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에 경의를 표한 리베라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벨라스케스의 <데모크리토스>157가 1881년까지 호세 데 리베라의 작품으로 알려진 데서 리베라가 프랑스인에게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리베라는 1591년 스페인의 발렌시아 근교 하티바에서 태어났다.
리베라는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1610년 이후 잠깐 동안 파르마에서 작업했고, 1613~14년경에는 카라바조의 작품이 유행하던 로마에 머물렀다.
1616년에는 당시 스페인이 통치하던 나폴리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화가의 명성을 얻었다.
호세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식으로 주세페라고 불리는 경우가 잦았고, 키가 작았던 탓에 이탈리아어로 스페인 꼬마라는 뜻의 “로 스파뇰레토 Lo Spagnoletto”로 불렸다.
리베라는 모든 작업을 이탈리아에서 했기 때문에, 스스로는 스페인인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화단의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1610년 카라바조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리베라가 이탈리아 바로크의 명암대비화법에서 선두를 달리게 되었으며, 나폴리에서 제작한 그의 작품은 당시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화가들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북유럽에까지 알려졌다.
루벤스와 렘브란트도 리베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리베라의 작품들은 모두 나폴리에 정착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제작한 많은 작품은 주로 종교적 성향이 짙지만 고전적 주제와 풍속화도 많이 다루었고 초상화도 몇 점 그렸다.
그는 스페인 총독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그 대부분이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고용되어 일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국적의 개인 후원자를 많이 갖고 있었다.
리베라의 초기 작품은 인물의 윤곽선이 뚜렷하고 전체적으로 극적인 명암과 함께 테네브리즘 경향을 보인다.
테네브리즘은 ‘어둠’이라는 뜻의 라틴어 테네브라에tenebrae에서 유래한 용어로 극단적인 명암 대비를 사용하여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법을 말한다.
그때까지 카라바조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조된 경향이 있었으며 색채 기법에서는 느슨하면서 표현력이 풍부한 티치아노의 붓놀림을 모방했다.
그는 순교 장면과 죽음의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집착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다소 과장되었다.
그는 <여신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천>136,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1624), <성 안드레아의 순교>(1628), <천상으로부터 트럼펫 소리를 듣는 성 히에로니무스>137,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138 등을 그렸지만 동시대의 일반적인 취향을 벗어난 것들이 아니며 당시의 화가들에 비해 많이 그린 편도 아니다.
1868년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에 감동한 테오뒬-오귀스탱 리보는 1870년에 <사마리아인>139을 그렸다.
리베라의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인물의 개성을 표현한 것으로 이는 매너리즘이 르네상스에서 계승한 이상화된 인물 유형과는 대조된다.
<은자 성 바울로>140, <피에타>148, <성 히에로니무스> 등의 작품에서는 웅장한 형태와 다양한 표현력과 함께 세부 묘사가 뛰어나며 묘사된 인물의 인간성과 내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은자 성 바울로>도 1868년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었는데, 훗날 레옹 보나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1880년에 <욥>141을 그렸다.
마드리드에서 미술을 공부한 레옹 보나의 초기 작품은 고대 스페인 미술의 영향이 뚜렷한 풍속화인데, 1875년부터는 초상화를 그려 더 유명해졌다.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스페인 화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빅토르 위고, 루이 파스퇴르, 앵그르를 비롯한 당시 인물들의 초상을 그렸다.
리베라는 벨라스케스에서 고야에 이르는 스페인 미술의 전통 속에서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개인의 존엄에 대한 경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특징은 <술병을 들고 웃는 주정꾼>(1638), <걸인>143 같은 세속적인 모티브의 작품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는 걸인과 부랑자의 모습으로 그린 철학자 연작144을 통해 바로크 회화의 주제를 확장했다.
이 작품들은 아카데미의 인문주의적인 현학적 태도를 비웃기 위함이었으며 벨라스케스의 반고전주의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걸인>은 1869년 루브르의 2층 특별전시장에 바토와 장-밥티스트 샤르댕의 <은술잔>142, 그리고 몇 점의 스페인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으며 인기가 있었다.
1630년대 중반 이후 리베라의 작품에서는 어두운 색채가 점점 밝아졌다.
명암의 대비는 줄고 형태의 모델링은 부드럽고 대담해졌으며, 그림자 부분에도 보다 많은 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품에서는 대상을 감싸는 대기의 효과가 나타나며 3차원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그의 최고의 작품에서는 이런 특질이 잘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삼위일체>313, <성 카타리나의 신비스러운 결혼>(1648), <성 앤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와 함께 한 성가족>145, <목자들의 경배>146등이 있다.
리베라가 1651년에 그린 <사도들의 영성체>147는 대기와 빛에 충만한 작품으로 진정한 모티브는 등장인물의 내면적 생활이었다.
그는 화면 구성에 숙달함으로써 신속하고 섬세한 붓놀림이 가능했고 거의 인상주의적인 분할주의의 색채를 보여주었다.
이런 방법을 벨라스케스가 이어받았으며, 마네와 피렌체 태생의 미국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에게 계승되었다.
17~18세기 스페인 화가들 가운데 리베라만큼 폭넓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사람은 없었다.
그의 사실주의는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유파에 영향을 주었으며 회화의 기교, 정확한 소묘방법, 성격 묘사의 탁월한 능력, 작품의 정신적 특질 등은 스페인 화가들의 유산이 되었다.
리베라는 나폴리 총독, 마드리드 궁정, 그리고 스페인의 종교 단체가 주문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일부 드로잉과 유명한 작품들을 모사한 판화 외에 그의 작품을 프랑스인이 대하기는 어려웠다.
루브르 궁전 내에 문을 연 프랑수아 뮤지엄이 1793년에 발행한 카탈로그에 4점이 리베라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1800년에 정정했으며, 루아얄 궁전의 오를레앙 소장품들 중에 리베라의 작품이 7점 있다고 했지만 훗날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로마로 유학한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은 나폴리로 가서 리베라의 작품에 감탄하고 그의 양식을 연구했을 것이다.
나폴리의 세르토사 디 상 마르티노 교회에 장식된 <피에타>148는 수많은 프랑스 화가들에 의해 모사되었다.
<피에타>와 <성 빌립의 순교>149는 프랑스인에게 리베라의 어두운 면만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18세기와 19세기 들어 과격한 구성의 그의 많은 작품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