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예술론에서
자연의 본체에 대한 인식과 그 예술적 실현
- 위진남북조에서 북송까지 회화론의 전개를 중심으로 -
문제 제기
동양의 산수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서양의 원근법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와유臥遊"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정신이 육체를 벗어나 그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에로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비상의 귀착점은 자연의 본체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정신과 형체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 및 그 정신이 귀속되는 보편적 정신과의 관계를 포괄하는 우주론적 존재론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산수화에서 '와유'를 통해 감상자의 정신이 현실적 제한에서 벗어나 무궁한 공간과 시간에로 비행하면서 자유를 느낀다고 하는 것은 동양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의 실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산수화의 창작과 감상은 단순한 자연적 대상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을 위한 궁극적인 자연의 본체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실현이 전제가 된다. 중국예술론에서 이러한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와유'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회화론에서 "와유"란 용어는 당말 장언원이 『역대명화기』의 「종병」조에서 『송서』 및 『남사』에 기록된 "누워서 노닌다臥以遊之"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 처음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종병은 위진남북조의 산수화가이자 이론가이며, 그의 저서 『화산수서』란 전문이론서가 『역대명화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산수화가 관념적 형태에서 벗어나 사실적인 세계로 이르러 본격적인 회화론이 발전하기 시작한 북송 이후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북송 곽희의 『임천고치』 「산수훈」에서 그 의미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명대 동기창 역시 이 개념에 근거하여 회화론을 구현하고 있으며, 중국 최고의 예술론이라 할 수 있는 청대 석도의 『고과화상화어록』에서도 그 예술의 기본적 이념이 일획에 의한 자신의 자유의 실현이었다. 이것은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조선후기 문인화가이자 이론가인 강세황 역시 이러한 사고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후대의 '와유'사상을 분석하면 두 가지의 상이한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곽희가 대표적인 예로서 와유를 감상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산수화는 정신이 '와유'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또한 그 정신이 초월적 세계로 지향하는 방편이 된다. 또 하나는 소식과 석도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 때 그 '와유'사상은 창작론적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것은 산수화를 매개로 하여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하기 전과 창작과정, 그리고 그 후의 감상을 일관하는 하나의 체험으로, 그 자신 스스로를 우주 창조과정의 실현에 비견하는 것이다. 이 때 무엇보다 작가의 창작하기 이전의 '立意'가 중시되며, 이 '意'는 우주의 보편적 정신으로서의 意가 된다. 즉 작가는 자신의 意를 보편적 의와 일체화시켜 이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창작과정을 이끌어 가는데, 이 때 하나의 창작행위는 우주의 창조과정으로 승화되고, 이로 인해 화가는 인생의 유한한 한계에서 벗어나 영원함을 체득하며서 순간적으로 자유를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본체와 일체화된 자신을 노닐게하고, 이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와유'사상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그것은 종병이 주장하는 '와유'가 회화론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두 가지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상의 변천을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논문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해서는 '와유'의 기본개념이 제시된 종병의 회화론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이 먼저 요청된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병의 회화사상을 분석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병시대의 사상과 그 시대 회화의 실제적 현상 및 그 회화론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병이 주장한 산수화이론과는 달리 그 시대에는 산수화가 일반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인물화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종병의 『화산수서』는 해석상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저서에 나타난 산수화에 대한 이론은 제작상의 이론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이론에 따르면, 그 이론은 종병의 또다른 저서 『명불론』과 연관시켜 불교의 연기설에 근거한 순수한 이론서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불교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시켜 그 이론은 불교의 해탈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종교의 시녀"라고 하였다. 즉 그녀는 이 『화산수서』의 내용은 비례의 문제 등 제작상의 기술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것은 당시의 회화 경향과는 달리 불교에 입각한 이론적 측면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이론을 수용한다면 이 "와유"는 처음에는 이론적 측면으로 있다가 시대적 변천을 지나 실제적 측면으로 이르게 되었다는 결론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과정에는 여러 변화가 있을 것이라 본다.
즉 종병의 "臥遊"는 불교적 입장에서 제작을 통해 정신의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할 때 종병 그 자신의 신앙인 불교의 명상을 통해 정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방편으로, 이는 개인적 사상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는 산수화에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구현의 방법이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이 전유하는 추상적 이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송 이후에 오면 산수화는 몇몇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보편적이고 세속화되어 시대 양식으로 등장한다. 이 때에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와유"를 실현할 수 있기 위해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가 하는 제작론이 바탕이 되고 있다. 즉 "와유"를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렇게 유도하는 제작기법과 방식을 필요로 한다. 회화사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바로 산수화의 성립을 의미한다. 그런데 산수화의 성립은 이 시대에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를 선결해야 하였다.
첫째로 자연에로의 전향과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중국인이 자연에 몰입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것은 인간과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또한 이러한 것은 중국에서 최초의 산수화론인 종병의 『화사수서』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 자연에 대한 가치와 인식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화가와 그 창작행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연의 세계가 아무리 영원함을 간직하고 있고 그 세계를 통해 유한한 인간이 영원함으로 초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화가와 그 회화활동이 사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면 그 자연의 고귀한 가치를 회화를 통해 실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화가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며, 그 행위는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이것은 창작론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셋째로 위의 문제가 선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이 형성되지 않으면 자연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객관적 조형언어와 그 양식을 통해 감상자는 회화작품에 구현된 자연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것을 매개로 "臥遊"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통합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대적 의식의 요구로 볼 수 있다. 종병의 경우처럼 개인 또는 몇몇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것을 요구하고 받아들이는 시대적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산수화는 하나의 시대양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 중국회화사에서 이 시대가 오대·북송이다. 엄밀히 말하면 성당 이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것이 시대양식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와서 '와유'는 두 가지 경향으로 구체화된다. 즉 하나는 산수화를 보면서 그곳에 구현된 자연에 정신이 노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가 그림 그리기 이전에 그의 意를 천지우주의 意와 일체화하고, 창작과정을 자연만물의 생성과정에 의탁하여 간접적으로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화가의 의와 창작과정은 바로 자연본체의 실현으로서, 본체와 일체화된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즐기고 그것을 노닐게 한다. 전자는 종병의 『화산수서』에 나타난 감상론적 측면의 '와유'를 계승한 것이고, 후자는 특히 唐代에 성숙된 창작론의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 또한 이 두 개념이 일반화될 때 중국에서 화원화와 문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와유'사상과 결부하여 흥미롭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중국에서 한 시대에 동시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 위진남북조시대에서 북송대에 이르기까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체계적이라기보다 산발적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 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1.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
'와유'사상이 제기된 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의 존재에 대한 문제로서, 진정한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관련되며,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즉 인간은 자연에게 어떠한 존재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을 어떻게 이상적 관계로 맺을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과 문화에서 일관되게 추구해 온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예술에 관련되어 나타난 것은 위진남북조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이 문제가 예술에 표면적으로 부각된 것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의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일어난 "인생의 자각"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이 때 인생이란 자연의 무한함에 대한 인생의 유한함의 자각이다. 한말과 위진시대에는 많은 전쟁과 권력투쟁에 의해 주변에서 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漢代의 지고의 가치인 윤리도덕이 몰락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人生의 덧없음과 슬픔을 느꼈을 것이고, 이에 대한 극복으로 자연의 영원함에로 전향하여 자연의 무한함을 자신의 인격이상의 경지로 추구함으로써 삶의 위안을 찾았을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 魏晉玄學과 佛學이었다. 또한 그것은, 劉宋의 『세설신어』에서 사람의 내면적 세계를 자연의 형상에 비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에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심미적 태도를 형성되었으며, "인생의 자각"과 함께 자연의 영원함에 대한 추구를 예술에서 추구하게 됨으로써 "예술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1) 현학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문제 : 有無논쟁 - '象'의 발견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대비 속에 자연에 대한 추구는 철학에서 왕필을 대표로 하는 현학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변화하는 현실 배후에 이를 관할하는 근원적인 무엇이 있음을 상정하고, 그들이 처한 일시적 현실과 영원한 불변의 세계를 "有"와 "無"라는 현학적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에서 유를 부정하고 무에 도달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으며, 무는 세계를 생성하는 본체이면서 그 인격이상의 본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유와 무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될까. 왕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만물의 생성근원인 無는 변화무쌍한 (일시적인) 有와 대립적이다. 有가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에 반해 無는 명칭이 될 수 없고, 有는 귀로 들을 수 있지만 無는 들을 수 없다. 또한 有는 볼 수 있는 것이되 無는 볼 수 없으며, 無는 3차원적 형체가 없지만 有는 형체를 갖고 있다. 따라서 有와 대립되는 無는 有의 개별성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으므로 無名·無形인 것이다. 그러나 無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도 일체의 무한한 잠재 가능성을 지니고 복잡다양한 현실적인 有로 전개되기 때문에 다만 無는 모든 가능한 명칭·형태·소리·개념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또한 無는 有 이외의 것으로 관계지어질 수 없기 때문에 無와 有는 확연히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부연한다면 有는 無의 표상이기 때문에, 無는 有 속에 존재하며 有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有에서 無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有를 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有 속에서 無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면 有 속에서 어떻게 無를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논리적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 이 인식론적 가능성에 대해서 왕필은 유명한 "得意忘象" "得象忘言"으로써 해답하고 있다.
이 意·象·言은 『주역』의 卦象과 卦傳을 설명하기 위해 왕필이 들고 나온 것이다. 여기서 성인은 천지의 道를 보고 象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意는 성인의 意로서 천지의 道인 無에 해당될 수 있고, 象은 無에서 파생되어 나온 자연 대상으로 볼 수 있으며, 言은 인간이 자연 대상을 보고 사용한 언어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발생과정은 "言은 象에서 생기고……, 象은 意에서 생겼기 때문에" 역순으로 "言을 살펴봄으로써 象을 알 수 있고, 象을 살펴서 意를 알 수 있다." 즉 "意는 象을 통해서 다 나타나며, 象은 言을 수단으로 다 표현될 수 있다." 즉 意→象→言의 순서로 파생되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역으로 言→象→意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현학의 有·無 관계에서 無는 無名·無形으로 인식됨으로 언어개념이나 구체적 형상으로서 표현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왕필이 강조한, 言과 象을 통해서 意를 표현하는 논리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것은 왕필이 다음과 같이 大象과 大音을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형체는 반드시 분별되는 것이 있고, 소리는 반드시 그것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象으로써 형성되는 것은 大象이 아니다. 言으로써 소리나는 것은 大音이 아니다. 따라서 四象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大象은 나타날 수 없고, 五音으로써 소리나지 않으면 大音이 표현될 수 없다
形과 聲은 그것에 관계되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 形과 聲이 대상과 관계 지워지는 이 규범성은 有 그 자체를 위해 한정된 것이므로 이것으로써 無를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形과 聲은 大象·大音을 위한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大象·大音 그 자체를 의미할 수는 없다. 다만 무한을 상징하는 大音은 일체의 소리(五音)를 포괄하는 것으로 개별적인 宮·商·角 등으로 명칭될 수 없고 일체의 五聲으로써만이 표현이 가능하다. 만약 개별적인 것으로 無를 나타내게 되면 無를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면 왕필의 경우 이미 살펴보았듯이 意를 얻기 위해서 象으로부터 해야 하고 象을 얻기 위해서는 言으로부터 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意를 얻기 위해서는 言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위의 大象·大音의 논리대로 따른다면 言은 유한·개별을 가리키는 언어개념으로서 현학의 道, 즉 無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왕필의 이론에는 서로 상충되는 모순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言이라는 것은 象을 밝히는 것이지만 象을 얻으면 言을 잊어야 하고,
象이라는 것은 意를 보존하는 것이지만 意를 얻으면 象을 잊어야 한다
왕필이 말하는 言의 목적은 명상을 위한 것이며 象의 목적은 存意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言과 象은 각각 象과 意를 파악하기 위한 인식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象에 대한 이해는 일종의 言을 필요로 하지만 言을 초월하는 깨달음이어야 하고, 진정한 意를 이해하는 데는 일종의 象을 바탕으로 하지만 象을 초월하는 깨달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言에 집착하게 되면 象을 얻을 수 없으며, 象에 집착하면 意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忘言하는 것이 得象하는 것이며, 忘象하는 것이 得意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물의 근원인 無, 즉 意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현실 대상인 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象에서 파생되어 나온 언어개념으로서의 言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를 초월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만물의 발생은 意→象→言의 순서로 파생되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역으로 言→象→意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意가 노장의 無와 결합되어 현학의 중심개념이 되고 있으며, 意와 無는 바로 자연의 본체이기도 하며, 인간이 실현해야 하는 인격이상의 본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학의 인식론에서 시대적 의의를 띠는 것은 바로 '象'의 위상이다. 이 '象'이야말로 현상의 有서 본체인 無에로 이행하는 통로이고, 그것은 바로 無의 상징이다. 이 시대에 예술의 자각이 일어났고, 예술의 실천과 비평 및 예술론이 발전하였다고 하는 것은 철학에서 '상'의 시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2) 불학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문제 - 形神논쟁
현학을 낳게 한 사회적 상황은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東晉과 劉宋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진의 사마염이 죽자 賈侯의 농간에 의해 八王의 난이 일어나 내부적으로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북쪽의 이민족들이 이런 틈을 타서 중국본토를 공격하여 오자, 진은 양자강의 건너 남으로 내려왔지만, 북의 이민족과의 전쟁과 내부적 반란을 겪으면서, 인생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더욱 심하게 되었다. 이 시대와 와서 현학과 청담의 풍조는 은일과 함께 더욱 크게 유행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더 이상 정신적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틈을 따서 새롭게 문벌귀족의 정신세계에 들어온 것이 불교이다. 따라서 현학청담에 빠진 문벌사족이 불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심지어 明帝·簡文帝·哀帝 등은 佛法을 좋아하였고, 더욱이 成帝는 "沙門可以不궤拜王者"의 선례를 남김으로써 불교의 세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사상은 날로 통치계급의 사상에 잠입하였고, 이를 계기로 名僧 역시 현학청담과 영합하게 됨으로써 이것은 현학청담과 불학이 함께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동진 특유의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벌귀족은 불교를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더욱 나아가 현학과 불교 사이의 상호 유사점을 인식하였다. 가령 종병의 『화산수서』와 유사하게 산수화를 보고 그 세계를 문필로 표현한 『遊天泰山賦』를 지은 孫綽은 『道賢論』을 지어 천축의 七僧과 현학의 "죽림칠현"을 서로 비교하여 불과 현은 서로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 심지어 불학은 현학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불교의 입장에서 현학에 관심을 가진 지둔은 『장자』의 「소요유」 해석에 곽상과 향수와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신흥종교로서의 대중적 확장을 위해 불교는 기존 학문의 틀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格義불교가 나왔다. 불교경전에 쓰여진 것을 중국고전에 씌어진 말에 적용시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불교의 空과 유사한 노장의 無에 의거할 뿐 아니라 불교의 오계를 유교의 오상·오행·오경에 견주는 것 등이 일반화되었다. 종병의 스승인 혜원도 24세에 불경을 강할 때 청중이 더욱더 의심만 품게 되자, 그가 『장자』의 뜻을 인용하니 청중은 명확한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스승 道安은 그에게 격의불교의 강학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학은 동진문벌인사가 당면한 각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虛幻不實에 대한 깊은 느낌은 현학의 영원무한한 인격 본체에 대한 회의를 발생시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학은 더욱 발전하였는데, 특히 『般若學』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현학은 불학으로 향하게 되었고, 더욱 불학은 현학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처음에는 불학을 현학으로 해석하였지만, 불학은 현학이 주장하는 유무의 이원론적 존재를 부정하였는데, 有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존재로서의 無도 부정하여 유와 무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假像, 또는 幻像이라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불학의 위치가 확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재에 대해 철학적으로 전개된 것이 현학의 有無논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形神논쟁이다. 이것은 혜원이 어떤 사람에게서 形이 滅하면 神도 滅한다는 물음에, 그는 形은 滅하지만 神은 滅하지 않는다는, 神의 실재와 영원성을 강조하는 神不滅論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혜원이 쓴 『沙門不敬王者論』 중 「神不滅論」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佛學의 "泥洹", 즉 열반경계는 정신의 영원불멸의 표현임을 논증하는 것이고, 둘째로 "以化盡爲至極", 즉 육체생명의 死滅로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영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情"은 "生"의 고통을 띠고, "生"은 "神"을 고통으로 빠지게 하므로, 이 고통을 타파하기 위해서 생명을 소멸하고 정신활동을 정지시키며, 外物에 대해 愛憎을 발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 철저한 해탈이고 영생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혜원은 이러한 목적에서 "形"이 다하여도 "神은" 滅하지 않는다는 "形盡神不滅"論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혜원의 제자 종병에 와서 한층 격렬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촉매제는 惠琳의 『白黑論』이었다. 당시 스님이면서도 재상을 지낸 혜림은 당시의 불교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유교를 대표하는 白學先生과 불교를 대표하는 黑學道士를 등장시켜 유교와 불교의 논쟁을 진행시키고 결국에는 유교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백흑론』의 논지이다. 이것은 당시 불교계의 비난을 받고 심지어 승려로서 최악의 벌인 波羅密(교단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것)을 받을 뻔하였지만 당시 왕인 文帝의 구원으로 간신히 이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원군을 얻은 것이었다. 그래서 何承天은 당시 불교에 몰입한 종병에게 이 『백흑론』을 보내어 백학선생과 흑학도사의 사상검토를 요구하자, 종병은 혜림의 흑학도사의 입장을 견지한 답장을 보내었고, 아울러 그는 『명불론』, 일명 『신불멸론』을 저술하여 혜원의 학설을 바탕으로 『백흑론』에서 불교의 논리적 부족을 보충하였다. 종병이 구상한 佛國은 形身에 구속되지 않은 '神'의 존재를 전제하였기 때문에 可形可視의 현상계를 시간적·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확대한 無量無邊無始無終의 세계였다. 이 세계가 곧 神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그것은 무궁한 과거로부터 영겁의 미래로 향하여 청탁승강을 되풀이하면서 유전한다. 그러나 이 순수한 神은 佛만이 가지고 있으며, 佛만이 이 神으로써 도를 본받는다. 현실의 군생이 분유하고 있는 신은 이 본래의 신의 결여태이다. 그것은 인연에 따라 유전할 때 배양된 추妙의 情識이 神에 부착되었기 때문이다. 즉 인연에 따라 유전한다는 것은 神이 인연과의 만남을 통해 차례로 形身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神은 情識을 매개로 形身과 결합하는데, 이 때 情識의 추妙의 정도, 즉 神의 淸濁昇降에 상응하여 각각 다른 形身을 취하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생을 품수받는다. 여기에서 종병은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정신이며 현실의 形身은 영원의 시공 위에서 일시적으로 假見되는 "한 순간의 역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존재론에 입각하여 종병이 기도하고자 한 것은 현세에 있어서는 神을 구속하고 있는 情識을 제거하여 이것을 계기로 죽어서는 神의 淸昇의 계기로 삼아, 神이 淸昇의 極에서 形身의 구속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본래의 神으로 복귀하기 위한 것이다. 종병은 이러한 것을 위한 방편으로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善行이고, 다른 하나는 空觀이다. 이중 종병의 산수화론에 중요한 것은 후자인 空觀이다. 공관이란 모든 존재를 實有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여 존재하지 않는 空으로 보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그의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3) 종병의 자연관 및 산수화이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종병에게 空觀이란 神이 淸昇하여 본래의 神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명불론』에서 공관을 확인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자연이었다. 그 이유는 종병의 자연관의 두 가지 측면 때문이었다. 첫째로 자연이란 시간적으로 무시무종의 영원함이며, 공간적으로 무량무변의 광활함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앞에서의 자연의 영원함과 광활함에서 볼 때, 자연은 무한히 변화하여, 여기에는 어떤 고정된 것이나 정지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집착하는 有도 곧 사라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無이며 空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연의 광활함과 영원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존재 및 그 세계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도 無라고 할 수 있다. 종병은 이러한 자연에 대한 空觀을 통해 모든 사물이 원래 空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心用인 情識이 정지되고, 心이 외물과 교섭하는 일이 없으며, 神은 虛인 상태로 보존된다고 한다. 종병은 궁극적인 상태인 泥洹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僞有가 神을 해치고, 精추의 識을 이룬다. 識은 神에 부착한다. 그러므로 죽는다 하더라도 (神에 부착된 精추의 識은) 멸하지 않는다. 이것을 空으로써 점차로 하면 장차 習이 점차로 다함에 이르고, 그래서 本神을 다한다. 이것을 泥洹이라 한다.
즉 공관에 의한 識의 제거가 성불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관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종병은 그곳을 자연으로 보고 있다. 그는 『명불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巖林은 희미(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은 希,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微)하고 바람과 水는 虛하다. 이것을 가슴에 가득 담고 나가면 (그러한 풍경을 접하면) 오히려 텅빔이 있(어 가슴이 개어)서 空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옛날에 虛를 따라서 道에 들어간 경우가 많다.
자연이란 도를 획득하기 위한 방편인 공관을 얻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종병은 『화산수서』에서 산수는 "형태로써 도를 꾸몄기以形媚道" 때문에 "물질적인 것이 있으면서 신령함으로 이끈다.質有而趣靈"고 하였다. 과거 황제·요·순·공자·광성자·허유 등과 같은 성인들이 공동산·구자산·막고역산·기산·수양산 등에서 노닌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라고 한다. 즉 자연의 관조를 통해 공의 세계로 나갈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종병 역시 이를 실천하였다. "산수(를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서쪽으로는 형산과 무산에 오르고, 남쪽으로는 형산과 악산에 올랐다. 이로 인해 형산에 거처를 만들어 상자평(과 같이 자연에 은거하는) 뜻을 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병이 나서 강릉으로 돌아와, "아! 늙음과 병이 함께 이르렀구나. 유명한 산은 두루 유람하기 어려울까 걱정된다. 오직 마음을 깨끗이 하고 도를 관조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벽에 걸어 놓고) 누워서 그곳에 유람한다"고 하였다. 산수화의 탄생은 바로 종병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을 영원화 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산수화의 목적은 분명하다. 이것은 『명불론』에서 정신을 淸昇하여 泥洹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며, 『화산수서』에서는 이를 "暢神"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창신', 즉 정신을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하는 것은 '泥洹'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종병에게 있어서 산수화는 成佛의 방편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체인 空을 인식하는 空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 때문에 종병의 이론은 이 시대의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다른 "종교의 시녀"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종병은 산수화를 어떻게 그렸을까. 이 시대에는 회화사적으로 산수화가 발전하지 못한 시기였다. 산수에 대한 인식은 제고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객관적으로 구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어떤 이는 『화산수서』에서 대상의 비례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점을 들어 사실주의의 형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산수를 통해 暢神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연의 대상을 축소하여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여러가지 시대적 자료와 비교하여 보면 설득력이 없다. 회화사에서 이 시대에 주류를 이룬 것은 인물화였다. 산수란 그 인물의 배경으로 그려졌으며, 그것도 묘사에서 기교의 치졸함과 비현실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종병의 산수화는 그 묘사기술이 오늘날 산수화에서 보는 것처럼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暢神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현실성을 띤 관념적 묘사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종병의 산수화론은 자연의 구현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정신적 체험을 중시하였고, 또한 종병은 당시 인도의 밀교의 영향으로 명상에 의한 아미타 신앙에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승천이 종병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논쟁을 걸었던 "西方의 法事"는 다름 아닌 서방세계의 극락정토에서의 왕생을 기원하는, 헤원의 여산에서 비롯된 念佛結社였다. 『관무량수경』의 16관에 의한 서방세계에 대한 定觀이 있지만, 그 당시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혜원은 『반주삼매경』에 의한 定中見佛에 의거하였는데, 종병에게는 여기에서 산수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렇게 볼 때 종병의 산수화는 상당히 관념적이라 할 수 있다.
2. 자연의 본체에 대한 구현을 위한 선결문제
위진시대의 현학과 불학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문제에서 주목되는 것은 『주역』의 위상 문제이다. 위진 현학에서 자연의 본체인 무를 설명할 때 노장사상과 함께 『주역』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앞서 예를 들었던 현학에서 왕필이 유와 무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거론하였던 것도 주역에서 意·象·言의 문제이다. 불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혜원과 종병은 자연의 공의 문제를 설명할 때 노장에서의 無와 『주역』에서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하고, (이) 음과 양(이 서로 변하여 인간의 인지로서) 파악할 수 없는 작용을 신이라 한다.一陽一陰謂之道,陰陽不測謂之神"에 근거하였다. 『주역』의 자연관은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고 한 것처럼 변화와 지속성, 그리고 무궁함이다. 이것은 노장의 無와 불학의 空과 같은 속성이다. 다만 노장은 그 본체를 무로 보았고, 불학은 무 역시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노장을 부정하여 空이라 보았지만, 주역은 이 본체를 實로 본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상이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주역』은 중국사상에서 존재론을 설명할 때 유불도의 사상을 통합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의 자연관은 약간의 변화는 일어나지만 이들 사상의 전개와 함께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후 예술론에서 『주역』의 象의 비중은 높아져 간다. 이 상의 내용은 "易者,象也"라고 한 것처럼 "변화"였다. 이후의 예술론의 전개에서 자연론에 관한 것은 『주역』으로 대체되어 설명되어 간다.
1) 회화에 대한 인식의 문제
(1) 書畵同原論
화가가 자연의 본체를 인식하였다고 해서 바로 그것이 회화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회화'라는 영역이 사회적으로 가치를 획득하여야 한다. 즉 회화는 사회에서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고 인생에서 의미있는 행위임을 공인 받아야 한다. 회화는 처음부터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였던 것은 아니다. 육조시대에 "琴棋書畵"라고 하여 지식인에게 고상한 행위로 간주되었지만, 이 중에서도 회화는 서예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회화의 가치획득은 서예와의 견줌을 통해 이루어졌다. 육조의 왕미는 회화의 특징을 서예처럼 『역』의 공적을 같이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역』을 공통으로 하는 서화동조론이다. 이 이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당 장언원의 『역대명화기』 「敍畵之原流」에서이다. 그는 복희, 창힐의 시대에는 書畵가 同體이면서 분화되지 않았는데, 후대에 書는 意를 전달하기 위해, 畵는 形을 나타내기 위해 분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서예와 회화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성에 의해 사회적으로 다르게 평가받고 있는 회화가 서예와 그 근원을 같이 함으로써, 회화는 서예와 같이 『주역』과 같은 자연의 이치를 추구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회화의 사회적 가치의 재고를 의도하였다.
장언원보다 약간 시대가 앞선 주경현은 그의 저서 『당조명화록』에서 내리고 있는 회화의 정의는 얼마나 회화에 대한 가치인식이 높아졌는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내가 듣기로 옛날 사람이 '그림이란 聖스러운 것이다'고 하였다. 대체로 (그림은) 천지가 이르지 않은 것을 다하고,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한 것을 드러낸다. 섬세한 털로 된 붓을 움직이면 만물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마음의 능력을 펼치니, 천리나 되는 경물이 손 안에서 움직인다. 정신을 옮기고 형질을 묘사할 때 먹을 경쾌하게 화면에 떨어트리면, 형상이 있는 것은 그것으로써 세워지고, 형상이 없는 것은 그것으로써 창조된다.
주경현의 회화에 대한 정의에는 두가지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다. 그것은 聖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는 "천지가 이르지 않은 것을 다하고,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회화의 효능에 대한 기술로서, 그것은 현재의 현상세계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영역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연원은 바로 마음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형상이 있는 것은 그것으로써 세워지고, 형상이 없는 것은 그것으로써 창조되는" 마음의 자유로운 창조의지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회화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여 준다. 그것은 회화론사적으로 볼 때 이전에는 회화의 효능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후에는 작가의 마음의 세계에로 비중이 커져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경현의 회화의 정의는 회화론에서 바로 마음의 세계에로의 전환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경현의 사상은 장언원에 와서 회화의 효용론은 위에서 말한 '서화동원론'에 의해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고, 마음의 세계의 강조는 도가적 예술론의 수용에 의해 창작론으로서 본격적으로 다루어 진다.
(2) 도가적 예술개념의 수용
유가사상에서는 예술의 교화적 작용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 인격형성을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유가사상은 예술론에서 감상론에 비중을 두어 다룬다. 창작론에 대해서는 "완물상지"라고 하여 뜻을 대상에 몰입하게 되면 도덕적 주체가 상실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도가사상에서는 예술행위의 가치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엿보인다. 그것은 도가사상에서는 예술행위를 통한 인격완성의 길을 열어 놓으므로써 예술활동 자체가 인격완성으로 일관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 이후 창작론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장자의 "포丁解牛"의 고사를 들어보자
제가 반기는 것은 道입니다. 저의 행위는 技를 초월하여 道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소를 잡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러운 활동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천리에 따라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의 생긴 그대로를 따라 갑니다.
技의 궁극적 목표는 기의 기술적 단계에 머물지 않고 이를 초월하여 道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단계, 즉 포丁의 心과 牛의 物이 대립해소를 벗어나서 技의 심적 제약이 되는 心과 手의 거리가 해소되는 경지인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러운 활동만이 있게 되었습니다"를 경과해야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도가사상에서 이상적 인간은 본성을 회복하여 그 본성에 내맡겨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때 그 사람의 본성은 德이 되지만, 이 덕은 道로부터 분가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면에서 도와 덕은 차이가 없다. 이것으로 볼 때 기는 덕이 파생되어 나온 도의 경지를 추구함으로 技와 인간의 본성인 德과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는 이상적 인간을 위한 인격을 완성-인간의 본성인 덕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기서 주시해야 할 점은 기의 단련으로 인한 경험적 행위의 축적은 유가사상과는 달리 이상적 인간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예술행위에 대한 가치 인식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 특히 성당 이후 도교철학의 발전으로 이 예술론 역시 회화론에 수용되어 회화행위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화가의 의식세계와 창작태도-以天合天
회화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또 회화행위가 지고의 목적을 갖추었다고 할 때, 자연의 본체를 인식하고 이를 회화로 구현하는 화가의 의식세계는 어떠해야 할까. 화가의 의식세계는 자연의 이치를 구현하기 위해 자연의 이치와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철학에서 聖人의 경지에 해당한다. 그래서 "畵者,聖也"라고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書聖이니 畵聖이니 詩聖이니 하는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명칭이 등장한다. 성인은 일상생활에서 자연과 일체된 경지를 실현하지만, 예술가는 예술적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용어가 형성된 것이다. 성당 이후 회화론에서는 畵聖이라고 칭해지는 吳道子論이 형성되어 성인의 경지에 견줄 수 있는 화가의 의식세계와 창작태도에 대해 이론적인 통찰을 하게 되었다.
장언원은 성당의 張志和가 지은 『玄眞子外篇』과 장언원의 숙부인 張심에 의한 『吳畵說』을 근거로 하여 오도자의 의식세계와 창작태도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역대명화기』 「論顧陸張吳用筆」에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오도자에게 "자와 척도를 사용하지 않고 굽어진 활이나 곧바른 칼날, 수직으로 된 기둥, 수평으로 된 대들보를 그릴 수 있는" 이유를 묻자, 오도자는
[순수한] 정신을 굳게 지키고 [그 정신이 우주의 정신과 합일된] 순일한 상태를 온전하게 하여 자연의 조화활동과 일체가 되게 한다. [그러면 우주의 정신은] 오도자의 붓을 빌려 [모든 형상을] 표현한다. 전에 말한 [의는 필보다 앞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창작행위가 끝났어도 [주체의] 의는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창작행위가 시작되기 이전의 자기 심적상태를 설명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자나 척도, 계필을 사용한 그림은 사화이다. 그리고 자기의 순일한 정신을 굳게 지키고 그 정신이 우주의 정신과 합일된 순일한 상태에서 창작된 그림은 진필이다.
라고 하여 사화와 진화를 구별하고 있다.
도가사상에서 만물은 도에 의해서 생성·화육되는데, 만물이 형체를 가지 듯 인간 역시 형체를 갖게 된다. 이때 형체 가운데에 神(道의 활동)이 깃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 인간의 개체적 神은 천지우주의 보편적 神에 그 존재근거를 가진다. 그러나 천지우주의 신은 순수하고 고요하며 무위하는 "정묘한 정신"임에 반해, 인간의 신은 형체에 의해 구속되어 정욕에 따라 일그러지고 조잡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화하고 순수하게 하여서 "정묘한 정신"을 온전히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천지우주의 정신과 하나가 되어서 자연의 無方無窮을 자기 정신의 경지로 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화된 자유의 상태가 오도자의 창작하기 이전의 상태인 "守其神,專其一"이며, 이것은 眞畵가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도가에서 眞人·達人·聖人 등 인격의 완성자로 불리기 때문에 "守其神,專其一"의 상태는 인격과 연관되어 화가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장언원은 화가가 창작할 때의 찰나에 도의 활동인 자유의 세계에 도달하는 독특한 방법을 제시한다. 즉 오도자가 "술을 좋아하고 氣를 북돋웠으며 그림을 그리려 할 때마다 반드시 술에 흥취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도가사상에서 술에 도취함으로써 정신의 온전한 상태와 육신을 보존하는 것을 칭송하고 있듯이 술의 흥취는 비록 이것이 진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허정하게 하여 주관과 객관이 서로 명합함과 함께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장언원은 또한 창작하기 이전의 화가 자신의 심성이 우주의 근원인 도와 합일되는 것을 화가가 화면 앞에 실존하는 상태인 意在筆先으로 해석함으로써, 화가의 意를 주관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창조자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면 화가는 의가 형성된 후 이것이 작품에 형상화되는 과정까지 어떠한 태도로서 일관하고 있는가.
대체로 생각을 몰두하고 붓을 움직여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 그림 [그리는 행위]를 의식하게 되면 더욱 그림에서 [자기의 意를] 잃게 된다. 생각을 몰두하고 붓을 움직여 [그림을 그릴 때], 그림 [그리는 행위]를 의식하지 않으면 그림에서 [자기의 意를] 얻게 된다.
대체로 [진정한 화가는] 사물을 그릴 때 얼굴의 모양, 복식의 화려한 문장을 다 갖추고 또 [이것을] 매우 세밀하게 그려서 교밀하게 나타내는 것을 싫어한다. [이 때문에 이것이 외형적으로] 완료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미 [본래적인] 완료를 안다면 역시 어떻게 [기교적인 외형의] 완료를 실행하겠는가. 이것은 완료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본래적인] 완료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것은 진정으로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회화는 대상을 형상화하는 것이지만 화가는 회화를 통해 대상의 외형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고 대상의 외형을 주도하는 내면적인 생명세계를 추구한다. 화가는 이를 위해 자기 내면에서 대상의 생명 세계와 동일시되는 神을 온전하게 하는 立意의 진정한 완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화가는 이 의를 일관되게 유지하여 작품에 옮겨 놓기 위해 대상의 세부적인 외형에 구속되지 않아야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창작행위까지 "손에서 지체되지 않고 마음에서 막힘이 없이 자연스럽게"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창작과정은 화가 개인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화가는 주관의 의를 매개로 하여 보편적 의에 의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추진하는 의를 보편적 의로서 자연현상을 변화케 하는 도와 같다. 그러므로 이 창작과정에서 이루어진 형상은 보편적 도의 산물이므로 마치 "신이 오도자의 붓을 빌려 만물을 표현하는 것과 같으며", 이것은 "자연의 변화와 일치하고 또 거기에서 조화의 현상을 보는"것처럼 나타난다. 즉 이 회화적 형상은 [자연]의 변화 그 자체와 동일시되고 있다. 장언원은 창작행위가 끝나서 완성된 작품은 대상의 완전한 외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보편적 의가 얻어지는 것, '得意'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완성된 작품에 존재하는 것은 物我와 心手의 일체를 매개로 옮겨진 보편자로서의 意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운동하고 변화하는 자연의 세계이다. 때문에 창작행위가 끝나도 이 의는 작품 속에 잠재되어 밖으로 넘쳐흘러서 화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형태의 획 하나하나에서도 생동적 기운을 목격할 수 있다.
3) 자연본체의 구현의 방법
(1) 用筆의 형이상학적 의미 - 書畵用筆同法論
위에서 고찰한 것에 의하면 일련의 창작과정은 화가의 物我一體와 心手一體를 통해 자연→화가의 의식세계→창작행위→작품에로의 구현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차원에로 옮겨지면서 실현되지만, 그 상황은 간격과 정지가 없는 '자연'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본체가 이러한 자연의 흐름을 타고 마지막에 작품에 구체화되는 형식은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이란 단순한 윤곽선이 아니고 서예적 선을 말한다. 이것에는 변화와 율동을 함축하고 있다. 회화는 자연의 실현을 위해 서예의 선에 의지하여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화에서 "書畵用筆"論이라고 한다. 장언원은 이에 대해 『역대명화기』 「論顧陸張吳用筆」에서 고개지의 용필의 특징을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 장지는 최원과 두도의 초서의 법을 배워,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변화시켜 오늘날의 초서를 완성하였다. 그 글씨의 형체와 기세가 一筆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기맥이 이어지듯 서로 통하고 항을 바꾸어도 기세가 끊어지지 않았다. 오직 왕헌지만 그 깊은 뜻을 밝혔다. 그래서 왕헌지의 글씨에는 항의 첫글자는 왕왕 앞 항의 끝 글자와 연결되었다.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一筆書라고 부른다. 그 후에 육탐미가 또한 一筆畵를 만들었는데, 그 필치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그림과 글씨의 용필은 법이 같다는 것을 알겠다.
장언원은 이어서 장승요는 衛夫人의 『筆陳圖』, 오도자는 張旭의 狂草를 따라 배웠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 화가의 일필화에 나타난 특징은 변화와 연속, 그리고 기세로 간추릴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서예의 선에서 나온 것이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를 기술하기 이전에 『法書要錄』을 저술하여 역대 書論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서예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고개지·육탐미·장승요·오도자에 대한 서화동필법이란 것은 각각 전서·초서(장초)·해서·광초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서예의 발전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서예의 발전에 있어서 궁극적인 지향점은 '簡易'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간이'는 "간략하고 용이하다"는 의미인데, 『주역』의 건괘와 곤괘의 특성이기도 하다. 즉 天의 덕인 乾은 이치를 나타내고, 地의 덕인 곤은 그 이치를 받아 만물을 완성한다. 이렇게 천지의 교융에 의해 일어나는 만물의 생성은 바로 하늘의 '간략함'과 땅의 '용이함'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一陽一陰謂之道,陰陽不測謂之神"의 자연적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나 낼 수 있는 것이다. 서예의 발전이 천지의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듯이, 그림의 변화과정도 같은 선상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서예적 선을 회화적 요소로 삼아 전개하였다는 데 있다. 서예의 변천이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의 모색이라 할 수 있고, 서예의 선도 한획한획마다 무한한 변화를 지니면서 연결되어 흐르고 있는 것도 바로 자연본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회화가 '書畵用筆同法'을 주장함으로써 서예적 선을 그 조형적 수단으로 삼게 됨에 따라 자연의 본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획득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用墨의 형이상학적 의미
중국화의 표현기법에는 용필과 함께 용묵이 있다. 먹의 사용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가지면서 등장한 시대가 성당 이후이다. 당말 주경현은 『당조명화록』에서 당대의 회화를 전통적인 畵六法에 따라 神·妙·能의 세 등급으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인 화법에 적용되지 않은 새로운 회화경향을 목도하고 이를 '逸品'이라 하였다. 이 '일품'은 전통적 畵六法의 第二法인 骨法用筆에서 보듯이 용필법과는 다른 용묵법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이 일품에 분류된 세 화가, 즉 王墨·張志和·李靈生 등의 창작과정에 대해서 『당조명화록』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창작과정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술에 흥취하고 음악에 맞춰 요란한 몸짓을 한다. 둘째로 먹을 그릇에 담아 요란한 행동에 따라 화면에 뿌린다. 이것은 潑墨法이라고 한다. 셋째로 이렇게 뿌려진 이후 먹의 흔적에 의해 생긴 우연적 이미지를 따라 최소한의 간단한 필치로 완성한다. 이러한 행위로 그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화가 내면의 자유로움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장언원은 이러한 먹 사용을 "天理를 얻었다"고 하였고, 먹은 단순히 검은 색이 아니라 "먹은 五色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였다. 먹이 오색을 갖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臥遊'의 실현은 자연의 본체를 구현하는 것이다. 즉 그림이란 것은 형상을 그리는 것을 벗어날 수 없지만, 이것은 개별적 형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를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필이 자연본체의 특색을 구현하는 것처럼, 중국회화에서 용필과 함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용묵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색은 객별적 대상과 연관지어지기 때문에 이를 지양하고 자연 전체를 함축하는 色이 필요하다. 이것은 현학가 왕필이 자연본체인 無의 특성을 설명한 다음의 문장을 연관시킨다.
형체는 반드시 분별되는 것이 있고, 소리는 반드시 그것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象으로써 형성되는 것은 大象이 아니다. 言으로써 소리나는 것은 大音이 아니다. 따라서 四象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大象은 나타날 수 없고, 五音으로써 소리나지 않으면 大音이 표현될 수 없다.
세계의 모든 개별적인 象과 音 각각은 그 자연 본체인 無의 大象과 大音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大象과 大音의 한 요소이지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大象과 大音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별적 象과 音의 집합으로서 가능하다. 이것이 "四象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大象은 나타날 수 없고, 五音으로써 소리나지 않으면 大音이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色에 있어서도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大色은 개별적인 색의 총합인 五色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색을 한 작품에 다 구현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五色을 상징적으로 가진 먹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발견하고 이것을 자연의 본체를 구현하는 요소로 삼은 것이라 볼 수 있다.
3. 자연본체의 회화적 실현
위진남북조시대는 자연의 본체를 인식하고 이것을 회화에서 구현한다는 방향을 설정하였다. 당대에서는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 회화의 사회적 가치를 고양시킴과 함께 자연의 본체를 구현할 수 있는 화가의 의식세계 및 그로부터 일어나는 일련의 창작과정을 밝힌 창작론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그 자연의 본체를 구현할 수 있는 기법으로서 용필법과 용묵법에 형이상적 의미가 부여되어졌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오대와 북송 시대에 많은 회화론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이 이 시대에 와서 활성화되어 산수화와 산수화이론을 형성하고 그렇게 됨으로써 회화적으로 '와유'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宋의 시대의식의 요청이었다. 이것에 의해 과거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통합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1) 감상론에서의 자연본체의 실현
宋은 '문치주의'시대로 사대부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모든 사대부가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앞세우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도덕적 규율로 얽혀 있으며, 군주는 신하에게 신하의 도리를 요구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군주다운 도리를 요구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邦有道"나 "用之"의 상황으로 거기에 맞는 사대부의 행동철학은 '兼齊天下'였다. 즉 그들이 품고 있던 도덕이상을 정치에 참여하여 현실세계에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의 의식세계에서 이러한 兼齊天下를 통한 사회적 자아가 강조되면 될수록 그것에 가려진 獨善其身의 개인적 자아는 강렬한 본능적 욕구로 분출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본능적 욕구를 해결하고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의 심리적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한 장치가 바로 '산수화'라고 생각된다. 중국의 산수화가 송대에 크게 번성한 이유는 이러한 사대부의 의식세계와 필연적 연관을 갖는다. 북송 곽희는 『임천고치』에서 산수화의 필연성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군자가 산수를 애호하는 이유는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기본적 소양을 키울 수 있는 전원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며, 노래하고 자유로이 즐길 수 있는 곳이 샘과 바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원숭이나 두루미가 울고 나는 모습을 보며 숨어사는 즐거움이 고기 잡는 어부나 나무하며 한가롭게 사는 나무꾼과 같기 때문이며, 인간이라면 가까이하고 싶고 언제나 친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곳인 세속에 얽매인다는 것은 어느 인간이라도 항상 싫어하는 일이다. 구름과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에 사는 신선이나 성인들을 항상 만나 보기를 원하지만 쉽게 볼 수 없다. 훌륭한 임금과 자상한 부모가 사는 태평성세에 오직 자기 한 몸만을 깨끗이 하고자 세상을 등진다면, 태평성일에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마음이 다 깊은 데, 자기 한 몸만을 위하여 세상을 버리고 산다면 인간의 절조와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가.…… 그러므로 임천을 동경하는 마음이나 안개와 노을과 벗삼으려는 생각은 꿈속에서나 있을 일이요, 생생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현실에서는 단절되어 있다. 이제 훌륭한 솜씨를 얻어서 생생하게 산수를 표현한다면 집과 뜰을 벗어나지 않고도 앉아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오르내릴 수 있고, 원숭이와 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마치 귀에 들리는 듯 할 것이며, 산수의 광경이 눈에 홀리듯 황홀하게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뜻을 기쁘게 하지 않으며 진실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그림 속의 산수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의 참뜻이다.
산수화의 목적은 위진남북조의 종병이 「화산수서」에서 주장하던 '臥游'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종병은 육신의 한계로 인하여 할 수 없었던 정신적 해방을 산수화를 매개로 한 명상을 통해 구하였다면, 곽희의 주장은 사대부의 出仕觀에 기인하는 것으로,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충효"와 "一身만을 위한 자연에 대한 욕구"의 두 가지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고 자연에 노닐기 위한 방편으로 인해 산수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즉 산수를 그려 놓은 그림을 가상의 공간으로 하여 자신은 그 세계에 마음껏 노닐면서 '와유'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와유의 공간을 실현하기 위해 산수화는 다음의 문제를 강구해야 하였다. 첫째로 현실 속에서 갈구하는 자연을 마치 현장을 답사하는 것과 같은 사실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자연대상을 실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사실감을 나타내야 하고, 또 마치 그 자신이 산수화 속에 노니는 것과 같은 장치를 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자연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자연에 노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체를 통한 그들의 이상적 인격의 실현이기 때문에 산수화를 통해서 '소요유'의 경지인 '와유'를 추구할 수 있기 위해 무한한 자연의 공간을 그려야 한다. 북송 화가들은 전자에 대해선 사실주의와 삼원법으로 해결하였고, 후자에는 삼원법이 또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북송 화가이자 이론가인 곽희는 사실적 요소로서 나무하나 돌 하나 묘사하는 것도 방향의 시점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관찰과 거리의 차이에 따른 전체적 크기의 변화 등에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삼원법이란 고원·평원·심원을 말하는 것으로 세 가지 상이한 시점이 얽혀 마치 감상자로 하여금 그림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즉 서양의 원근법과 같이 주관과 객관을 엄정히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을 통일시켜 놓는 것이다. 두 번째의 삼원법의 의미는 '遠'의 의미에 있다. '遠'은 '玄'의 의미로, 이것은 바로 "구름을 타고 용과 함께 날며 四海 밖을 즐긴다"는 장자의 소요유의 공간인 자연을 가리킨다. 따라서 회화적 장치인 삼원법을 통해 감상자는 유한적인 것에서 무한적인 것으로 초탈하여 정신적 자유해방의 최고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와유'의 회화적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2) 창작론에서의 자연본체의 실현
그러나 또다른 와유의 실천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의 '와유'가 '兼齊天下'에서 일어난 것과는 달리 상반된 상황에서 기본적 개념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獨善其身'의 상황이다. 인간이 사는 집단이 설령 아무리 이상적 사회라 하더라도 일률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처음에는 같은 집단으로 출발하였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계층이 형성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 이권문제로 정치적 투쟁이 시작된다. 북송 때에는 문치주의의 기치 아래에서 구법당·신법당·촉당·낙당 등 여러 파벌에 의한 정치투쟁이 일어났었다. 구양수의 『붕당론』도 결국은 그들의 집단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정치투쟁의 소용돌이는 사대부를 그 세계에서 물러나 귀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가 정치적 투쟁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낙향하여 자연과 접하면서 취한 행위가 '獨善其身'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새로운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개인적 자아의 되찾음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편으로 예술은 '兼齊天下'의 경우와 반대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즉 그들의 생활과 익숙한 자연에서 스스로 그리는 행위를 통해 '와유'를 실현한다. 소식은 이러한 것을 "사물에 의탁한다寓於物"고 하였다. 그렇다면 "寓於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의 臥遊가 작품에 구현된 자연본체를 감상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식의 표현으로 한다면 "사물에 머문다留於物"는 것인 반면에, 이 "寓於物"은 스스로를 사물에 깃들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物은 구현된 사물이 아니라 창작행위를 가리킨다. 즉 자연의 본체의 생동성을 화가가 스스로 체득하고 그것을 창작과정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와유'란 바로 자연의 본체를 체득한 화가자신을 즐기면서 노니는 것으로, 臥遊의 공간은 바로 창작과정 그 자체이다. 이것은 문인화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원대를 지나 청대의 석도에 오면, 그는 『고과화상화어록』의 저서에서 이를 이론적으로 완결하였다. 그는 만물의 본체를 一畵이라 해석하고 이것에 대한 인식과 구현을 회화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나를 즐기면서 나를 노닐게 한다"는 '와유'를 주장한 것이다.
결 론
위에서 '臥遊'의 의미와 그 실현과정을 살펴보았다. '와유'는 단순한 회화개념이 아니라 그 안에는 자연의 본체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참여로서의 이상적 인격완성을 함축하고 있다. '臥遊'라는 개념의 형성이 바로 인간의 인격본체로서의 추구가 시작된 위진남북조시대에서이고, 바로 이 시대는 예술의 자각과 아울러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였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와유는 위진현학을 계승해서 활성화된 불학에 심취한 종병에서 시작되었다. 종병에게는 영원한 존재는 오직 神(=佛)만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神은 인연에 따라 끝없이 유전할 때 전생의 情識의 精추와 결합하여 새로운 形身을 만든다. 그리고 形身은 滅하여도 神은 滅하지 않는다. 또한 이 神은 다시 情識의 精추의 인연으로 인해 淸濁昇降을 되풀이하면서 유전한다. 神이 情識의 精에 의해 淸昇하면 오직 神만이 존재하는 극락에 머물게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즉 神이 情識의 추에 의해 濁降하면 六道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서 종병은 불교적 수양론을 제시한다. 神을 가리는 情識을 제거하여 神을 淸昇하게 하여 오직 神만이 존재하는 본래의 神에 참여하기를 기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空觀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有가 아니라 幻像이며 空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情識에 의해 생기는 僞有는 실상이 없는 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음과 함께 이 情識은 바로 제거되어 神은 淸昇하여 그 본래의 神으로 돌아간다. 이것으로 볼 때 종병의 수양론에서의 空觀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종병에게 이 空觀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山水이다. 종병은 산수를 통해 空觀을 실천하고 이로 통해 情識을 제거시켜 神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화산수서』에서 산수의 목적인 '暢神'이며, 그 양상이 '臥遊'인 것이다.
그러나 종병의 '와유'는 상당히 종교적인 명상법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회화로 실현되기 위해서 몇 가지 선결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이 과정은 바로 당의 회화론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회화의 사회적 가치획득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현상을 거론할 수 있다. 하나는 가치의 획득을 위해 먼저 그 가치를 획득한 서예에 견주면서 서예와 회화는 똑같이 『易』에 근원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회화는 서예와 같은 내용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書畵同原論"이다. 다른 하나는 도가적 예술개념의 수용에 의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특히 장자의 "포丁解牛"고사의 빈번한 인용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회화행위가 인생의 이상인격추구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역할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회화행위를 "貫道之器"로서 보는 것으로 회화행위는 유가에서처럼 도구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의 숙련 자체에 바로 道가 일관되어 있다는 목적론적인 것이다.
둘째로는 자연의 본체를 인식하고 구현하는 화가의 의식세계와 그것에서 비롯하는 창작태도를 들 수 있다. 화가의 의식세계는 서예와 그것의 영향을 받은 회화에서 나타나는 "意在筆先"의 意이다. 이것은 오늘날 말로 하면 화가의 구상 또는 의도라고도 하는데, 唐代의 여러 문헌에서는 그 意를 바로 자연본체에 대한 일체로 보고 있다. 특히 장언원은 이를 "守其神,專其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천지우주의 정신과 하나가 되어 자연의 無方無窮을 자기 창작정신의 경지로 하는 것이다.
셋째로 자연본체의 구현의 방법이다. 산수화는 단순한 눈앞에 보는 대상의 외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 본체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구현하는 매체도 개별적인 대상의 세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개체적 대상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자연본체에 대한 구현에 관련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자연본체의 생동성을 표현하는 서예적 선이 강조된다. 이것은 단순한 외형적 윤곽선이 아니다. 바로 당대 "書畵同原論"과 함께 형성되는 "書畵同筆論"이 주장되므로써 서예의 형이상적 필선이 회화에 적용하면서 자연본체의 변화와 지속성을 구현하는 매체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다른 것은 筆에 상응하는 墨의 형이상적 의미이다. 위진 현학에서 자연의 본체인 無는 有를 낳지만, 그 無는 無形·無色·無聲·無臭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無를 표현하는 것을 無에서 파생되어 나온 有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그 有는 개별적인 有가 아니라 그 有의 총체적인 것, 즉 五色·五音으로서이다. 唐代에 와서 墨에 형이상적 의미가 부여된 것은 바로 먹은 玄으로 "五色을 갖추었다"고 하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제시된 '와유'의 개념을 구현하기 위한 선결과제가 唐代에서 해결된 이후 송에 오면 이 성과를 바탕으로 '와유'가 활성화되고 회화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 즉 시대의식이 형성된다. 송이란 바로 사대부의 세계로 '문치'의 시대였다. 사대부는 그들의 도덕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강조되면 될수록 "사대부 의식세계의 이중적 모순 때문에" 한편으로 자연본체에 대한 추구가 강렬해진다. 이러한 본체에 대한 추구, 즉 '와유'의 구현을 위해 두 가지 회화론이 등장한다. 하나는 감상화를 통한 '와유'의 구현이다. 사대부는 산수화를 통해 자연에서 직접 경험하였던 것을 의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회화적 조형으로서 대상의 사실적 묘사나 감상자가 작품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三遠法'이 강구되었다. 감상자는 산수화에 구현된 삼원법에 의해 산수화의 '산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산수화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음으로써 자연에서 느꼈던 생생함을 산수화를 통해 경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다른 '와유'의 실천은 唐代에 구체화된 화가의 의식세계와 창작태도를 통해서이다. 즉 화가는 그림 그리기 이전에 그의 意를 천지우주의 意와 일체화하고, 창작과정을 자연만물의 생성과정에 의탁하여 간접적으로 그것을 체험한다. 즉 화가의 의와 창작과정은 바로 자연본체의 실현으로서, 본체와 일체화된 자신과 그 행위를 즐기고 그것을 노닐게 하는 '와유'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는 문인화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와유의 두 가지 개념이 형성되므로써, 그 이후의 회화발전은 이론적으로는 조형의 기법론과 자신의 자유를 즐기는 창작론으로 발전하고, 양식적으로는 畵員畵와 문인화가 서로 대립과 조화를 통해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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