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작가론 - 역학(易學)에서 본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
-Ⅵ강. 비견(比肩), 겁재(劫財) 와 주체의식 - 폴 세잔(Paul Cezanne)
1. 비견, 겁재의 특징
비견, 겁재란 아화자(我和者), 즉 자신을 의미하는 일간의 오행과 동일한 오행을 가리키는 통변성이다. 단, 비견은 자신(일간)과 동일하되 음양이 같은 경우이고 겁재는 음양이 다른 경우이다. 예컨대, 일간이 양간(陽干)인 경(庚)일 경우, 사주 내 다른 곳에 경(庚) 이나 신(辛), 또는 유(酉)나 신(申)이 있으면 이들이 비견, 겁재에 해당되는데 여기서 같은 양(陽)의 금(金)인 경(庚)과 신(申)은 비견에 해당하고 음(陰)의 금(金)인 신(辛)과 유(酉)는 겁재에 해당한다. 비견 겁재의 속성은 주체의식이다. 일간 자신과 동일한 오행이 사주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늘 자기주장이 강하고 항상 자기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전인수는 물론이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며 살아간다. 항상 기세등등하고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굴 만나든 기가 죽지 않는다. 당차고 당돌하며 자신만만, 득의만만하다. 타인멸시, 무시, 아전인수, 강한 아집으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 단체나 조직에서 소외당하기 쉽고 늘 평판이 좋지 않다. 천상 자유직이나 홀로 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사주에 비견, 겁재가 많은 사람은 조직 폭력배가 무리를 짓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반드시 어떤 무리에서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어 상대방을 지배하고 복속시키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친구를 유난히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이 친구들 중 보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상관과 마찬가지로 남이 나서서 뭔가를 주도하는 꼴을 못 본다. 당연히 좀 튀거나 두드러진 사람은 어떻게든 꺾어 눌러야 직성이 풀린다. 한 마디로 안하무인이요, 남 밑에 못 있을 사람이다. 이 모두 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이들 역시 상관처럼 인격에 문제가 있으므로 일찍이 학문이나 종교로 마음의 수양을 해야한다. 군림하기 좋아하고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며 남을 업신여기고 모든 걸 자기 좋을대로만 하는 사람을 환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겁재는 10개의 통변성 중 최악의 것으로 분류되는 흉성이다. 재물을 겁탈한다는 글자의미 그대로 남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악한 심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비견은 좋은 점도 있다. 주체의식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남에게 휘둘리거나 부화뇌동하지 않고 군중심리에도 휩쓸리지 않으며 따라서 언제나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강한 주체의식으로 인해서 남에게 특별히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기에 가식이 없고 소탈하며 강직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라는 얘기다. 이런 특성이 담백함으로, 나아가 공정함으로 발휘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장점은 공과 사가 분명하고 리더십이 있다는 점이다. 귀가 얇지 않기 때문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으며 통솔력이 있다.
비견, 겁재 그 자체는 흉성이지만 사주가 신약일 때, 그래서 일간이 재에 눌렸거나(재다신약), 관으로부터 심하게 극을 받을 때(관다신약), 그리고 식상이 너무 많아 지나치게 설기가 될 때는 꼭 필요한 것이 된다. 즉, 신약 사주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비겁은 대체로 좋게 활용된다. 반대로 신왕일 때 비겁은 온갖 흉작용을 일으키는 최대의 흉성이 된다.
한편, 비겁이 강하면 일차적으로 이를 제거하고 극할 수 있는 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조건이 해결되면 관왕 신왕하여 고위공 직자의 길을 갈 수 있다. 내 그릇도 크고 내가 감당할 책무 또한 국가적인, 스케일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주가 짜여지지 못했을 경우, 그래서 비겁을 잘 다스리지 못한 사주의 경우 비겁의 결과는 둘로 나뉜다. 우선 비겁의 나쁜 점이 그대로 발휘되어 조직 폭력배가 되던가 사기꾼, 도둑이 되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지탄받는 인물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 째는 세상을 등지는 인물이 된다. 이 경우는 신왕이라 해도 인성이 있든가 천을귀인이 사주에 길한 작용을 하는 오행과 함께 있는 등 사주에 일말에 청(淸)이 있을 경우인데, 세상을 등지고 속세를 떠나 종교에 귀의하여 구도자의 길을 가게 된다. 비겁은 대단히 왕성한데 이를 극할 관성이 사주에 없으니 이 사주의 인물은 자신의 주체의식을 극해줄 엄청난 힘의 존재를 찾게 된다. 그 정도의 극아자가 아니면 굴복하지 않는, 왕성한 비겁의 소유자이므로 웬만한 관은 시시하게 여기고 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스스로 굴복당할만 하다고 인정하는 그런 엄청난 극아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 사람은 신(神)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때 격국에 따라 무속인이 될 수도, 말단 수도승이 될 수도, 교구의 고위 성직자가 될 수도 있다.
여성 사주의 경우에도 이 논리가 적용된다. 여성의 경우, 관성은 남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주에 왕성한 비겁이 있으면 관으로 처내던가(=공무원) 재성으로 바쁘게 만들던가(=사업가, 기업인) 식상으로 그 넘치는 기운을 빼내주어야(=예술가, 기술자) 사주가 무사하고 발복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대성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주(신왕관약이 아니거나 재다신약이 아닌 경우)에 해(年)운에서 비겁 운이 오거나 비겁대운을 맞게 되면 쟁재가 일어나 재물의 손실, 처나 아버지와의 이별 내지 사별, 사기 당함, 친구나 형제, 동료 및 동업자 등과의 불화, 분쟁 등의 악운이 올 수 있다.
2. 폴 세잔(1839-1906)의 삶과 작품세계
1) 세잔의 삶 - 토(土) 일간에 월지(月支) 비겁, 재성과 식상이 길 작용
세잔은 1839년 프랑스 남부 엑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처음엔 모자 제조업자였으나 후에 은행가로 성공하였다. 아버지 덕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성격은 내성적이었고 언제나 과묵했다. 부르봉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세잔은 여기서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된다. 세잔과 졸라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세잔은 졸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비겁의 길 작용) 생계를 위해 졸라가 파리로 떠난 후 둘은 30년 이상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훗날 세잔이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하던 시절, 소설『목로주점』과『나나』로 세잔보다 먼저 무명에서 벗어난 졸라와 자신의 예술성을 진정으로 이해 못해주는 졸라에 대한 섭섭함을 지닌 세잔 사이의 긴장감은 결국 1886년 졸라가 소설『작품(L‘oeuvre)』의 등장인물 중 실패한 그림 앞에서 자살하는 무능한 화가를 세잔과 닮게 묘사함으로 해서 의절이라는 사태로 이어진다.
졸라와 친하던 시절의 세잔은 문학 소년이었다. 세잔이 보들레르의 <악의 꽃>들을 모조리 암기하며 시인이 되고자 꿈을 꾸었던 반면 세잔이 낙선한 학교 미술대회의 수상자는 졸라였다. 그럼에도 졸라는 이미 세잔이 그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너는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세잔에게 힘주어 말하곤 했다. 이러한 졸라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세잔은 학교 졸업 후 인근에 사는 화가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20세 되던 해 아버지의 명령대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화가가 되려고 결심했던 그는 법학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한 채 2년 동안 방황하다 끝내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했다. 그는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861년 세잔은 아버지를 설득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덕택으로 결국 파리로 나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그림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는 편지로 늘 세잔이 화가가 될 것을 강하게 종용했던 졸라의 권유 또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파리로 나온 세잔은 아카데미 쉬스(Academi Suisse)에서 그림 공부를 했는데 여기서 쇠라에게 미술평론을 배우고 피사로, 기요맹 등을 만난다. 이 후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파화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세잔은 1861년과 1862년 관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입학에 실패하며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고향과 파리 사이를 오가면서 독학의 길을 걷는다. 1869년에는 모델 오르탕스 피케를 만났고 11살 차이였던 그들은 3년 후 결혼해 아들을 얻었지만 집안에는 둘 간의 관계를 숨기고 지냈다. 집안의 식구들과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 그녀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세잔을 도왔고 그렇게 훌륭한 내조를 하였다.(재성이 길 작용) 세잔은 훗날 47세가 되었을 때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였다. 독학을 하면서 자기 화풍의 방향을 모색해 나가던 세잔은 1872년 헤어졌던 피사로와 재회해 그에게서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의 어둡던 작풍을 바꾸고 대신 밝은 색채를 구사하면서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는 한층 인상주의에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주의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화가로서 빠른 성공을 기대한 아버지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공식 등용문인 살롱전에 낙선을 하면할수록 화가의 길로 가야한다는 신념이 굳어졌다. 5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화가로서의 그의 인생을 걱정해 막대한 유산을 남겨줌으로서 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재성의 길 작용)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진 세잔은 아내와 아들을 파리에 남겨둔 채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1896년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그들의 평판에 염증을 느꼈고 떠들썩거리는 비판소리에 상관없이 자신의 그림의 문제점들을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한 주변의 혹평은 그의 은둔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1882년 세잔은 대망의 관전(官展)에 입선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중과 비평가들은 그에 작품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혹평과 불만을 해대고 있었다. 이때는 화풍에 있어서도 인상파 그룹과 완전히 결별한 상태였다. 이제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히면서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를 취했다. 1895년에는 생애 단 한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은 일반에게 냉담한 것이었으나 일부의 지식층으로부터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당시의 젊은 화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상파이면서도 훨씬 지적이고 신선한 야성미가 넘치는 세잔의 그림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00년 경 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져 마침내 1904년에는 살롱에서 그의 작품이 특별전시실에 마련되기도 했다. 세잔은 오랫동안 당뇨병에 시달려 병이 악화됐는데, 1901년 엑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세우고, 1906년 10월 15일 교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뇌우로 졸도, 22일 사망하였다. 평소 동료화가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죽기로 맹세하였다”라고 했던 자신의 말 그대로였다.
세잔은 자신의 그림을 사줄 고객들을 찾는 데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독자적인 수단과 규칙적인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제기한 예술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작품에 가장 정확한 규범을 적용할 수 있었다. 외관상으로 그는 평온하고 한가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만 그가 추구하는 완벽한 예술적 이상을 자기 작품에서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열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화가였지만 어떤 점에서는 연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순간적인 빛을 쫓고 일순간의 외관을 추구하는데 회화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신 빛에 의해 드러나는 사물의 겉모습을 넘어 그 본질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마치 철학자처럼 절대를 추구하였던 것이다.(“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 그는 하나의 정물화를 완성하기 위해 100회를 작업했고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힐 정도로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우리가 세잔의 작품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그 자신에게는 하나의 실험이었고 그림을 향한 접근이었다.(인성과 식상 발달)
그는 회화란 구도와 채색이 오랜 노력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질서를 통해 초월적인 자연의 힘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의 목표는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할 수 있게 굳센 정신을 지니는 것이지. 그 나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네.”라고 베르나르에게 했던 그의 말은 유명하다.(월지 비겁) 그는 언제나 혼자서 작업했다. 제자도 없었고 가족의 응원이나 살롱 심사위원의 격려도 없었다. 어머니가 죽던 날 오후에도 작업을 했고 1870년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도 에스타크에서 홀로 그림을 그렸다 (그해 여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터져서 징병이 실시되었는데 세잔은 병역을 기피했다) 그는 늘 홀로 있길 원했다. 자신의 전시회를 할 때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림을 팔기 위해 화상을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림을 시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왔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고, 그들과 친밀한 교류도 하지 않았다. 단지, 구도하듯 자연을 바라고 그리며 그 속에서 은둔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대단히 고독했던 세잔은 말하자면 마치 성직자같은 예술가였던 것이다.(왕성한 비겁, 약한 관성)
세잔의 고독은 사실 자아와 주체의식이 매우 강했던 그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 또한 어느 누구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친구도, 가족도 함께 하지 못한 채 자신 안으로 들어가 버린 세잔의 자아에 대한 사랑 또한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독특하고도 철저했다. 세잔의 인생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버지, 친구 그리고 자기 자신 정도일 것이다. 세잔은 30세에 여성과 동거에 들어가 아들까지 낳지만 아내 또한 그의 마음의 문을 열지는 못했다. 물론 긴 동거 뒤 정식 결혼도 했지만 그들은 자주 떨어져 살았을 뿐 아니라, 부부라기보다는 친구와 같은 사이였다. 세잔은 죽을 때 한 푼의 유산도 그녀에게 남기지 않았고, 그녀 또한 세잔의 임종 때 나타나지 않았다. 세잔에게 있어 부인 오르탕스는 전속 모델이자 그의 아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만 남았을 뿐이다.(재에 대한 무관심) 세잔이 진정 사랑했고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아버지와 친구인 졸라였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던 세잔은 늘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법관이 아닌 화가로서의 아들을 어렵게나마 인정했지만 그는 아버지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죄스러움과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망 사이에서 갈등하곤 했다. 한편, 졸라는 세잔이 화가에의 길을 고민하고 있을 때 강력하게 그 길을 걷도록 종용했고 그의 결심을 이끌어 냈다.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가. 네게는 화가가 될 재능이 있어. 재능을 모르고 있는 것은 너 혼자 뿐이야. 결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졸라는 이렇게 세잔에게 항상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세잔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의지하였다.(왕성한 비겁) 훗날 의절하게 되었지만 세잔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졸라의 그림자는 대단한 것이었다.
세잔은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굉장히 고집이 세고 괴팍하며 급한 성격이었다. 신경질적이었으며 갑자기 자신의 작품을 찢어버리는 자학적이고 충동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을 인정하지 않았고 타인에 대한 매너도 거칠어서 사교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그리고 1866년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자 당국에 항의서를 보냈을 정도로 아집이 강했다. 한편 세잔은 퍽 소탈하고 가식없으며 강직한 성품이었다. 그는 다른 화가들 보다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자화상에서 결코 자신을 미화시키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벗겨진 머리를 그대로 볼품없이 그려내는가 하면 뻣뻣한 수염을 숨김없이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독립독보, 과장없이 그냥 자기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평소 기질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월지 비겁) 늦게사 그의 진가를 알아본 비평가들이나 대중들과 달리 그의 동료들은 그를 인정했던 사실을 보면 세잔은 동료 덕이 있었던 것 같다.(드니에 의해 <세잔에게 경의를>이란 작품이 제작될 정도로 당시의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는 세잔이었고, 피카소 조차 자신의 유일한 스승은 세잔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 토 일간(=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 과묵함, 수줍음, 당뇨)에 월지 비겁(=독립독보, 타인 무시, 아집, 아전인수) 재성과 식상이 길신(왕성한 비겁을 식상으로 잘 설기하고 재성으로 조절→친구, 동료 덕), 약한 관성
2) 세잔의 작품세계
세잔은 처음 인상주의에 동조하였으나 곧바로 이들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는 다양한 외관의 배후에는 오직 하나 뿐인 지속적인 현실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발견하는 일이 예술의 기능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잔은 사물의 고유색을 인정하였으며 대상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려 하였고 조화 있고 균형 잡힌 화면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원근법을 무시했고 형태를 왜곡했다. 한편, 인상주의가 이루어 놓은 업적인 색채의 밝음을 희생하지 않고서 깊이감을 이루려하고 깊이를 희생하지 않고 질서 있는 구도를 이루려고 노력하다보니 윤곽선을 무시하게 되었다. 또, 인상주의가 잃어버린 대상의 단단한 물체성과 깊이감을 전달하기 위해 정확한 소묘를 무시하게 되었다. 이 점 현대 미술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뵈는 재현에 연연하지 않고 대상의 본질 파악을 위해 대상을 분해하고 그것을 근원적 형태로 재구성해냄으로써 회화를 사유의 영역으로 승격시켰다. 곧, 화면을 감각 자극을 위함이 아니라 인식 행위의 구현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 초기 : 바로크적, 낭만주의적 경향(들라크루와, 쿠르베 흠모, 카라바치오, 제리코에 영향)
(1873이전 ) <아쉴 엥프레르의 초상> (1867) <피아노의 소녀>(1869)
- 중기 : 인상주의적 경향(피사로의 영향)
(1873이후) <오베르의 목맨 사람의 집> (1873) <에스타크> (1882)
- 후기 : 사물의 본질에 대한 관심, 건축적, 구성적 회화, 표현주의적 경향, 추상의 경향
(1890이후)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1895) <대수욕>(1898) <성 빅토왈 산>(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