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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이론

철학이후(哲學以後)의 미술(美術)|

작성자다정|작성시간14.11.08|조회수53 목록 댓글 0

Art after philosophy

<철학이후(哲學以後)의 미술(美術)>

 

 

"최근 물리학자들 스스로가 종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공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자기들의 가설

(Hypotheses)적인 타당성에 자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것은 19c 과학자들의 반종교적인 독단에 대한 하나의 반발이며 물리학이 경험하던 바 위기의식에 대한 자연

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 A. J. Ayer

 

"... 일찍이 인간이 Wittgenstein의 논리철학(Tractatus)을 읽었더라면, 경험주의적 과학이나, 동어 반복적인

수학이 아닐지라도 철학과 인간 자신을 관련시키려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즉, 인간은 1918년 Wittgenstein

같이,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혼란 속에 근저된 철학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 J. O. Urmson

 

 

 전통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말될 수 없는 것(The unsaid)"에 관계가 있다.

 

20c 언어분석 철학가들이 논쟁을 해왔던 "말될 수 있는 것(The said)"에 대한 유일한 초점은 The unsaid는 

the unsaid라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c에는 Hegel 철학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Hume, 계몽철학가, Kant 등을 넘어 서서 한 

세기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면,

Hegel 철학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하나의 방편을 줄 수 있었고, 역사의 발전을 하나의 원리로써 적용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Darwin의 생물학까지도 인정할 수 있었다.

Hegel은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인정할 만한 해결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Hegel 철학의 영향력의 결과, 다수의 현대철학가들은 실제로 철학사가,

다시 말해서 진리의 보고에 불과했을 뿐이다. 인간은 "말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Wittgenstein의 사고나 그에 영향을 받은 사고의 내용을 확실히 인식한다면 여기에서 대륙철학

(Continental philosophy)을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철학에 있어서 "비실재"에 대한 근거가 있었을까? 아마도 이러한 이유는 우리 시대와 전시대의

차이점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있어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결론은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가졌던

정보(information)에 의존한 것이었다.

즉 경험주의자들 같이 전문적이지 못하고 합리주의자들 같이 보편적이지 못했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상 과학과 철학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서 과학자와 철학자의 그 위치는 같은 것이었다. 사실, Thales,

Epicurus, Heraclitus와 Aristotle 시대에서 Descartes, Leibnitz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저명은 철학이나

과학에서나 똑같은 것이었다.

그와 같이 20c 과학에 의해 지각된 세계가 그 전시대의 세계와 크게 다르다는 것은 여기에 전통적 철학의 합리

성을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문제는 아마도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거기에 대하여 James Jeans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철학이 과학의 결과를 사용했을 경우, 그것은 사건의 모형에 대한 추상수학적 표기를 빌려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형에 대한 '그때 그때 일어나는 회화적 표기'(current pictorial description)를 빌려오는 것이다.

즉 철학은 어떤 일정한 지식으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추측(conjectures)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추측해석은 인간 크기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 인간세계의 사건(heppenin

gs)을 지배하거나 우리에게 실재의 진실한 본질을 가장 가깝게 가져다주는 그런 종국의 과정은 아니기 때문

이다."

 

그는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 많은 문제들, 즉 원인성, 자유의지, 물질주의, 정신주의 등에 기준이 되는 철학상의 논쟁점은 이미

주장될 수 없는 사건유형을 해석하는데 근거되고 있다. 이렇게 보다 진부한 논쟁은 없애 버리고 그렇게 사라짐과

더불어 모든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20c는 이른바 '철학의 종언과 미술의 시작'의 시대를 초래했다. 물론 나는 엄밀히 말해서 그것의 뜻을 파악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의 추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언어철학은 경험주의를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하나의 연계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확실히 거기에는 Duchamp 이전의 '미술조건(art condition)'이 있으나 그것의 다른 기능이나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미술로서의 명확한 그 기능력은 너무 철저해서 최소한

미술로서의 미술조건으로 한정되어 진다.

철학의 종결과 미술의 시작의 관계가 기계적 감각에서 있는 것은 아니나 나는 이러한 문제발생이 전혀 합당한

것인가를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유가 두 문제에 필연적인 것일지라도 그 관계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이것에 의해 미술의 기능을 분석하고 그것의 존재를 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합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그것을 확장시킴으로서 다른 작가의 미술뿐 아니라 '개념

미술'의 용어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다.

 

 

미술의 기능(The funtion of Art)

 

" 회화의 위치가 보다 제한되어 있는 것은 미술의 발전이 항상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

이다."- Donald Judd(1963)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새로운 작품들은 대부분 회화도 조각도 아니었다."

- Donald Judd(1965)

 

"모든 조각이 갖고 있는 것을 나의 작품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

- Donald Judd(1967)

 

"아이디어는 작품을 만드는 하나의 기계가 된다."

- Sol Lewitt(1965)

 

"미술에 대하여 언급되는 한가지는 그것이 오직 하나일 뿐이다. 미술은 미술로서의 미술이며 그 밖의 것은 그

밖의 것이다. 미술로서의 미술은 오직 미술이며 미술이 아닌 것은 미술이 아니다."

- Ad Reinhardt(1963)

 

"의미는 사용이다." - Wittgenstein

 

"개념연구에 대한 보다 기능적인 접근방법은 내성의 방법으로 변화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개념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파악하려는 대신에 신념과 판단의 요소로써 작용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

- Irving M. Copi

 

"의미하는 것은 항상 기능의 전제조건이다." - T. Segerstedt

 

"...개념적 탐구의 주제는 어떤 낱말이나 표현의 의미에 있으나 낱말이나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에

대한 사물이나 사건상태 그 자체는 아니다." - G. H. Von Wright

 

"사고(思考)는 극히 은유적이다. 의미는 오직 일종의 실례를 표시하는 기호(記號)에 의한 원인관계를 통해서

만이 발생하기 때문에 분석에 이한 연쇄는 그 제도적 법칙, 원리이며 원인관계이다.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종의 그와 같은 '~으로써'다루는 것이며 '~로써' 개방적이거나 가장적으로나 분석, 평행, 은유적 파악을

하게 되는 것은 정신에 의해서만이 그려지고 파악되는 것이다.

그것에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파악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는 기호적(記號的)인 것에 이끌려

있기 때문이다." - I. A. Richards

 

 여기서 나는 미학과 미술을 분리시켜 논의하려 한다.

 

간단하게 형식주의자의 미술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들이 미술로써 미학적 이상을 주도적으로 제안한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술이 하나의 분석적 명제와 일치하고 철학적 추측과 '초연'할 수 있는 하나의

동의어로써 미술의 존재를 주장해보자.

 

 미학과 미술을 분리시켜야 할 필요한 이유는 미학이 대체로 세계에 대한 지각의 견해를 다루어 왔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미술기능의 두 가지 분야 중에서 하나가 장식적 가치였었다.

 

미(美)나 그와 같은 취향을 다루었던 철학의 분야가 똑같이 미술을 논의하려는 것은 필연적인 의무였다. 이러한

관습에서부터 미술과 사실적이지 못한 미학과의 하나의 개념적 관계가 성장해 왔다. 이러한 생각이 작가적

사고와 철저하게 충돌한 것이 최근에 와서인데 그 이유를 미술의 형태학상 특징이 계속 이러한 과오를 저질렀던

이유뿐 아니라 똑같이 미술의 또 하나의 명백한 기능(종교적 테마의 기술, 귀족들의 초상, 건축의 세부등)이

미술을 은폐시켜 사용되었던 이유이다.

오브제가 미술관계에서 나타나게 될 경우, 또는 최근 오브제가 사용되어 왔을 때까지 오브제는 어떠한 오브제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만큼 미학적 사고에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미술의 영역내에 존재하는 오브제의 미학적 사고는 미술관계에서 오브제의 존재와 기능이 미학적 판단과

무관한 것을 의미한다.

 

 미술과 미학과의 관계는 건축에 의한 미학, 그것과 다르지 않다. 즉 건축에서는 매우 특유한 '기능'을 갖고

있어서 디자인이 어떻게 좋으냐는 그 기능이 어떻게 잘 되었느냐에 따라 우선적으로 관계된다.

그와 같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판단은 취향과 일치해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각기 다른 건축의 양식이 각

시대의 미학에 의존하여 평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학적 사고는 미술과 전혀 관계없는 건축양식이 되어

버리는 한 그 자체가 미술작품들이다. 예를 들면 Egypt의 Pyramid가 그러하다.

 

 실로 미학적 사고는 오브제의 기능이나 그 합리성과는 다르다. 물론 그렇지만 않다면 오브제의 합리성은

엄밀히 미학적이다. 순수한 미학적 오브제의 실례는 장식적 오브제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장식성의 우선적 기능은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어떤 것을 덧붙여서 장식하고 꾸미기 때문에

기능은 취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형식주의 미술과 비평에 직접적으로 다르게

해 준다.

 

형식주의 미술의 회화, 조각작품은 장식적인 것에 앞장섰었고,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은 그 미술조건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 기능적인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순수한 미학적 경험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Clement Greenberg는 취향적 평론가이다.

 

 그의 모든 결론 뒤에는 자기 취향에 반영된 미학적 판단이 뒤따른다. 그러면 그의 취향이 반영하는 것은 무엇

이냐? 그것은 그가 평론가로서 성장했던 시대와 그에게 '리얼' 한 시대 즉 50년대인 것이다.

 

 그의 이론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Frank Stella, Ad Reinhardt와 그 밖에 그의 역사적 계획에 적당한

작가에 대한 무관심을 그가 그밖에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개인적인 경험근거에 근본적으로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 Don Judd가 미술의 철학적 '백지'(Tabla rasa)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만일 누가 이것이 미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술일 수 있다." 여기에 주어진 형식주의 회화, 조각은 하나의 '미술조건'을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미술의 아이디어에 의해서만이 인정된다.

 

즉 (예를 들면 정방형의 캔버스가 나무들 위에 펴져 있고 그저 적당한 색채로 얼룩져 있고 그와 같은 형태를

사용하여 그와 같은 시각경험을 주는) 만일 이러한 관점에서 미술을 본다면 우리는 오늘날 대체로 그와 같이

작업하는 화가, 조각가들이 역할 하는 최소한의 창작노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형식주의 미술과 비평이 형태학적 근거로써만이 존재하는 미술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을

인식시켜 준다.

다소 오브제나 이미지를 똑같이, 또는 오브제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관련지어 보는 것은 시각적/경험상의

'reading'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작가적이고 개념적인 관계에서

주장수는 없다.

 

형태에 대한 형식주의자들의 비평의 신뢰가 필수적으로 전통적 미술의 형태를 거쳐서 이끌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형식주의자들의 비평은 Michael Fried처럼 회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또 다른 학자적이 장식품을 우리가 믿으려드는 것처럼 그들의 비평은 '과학적인 방법'이나 어떤 경험

주의적인 것에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형식주의의 비평은 단지 형태학적 관계에서 우연히 존재하는 특별한 오브제의 물리적 속성을 분석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미술의 기능이나 본질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지식이나 사실을 첨가시켜

줄 수 없다.

또한 분석된 오브제가 미술작품인지 아닌지 조차도 논평할 수 없다. 그런 형식주의자들의 비평은 항상 미술

작품의 개념적 요소를 무시하고 있다. 그들이 미술작품의 개념적 요소에 대해서 정확하게 논평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미술이 단지 초창기 미술작품의 외형을 닮은 미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이 결여된 미술

이며, Lucy Lippard가 Jules Olitski의 회화를 간결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회화는 시각적인 놀이에

(Muzak) 불과하다.

 

형식주의의 비평과 작가들이 똑같이 미술의 본질을 문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어디선가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 작가가 존재하는 것은 미술의 본질을 문제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사람들이 화화의 본질을

문제시하고 있다면 미술의 본질을 문제삼을 수 없다. 만일 한 작가가 회화나 조각을 인정한다면 그는 그

전통을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Word art는 보편적이고 Word painting은 특수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며 회화는 일종의 예술이다.

만일 여러분이 회화를 제작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미술의 본질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의문없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술의 본질을 회화, 조각으로 구분하는 구라파적 전통을 인정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통적 미술의 형태적 정당화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것은 미술의 형태적인 개념이 미술

가능성의 함축된 a Priori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있다. 미술의 본질에 대한 그러한 a Priori한 개념

(내가 후에 논의할 분석적으로 형성된 미술명제나 작품과 분리된)은 참으로 미술의 본질을 문제삼기 힘든

a Priori한 것으로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미술의 기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된다.

 

 하나의 문제로서 미술의 기능은 Marcel Duchamp에서 처음으로 제기되며, 사실상 우리에게 그러한 미술

자체의 자격을 부여한 작가가 바로 Duchamp이었다.

사람들은 Manet, Cezanne, Cubism을 통해서 미술이 시작되는 자기 증명의 한 추이를 확실히 알 수 있고

그들의 작품이 Duchamp의 작품과 비교될 때마다 얼마나 소심하고 욕심이 많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현대미술과 그 이전의 작품은 그들의 형태에 의해서 관계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똑같이 남아

있는 미술의 '언어'이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고", 아직도 미술에서

의미가 통하는 것을 실현시켰던 사건이 Marcel Duchamp의 독자적인 Ready-made이었다.

그 작품과 더불어 미술의 본질을 형태학의 문제에서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작품과 더불어 미술의 본질을 형태학의 문제에서 기능의 문제로의 변모를 뜻하며, 이러한 변모, '형상'에서

'개념'으로는 현대 미술의 시작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인 것이다.

 

 Duchamp 이후, 모든 미술은 본질적으로 개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미술이 오직 개념적

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Duchamp 이후, 특수작가들의 가치는 그들이 미술의 본질에 대하여 얼마나 더 문제시하느냐에 따라 정해

질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그들이 미술의 개념을 첨가해 주고 시작하기 전에 없었던 것을 보여 주는데 있다.

 

작가는 미술의 본질에 대하여 새로운 명제를 보여 줌으로써 미술의 본질을 문제삼게 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가 미술명제를 형성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근거된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 미술에서 전해 내려온 '언어'와 자신을 관련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의 요소는 참으로

새로운 명제를 창조해 내는데 크게 관계된다.

 

 그러한 경우 특히 Duchamp에 있어서 미술의 오브제, 물론 ready-made이며 모든 미술이 여기에 포함되

지만, 그것은 몇 년 후에는 오브제 미술로 판단되어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된다.

그런 논의는 반드시 사실과 관계없이 질서화된 예측된 개념의 경우이다.

요점은 우리가 지적했듯이 미학이 미술과 개념적으로 무관하다는데 있다.

그처럼 어떤 구체적인 것이 오브제 미술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미학적으로 즐겁고 기호적인 것으로 생각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술관계에 오브제를 적용시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것은 미술관계에서의 그

기능성이다.

 

예를 들어 어떤 수집가가 그림을 수집하여 그것에 책상다리를 붙여 하나의 테이블로 사용했을 경우, 그것은

미술로서 작가적 의도가 없기 때문에 미술이나 작가와는 무관한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Duchamp 작품의 순수성은 그 이후 대부분의 작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바꾸어 말해서 Cubism의

예를 들어 가치는 미술의 영역 속에 차지하는 그 관념(idea)이지, 하나의 전문화화에서 보여주는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특징이나 일정한 색채, 형태의 특수화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색채나 형태는 미술의 '언어'

뿐 미술로써의 개념적인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에 관계되는 한 입체파들의 대작품을 오늘날의 미술로서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Cubism 언어의

특이한 시각적 지시는 대체로 오늘날 주의를 끌어왔고 인간이 회화를 '언어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많은

관계를 지녀 왔다. 예를 들어 Gertrude Stein이 말한 바와 같이 입체파 회화가 시도적이고 개념상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그와 같은 회화가 오늘날의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입체파 회화의 가치는 Lord Byron의 초고와 스미소니언 연구소(Smithsonian

institute)에서 보여 주었던 st. Louis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참으로 미술관은 스미소니언 연구소와 매우 같은

기능으로 채워져 있다. 루브르 전시장에 그들의 회화처럼 자랑스럽게 Cezanne나 Van Gogh의 파렛트를 전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미술작품은 하나의 역사적인 골동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미술이 Van Gogh

회화에 관계되는 한 그 가치는 그의 파렛트 이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의 회화는 수집가들의 수집 품목일뿐.

 

 미술은 작가적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나머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미술에 영향을 줌으로써 살아있는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작가가 다시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 작품의 어떠한 일면이 살아 있는 작가들

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미술에 진리가 없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미술의 기능이나, 그 본질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미술형태를 미술의 '언어'의 존재로써 계속 분석한다면

미술작품이 미술에 대한 논평으로써 미술관계에 나타나는 일종의 '명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명제의 형태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Kant의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의 구별에 관한 A. J. Ayer의 평가를 보면 더욱 편리할 것이다.

즉, "분석적 명제는 그 타당성이 오직 그것에 포함된 상징의 한정에 의존할 경우이며,

종합적 명제는 그 타당성이 경험의 사실에 의해 결정되었을 경우이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미술조건과 분석적

명제의 조건에서 한가지를 찾으려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그것들을 다른 것처럼 믿을 만한 것이나, 오직 미술에서는 가장 명확하게 속할 수 있는 미술형태가

분석적 명제와 가장 가까운 어떤 미술이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줄 수가 없다.

 

 미술작품은 하나의 분석적 명제이다. 그러한 관계에서 볼 때 미술작품은 어떤 사실문제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규정도 할 수가 없다.

미술작품은 동어 반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작가적 의도의 한 표현이며 작가는 특이한 미술작품은

미술이라고 보며 미술에 대한 하나의 한정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그처럼 미술은 순수한 a Priori한 것이며 그 개념을 Judd가 언급한 바와 같이 "누가 그것이 미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술이다."

 

 참으로 미술을 동어반복적인 것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일반적인 말로 논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미술을

전혀 다른 식으로 다루어 미술을 이해하려는 것은 보통 그와는 다른 면이나 미술작품의 미술조건과는 관계

없는 명제적 성격에만 촛점을 두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술의 조건이 개념적인 상태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작가가 자기의 명제를 흔히 개인적인 규약이나 언어로 연구한 언어적 형태는 형태학적 압축에서 유래된 미술

자유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대미술과 친숙해져서 미술을 평가, 이해한다. 역시 사람들은 왜 '거리의 인간'들이 작가의

미술보다 편협하고 항상 전통적 언어로서 미술을 요구하고 있는가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주의 미술이 Hot cake와 같이 팔리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오직 작가들은 회화, 조각 같은

언어를 전부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형식주의자들의 "진기한 예술"(Novelty art)라는 새로운 언어가 반드시

새로운 명제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찾으려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키네틱 아트나 일렉트로닉 아트가 그러하다.)

 

 미술에 관련된 또 하나의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Ayer는 언어관계의 분석적인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

하고 있다. 작가적 명제의 타당성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어떤 경험주의적이거나, 미학적, 전제적인 것에

의존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 분석가로서 작가는 사물의 물리적인 소유와는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오직

다음과 같은 방법에만 관련을 맺고 있다.

 

(1) 미술은 개념적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과

(2) 작가의 명제가 어떻게 논리적으로 그런 성장을 뒤따르게 할 수 있는 가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명제는 성격상으로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이다. 즉, 미술명제는 구체적이고 정신적인

오브제의 행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개념의 한정과 그 한정의 형식상의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술이 하나의 논리 속에서 작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수한 논리적 탐구의

특징을 미술에 한정된 형식적 결론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어떤 경험적인 사실 문제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이 논리학, 수학과 같다는 말은 동의어적인 의미에서이다. 미술의 아이디어나 작품, 그리고

미술과 같은 것 등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미술관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미술로서 평가될 수 없다.

 

 한편, 미술이 종합적 명제가 될 수 없고 시도되기 어려운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 이유는 그런 주장에 대한

진리, 또는 거짓은 경험적인 근거로써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Ayer는 말하고 있다.

 

"... 우리가 a Priori한 것이나 분석적 명제의 타당성을 결정짓는 비판기준은 경험주의적이고 종합적 명제의

타당성을 결정하는데는 충분치 못하다. 그것은 그런 타당성이 순수하게 형식적이지 못한 경험주의적 명제

에서 나온 특징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하학적 명제나 그러한 제도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모순적인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경험주의적 명제나 그런 제도는 아마도 모순과는 다른 것이며 아직도

거짓일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물질적인 비평기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적' 미술의 비실재성은 종합적 용어로서 미술명제를 형성하는데 기인된다. ; 우리는 항상 명제를 경험

적인 것으로 증명하려든다.

사람들에게 사실주의의 통합적 상태는 미술의 본질에 대해서 보다 커다란 문제형성의 대화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그러한 작품은 Malevitch, Mondrian, Pollock, Reinhardt, 초기의 Rauschenberg,  Johns,

Lichtenstein, Warhol, Andre, Judd, Flavin, Lewitt, Morris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미술의 제도에서 인간조건의 무한한 공간으로 뛰어든다.

 

계속해서 Ayer의 말을 인용하면, 그는 순수표현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지시적 기호(記號)로

구성된 하나의 문장은 진정한 명제를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절규일 뿐 언급되어진 것을 특징

지워주는 방법이 아니다."

보통 표현주의 작품은 전통적 미술의 형태적 언어로 보여주는 일정의 '절규'이다. Pollock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캔버스를 마루 바닥 위에 수평으로 놓고 그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화폭 위에 dripping을

하고 벽면에 나란히 걸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미술 자체를 가져오는 것이지 전에 있던 것을 사람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다. Pollock의 자기 표현적 개념은 미술에 있어서 그리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자기 표현식의 주제적인

의미는 자기 개인적으로 표현된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특수한

특징은 미술의 관계 밖에 놓여지게 된다.

 

 Richard Serra는 말하고 있다. "나는 미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행위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미술로 부르고 싶다면 그것은 그의 일이지 내가 그것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나중의 일이다." 그런데 Serra는 자기 작품의 의미를 많이 알고 있다. Serra가 정말로 자기

작품의 납(lead)이 중력적이고 분자적으로 '되어진 것' 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미술작품으로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그가 미술이 존재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가 할 수 있고, 누가 해야 되는가?

확실히 그의 작품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납이 작품이 될 수 있고 많은 구체적인 행위로 사용되고 있다. 납은 그 자체가 미술의 본질에 대한 대화를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행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그것이 미술이라는 것을 '그의 행위'가 일어난 이후의 그의 행동에 의해서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여러 화랑에서 있었던 그의 행위의 물리적인 흔적에서 나타내며 미술 수집가에게

작품을 매매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수집가들은 한 작품의 '미술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그 자신의 작품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작가가 모순 이상의 것을 작업했을 경우에만 제한

된다.

Serra는 '미술시대'가 경험적으로 도달한 것을 은밀히 느끼고 있다. Ayer는 말하고 있다.

 

"어떤 경험적인 명제란 없다. 확실한 것은 오직 반복적인 것일 뿐, 경험적인 문제는 하나이며 실제적인 감각

경험으로 제한돼 있어서 믿을 수 없는 가설적인 것이다. 그처럼 최종의 명제란 없다."

 

우리가 Ad Reinhardt의 글을 통해서 발견한 것은 '미술로서의 미술'의 테제와 매우 유사한 개념으로 미술은

항상 죽은 것이고 '살아있는' 미술은 하나의 기만이라는 것이다. Reinhardt는 미술의 본질에 대하여 매우

정확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인식하기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종합적 명제로 생각된 미술 형태가

세계에 의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미술의 조직과 같은 반복적인

것을 떠나야 하며 지시의 '밖에서' 생각해야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를 미술로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것을 지시의 밖에서 무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시나 경험적인 특징을 떠나서 그 자신의 본래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조건의 상태가 필요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미술의 생존능력

일종의 시각적 경험의 표현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 표현이 전시대의 미술기능

무관하다는 것도 같다.

그후 19c의 인간까지도 매우 규격화된 시각환경 속에서 생활했었다. 즉, 그것은 인간이 날마다 접하게 되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며, 인간이 살고 잇는 세계의 일부에 대한 시각환경은 계속적인 것이다.

 

 우리 시대에 와서 경험상으로 보다 철저한, 풍부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구의 어느 곳이나 월(月)이

아닌 시일(時日)의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영화관, 칼라 TV를 갖고 있으며 Las Vegas의 불빛이나, New

York 마천루의 경치를 갖고 있다. 전세계는 거기에 보여지며 안방에서 달을 걷는 인간을 볼 수 있다.

확실히 회화, 조각, 오브제 미술이 어떻게 시도적으로 이러한 것과 싸워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사용'의 개념은 미술이나 그 언어와는 관계가 없다. 최근 박스나 큐브의 형태가 미술에서 많이 사용되어 왔다.

(그 예로 Judd, Morris, Lewitt, Bladen, Smith, Bell, Mc Craken 등 그 후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모든 박스, 큐브 형태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차이점은 그 작가의 의도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으로 특히

Judd의 박스나 큐브형태의 사용은 하나의 오브제가 미술관계에서 위치하는 초기의 주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몇 개의 예를 지적해 보면, 사람들은 Judd의 박스 형태의 하나를 쇠부스러기로 채워서 공업적 배경에 놓여져

거리의 구석진 것으로 보여진다면 그것은 미술과 일치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는 그것을 미술작품

으로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미술작품으로 '보기'위해서는 a Priori한 요소가 필요할 것이다.

 

미술의 개념이나 작가적 개념에 대한 전제적 지시는 현대미술을 평가하고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현대작품의 물리적인 특성을 분리시켜 전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술의 개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Judd가 말한 미술개념은, 물론 그가 꼭 이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전체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했다.

 

개념의 일부를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미술조건과는 관계가 없는 면을 생각하는 것이며, 또는 어떤 한정의 부분

읽는 것과 같다.

 

 최초로 고정된 형태미술이 우리가 미술을 일반적 용어로 그 본질을 해석하는데서 나온 실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형태와 분리되어 존재하고 그 기능으로 구성된 관계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보다 비슷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찾아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언어를 그럴싸하게 포기할 수 있게 된것은 바로 짧은 역사를 가진

데서 현대미술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서구의 회화, 조각에서 유래된 미술이 그 본질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문제시 할 수 있었고 모든 일반미술에 관계되는 최소의 전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분석에서 볼 때 모든 미술은 단지 Wittgenstein의 말, 서로 닮은 '한 가족'인 것이다.

 

그러나 시, 소설, 영화, 연극 그리고 여러 형태의 음악이 지닌 미술조건에 관련된 여러 특징은 여기서 주장된

가장 확실한 면인 것이다.

하나의 미술 일상언어를 사용하는 시에서부터 함축된 형이상학과 관련된 시가 쇠퇴하지 않을까?

최근 New York의 지난 10년의 시단(詩壇)에서는 실제적 오브제와 연극을 사용하는 '구체적 시'를 영화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미술형태에 대한 비실재성을 느낄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기하학의 증명(axiom)이 단순한 한정이며 기하학의 정설이 이러한 한정의 단순한 논리적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기하학 그 자체는 구체적 공간이 아니며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말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하학을 실재적 공간에 대한 이유로 사용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증명(axiom)에

실재적 해석을 하기만 한다면 그 정설(theorem)에 그 증명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오브제를 적용시켜 나갈 수

있다.

기하학이 실재적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기하학 그 자체의 범위 밖에서 유래된 하나의 경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하학이 우리에게 거짓이거나 진실이거나 알려지는 문제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모든 기하학이 모순되지 않는 한에 있어 그것은 모두 진실이다. 기하학의 일정한 적용의 가능성에 언급된

명제는 그 자체가 기하학적 명제는 아니다. 기하학 자체가 우리에서 말해주는 것은 어떤 것이 한정될 수

있다면 그 정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순수한 논리적인 제도이며 그 명제는 순수한 분석적 명제이다." - A. J. Ayer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미술의 생존능력을 제안한다. 한 시대에 있어서 전통적 철학이 그 전제 때문에 실재적

이지 못할 경우, 미술의 존재 능력은 봉사를 수행할 수 없는, 즉, Kitsch적 문화와 공학으로 쉽사리 바꿀 수

없는 시각적 경험적, 장식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오히려 철학적 자세로 전제될 수 없는 것으로 만이 존재될

것이다.

이에 대한 존재 이유는 미술의 특수한 성격이 철학적 판단과 '초연'하여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미술은 논리학, 수학뿐만 아니라 과학과 같은 유사성을 나누어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기능상에서 노력의 대가로 사용될 수 있으나 미술은 그렇지 못하다. 참으로 미술은 그 자신

만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인간 세계에서 철학과 종교 이후, 미술은 다른 시대가 '인간의 정신적 요구'를 수행하는 하나의 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미술은 가능한 한 철학이 주장되어야 하는 물리학을 넘어서서 사물 상태와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될 것이다. 또한 앞에서 말한 글은 하나의 주장이며, 미술의 힘은 미술에 의해 증명될 수

없는 것에 있다. 오직 미술에 대한 주장은 미술에 대한 것일 뿐이며 미술은 하나의 미술의 정의이다.

 

(끝)

 

Studio International, October 1969. 

Joseph Kosuth

번역: 장화진(1973년, S.T Group 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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