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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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구로 그린 서양식의 그림. 유채화라고도 한다. 유화의 재료기법과 양식에는 시대나 지역 및 유파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볼 수 있다. 유화는 건성유가 주원료인 용액에 분말안료를 섞어 갠 유화물감을 활용하여 그리는 회화기법, 또는 회화작품이다. |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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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구(油畵具)로 그린 서양식의 그림. 유채화라고도 한다. 유화의 재료기법과 양식에는 시대나 지역 및 유파(流派)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볼 수 있다. 유화는 건성유(乾性油)가 주원료인 용액에 분말안료(粉末顔料)를 섞어 갠 유화물감을 활용하여 그리는 회화기법, 또는 회화작품이다. 건성유란 액체로 된 기름을 아주 엷게 칠하였을 때 공기 속의 산소를 흡수하여 산화되어 점차 점착성(粘着性)을 잃으면서 유연성과 투명성이 있는 고체물질로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식물성 기름이다. 안료의 배합재료, 즉 미디엄(medium)은 그림물감 상태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데 알맞은 유동성을 지녀야 하며 안료 입자를 결합(膠着材와 展色材)시켜야 하는 동시에 화면에서는 색채를 변화시키지 않아야 하고 단단한 그림물감 층을 만들어야 한다. 건성유는 이러한 효과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천연수지(天然樹脂) 등을 혼합하여 다양한 마무리 효과를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테레빈유(油)나 라벤더유 등의 휘발성 정유를 용해유(溶解油)로 사용하면 그림물감의 짙음새 또는 그림물감 층의 두께를 조정할 수도 있다. 유화 미디엄으로 가장 일반적인 건성유는 아마인유·양귀비씨기름·호두기름 등이다. 러시아에서는 해바라기씨기름을 썼다. 15세기 플랑드르에서 건성유가 주가 된 미디엄을 사용하는 기법이 생긴 이래 이 유화기법은 유럽 각지에 퍼져 20세기까지 주된 회화기법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어 왔다. 미술의 재료기법과 양식 사이에는 밀접하고 중요한 관계가 있다. 0유화는 건성유가 미술공예품의 도료(塗料) 재료로 사용될 때부터 시작되었다. 건성유는 1세기 로마의 식물학자 디오스코리데스가 이미 호두기름과 양귀비기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약품으로서의 건성유이다. 미술공예품에 건성유가 사용되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 의사 아이티우스가 쓴 의학서에 있다. 그는 <호두를 빻아 부수거나 압축해서 뜨겁게 끓인 물에 넣어 짜낸 호두기름을, 의약용 외에도 금박공(金箔工)이나 인코스틱 화가(畵家)가 사용하였다. 호두기름은 마른 뒤 금박이나 인코스틱 그림을 오랫동안 보호하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건성유가 보호막인 니스로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름이나 니스에 황색을 섞은 글레이즈(미디엄이 많은 옅고 투명한 피막)를 은박이나 주석박(朱錫箔) 위에 덮어 금박처럼 보이게 한다든지 금박 위에 씌워 금빛을 더 빛나게 하는 기법의 기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글레이즈를 이용하는 기법은 중세에도 있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기나 16세기 독일에서도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P. 우첼로의 《산 로마노의 접전(接戰)》에서는 금 위에 붉은 글레이즈가 씌워져 있다. 이 유성 미디엄에 의한 글레이즈가 어떻게 전통적인 템페라기법과 병용되게 되었는지, 즉 회화기법의 하나로 사용되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유성 미디엄을 분명히 회화재료로 사용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11세기 무렵 화가 에라크리우스의 화론(畵論)이나 12세기 무렵 독일의 수도사 데오필루스의 《제예제요(諸藝提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L. 기베르티는 그의 저서 《조각론》에서 B. 조토가 종종 기름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기록하였다. 플랑드르의 J.D. 반 에이크와 같은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 C. 첸니니가 1400년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기법책》에는 템페라용 아마인유의 조제법, 안료를 아마인유로 섞는 방법, 달걀템페라 위에 유성 글레이즈를 쳐서 그림을 마무리하는 방법 등이 기술되어 있다. G. 바자리는 유화 기법은 반 에이크가 발명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세기에 걸쳐 많은 화가들이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15세기에 이르러 반 에이크형제를 비롯한 플랑드르의 화가들에 의해 유화 기법이 체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화기법의 확립과 급속한 전파는 르네상스의 합리적인 자연관과 싫증나지 않는 사실표현의 추구 등과 방법을 같이하고 있다. 3차원의 입체와 공간, 빛과 그림자, 사물의 질감(質感) 등의 실감나는 묘사는 유화기법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0반 에이크의 유화기법은 다음과 같다. 치밀한 나무결의 떡갈나무 판자를 기초재료로 하여 천연탄산칼슘을 동물성 아교(토끼 등의 皮膠)로 녹인 도료로 바탕칠을 한다. 반들반들하게 연마(硏磨)한 바탕 위에 수성 그림물감(달걀템페라)을 이용하여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구도를 그린다. 건성유의 도막(塗膜)을 전면에 입히고 바탕을 비흡수성으로 만든다. 흰색을 섞은 고유색으로 각 색면을 칠한다. 흰색의 양을 줄이고 유색안료를 약간 많게 해서 제 2 층을 칠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투명한 그림물감의 짙음과 옅음을 바꾸면서 살을 붙여 나간다. 제작은 밝은 부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진행하고 그림물감은 불투명한 효과를 가지는 그림물감층 위에 차례로 투명도를 높인 그림물감층을 덧칠해간다. 그림물감층 전체의 두께는 밝은 부분일수록 얇고 그림자 부분은 두꺼워진다. 인물의 살결 부분에서는 엷은 분홍색이나 갈색의 투명도가 높은 그림물감층을 통해 희게 빛나는 바탕이 비쳐 보이는 효과를 이용하기 때문에 흰색 그림물감은 하이라이트로 약간만 사용한다. 배합재료는 건성유에 수지(樹脂)를 섞은 것으로 보이나 재질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건성유에 수지를 녹여 만드는 유성 니스에 대해서는, 8세기 루카사본(寫本)과 테오필루스의 저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반 에이크의 경질(硬質)의 투명한 그림물감층은, 코펄이나 호박(琥珀)같은 화석수지가 포함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아마도 끓여서 건성화된 아마인유에 경질수지(硬質樹脂)를 섞은 배합재료를 썼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용재(溶材)로 휘발성 정유가 쓰였는지의 여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발삼의 일종을 정유(精油)로 묽게 희석시켜 썼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그림 표면은 반질반질하며 붓을 댄 자리는 거의 보이지 않고, 미묘한 색조 변화는 조화가 잘 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서서히 마르는 건성유를 미디엄으로 이용함으로써 화가들은 세부의 정밀한 묘사와 마무리효과를 위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달걀템페라에 의한 묘사를 훨씬 뛰어넘는 사실표현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투명도가 높은 그림물감층의 광학적 효과는 화면에 부드럽고 깊이가 있는 칠보단장(七寶丹粧)과 같은 번쩍임을 주므로 빛과 질감의 표현에 있어 뛰어난 효과를 내고 있다. 반 에이크의 유화기법은 혁신적이며 탁월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유화의 발명자로 보고 있다. 15세기 플랑드르에서 급속히 발전된 유화기법은 이탈리아에서는 비교적 서서히 진보되었다. 바자리는 A. 메시나가 반 에이크에게 유화기법을 배운 뒤 이것을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전파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이들이 살았던 시절로 미루어 보아 타당성이 없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중엽부터 점차 유화기법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 시대 베네치아파의 대표적 화가인 G. 벨리니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기법 변화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순수한 달걀템페라 기법으로 그렸으나 곧 유성 글레이즈를 병용하게 되었으며, 그 뒤 분명하게 유화라 할 수 있는 기법으로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대기와 빛의 미묘한 뉘앙스가 있는 사실적 묘사의 발전과 일치하는 변화이다. P. 델라 프란체스카는 시대와는 그다지 관계없이 달걀템페라기법과 유화기법으로 그렸으며, 또한 이 2가지 기법을 혼합시킨 기법으로도 그렸다. 그의 화면에 침투되어 있는 맑고 밝은 대기와 빛은 유성미디엄 사용에 의해 실현되었음이 분명하다. 유화의 기법은 이윽고 V. 티치아노에 의해 최고조로 발달되었다. 베네치아에서 유화가 융성해짐에 따라 바탕재료로도 판자보다 마포(麻布)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바탕재료로서의 판자는 최상급 재료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값이 비싸고, 큰 화면에 사용할 만한 판자를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습도로 인해 변형될 우려가 많았다. 이에 비해 마포는 천을 잇대고 기워 크게 할 수도 있고 값이 싸며 운반하기에도 편리했다. 티치아노는 나무틀에 펼친 마포를 바탕재료로 이용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엷은 물감층이 개칠(改漆)되었으나, 1540년대가 되자 밝은 부분에 두껍게 부풀어오른 그림물감이 나타나게 되었다. 후기 작품에서 그는 자유자재로 유화물감을 이용하고 있는데, 얇은 석고(石碍)와 제소(gesso) 위에 대담한 구도를 그려놓고, 화필(畵筆)뿐만 아니라 손가락이나 손바닥을 이용해서도 그렸으며, 고유색은 포기하였다. 미디엄에는 아마인유와 호두기름이 쓰였으며, 투명한 글레이즈에는 수지가 섞여 있었다. 명암의 대비를 강조한 자유분방한 화면은 거의 인상주의적이었다. 티치아노의 기법은 후세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7세기에는 플랑드르의 P.P. 루벤스, 에스파냐의 D.R. 벨라스케스, 네덜란드의 H.R. 렘브란트 등 3사람에 의해 각각 독특한 기법이 완성되었다. 루벤스는 바탕을 희게 칠하고 수지를 섞은 아마인유를 사용한 엷은 칠 그림물감이라는 반 에이크 이후의 전통적인 플랑드르기법에 티치아노풍의 임파스토기법을 결합시켰다. 또한 항상 휘발성 정유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벨라스케스는 가볍고 재빠른 붓의 터치에 의한 임파스토 표현효과를 추구해, 18세기 F.J. 고야를 비롯하여 19세기 E. 마네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른바 보디컬러, 즉 체질(體質)을 많이 포함한 부피가 있는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을 집중해 인물이 부각되는 독특한 명암표현에 역점을 두었다. 17세기에 엷은 칠이나 두꺼운 임파스토, 투명한 글레이즈나 보디컬러 등, 유화기법상의 가능성은 모두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19세기 전반에 걸쳐 유화는 기법적으로 쇠퇴하였다. 재빨리 완성품을 그려낸다거나 고쳐 그린다거나 마음대로 가필하는 등 제작상 편리함이 우선되었고, 재료나 기법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사라져 갔다. 칼슘분필이나 석고를 이용해 바탕칠한 화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대부분의 화가들이 아마포를 사용하였다. 또한 건조제, 즉 시카티프(siccatif)나 휘발성 정유, 레이크(lake)나 바이튜먼(bitumen)이 남용되었다. 그 결과 화면은 투명한 빛을 잃었고 거칠거칠한 무딘 그림물감층이 생겨 시커멓게 변질되거나 갈라졌다. 그리고 산업혁명 성과의 하나로서 1840년대에는 주석튜브에 담긴 그림물감이 나오게 되어, 화가들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분량과 성질을 배합재료와 분말안료를 이용해서 독자적으로 그림물감을 만들어야 하는 것에서도 해방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상파(印象派) 화가들은 회화사에 큰 혁신을 가져왔다. 그들은 집 밖에서 자연의 인상을 직접 화면에 담기 위해 스케치했고, 최종적인 효과를 맨 처음의 터치로 그려내는 새로운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들에 의한 인상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회화의 사실주의가 도달한 귀결일 뿐만 아니라 유화기법 역사의 종말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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