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인상주의 (科學的印象主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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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188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를 중심으로 한 예술운동. 미술 표현에 르네상스 이래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 것이며, 유럽을 비롯하여 동양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
설명
1860∼188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를 중심으로 한 예술운동. 미술 표현에 르네상스 이래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 것이며, 유럽을 비롯하여 동양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인상주의의 개념은 음악·문학 등에 대해서도 쓰인다.
미술
기원과 선구(先驅)
인상주의가 이룩한 혁신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몇 가지의 새로운 기법으로 뒷받침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이래의 다양한 노력이 체계화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인상파의 전위적 움직임이 18세기 말경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전성시대를 이어받아, 18세기 후반에는 특히 영국에서 풍경 그 자체의 미와 위대함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 중에서 J.M.W. 터너·J. 컨스터블·R.P. 보닝턴 등의 유채(油彩)와 수채의 스케치에는 야외에서 직접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빛의 상태가 묘사되어, 인상파의 초기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것들은 습작의 단계에 그쳤고, 실제 유채작품의 제작에서는 대폭 수정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의 성채에 틀어박혀 있던 신고전주의의 풍경화가들까지도 인상파를 연상하게 하는 참신한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P.H. 발랑시엔은 저서 《실용원근법입문(1800)》에서 자연의 모든 계절·시간·빛의 상태를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구름과 산을 덮는 안개 등을 단시간에 포착한 유채스케치를 남겼다. 이와 같은 스케치 단계에서는 일찍부터 야외의 밝은 빛을 보이는 대로 그려내려고 노력하였는데, 그것을 실제 완성작품에 부분적이나마 응용한 화가가 F.V.E. 들라크루아이다. 그는 베네치아파 연구를 통해서 밝은 색채를 추구하였으며, 색채를 특별히 밝게 보이게 하기 위해 보색을 색반(色斑)으로 늘어놓는 연구를 하였다(일설로는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J.B.C. 코로는 야외에서 제작할 기회가 많아서 화면이 밝은 뉘앙스로 차 있다. 독립된 자연을 갖가지 양상으로 다룬 바르비종파는 자연관찰의 측면에서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젊은 그들을 격려하고 지도한 인물은 G. 쿠르베·C.F. 도비니·J.B. 용킨트·E.L. 부댕 등이었다. 쿠르베는 아카데미와 여론에 대한 감투정신으로 모범을 보였고, 역사화·신화화·종교화와 같은 전통적 장르를 떠난 현대적 주제를 인상파에게 가르쳤다. 도비니·용킨트·부댕은 인상파에 앞서서 강과 바다 등, 빛이 충만하고 대기가 변화하기 쉬운 장소에서 정확한 자연관찰을 한 뒤 밝고 생생한 화면을 완성하였으며, 특히 부댕은 소년시절의 C. 모네를 직접 지도한 스승이었다.
혁신 내용
인상파는 다양하게 혁신을 시도하였는데, 색채·구도법·주제 등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색채
19세기가 되어 색채와 빛의 원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M.E. 슈브뢸·H. 혤름홀츠 등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화가들이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이 체계화되었다. 인상파는 의학생이었던 J.F. 바질을 통해서 이 지식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인상파에서처럼 이들 이론을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한 기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색이란 3원색 중의 2가지를 섞으면 새로운 색이 되는데, 섞을수록 명도를 잃게 된다. 따라서 어떤 색을 보다 밝은 상태로 만들려면, 화면 위에 점묘(點描)로 2색을 나란히 찍고(디비조니슴),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것이 혼합되어 보이므로(시각혼합), 필요한 색을 보다 밝은 상태로 얻게 된다. 이처럼 밝은 화면을 얻기 위한 집요한 노력은 그들이 야외제작을 한 결과였다. 즉 빛속에는 원래 검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빛이 풍부한 야외에서는 모두가 밝게 보인다. 따라서 사물에는 각각 고유색(local color)이 있다는 종래의 사고방식은 타파되고, 빛이 물질에 반사되어 그것이 눈에 들어올 때 색이 보인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구도법
구도법에서 그들은 사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진은 네모난 틀로 시야를 잘라내는 식으로 대담한 구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측면과, 대상을 <영원한 상(相)에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발상이 인상파의 대상을 포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주제
주제의 선택에서는 1세대 전의 사실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종교화·신화화·역사화에 등을 돌리고, 그들은 특히 같은 시대의 풍속과 초상·정물 등의 시민적 장르, 주변의 흔한 풍경 등을 주제로 채택하였다.
그룹전(展)
인상파 그룹의 화가들이 서로 알게 된 것은 1863년 C. 글레르의 아틀리에(C. 모네·A. 시슬레·P.A. 르누아르·바질)에서였고, 모네가 아카데미 쉬이스에서 알고 지내던 C. 피사로·P. 세잔이 합류하였다. 피사로를 통해서 B. 모리조도 참가하여, 그들은 E. 마네나 바질의 아틀리에, 또 브라스리 데 마르튀르, 게르부아, 누벨아텐 등의 카페에서 만나 비평가들과도 친교를 맺었으며, 야외제작을 함께 하는 등 점차 그룹을 형성해 나갔다. 그들에게 특별히 큰 영향을 준 것은 마네였다. 1863년의 살롱전(官展)에서 낙선을 한 뒤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서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풀밭 위에서의 점심》, 1865년의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 등의 작품에서 그는 항상 새로운 흐름의 선두에 서서 주제의 참신성, 르네상스 이래의 건물 등의 깊이 표현을 무시한 플랜구성, 평면으로 보이는 인체 표현, 명암이 두드러진 색조(色調), 생동하는 터치 등으로 젊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의 초기작품에는 마네의 영향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젊은이들은 차츰 보수화되어가는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뼈대만 남은 아카데미즘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살롱전에 입선할 수도 없었으므로 독자적인 그룹전을 기획하였다. 이것이 <인상파전>의 시작이다. 제1회 전람회를 개최한 것은 제3공화정이 된 뒤이며, <화가·조각가·판화가의 협동조합>이라는 명칭으로 1874년 4월 15일부터 1개월 동안 열렸다. 이때 전람회를 취재한 《샤리바리》지(紙)의 L.J. 르루아 기자가 모네의 출품작 《인상, 일출(Impression, soleil levant)》을 비꼬아서 그들을 <인상주의자들(Impressionnistes)>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이 그룹의 명칭이 되었다. 그들은 주로 <바티뇰의 무리들>이라고 일컬어졌고 마네를 중심으로 한 사실주의의 흐름을 참작한 사람들이었으나, 마네는 끝내 이 그룹의 전람회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모네·E. 드가·세잔·시슬레·피사로·르누아르·모리조 등 30명이 165점을 출품하였다. 이 전람회는 저널리즘의 흥미본위 보도에 자극되어 많은 관객이 몰려드는 등, 화제는 많았지만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전람회는 1876·1877·1879·1880·1881·1882·1886년에 8회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그들의 활동이 일반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7회 때부터였다. 인상파그룹은 본디 자유롭고 심사를 하지 않는 전람회를 원칙으로 하여 새로운 예술에 대한 의욕만을 공통의 방침으로 한 까닭에, 모네·르누아르·시슬레 등의 제1회전람회 그룹을 보존하려는 경향과 드가·피사로와 같이 젊은이들을 참가시키려는 경향 사이에서 대립이 생겨, 5·6회 때는 모네·르누아르·시슬레가 출품하지 않았으며, 또 반대로 7회 때는 드가를 제외한 당초의 중심멤버 9명만이 출품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8회 때는 P. 고갱·G. 쇠라·O. 르동 등이 대폭 출품하였기 때문에 모네 등이 참가를 거부하여 인상파그룹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람회에 일관되게 출품한 사람은 피사로뿐이며, 세잔은 1·3회 때만 참가하였을 뿐이다. 그룹의 이론적 뒷받침이나 기본방침 등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이 그룹전은 아카데미즘에 도전하여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려는 인상파의 자세를 확실히 제시하였다. 그들의 참신한 양식은 과거로부터 탈피하여 자기들의 시대를 표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지지를 받았으며(J.A. 카스타냐리·T. 뒤레·Z. 아스트뤽·E. 졸라의 초기), 기존의 아카데미즘을 수호하는 쪽으로부터는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룹전 이후
인상파가 그룹활동을 그만둔 뒤에도 그들은 각기 독자성에 알맞는 제작활동을 해나갔다. 즉 모네는 빛의 변화를 더 순간적으로 포착하기 위해서 대상을 한정하고 때로는 구도를 고정시켜 상이한 빛의 상태를 나눠서 그리는 연작의 세계로 들어갔으며, 르누아르는 한때 고전주의적인 윤곽선의 부활을 지향하였으나, 얼마 뒤 벽에 부닥쳐 다시 나부(裸婦)를 중심으로 한 풍요한 색채의 세계로 돌아갔다. 드가는 인체나 말의 순간적인 움직임의 표현과 그 결과 생기는 특수한 구도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세잔은 목욕하는 사람들과 풍경을 공간의 중심에 구축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피사로만이 혼자서 다음 세대와 함께 신인상주의 기법을 받아들였다. 한편 인상파의 영향은 대단히 폭넓고 다양하며 또 깊게 오늘날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기술하는 것은 곤란하다. 회화기법에서 <인상파적>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주로 화필의 터치를 남기면서도 밝은색을 나란히 하는 기법, 또는 대단히 빠르고 큰 화필(畵筆)의 터치기법(touch技法)이다. 또 빛의 느낌으로 가득찬 밝은 화면을 뜻하기도 한다. 후세에 끼친 영향으로, 그들이 사용한 유달리 밝은 색채는 모든 유파의 회화에서 사용 이전과 이후의 화면의 빛깔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프랑스에서는 1850·1860년대에 태어난 화가의 대부분이 인상파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카데미즘 이외에도, 이 운동에 대한 비판은 같은 시대에 이미 있었다. 인상파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지나치게 나타냄으로써 정신적 내용을 간과하고 있다는 입장(G. 모로·르동)은 상징주의라는 경향을 낳았고, 또 후기인상파라는 일련의 작가들도 이 반성 위에서 일어섰다. 또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본능적인 부분을 초월하고자 과학적·이론적으로 이것을 체계화하였다.
신인상주의
인상주의의 경험적·본능적 특성을 계승하면서, 색채론과 광학이론을 도입하여 인상주의회화의 과학화·이론화를 추구한 것이 신인상주의이다. 쇠라·P. 시냐크 등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들라크루아·슈브뢸·헬름홀츠 등의 색채이론을 받아들여 색채와 광선표현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화면이 최고도의 광채를 얻기 위하여 색채는 당연히 원색 내지 순색으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켄버스 위에서 색을 직접 혼합하지 않고, 화면에 순색 또는 원색의 작고 균일한 크기의 점을 찍어 순도 높은 빛과 밝음을 얻어 혼색 효과를 내는 디비조니슴이 신인상주의의 특징적 기법이다.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는 이러한 신인상주의 화법의 특징을 살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는 C. 앙리의 상징주의적인 미학에 공감하여 그것을 실제작품에 실현시킴으로써 신인상주의를 보다 완벽하게 확립하려 했으나, 1891년 그의 죽음으로 이 운동은 쇠퇴하게 되었다. H. 크로스·C. 앙그랑·A. 뒤부아피·M. 뤼스 등이 쇠라의 기법에 공명하여 이 유파를 이었다. 과학성과 이론성의 추구라는 특성은 큐비즘과 미래파에 영향을 주었다.
후기인상주의
빛을 색채로 환원시키는 인상주의의 감각 추구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방향을 개척한 것이 후기인상주의이다. 이는 영국 비평가 R. 프라이가 인상주의 이후에 다양한 양식들을 표현해 낸 작가들에게 편의상 붙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주로 세잔·고갱·V. 고흐 3명을 가리키는데, T. 로트렉·르동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세잔은 형태감각이 결여된 인상주의의 화면에 대해 견고하고 질서감 넘치는 화면을 구축하고자 하였고, 고갱은 인상주의의 섬세한 필치 위에 강력한 장식성과 심리적인 화면구성으로 상징주의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흐는 격렬한 감정으로 밝은 색채를 철저히 주관화하여 화면에 쏟아부음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세잔을 제외한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를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상징주의회화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인상파 이후>의 화가들이 의미내용의 상징화를 목표로 설정한 데 기인한다. 즉 객관적 빛의 묘사에 치중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그들은 주관적 내면세계의 형상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음악
인상주의라는 개념을 회화에서 빌려 음악에 적용한 것은 프랑스의 아카데미가 C.A. 드뷔시의 《봄(1887)》의 비평에 쓴 것이 최초인데, 그것은 《봄》에서 표현된 <색채성의 과대평가와 형식의 경시>를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드뷔시가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해감에 따라 이 용어에서 부정적인 느낌은 사라졌다. 그 뒤 <인상주의음악>이란, 낭만주의의 한 귀결인 감각주의에 입각하여, 아카데미가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본 색채성의 강조 등이 오히려 특색인 양식이며, 드뷔시와 M.J. 라벨의 작품 속에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인상주의음악은 보통 다음과 같은 기법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① 5도 또는 8도, 2도 등을 포함한 음정·화음의 같이가기(倂進行), 어울림 화음과 동격으로 다루어지고 <해결>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고차화음·안어울림 화음·변질화음 등의 사용(전통적인 기능화성법에서는 이들 화음은 사후에 일정한 처리를 한다는 약속 아래 사용하였다. 이 약속된 처리를 해결이라 한다) 등의 결과로서 기능화성법을 원칙에서 뺀다. ② 이에 대응해서 자주 장조·단조의 조조직(調組織)에서 이탈하여 교회선법(敎會旋法)·온음음계·5음음계 및 기타의 선법을 작곡의 기반에 둔다(旋法性). ③ 기능화성법의 맥락을 배제하는 방향과 상관적으로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음색의 유연·대비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④ 음악형식 및 선율구조의 구성요소의 단편화가 두드러지며 형식과 구조는 이미지의 연쇄로 형성된다. 리듬도 마디선에 구속되지 않는다. 한편, 인상주의의 회화와 음악에는 색채의 우월과 발산하는 기분에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도, 음악에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적용시킨 것은 적당한 것은 아니었다. 음악은 새소리 등 청각적 인상 이외에는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회화와 같이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상에서 표현에 이르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의 참여를 빼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드뷔시는 음악은 <많건 적건 간에 정확한 자연의 재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상상력 사이의 신비로운 일치를 위해서 제공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 일치협동은 드뷔시의 경우, 귀(감각)로 듣는 것 가운데서 그 감각적 이미지를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므로 오히려 더 상징주의적인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따라서 인상주의는 감각주의나 자연주의와는 구별되며 양립할 수 없다. 음악에서의 인상주의란, 결국 낭만파의 서술·묘사에 대한 지향과 고전파 또는 현대음악의 추상성과의 중간에 있는 상형적(象形的)·암시적인 표현의 한 형태를 막연하게 파악한 관념에 불과하며, 역사적인 한 양식을 둘러싼 용어로서 적절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상형적·암시적 표현은 C. 자누캥·F. 쿠프랭·J.P. 라모·L.H. 베를리오즈·F. 리스트 등의 음악 중 일부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또 현대의 O. 메시앙 이후의 음악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다.
문학
회화상의 인상주의가 점차 문학에도 파급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독일의 인상주의 작가들은 극도로 정교한 언어와 세밀한 표현을 강조하는 개성적인 문체를 특징으로 하였다. 또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이면서도 독특한 인상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서정시에 보다 적합하였다. 이러한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가로는 R.M. 릴케·R. 데멜·H.V. 호프만스탈 등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T. 만의 《부덴부로크 일가》를 중심으로 한 초기 산문과 A. 슈니츨러의 희곡 등에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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