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미술이론

원근법의 탄생

작성자파라다이스|작성시간11.03.05|조회수467 목록 댓글 0

원근법의 탄생

 

월간미술 2003.07 classic odyssey ⑦



<뉴욕 타임즈>는 지난 밀레니엄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르네상스 원근법을 꼽은 적이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하고 어깨를 겨룰 만한 혁명적인 사건이 미술에서도 일어났다니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런데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던 원근법은 누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낸 걸까? 원근법이 이 세상에 처음 머리를 내밀고 󰡐응애󰡑하면서 첫 울음을 터뜨리던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 보자. 

 

 김병종 <생명의 노래-양자강 기행> 한지에 먹 채색 93.5×130cm 1993 

  



1410년께의 어느 날, 피렌체 대성당의 서쪽 정문 근처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림 한 점을 놓고 시민들이 몰려들어 서로 보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그림 크기는 가로 세로 30cm 남짓. 그림 복판에는 콩알만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고 그 구멍에 눈을 갖다 붙이고 대성당 문 안쪽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그린 이 그림이야말로 원근법을 구사해서 그린 미술사 최초의 작품이었는데, 안타깝게 소실되어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그림이기에, 또 무엇을 어떻게 그렸기에 그날 피렌체의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이 혀를 차면서 감탄했던 걸까? 그날 직접 그림을 만져 보고 또 눈구멍으로 들여다보았던 사람 가운데 마네티도 있었다. 그는 나중에 브루넬레스키의 생애를 전기로 기록하면서 그날의 사건을 소상히 기록해 두었다.


󰡒그가 처음으로 원근법에 관하여 보여 주었던 것은 크기가 대략 반 브라치아 가량 되는 작은 사각형 패널 그림으로 거기에다 피렌체의 성 요한 세례당 건물의 외관을 그려 두었다. 세례당은 바깥에서 건물 전체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마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중앙정문 안쪽으로 대략 세 브라치아 들어간 곳으로부터 (정면에 위치한) 세례당을 내다보면서 (그림으로) 옮긴 것 같았고, 세례당(외벽)의 흰색과 검은색 대리석 색깔에 이르기까지 어찌나 꼼꼼하고 정성스럽고 정교하게 그렸는지 어떤 세밀화가의 솜씨로도 이보다 더 낫게 그릴 수 없었다.


(성 요한 세례당 뒤편) 광장의 정면부를 눈에 보이는 대로 미세리코르디아 건너편에서 시작해서 양모시장 상부 박공과 모퉁이까지, 그리고 성 제노비오의 기적을 기리는 기념 원주에서 밀짚시장까지 (그림에) 그려 넣었다. 광장(을 에워싼 건축군들)이 멀리 떨어져 보였고, (그림에) 하늘을 나타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림 속에 담벽(처럼 늘어선 건축군들)을 대기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브루넬레스키는 패널 그림의 상부, 곧 하늘이 들어갈 자리에다) 은박을 입히는 방법을 썼다. 은박은 거울처럼 투명해서 대기와 하늘이 그대로 비쳤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구름들이 은박 위를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림을 관찰할 (고정된) 단일 시점을 확보하는 일이 문제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사람들이 그림을 잘못된 시점에서 보는 일이 없도록 높낮이는 물론 방향과 거리를 정해 두고 그림에다 작은 구멍을 뚫었다. 이 시점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바라보면 눈에 비치는 (세례당과 배경건축군의) 광경들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림에서 구멍의 위치는 성 요한 세례당 부분에 놓였고, 구멍에 눈을 대면 (브루넬레스키가 앞서) 세례당을 그리기 위해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안쪽에 자리를 잡았을 때의 시점과 일치했다. 구멍은 (나무패널에서) 그림이 그려진 쪽이 완두콩(의 지름)만큼 작았고, 뒤쪽을 향해서 여자들이 쓰고 다니는 밀짚모자처럼 생긴 피라미드 꼴을 이루며 점차 벌어져서 (패널그림의 반대편에 이르면) 두카토 주화의 크기 정도, 아니면 그보다 약간 더 큰 구멍이 뚫렸다. 브루넬레스키는 그림의 앞뒤를 뒤집어서 구멍이 크게 난 쪽(의 면)에 눈을 갖다대고 보게 했는데, 사람들은 한 손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평면거울을 그림과 마주보게 세워든 채로 거울에 비치는 그림을 관찰하였다. (눈을 가린 손 말고) 다른 손에 든 거울은 (마주보는 그림으로부터) 대략 작은 브라치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지만, (구멍에 눈을 대었을 때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그림과 눈 사이의 거리는 눈과 거울 사이의 거리의 두 곱에 해당하므로) 실제 브루넬레스키가 성 요한 세례당을 그리기 위해서 잡았던 지점으로부터 온전한 브라치아만큼 거리가 떨어져 보였다. 그래서 (구멍을 통해서 거울 속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은박이나 광장(에 늘어선 건축군의 모티프) 그리고 시점 등 앞서 말한 여러 다른 장치 덕택으로 마치 실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내 손에 (거울을) 직접 들고 여러 차례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나의 증언은 틀림없다.󰡓


건축적 원근법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에 원근법을 구사하여 그린 그림의 도해. A는 그림. B는 거울. C는 거울 속에 비친 그림. 시계각도를 90도로 잡을 때 AB 사이의 거리는 그림 한 변 길이의 1/4이 된다.

 

  


마네티가 이날의 사건을 하도 꼼꼼하게 써둔 덕분에 미술의 역사상 가장 짜릿한 그날의 원근법 시연 소동은 지금도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바사리는 그의 못생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빗대어서 󰡒흙덩어리가 금맥을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건축가지만 기계 설계도 잘하고 그림 솜씨도 어지간했던 것 같다. 머리도 비상해서 당대의 기하학자 토스카넬리와 논쟁을 벌여서도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가 그린 시연 그림에서는 세밀화가도 못 당한다는 붓솜씨도 일품이지만, 아무래도 하늘 실루엣 부분에다 은을 얇게 펴고 거울처럼 반짝반짝하게 윤을 낸 은박(ariente brunito)을 발라둔 것이 압권이다.


마네티의 증언에 따라 시연 방식은 복구해 보면 대강 이랬을 것이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차례대로 그림 뒷면에 난 구멍에다 눈을 붙이고 보았을 텐데, 돌려세운 그림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해 두었다. 이때 그림을 마주보게끔 거울을 세워들고 한 손으로 거울을 움직이면서 눈구멍으로 관찰한다. 거울을 치우면 그림의 눈구멍을 통해서 실물 세례당이 보이고, 거울을 마주 대면 그림으로 재현한 세례당이 거울에 비쳐 보인다. 거울을 조금씩 움직여 가면서 그림과 실물이 얼마나 빼닮았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원근법의 탄생을 목격한 피렌체 시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림과 실물의 두 세례당이 윤곽선, 형태, 실물감, 비례관계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크기까지 같아 보였다.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을 바라보는 브루넬레스키도 내심 뿌듯했을 것이다. 사실 브루넬레스키는 깜짝쇼에 재능이 남달랐다. 원근법 시연 말고도 달걀을 똑바로 세워 보인적도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바사리의 전기에 실려 있다.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얹는 공사를 누가 따낼지 경합을 벌이다가 달걀을 곧추세우는 사람이 맡기로 했다.그런데 브루넬레스키가 달걀 머리를 콩 찍어서 바스라뜨린 다음에 턱 하고 세워 보였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나중에 바사리의 책을 읽은 벤초니가 10년 뒤 1565년 《신세계의 역사》를 쓰면서 인용하는 바람에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속담을 낳지만, 원래는 브루넬레스키의 달걀 세우기라고 해야 맞다.


앞에서 인용한 마네티의 기록은 지금까지 미술사학자들 사이에 큰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넬레스키의 전기를 쓰면서 마네티가 굳이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을 까닭이 없을 테고, 또 그의 서술이 너무나 현장감 넘치고 생생해서 당연히 그랬겠거니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잘 기록을 뜯어보면 이상한 곳이 한 군데 보인다. 가령 시연 그림과 거울 사이의 간격이 작은 브라치아, 곧 30cm 정도라는데, 이것은 시연상황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브루넬레스키가 정해 둔 그림의 시연 위치는 피렌체 대성당의 중앙 주정문의 문설주를 동축으로 삼고 성당 내부로 󰡐대략󰡑 세 브라치아, 곧 1.8m 가량 들어간 지점이었다. 이 시점에서 성 요한 세례당 바깥 주벽까지 최단 거리는 정확히 예순 브라치아, 곧 36m에 달한다. 그런데 대성당 주정문의 바깥 문설주가 벌어진 너비는 6.5브라치아니까 그림 구멍에 눈을 들이대고 본다면 보는 사람의 시계는 95도 가량 벌어진다. 마네티는 사람들이 그림과 마주보게 들었던 󰡒거울은 (그림으로부터) 대략 작은 브라치아(circha di braccia piccholine) 거리에 위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구멍에 눈을 대면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그림과 눈 사이의 거리는 눈과 거울 사이 거리의 두 곱에 해당하므로 󰡒실제로는 브루넬레스키가 성 요한 세례당을 그리기 위해서 잡았던 지점으로부터 온전한 브라치아(braccia uere)만큼 거리가 떨어져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림의 눈구멍에 대고 있는 눈을 시각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 잡고 문설주의 너비를 밑변으로 삼으면, 꼭지각이 대략 90도가 되는 삼각형이 그려진다. 꼭지각은 관찰자의 시계 각도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삼각형의 머리 부분에 작은 삼각형을 하나 더 그릴 수 있는데, 이번에는 눈이 꼭지점, 거울 속에 비친 그림이 밑변이 된다. 작은 삼각형의 꼭지각은 큰 삼각형과 같다. 꼭지각이 90도인 대칭 이등변삼각형의 밑변과 높이는 2:1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 작은 삼각형의 밑변은 거울 속의 그림이고, 꼭지점은 눈구멍에 붙이고 있는 눈이다. 거울 속의 그림은 거울 밖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가로 세로가 30cm, 다시 반으로 나누면 꼭지점과의 거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림과 거울 사이의 거리는 거울 속의 그림과 눈 사이의 거리를 다시 반으로 나누어야 하니까 7.5cm밖에 안 된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시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그림과 거울을 실제로 긴 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만큼 떼어놓고 보았을 것이다. 마네티가 작은 브라치아만큼 떼어놓았다고 한 대목은 아마도 작은 손바닥, 다시 말해 손바닥의 짧은 길이를 뜻하는 작은 손바닥(palmo piccolo)을 오기한 것이 아닐까? 15세기 피렌체의 건축가들이 사용하던 󰡐작은 손바닥󰡑의 측정단위는 대략 7.39cm니까 얼추 맞아떨어진다.


백 보 물러나서 마네티의 기록이 맞다고 치면 그림의 크기가 2×2브라치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로 세로가 1.2m나 되는 커다란 그림이라면 앞서 반 브라치아라고 했던 것, 그리고 세밀화가도 못 따라온다는 이야기하고도 앞뒤가 안 맞는다. 또 이럴 수도 있다. 대성당 문설주 안쪽으로 아예 깊숙히 더 들어가면 시계가 좁아지니까 그림과 거울 사이의 거리를 벌릴 수 있다. 꼭지각을 잔뜩 오므린 뾰족한 삼각형을 만들 수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대략 세 브라치아 들어간 위치󰡑와 달라질뿐더러, 앞서 마네티가 생생하게 묘사했던 광장 뒤편의 여러 건축군이 모두 성 요한 세례당 뒤에 숨어서 하나도 안 보일 테니까 이것도 곤란하다.


마네티의 기록을 살펴보면 또 하나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여기서 문제 하나. 브루넬레스키가 그린 그림은 세례당과 배경 건축군을 똑바로 그렸을까. 아니면 좌우를 바꾸어서 그렸을까? 그림을 뒤집어서 세우고 거울을 마주보게 한 다음, 거울 속의 그림에 그려진 세례당이 실물과 똑같았다니까 답은 좌우를 뒤집어서 그린 것이 된다. 거울은 무엇이든 좌우를 바꾸어서 비추기 때문이다. 물론 그림 위쪽의 은박 위를 흘러가는 구름의 방향은 실제 하늘에서 흘러가는 방향과 똑같다. 은박이 거울 구실을 하니까 구름은 두 장의 거울을 지나면서 좌우가 두 차례 바뀌어서 원래 방향을 회복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브루넬레스키가 어떤 방법으로 그의 완전한 원근법적 그림을 󰡐좌우를 뒤집어서󰡑 완성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자로 친 듯이 정확한 재현이 가능하면서 좌우를 뒤집어 그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20여 년 뒤에 알베르티가 그의 《회화론》에서 말하는 투명한 그물망사를 가지고는 쉽지 않다. 일단 그린 그림을 동판화가들처럼 다시 뒤집어서 그리는 과정에 재현의 정확성이 떨어질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는 그물망사 대신에 건축적 조감법을 사용해서 그의 첫 원근법적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건축물의 평면도와 정면입면도 그리고 측면입면도를 결합해서 입체적인 조감을 완성하는 이 방식은 이른바 󰡐코스트루치오네 레지티마(costru-zione legittima)󰡑라고 불렸다. 화가나 조각가라면 생소했겠지만 설계도 그리는 일로 밥을 먹고 살았던 브루넬레스키에게는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수평투영평면과 수직투영평면을 결합하는 방식이라는 뜻에서 󰡐결합 투영법󰡑, 혹은 󰡐건축적 투영법󰡑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 방식을 사용해서 원근법적 그림을 그리려면 건축물의 전체와 부분의 길이, 폭, 높이 등을 하나씩 측정하고, 그것을 다시 그림의 크기에 맞추어 비례만 계산하면 된다. 무엇보다 재현 대상의 좌우를 바꾸기가 쉽고 정교하다는 장점이 있다.


바사리는 브루넬레스키의 작업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말 번역이 나와 있지만 다시 옮겨 보았다.


󰡒그것은 평면도와 측면도 그리고 시각 피라미드의 횡단면을 사용해서 원근법적 재현을 건져 올리는 방법이었다.(perspettiva… che fu il levarla con la pianta e proffilo e per via della intersegazione…)󰡓


참고로 이근배의 이탈리아 예술가 전기 1권 327쪽에는 같은 구절을 이렇게 옮겼다. 󰡒투시도의 기평선과 표고 등에 교차선을 사용하였다.󰡓 ■


노성두 | 미술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