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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용어

르네상스( Renaissance)

작성자진상용|작성시간05.10.28|조회수361 목록 댓글 0

 

 

  르네상스( Renaissance)


17세기에서 18세기로 바뀔 때, A. 퓌르티에르의 《보편적 사전(제2판, 1701)》과 P. 벨의 《역사적·비판적 사전(1697)》이 <르네상스>라는 항목을 설정했다. 전자는 <미술 르네상스>라는 말을 수록했고, 후자에 의해 <문예 르네상스>라는 말이 정착되었다. 양자의 정의는 16세기 인문주의자의 견해를 확인한 것이었다. 16세기 중엽 이탈리아 화가 G. 바자리가 그의 저서 《치마부에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저명한 건축가·화가·조각가의 전기(1550)》에서 <미술의 리나시타(재생)>를 지적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화가들의 고대미술양식의 학습과 자연묘사 훈련의 성과를 기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J. 아미요가 플루타르코스의 《대비열전(對比列傳)》의 불역본(佛譯本, 1559)을 앙리 2세에게 바치는 헌정문에서 <문예가 재생했다(르네트르했다)>고 언급했다. 이 경우, 아미요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창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문예 르네상스> 당시의 생각은 고전어와 고대 저술의 학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미술과 학예 부흥, 이것이 15세기 이후의 이탈리아 및 16세기 이후 북유럽의 인문주의자가 생각한 <르네상스>였다. 그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 때에는 <르네상스>를 하나의 시대구분으로서 생각하는 견해를 차츰 형성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중세·근세 문제와 관련지어서 <르네상스>를 계몽적인 근대의 개시기(開始期)로 보았다. 볼테르는 기본적으로는 전 세대 이래의 생각을 답습해서 <르네상스>를 고대 학예의 부흥을 가리키는 용어로 취급하면서 <중세>로부터의 탈출을 거기에서 보았고, <계몽>과 <정치사회적인 생활 향상>을 거기에 상정하였다. 또 한 가지 볼테르의 탁견(卓見)은 그러한 동향에서의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사회의 뛰어남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이윽고 시민혁명을 달성한 19세기의 <부르주아지(시민계급)>는 <르네상스>를 근대시민사회의 성립기로서 구상했다. 고대 학예의 학습이라는 한정된 개념으로서의 <르네상스>가 하나의 시대개념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여기서 열리게 되었다.

0<르네상스>를 하나의 시대개념으로서 전체적으로 전망한 사람은 스위스 역사가 J. 부르크하르트이다. 그의 저서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문화》는 1860년에 나왔다. 이 책은 14∼16세기 이탈리아의 하나의 독특한 형태의 사회와 문화를 찾아내려고 한 시론(試論)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시간과 공간의 한정(限定)에 뜻을 부여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라든가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사회에서는> <이탈리아가 아니고서는 어디서>라는 식의 표현법을 곳곳에서 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문화>가 그의 특별한 고찰대상이었다. 이것과 관련시켜서 같은 시대의 프랑스 역사가 J. 미슐레의 입장은 흥미가 깊다. 1855년 《프랑스사(史)》 제7권(1881년 결정판의 재편집에서는 제9권) <르네상스>를 간행한 그는,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하는 관점을 부인하고, 다른 한편에서 <인간과 세계의 발견>을 널리 16세기 유럽사회의 업적으로 찬양하고, 이것을 <르네상스>라고 명명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르네상스>는 고대 학예의 부흥만도 아니며, 부르크하르트의 한정적 고찰 대상이 되었던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사회에 관계된 문화운동만도 아니었다. 유럽사회 근대학의 기운, 이것이 곧 미슐레가 말하는 <르네상스>였다. 이 미슐레적 시점은 볼테르 이래의 계몽주의적 사고의 계보에 속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세계의 발견>은 부르크하르트의 저서 중 한 장(章)의 제목이다. 부르크하르트도 역시 인간과 세계, 개인과 국가라고 하는 근대에 즐겨 쓰는 키워드로 해당 시기의 이탈리아사회를 고찰한 것이므로 거기에는 자연히 고찰자 자신의 시점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은 미슐레의 시점, 나아가서는 19세기 시민사회의 시점이기도 했다. 부르크하르트 이후,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를 논한 책으로는 먼저, J.A. 시몬스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1875∼86)》가 있는데, 제 1 권을 <전제군주들의 시대>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이것은 부르크하르트의 책 제 1 장 <예술작품으로서의 국가>에 대응하고 있어서, 거기서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듯이 시몬스의 저술은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정중히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논조는 오히려 미슐레 또는 G.W.F. 헤겔(《역사철학》이나 《철학사》에서 볼 수 있는 이론)과 상통한다. <르네상스는 근대세계가 존립해야 할 이유를 해명한 것이다>라고 기술한 구절에 의해 그것은 명확해진다. 부르크하르트로부터 시몬스 이후,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똑 같았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가 유럽의 근대를 해방시켰으며, 근대적 가치체계는 모두 그 원천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사상이다.

0<북방 르네상스> 논의, 또는 <북방 르네상스> 논의의 한 측면으로서 <변경의 사상>을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한편에서는 문학사쪽에서 G. 랑송의 《프랑스 문학사(1894)》에서와 같이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계승이라고 보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과 병행해서 변경의 입장을 강조할 때도 <북방 르네상스>라는 표현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주장은 미술사 분야에서 뚜렷하고, L. 쿠라조와 그의 조술자(祖述者)인 I.F. 헤펠트를 들 수 있다. 쿠라조의 《에콜 드 루브르 강의록(1887∼96)》은 개인주의와 자연주의의 특징을 지닌 14세기의 북프랑스 미술이 15세기에 부르고뉴문화권에 흡수되어 네덜란드화파(畵派)를 길러서 같은 세기 후반에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경위를 논하고 있다. 벨기에 헤펠트의 《북방 르네상스와 초기 플랑드르화파(1905)》는 쿠라조의 주장을 정중히 반복한 것인데, 이 저술의 타이틀이 미술사에서 <북방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고 생각된다. 문학사와 사상사 분야에서도 <북방 르네상스>에 대한 해석은 이중성(二重性)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르네상스>가 <인문주의>나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계이기는 하나 프랑스의 H. 오제는 인문주의가 페트라르카에서 시작되는 이탈리아의 현상(現象)에 불과하며, 프랑스는 그것을 수입했다고 말했다. 독일의 L. 가이거는 <르네상스>가 부르크하르트의 정의에 따르는 것이며, <미개한 독일>이 그 후계자가 되었다(《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1882)》)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P. 요아힘젠은 르네상스인문주의를 원(原)이탈리아적인 기운이라고 판정하고, 독일의 인문주의를 독자적인 민족적 기반에 두고 해석할 것을 《인문주의 영향하의 독일에서의 역사 이해와 역사 서술(1910)》에서 주장했다. K. 부르다흐에 의하면 <르네상스>에 대한 자각은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것이었는데, 13세기의 프란체스코회의 신비주의에서 촉발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콜라 디 리엔초의 공화제 로마로의 회귀를 목표로 한 복고운동을 낳았으며, 그 후 세속화 경향을 걸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보헤미아왕가의 궁정을 거쳐서 독일로 분기(分岐)된 <르네상스>에 대한 자각은 종교적 성격을 강화해서 <종교개혁>으로까지 발전한다. <독일 르네상스>는 자연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발상 기반을 달리하고 있었다(《독일 르네상스(1916)》). 영국은, 이런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단순했다. 대체로 <르네상스>라는 발상 그 자체에 냉담했었고, 외래의 여러 자극 중의 하나로 수용했을 뿐이었다. 전 유럽이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0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라는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유럽사회 전체에 관계되는 기운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시간적으로도 또한 자유화가 진행되어 중세세계의 깊숙한 곳까지 <르네상스>의 원천이 끝없이 탐구되고 이것을 <르네상스 원천탐색론>이라고 한다. H. 토데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의 시작(1885)》은 이러한 맥락에서 서술되었으며 책 이름으로 그것은 명확히 밝혀져 있다. <사람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르네상스의 각인(刻印)이 찍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나 움직임을 발견하려고 했다>라고, J.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1919)》에서 말하고 있다. 1913년에 H. 샤마르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기원을 <골(Gaul) 정신>과 <궁정풍(宮廷風) 예절의 마음>에서 찾았다. 《장미 이야기》와 <대수사가(大修辭家)>가 중세의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중개역할을 하였다(《르네상스 프랑스 시가(詩歌)의 여러 기원(1932)》). 또한 쿤노 프랑케의 《루터 이전의 독일문학에서의 퍼스낼리티(1916)》는 12·13세기의 미네젱거에서 <르네상스의 퍼스낼리티>의 최초의 발상을 찾고 있다. 샤마르나 프랑케가 중세문화와 <르네상스>의 접속을 문제시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중세문화 그 자체에서 <르네상스>를 찾아야 한다. 인문주의자 이후의 <르네상스> 논쟁을 전망한 책 《역사적 사고에서의 르네상스(1948)》의 저자인 미국의 W.K. 퍼거슨은 마지막 장의 제목을 <중세주의자의 반역, 중세의 지속으로서 설명된 르네상스>로 정했는데, 요컨대 중세문화에 관한 것이 너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중세에 관한 식견이 급속히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중세문화에서의 <르네상스>적인 동향의 적절한 평가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재료가 갖춰지고, C.H. 허킨스로 하여금 《12세기 르네상스(1927)》를 쓰게 하였다. 미술사에서는 시점(視點)의 이동이 인상적이다. 독일의 W.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1908)》과 H.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 개념(1915)》은 양식의 관점에서 보아 중세미술의 독자성을 밝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척도를 무작정 중세 또는 어떤 시대에나 적용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프랑스의 E. 말은 《프랑스 13세기의 종교미술(1898)》로 시작되는 일련의 저술에서, 중세미술에서의 자연주의 전통에 대한 전망을 개척했다. 중세미술에서 자연주의 문제는 오스트리아의 M. 드보르자크에 의해, 중세의 정신적 상황과의 관련에서 해명되었다(<고딕조각과 회화에서의 이상주의와 자연주의> 《히스토리셰 차이트슈뢰프트》지 게재).

0<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는 그 일부였으나,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만은 틀림 없다. 1975년에 나온 《이탈리아의 이티네라리움》이라는 논문집은 착실한 작업의 보고서로서 이탈리아 인문주의의 연구로 알려진 석학 P.O. 크리스텔라에게 헌정된 것으로 <유럽의 변모라는 거울에 투영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프로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의 변모>를 넓은 뜻의 <르네상스>로 취급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세에서부터 근대로의 지속과 변화의 양상을 그려낸 도면이다. 거기에서 <이탈리아의 이티네라리움>을 볼 수가 있다. 즉 그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자취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의 변모>를 넓은 뜻으로 <르네상스>라고 이해하는 종래의 관행은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의 정신적 상황에 관하여 최근에 <마니에리슴>이라고 하는 개념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집에 기고한 드레스덴의 논고(論考)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프랑스에의 수용(受容) 프로필>이라고 하였고 주로 프랑스의 16세기 인문학자나 문학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라블레·롱사르 또는 몽테뉴 등 종래에 <르네상스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소개되는 일이 많았던 저술가들의 정신을 해명하는 데, <나투라(자연)> <아르스(技藝)> <이미타티오(모방)>, 또는 몽테뉴가 그의 저술의 타이틀로 취했던 <에세(시행 또는 훈련)>, 즉 <마니에라>라고 한 용어가 유효하다고 그는 논의하였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마니에리슴>이라는 개념쪽이 16세기의 정신상태를 해명하는 키워드로서 적절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M. 세르반테스도 그러한 개념으로비추어 보는 데 적합한 대상이라고 말했다. <마니에리슴>은 원래, 미술사의 용어로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미술이 바로크미술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의 미술로서 사용되어 왔다. 그러한 범위내에서는 <마니에라>란, 미적 표현형(型)을 뜻하지만, 이미 G. 바자리는, 이 말을 단순히 그러한 뜻으로서만이 아니라 적어도 예술가의 표현행위의 전체와 관계되는, 말하자면 예술가의 생활방식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16∼17세기의 <유럽의 변모>라는 사태를 관찰함에 있어서는 <르네상스>라는 용어뿐만 아니라 <마니에리슴>이라는 개념에도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르네상스> 개념을 스스로 보정(補正)함으로써 용어의 풍요성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또한 과학사(科學史)의 입장에서 보는 <르네상스> 비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부르크하르트의 책에서 함축된 이래, 자연과학적 인식과 지식의 전개가 <르네상스>의 커다란 노획물로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1929년에 과학사가 G. 사턴은 <과학의 관점에서 보는 경우, 르네상스는 하나의 르네상스조차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르네상스에서의 과학> 사턴 외편 《르네상스의 문명》 수록). 또한 《마술과 경험과학의 역사(전6권, 1923∼41)》의 저자 L. 손다이크는 15·16세기를 과학의 불모시대라고 했다. 이 전망 가운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이다. 오늘날 <르네상스> 논쟁은 거기까지 꿰뚫을 수 있는 시력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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