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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symbolism)’는 1880년대를 전후하여 20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을 풍미한 미술의 동향을 일컫는다. 엄밀히 말해 미술보다는 문학에서 주도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의 핵심사안은 당시 서구 사회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과학 및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세계,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치 낭만주의로 거슬러 올라간 듯, 상징주의 미술가들은 그들 이전 세대인 리얼리스트와 인상주의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비가시적인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죽음과 성(性), 그리고 꿈과 무의식과 같은 비물질적인 주제를 가져와 지극히 주관적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고 직관적으로 전달하고자, 즉 상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양식적인 면에서 결코 하나로 묶여질 수 없는 이들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을 꼽자면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표현대로 “이 세상이 아닌 그 어딘가”와 같은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물질적엔 주제에 대한 직관적 표현
 미술에서 상징주의가 공식적으로 규명된 것은 프랑스 비평가 조르주 알베르 오리에(Georges-Albert Aurier)의 1891년의 전시논평 [회화에서의 상징주의-폴 고갱 Le Symbolism en peinture-Paul Gauguin]이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오리에가 꼽은 최고의 상징주의 화가는 훗날 타히티로 떠나버린 고갱이었다. 그러나 고갱 이전부터 이미 프랑스 상징주의 미술은 몇몇 선구적인 화가들에게서 발현되고 있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1876년에 그려진 [환영]은 참수당한 세례 요한의 머리가 마치 환영처럼 살로메 앞에 떠오르고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고대 신화는 물론 철학과 고고학, 신지학(神智學, Theosophy)과 같은 신비주의 종교에 관심 가졌던 모로 특유의 정교하고 이국적인, 어딘가 괴이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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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6년
수채화, 72.2cmx106cm, 루브르 박물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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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귀스타브 모로 [구혼자들] 1852년
캔버스에 유채, 343cmx385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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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적인 화풍을 적절히 익힌 테오도르 샤세리오(Theodeore Chasseiau)의 제자로서 전통적인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화가였다. 그러나 기존 고전주의 양식과는 사뭇 다른 그의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는 곧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Joris Karl Huysmans)와 같은 상징주의 문학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위스망스는 모로를 개성 있고 창조적인 화가로 칭송하는 한편 1884년에 발표한 자신의 소설 [거꾸로 A Rebours)]에서는 [환영]에 대해 여러 페이지에 걸쳐 묘사했다. 모로는 살로메처럼 치명적인 매력의 여성 이미지뿐만 아니라 아름답지만 연약한 남성과 자웅동체와 같은 양성적인 성적 이미지 역시 자주 그렸는데 이러한 모로의 작품들은 당대 상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훗날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과 같은 초현실주의자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모로와 함께 샤세리오의 제자였던 당대 최대의 벽화가 피에르 퓌비 드 샤반(Pierre Puvis de Chavannes) 역시 진보적인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면 고전적인 풍경과 인물들이 등장하는 아카데미 형식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하고 정적인 구성, 제한된 색채로 섬세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한 편의 함축적인 시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상징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했으나 그의 기질과 성향은 상징주의에 지극히 부합했다. 퓌비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위스망스가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반발심이 생기지만 어떤 매력이 느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며 그와 자신이 갖는 공통의 관심사를 인정할 정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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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퓌비 드 샤반 [바닷가의 젊은 여자들] 1879년경
캔버스에 유채, 205cmx154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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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퓌비 드 샤반 [가난한 어부] 1881년
캔버스에 유채, 155cmx192.5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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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나 퓌비가 아카데미 화풍의 환영적인 상징주의를 구사하고 있었다면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은 또 다른 상징주의자의 시선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표현해냈다. 1879년 첫 번째 석판화집 [꿈속에서]를 출간하면서 뒤늦게 미술계에 입문한 르동은 1881년경부터 상징주의 문학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작품을 주제 삼아 그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1882년에 제작한 [에드거 앨런 포에게]라는 6점의 석판화를 들 수 있는데, 포의 작품은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의 번역으로 당시 프랑스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눈 풍선, 사람의 얼굴을 한 거미 등, 르동 작품의 독창성은 그가 일기에 기록했듯이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인간과 같이 살아있게 만드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1890년대 후반부터 르동은 파스텔, 수채화, 유화에서 색채의 표현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탐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상징주의 화가로서 그가 사용한 모호한 암시의 기법은 감상자와의 소통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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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파리보다 더욱 진취적이고 실험적이었던 벨기에의 도시들에서도 상징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83년 브뤼셀에서 창립된 그룹 ‘레 벵(Les XX)’의 주요멤버였던 페르낭 크노프(Fernand Khnopff)는 모로와 라파엘전파의 에드워드 번-존스(Edward Coley Burne-Jones)를 존경하며 이들의 영향을 반영한 우아하면서도 나른하고 환상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에서는 묘하게 관객을 빨아들이는 눈빛을 지닌 여인이 턱을 괴고 잠의 신 히프노스 조각상과 함께 등장한다. 히프노스 신은 이 여인을 곧 잠과 꿈의 세계, 즉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크노프는 전위그룹 레 벵에 속해있으면서도 조세팽 펠라당(Josephin Péladan)이 이끄는 신비주의 집단 ‘장미십자회(Order de la Rose-Croix du Temple et du Graal)’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야말로 신비롭고 상징주의적인 인물이었다. | |

페르낭 크노프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 1891년 캔버스에 유채, 72cmx140cm, 바이에른 국립미술관,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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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태동한 상징주의는 곧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스위스 바젤 태생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은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출발했으나 브뤼셀, 파리, 특히 로마에서의 체류를 통해 고전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였다. 풍경화이기도 인물화이기도, 또한 신화를 그린 고전주의 회화이기도, 혹은 아니기도 한 그의 작품들은 평온과 불길함 사이를 오가는 ‘분위기 회화(mood painting)’로 불리기도 한다. 1880년에 제작한 [죽음의 섬]은 화가의 주관대로 창조된 상상화로 장중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원래 뵈클린이 붙인 이 작품의 제목은 [꿈을 위한 그림]이었으나 어떤 화상이 현재의 제목으로 바꿨다는 일화가 전한다. | |

아르놀트 뵈클린 [사자 (死者)의 섬] 1880년 목판에 유채, 71cm×122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작품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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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클린 외에 스위스 상징주의를 이끈 또 다른 화가는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였다. 초기에는 리얼리즘을 따랐으나 파리와 독일에서 활동하며 점차 상징주의로 옮겨갔다. 그는 장미십자회 운동에 동조하면서 그들의 살롱전에 출품하기도 했는데, 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종교와 관련된 작품을 제작했다. 호들러가 존경하고 따른 화가는 헨리 퓨즐리(Henry Fuseli)와 퓌비 드 샤반이었다. 1890년경의 작품 [밤]은 상징주의로 전향한 직후에 그린 것으로 어렴풋이 이들의 영향이 엿보인다. 화면 중앙에는 검은 덩어리로 묘사된 죽음의 사자로 인해 잠에서 깬 호들러 자신이 묘사되어 있다. 호들러는 선과 형태, 색채를 반복하고 수직이나 수평이 평행을 이루는 특유의 구성을 사용하곤 했는데, 이를 통해 묘사에 있어서는 사실적이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신비주의적인 느낌을 풍겼다. | |

페르디난트 호들러 [밤] 1889~1890년 캔버스에 유채, 116.5cmx299cm, 베른 미술관 작품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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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이들이 바로 상징주의자들이었다. 관행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일탈을 의미하기에, 이들의 표현법은 신선하고 매혹적이었지만 때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라파엘전파의 리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와 그와 유사성이 많은 노르웨이 출신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역시 각각의 화법으로 자국의 상징주의 경향을 이끌었다. 상징주의 이후 미술가들은 더 이상 외부세계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자유롭고 순수한 그들만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은 상징주의의 가장 큰 수혜자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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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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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3.14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