루동, 소설가 샹플뢰리, 시인 보들레르 같은 그의 정신적 지주들과 미술 애호가 브뤼야스 부부를 등장시키고 있다. 반면 화면 왼쪽에는 가난한 여인과 목사, 창부, 무덤 파는 인부, 상인 등 사회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암시된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편 이런 철학적 관점과 무관한 랍비와 사냥꾼 같은 인물들도 보인다. 쿠르베는 샹플뢰리에게 쓴 편지를 통해 왼쪽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이들은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며, "나의 대의에 공감하고, 나의 애상을 지지하며, 나의 행동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린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작가 자신과 그 주변 세계와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 중심부의 인물은 밝고 선명한 햇빛의 조명을 받고 배경과 측면에 있는 인물들은 중간 톤의 어두운 빛에 싸여 있도록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쿠르베, 사냥개Hunting Dogs with Dead Hare, 1857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쿠르베,바닷가에 배The Fishing Boat, 1865.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쿠르베, 바다 The Sea, 1873
1865~67년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프랑스 노르망디해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도미에 [1808.2.20~1879.2.11] 원어명 Honor Victorin Daumier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1832년 국왕 루이 필리프를 공격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18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 ·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3등열차》《관극(觀劇)》《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목판에 유채
나다르 [Nadar, 1820.4.5~1910.3.20]기구를 타고 세계 최초의 공중촬영을 감행하는 모습을 그린 도미에의 그림

마르세유 출신의 오노레 도미에(1808∼1879)는 혁명의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려낸 혁명 화가였다.
나이 40에 이르러 사회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믿기까지 그는 혁명의 무기로서 풍자만화 그리기에 전념한 독특한 경력을 가졌다.
1848년부터는 풍자만화에서 손을 떼고 순수 회화 세계를 파고들며 자신의 미학이랄까,사상을 사회참여에서 순수 쪽으로 전향했다.
이즈음 그는 신문의 풍자만화 연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기법 연구에 몰두했다. 얼굴과 몸이 주변의 빛에 둘러싸여 대상과 주변환경이 하나로 어울리는 인상주의 기법을 발견해낸 그는 그런 미학원리를 좇아 수많은 석판화를 제작했다.
풍자만화나 삽화를 실어주던 신문사들은 그의 새로운 기법에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지만,개의치 않고 인상주의에 전념했다.
천재는 천재만이 알아보는 법이다. 천재시인 보들레르는 모든 미술사가들이 외면하던 도미에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는 그를 옹호하는 평론을 썼다. 그것은 도미에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평론으로 기록된다. 그 평론 속에서 시민의 도미에를 아끼는 마음이 숭배에 가깝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숭배한 천재들이 두 사람 더 나타났다. 프랑스 인상파의 대부가 된 마네와 모네다. 그 인연으로 도미에 작품의 인상주의적 가치를 첫눈에 알아본 두 천재에 의해 인상주의 회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왜 서양미술사는 도미에를 인상주의의 선구자 또는 아버지로 부르지 않을까. 이것은 서양미술사를 훑어오는 동안 내가 키워온 큰 의문의 하나다.
12살 때까지 마르세유에서 살던 도미에가 항구를 떠나 파리로 올라온 동기가 아무래도 수상쩍다.
만화 혹은 우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그 동기는 도미에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지닌 마르세유 남자의 독특한 기질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에서도 마르세유는 항구이며,남자 또한 항구를 떠나는 팔자소관의 배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마르세유에서 채색한 장식판과 액자를 파는 유리공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어느날 꿈 많은 마르세유 남자의 길을 좇았다. 시인으로 출세하겠다며 가산을 처분하고 항구를 훌쩍 떠나 파리로 올라간 것이다. 아버지는 국왕 루이 18세를 알현하여 얼마간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왕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자마자 정신이상을 일으켜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그가 왕의 총애를 받은 기간은 2주간이었다고 한다.
왕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믿은 것일까. 마흔살이 될 무렵 파리에서 풍자만화가로 명성을 떨치며 이미 4,000점의 석판화와 4,500여점의 삽화를 그렸던 도미에는 좌익계 인사와 교류하며 당시 국왕 루이 필립을 풍자만화로 두 차례에 걸쳐 맹공격했다. 그 바람에 1832년 두달간 투옥되었고 정신병원에 넉달간 감금되기도 했다. 석방된 이듬해에도 풍자만화를 통해 권력과 돈을 가진 기득권자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견제했다.
인상주의 기법을 창시하면서 현실참여 열정이 식은 듯했지만,그것은 잠깐 동안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1850년부터 풍자화에 다시 손을 대며 인상주의 기법을 담은 석판화를 통해 기득권과의 투쟁을 죽는 날까지 계속했다.
제국정부가 주는 훈장을 거부한 그는 62세의 나이가 된 1870년에 좌익계 파리코뮌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런 투쟁 의지 탓에 인상주의 기법을 창안해 놓고서도 그 새로운 미학에 입각한 새로운 회화에 정진할 틈조차 내지 못했다. 풍자성격의 석판화를 수천점 제작했음에도 정작 인상파 기법의 회화는 몇점 그려내지 못한 것이다.
타계하고 나서 도미에는 서양미술사에서는 잊혀진 이름이 되었고,사회사를 열거하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예술가 도미에가 아니라 공화주의자 도미에로 찬양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여자인 항구를 떠난 배로서 남자의 인생항로가 만화로 풍자되어야 겨우 전달될 만큼 희화적일 뿐이라는 그 눈물겨운 사연을 항구 마르세유를 떠난 도미에의 인생역정이 말해 주고 있다. 떠난 배가 돌아오건 말건 떠나보낸 항구는 이토록 영원한 것을.

도미에, 대화하는 세 변호사Three Lawyers Conversing, c. 1862-65
도미에는 늘 돈 걱정을 하며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고 일생동안 그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마도 도미에는 빚쟁이의 등살에 자주 법원에 불려갔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집달리 판사 서기와 변호사 주변에 있는 거간 꾼 들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의 눈에 자주 띄었던 사람은 변호사였다.1830년과 1860년 사이에 그는 이와 같은 주제의 그림을 자주 그렸다.

도미에, 술 마시는 사람들The Drinkers, 1856년, 목판에 유채
도미에의 드로잉이 가장 대담했을 때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 나오는 ㅅ술 마시는 두 사람의 그림은 보들레르의 시 <넝마주의들의 포도주>의 한 소절을 위해 구상한 삽화였다. 왼 쪽의 인물은 또 다시 술을 따르려고 가슴을 쑥 내밀고는 팔꿈치를 과장해서 들어올리고 있다. 오른 쪽의 인물은 곧 의자에서 굴러떨어질듯한 상태로 술 취한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빨래하는 아낙네, 도미에, 1860년, 목판에 유채
도미에는 판화가이자 풍자화가로서 당대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은유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동시대의 현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 생활을 종종 소재로 택하였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방금 강가에서 빨래를 끝내고 제방을 오르는 여인과 아이를 그린 것이다. 한쪽 팔로 빨래 더미를 가득 안은 어머니는 혹시나 아이가 계단을 헛디딜까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도미에의 세심한 관찰력은 아직 키가 작아 계단을 오르기 힘든 아이가 다리를 한껏 올려 계단을 오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도록 하였다. 멀리 환하게 빛나는 건물들을 뒤로한 채,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은 얼굴의 윤곽이 생략되어 그려졌다. 특정한 인물을 나타내지 않는 이러한 익명성은 오히려 당시 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여성, 그 고단한 삶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미에는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노동자들, 소외된 여성들의 모습에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결코 서민들의 모습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리얼리티가 지닌 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공감하도록 한다.

도미에, 3등 열차, 1862년, 목판에 유채
도미에는 철도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어 1855년 경 부터 그의 작품에 철도의 소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묘의 정확성이 뛰어나다. 객차의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오른 쪽 승객들은 으스름 속에 앉아 있다. 그림의 중심에 있는 늙은 여인은 몸을 곧추세워 조금 굳어져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왼쪽의 품에 아이를 안은 여인은 매우 느긋해 보인다.

떠돌이 악사들의 연주, 도미에, 1862∼65년, 캔버스에 유채
그림의 현장은 시골의 자그마한 마을이다. 나팔을 부는 어린아이는 피에로 의상을 입고 있다. 도미에는 가난하고 생활이 불안정한 사람들을 그릴 때 마다 동료의식을 드러낸다. 떠돌이 풍각쟁이들보다 그의 마음속에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없다. 색채대비가 힘차고 자유롭다
밀레 [1814.10.4~1875.1.20] 원어명 Jean Franois Millet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걸음마》(1858) 《만종》(18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 《저녁기도》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만종 [晩鐘]
원어명 L'Angelus
작가 장 프랑수아 밀레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55.5×66㎝
제작연도 1857∼1859년
소장 파리 오르세미술관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화가 밀레의 1857∼1859년 작품으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삭줍기》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한 농부 부부가 황혼이 지기 시작한 전원을 배경으로 삼종기도를 드리고 있다. 들판에 굳건하게 서 있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마치 대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며, 먼 지평선에서 물들어가는 황혼빛을 받고 있는 부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유년시절을 농촌에서 보냈던 밀레는 순박한 농부들의 이미지를 통해 순수한 전원생활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였다. 그는 노동을 하늘의 섭리로 알고 묵묵히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통해 도시와 상반되는 농촌의 가치를 종교적 색채로 그려낸 것이다. 특히 이 그림은 단순히 노동에서 오는 기쁨뿐 아니라 삶의 진실을 함께 전해 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1,000프랑에 국외로 팔려나갔다가, 많은 소장자들을 거쳐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에는 80만 프랑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1890년 프랑스인 A.쇼샤르(Alfred Chauchard)가 사들여 1906년 루브르미술관에 기증하였고, 이후 오르세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원어명 Les glaneuses
작가 장 프랑수아 밀레
종류 캔버스에 유화
크기 83.82×111.76cm
제작연도 1857년
소장 파리 루브르미술관
추수가 끝난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나이 든 세 농촌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앞부분은 농촌의 실제 생활을, 뒷부분은 아름다운 자연과 목가적인 농촌을 그렸다. 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소란스러움은 멀리 원경으로 밀려나 있으므로 화면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어 세 사람의 모습에서는 엄숙함까지 느껴진다.
두 여인은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한 여인은 자신이 모은 이삭들을 간수하고 있다. 시선은 오른쪽 끝 여인에게서 왼쪽의 두 여인에게로 부드럽게 흘러가서 세 사람을 한 무리로 파악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엷은 구름이 낀 하늘 아래 높이 쌓인 수확물들이 길게 늘어져 고전적인 풍경을 이루고, 오른쪽 건물 앞에는 말에 탄 지주가 일꾼들을 지켜보고 있다.
밀레는 퐁텐블로 숲 근처의 샤이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추수하면서 땅에 흘린 이삭을 주워 가져가는 것은 당시의 농촌 사회에서 널리 인정된 권리였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가난한 생활을 했던 밀레는 과장하거나 감상도 섞지 않고, 일하는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비평가들은 농민의 모습만을 계속 그리는 밀레를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였으며, 1857년 살롱에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도 농사 일을 하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거만하게 표현되었다거나 '하층민의 운명의 세 여신'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밀레는 물론 정치적인 이유에서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것은 아니었으며,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인간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할 수 없었다.

↑ 소를 불러들이는 목동 / 밀레 작. 캔버스에 유채 94.6 x 64.8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바위에 앉아 있는 양치기소녀Seated Shepherdess -밀레 작.
캔버스에 유채 35.9 x 28.3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칠면조가 있는 가을풍경-밀레 작. 1873년 캔버스에 유채 81 x 99.1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