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미술이론

하이데거의 예술론 - 예술작품의 근원을 중심으로

작성자꽃품팔이|작성시간10.05.24|조회수617 목록 댓글 0

하이데거의 예술론 - '예술작품의 근원'을 중심으로


Ⅰ. 하이데거의 논문, '예술작품의 근원'은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적 존재론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저술이다. 이 글에서 하이데거는 그의 사상 초기부터 계속되어온 존재에 관한 물음을 철저한 논리와 반성을 무기로 심도있게 펼쳐 나간다. 그는 과거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를 거쳐 칸트, 헤겔에 의해 절정에 이른 이성의 행진에 강한 회의를 품고,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 대하여 깊은 불신을 표시함으로써 서구 사상을 꿰뚫고 있는 철학적 전통을 밑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수공적' 수행의 결과 그는 '진리는 비진리이다'와 '예술작품은 진리의 자기 속으로의 정립'이라는 간결한 명제 두개를 산출해 낸다.

논문의 요지를 살펴보자. 그는 우선 예술작품과 예술가는 서로가 서로의 근원이 되는 순환적 관계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순환의 근원이 되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의 출발점으로 그는 의심할 수 없는 근거라고 우선 가정한 '작품의 사물적 측면'에 대한 사유를 시작한다. 그는 사물에 관한 전통적인 세가지 견해, 즉 '특성들의 담지자', '감관에 주어진 다양성의 통합', '형식화된 질료'라는 세가지 견해에 대해 비판적인 검토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세가지 견해가 모두 사물의 사물존재를 밝히는 데는 부족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세가지 견해 중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질료화된 형식'이란 개념은 도구를 중심으로 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음을 밝혀내고 다시 도구의 도구존재에 대한 사유를 시작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한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것은 바로 '작품에 즉해서' 우리는 도구의 도구존재가 바로 그 용도성과 셰계와 대지에의 신뢰성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착안한 하이데거는 그 다음 단계인 작품과 진리와의 관계로 나아간다.

작품은 결국 하나의 세계를 열어세우고(aufstellen) 대지를 불러 세운다 (herstellen). 물론 여기서의 세계와 대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와 대지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자면 '세계란 역사적 민족의 운명 가운데서, 단순하고 본질적인 결정들이 이루는 광활한 궤적들이 스스로 열어놓는 개시성(Offenheit)을 말한다. 반면 대지는 끊임없이 자기를 폐쇄하면서 그런 가운데 자신을 감추어 간직하는 것으로서 그 스스로를 외부로 내밀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와 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과정에서 이들 사이에는 투쟁이 일어난다. 작품은 이 투쟁을 선동하며 이 투쟁은 단순한 내면성 속에서 극도에 달한다. 여기에 작품의 고요함이 있다. 즉 작품의 작품존재는 바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투쟁화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을 잠깐 바꾸어서 하이데거는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진리 개념 - 인식과 사실의 일치 - 는 사실 자체가 '숨어있지않음'을 전제로 해야 함을 망각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리스어 알레테이아에서 찾을 수 있는 '숨어있지않음'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숨어있지않음에는 거부와 위장이라는 이중의 숨김이 필요하고, 여기에서 결국 진리는 비진리에서 연유한다는 명제가 도출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진리의 본질은 밝힘과 숨김 사이의 근원투쟁이며 이러한 근원투쟁의 와중에 열려진 중심이 쟁취되고, 그곳에 존재자가 들어왔다 나왔다 한다. 세계와 대지 역시 스스로의 투쟁으로 이 터에 속하고 있으며, 작품은 이 투쟁을 선동 투쟁화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아름다움은 바로 숨어있지않음으로서의 진리가 일어나는 한 방식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진리의 본질은 예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이데거는 '테크네'라는 말의 어원적 고찰에서 새로이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스어의 테크네는 단순히 수공과 예술행위를 뭉뚱그린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앎의 한 방식으로 '이미 보았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알레테이아, 즉 존재자를 숨어있지 않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결국 테크네는 존재자의 산출행위인 것이며 수공 행위를 사유의 실마리로 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하이데거는 개시성의 밝힘과 열려진 터 가운데로의 조직 정돈이 진리가 일어나는 본질적인 방식이며, 여기에서 '진리는 작품에로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라고 단언한다. 즉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작품은 진리가 일어날 수 있는 한 탁월한 가능성인 것이다. 그 후 하이데거는 균열에 대해 언급하는데, 존재자의 열려진 터에로의 등장은 균열이 대지에 의탁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며 이 방식이 바로 형태(Gestalt)라고 한다. 즉 작품의 창작되어있음이란 진리가 형태 속에 확림되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진술에 빠진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보존'의 측면이다. 즉 작품은 우리를 일상이 아닌 존재의 깊은 심연에 밀어넣고 진리를 개시하는데, 자신의 실존을 초월하여 작품속에 정립된 이러한 존재자의 개시성 가운데로 자신을 내세우는 냉엄한 결단이 바로 원함으로서의 앎인 것이다. 결국 작품존재는 창작과 보존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산물로서 예술은 진리를 작품 속에서 창조적으로 보존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 이 후에도 하이데거는 사유를 계속 수행하여 언어의 중요성, 그리고 '존재자의 숨어있지않음을 말함'으로서의 '시작'이란 개념을 내놓는다. 그리고 예술의 본질로서의 시작을 세가지 의미, 즉 진리의 증여, 진리의 근거지움, 진리의 시작(출발)으로서 정의하며 좁은 의미의 시작, 즉 우리가 즐겨 쓰는 의미의 시작을 가장 근원적인 시작이라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언어는 다른 예술장르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Ⅱ. 이상이 하이데거의 논리 전개의 요지이다. 그러면 위의 사유가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살펴보자. 하이데거는 고호의 구두그림 예를 들었지만, 사실 어느 작품에도 이 이론은 성립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세잔의 꽃병그림을 보자. 꽃병은 평소에는 우리 주위에서 장식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잔의 이 그림은 그러한 꽃병을 아주 미묘한 색채와 정밀한 구도로 우리에게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가버렸을 꽃병임에도 불구하고 그 꽃병의 모양과 색채, 그리고 위치등에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꽃병의 존재를 우리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준다. 도구로서의 '꽃병'은 우리에게 한낱 도구로서 인식되며 그것의 용도성에 둘러싸이고, 또 주위의 장식들과의 '신뢰성' 속에서 우리의 주목적인 관심을 얻는데 실패하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었던 꽃병의 용도성과 함께 꽃병이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새로운 아름다움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결국 꽃병을 그림으로써 꽃병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와 꽃병의 아름다움을 사물적으로 뿜어내는 대지외의 투쟁을 선동하고 있으며, 그러한 투쟁 속에 숨겨져 있던 꽃병의 존재가 밝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숨어있지않음으로서의 진리를 작품 속에 정립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적 의미의 예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이론은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서의 보존에도 주목한다. 즉 본질을 드러내는 창작은 그러한 작품존재를 인식하고 진리의 일어남 속에 두려움 없이 머무를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사람에 의한 보존과 함께함으로써만 완성된 작품존재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이론은 제롬 스톨니쯔를 비롯하여 현재 미학이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무관심적 주목'의 이론과 꽤나 흡사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을 예술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할 때, 단순히 미의 가치에서 논하는 '무관심적 주목' 이론에 비해 하이데거의 이 이론은 존재의 심연에까지 치밀한 사유를 통해 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Ⅲ. 그러면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예술 철학에 있어서 의문시되는 점은 없는가? 그 스스로 치밀하고 명쾌한 논리전개를 위해 무진 애쓰고 있는 것에 힘입어 그의 사상은 작품의 작품존재와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어느정도 명쾌하게 풀어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기초로 하는 과거의 미학 이론과 철학적 전통과의 괴리는 아직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몇가지 문제점을 대략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우선 하이데거는 과거의 무반성적 철학 사유를 비판하기 위해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에 천착한다. 즉 '알레테이아', '퓌시스', '테크네' 등의 단어의 진정한 뜻은 과연 무엇이었겠느냐를 논의의 출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탐구는 과연 그리스인들이 그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때에 그들에게 일어났던 원초적 경험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그러한 경험은 '원초적'이고 '역사적 민족'의 결단들 중의 하나로서 존재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을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뒤에서 하이데거가 언어에 꽤 중요성을 준 점, 즉 언어 속에 역사와 민족의 세계와 대지가 보존되어 있으며, 세계 역사에의 귀속성이 민족의 본질을 이룸을 강조한 점, 그리고 언어 예술이 다른 예술에 비해 특멸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 점에서 한 번 더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그의 이론은 언어를 달리하는 사회에서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하이데거는 'Sein동사가 없는 동양계 민족이 존재론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전제 - 어원의 추적은 각 민족의 근원적 경험을 나타내고 있다 - 는 일견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각 민족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언어와 역사속에서 각각 상이한 진리와 예술을 가지게 된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결국 언어를 강조하고 세계를 '역사적 민족'의 것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견해는 스스로 꽤 범위가 좁은 예술론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서 언어를 연구한 비트겐슈타인 등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연구에서 보듯이 언어의 사유는 꽤 보편성을 띨 수 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처럼 그리스어의 어원만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위와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 예술이라는 어휘에는 두가지 개념, 즉 평가적 의미와 분류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미학 이론은 거의 예술의 평가적 의미에만 치우쳐 있는 편협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학 이론들의 한계를 하이데거는 어느정도 극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예술은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이라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이론과는 반대로 예술의 분류적 의미에서의 개념을 정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적 의미는? 하이데거는 어떤 것이 예술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그나마 극히 추상적이다) 과연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진리가 조금만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가능한가? 존재가 일부분만, 또는 희미하게 드러났다는 말은 가능한가? 물론 분류적 의미의 예술의 정의는 광징히 난해하며 (Dickie는 예술 제도론이라는 거대한 범주의 이론을 주창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난해함은 하이데거와 같이 존재의 뿌리부터 사유하는 근원적 작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업적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분파로 나뉘어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왔던 미학 이론들을 '존재'라는 거대한 구조 아래 편입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다 보니 개개의 예술의 특성이나 예술 감성의 다양한 과정에 관한 고찰에는 한계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의 의견의 불일치, 좋은 작품의 기준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의 예술론은 역시 반쪽 예술론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점은 그의 예술론은 다양한 예술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을 정의했고 그의 정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뿌리깊은 사유의 결과물이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긴 하지만 최근 예술의 다양한 사조를 일괄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많은 편협함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의 사상 기반 자체, 즉 진리의 본질과 존재자의 개시, 세계와 대지의 투쟁 등은 어느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고, 또 예술과 비예술을 가리는 훌륭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 특히 창작에 관한 부분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많은 한계를 지니는 듯하다. 그리고 예술의 가장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음악에 관한 설명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도 아울러 하나의 약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은 다른 예술과 달리 1차적 텍스트와 2차적 재생(연주)가 본질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간적 배경 하에서 이뢰적으로 감상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특멸히 고찰되어야 할 많은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말이다.


3. 하이데거는 진리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몇가지를 제시하고는 그 중 작품은 진리가 일어날 수 있는 탁월한 한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진리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론에서의 진리는 너무나 일어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존재자가 스스로의 본질을 개시하는 진리가 이렇게 일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고호의 그림을 설명하면서 하이데거는 그림에 즉해서 우리는 구두라는 도구의 용도성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두의 용도성을 깨닫는 것일까? 하이데거도 인정했듯이 구두가 낡아 떨어졌을 때 그 구두는 세상에의 신뢰성을 잃게 되고 결국 스스로의 용도성을 꽤 두드러지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한 상황 말고도 우리는 때때로 사물을 '무관심적'으로 주목할 때가 있다. 우리는 대개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을 보지 않고 그 사물에 달린 '꼬리표'를 본다고들 한다. 즉 우리는 그것을 도구적으로만 보고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때때로 무관심적 주목을 할 때도 있다. 즉 용도성에서 벗어나 그것을 사물 자체로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는 것이다(수업시간 중에 멍하게 연필을 바라보면서 연필의 직선적 공업적 아름다움을 경험한 적이 모두 있을 것이다). 물론 작품은 그러한 진리의 일어남을 끊임없이 일으킨고 그러함으로 인해 우리가 존재자의 개시성을 지속적으로 깨닫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다는 점에서 진리가 일어날 수 있는 '탁월한' 하나의 가능성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요 이에 관한 하이데거의 통찰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진리의 본질이 존재자의 존재 그 자체를 개시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진리는 우리가 무관심적 주목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진리는 순간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도' 일어날 수는 있는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나라의 성립, 본질적 희생 등 진리가 일어날 수 있는 몇가지 방식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엄격한 진리의 규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현재의 수많은 예술 사조를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더욱 힘이 되지 않을까?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이 협소함은 '보존' 개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작품에 즉해서 일어나는 진리의 일어남을 직시하고 존재자의 개시성 속에서 머물 수 있는 결단을 내리는 사람만이 작품을 창조적으로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보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미적 경험의 양태는 그러한 미적 경험의 체험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미학은 이러한 미적 경험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기도 한 바 예술론과 미론은 이러한 개인의 미적 경험을 도외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예를 들어 컬링우드는 예술임에 틀림 없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도구적인 것으로 격하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의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결국 진리가 이렇게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은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라고 느껴지며 하이데거는 고호의 그림을 바라보자고 우리의 손을 이끌 때처럼, 진리의 일어남을 창작과 보존의 과정에서도 조금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Ⅳ. 하이데거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미론이나 예술론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와 예술작품 사이의 '순환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해 나감으로써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사유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을 진리가 일어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파악한 그의 사상은 독창적인 동시에 유효적절하고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예술을 그 자신의 존재론을 위한 도구의 성격으로 삼은 감이 없지 않다. 즉 예술과 철학이라는 어찌보면 상반되기까지 한 두 학문을 연관지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꾸 묻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개개 분야에 내재된 의문으로 인해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필자는 주로 전통 미학의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비판해보았지만, 필자의 생각에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미학 이론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작품이라는 '진리의 한 가능성'을 통해 존재의 심연을 좀더 깊고도 쉽게 사유하려 했을 뿐이다. 그의 업적도 바로 이러한 심오함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바로 이 점이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그의 사상을 현대에 있어서도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