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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생의 탄크레디와 에르미니아 푸생: 프랑스 출신 위대한 바로크 화가 (Nicolas poussin)1594~1665 고전주의 화가이고 예술 활동을 로마에서 했다 ( 파리의 현대적 분위기가 그의 고전적 기질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 푸생은 데생의 형태미를 회화의 생명으로 간주한 화가이다. 색채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한다면 데생은 인간의 이성에 작용하는 요소라고 했다 데생과 형태의 명확함이 곧 이성과 사유의 명증이며, 이는 도덕적 분별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생이 데생의 효과를 회화의 생명으로 삼았다는 것은 작품에서 감각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면서 데생과 엄격한 형태의 완결성을 중심으로 인간이 이성적 사유를 표현하고자 했음을 보여 준다 푸생에 따르면 ,회화가 지닌 최상의 목표는 인간의 숭고한 사유와 고결하고 진지한 인간의 행위를 재현하는 것 이었다. 그 숭고함과 진지함이란 현실에서 가능한 의미가 아닌 ‘이데아’차원에 속하는 관념적 개념인 것이다. 이런 푸생의 관점은 그의 예술이 곧 도덕을 지향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푸생은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반짝이는 색깔같은 감정적이고 일시적이며 사소한 것을 억제하고 차가운 색조를 중심으로 정확한 형태와 기하학적인 화면구성에 역점을 두었다. 이런 데생의 효과는 균형 균제, 조화의 미라는 고전적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 엄격한 의미의 고전주의에 가장 걸맞은 화풍을 가진 이는 푸생이 아닐까, 생각 든다. 예술이 인간에게 끊임없이 도덕적 감화를 주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장대로 영혼을 순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푸생이 그림을 통해 실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생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그림을 감상하고 해독할 수 있는 지식인이라는 특권 계층을 상대로 한 화풍을 추구 했다고 할 수 있다 . 위의 작품 <탄크레디와 에르미니아>는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타미지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이작품은 십자군 원정에 관한 타소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을 근거로 한 것이다.이 작품을 보면 한 병사가 누워 있는데 이 사람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기사 탄크레디 이다 그 위에 한 여인이 칼을 들고 있는데 이 여인이 훌륭한 전사이자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탄크레디에게 반한 사라센의 여인 에르미니아이다. 그리고 뒤에서 다른 병사가 누워 있는 병사를 부축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탄크레디의 종복인 바프리노지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두 민족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이유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국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 사랑은 현재 에르미니아의 짝사랑 인 것이다. 군부대를 열병하던 탄크레디를 숨어서 본 에르미니아가 한눈에 반한 것이다. 탄크레디는 에르미니아아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 그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해 적진에 들었던 에르미니아는 포로가 된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탄크레디의 종복인 바프리노를 만나고 바프리노는 주인의 소재를 알고 있는 그가 이 여인을 탄크레디에게 인도를 약속 한다. 사랑과 연정에 들뜬 마음을 주채하지 못한 채 밤새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이 예루살렘인데 그곳에서 이들이 발견한 것은 두 사람의 시체 였다 한명은 그림의 오른편 중앙에 그려진 자가 사라센기사이며 다른 하나는 탄크레이디였다. 만났으나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들뜬 기대는 물거품이 된다. 에르미니아는 탄크레디의 주검 앞에서 “당신은 죽었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랑에 상처를 주지만 사랑을 죽일 수 없음을 보실 것이라 외치며” 눈물을 흘린다. 허망함에 흘린 에르미니아의 눈물이 탄크레이디의 얼굴에 닿자 기적적으로 탄크레이디가 눈을 뜨게 된다. 죽지 않고 단말마의 고통 속에 있었던 것이었다. 갑옷을 벗기자 출혈이 심했는데 이를 막을 길이 없어 에르미니아가 탄크레이디의 칼을 번쩍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는 자른다. 머리카락으로 출혈을 막아보려는 것, 바로 이 순간을 푸생이 묘사한 그림 이다. 당시 머리카락은 여인들에게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상징 했던 것이다. 출혈이 멈추지 않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붙이면 출혈이 멈춘다는 통설이 있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사랑하는 애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는 가련한 여인의 소망이 보이는 그림이다. 출혈이 멈추자 지원군이 도착해 탄크레디는 구조되고 이들 둘의 관계는 결혼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이 그림을 보면 세 사람이 이루고 있는 구도가 원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시각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완벽한 사랑의 실체를 암시 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 원이란 완전함과 영원한 순환성을 암시하는 것, 이 그림을 보면 빛과 희망의 상징인 하늘이 구름에 뒤덮이면서 그림의 대 부분을 차지하는 갈색의 대지와 맞물린 다. 대지는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잉태를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여기 표현된 대지의 색은 죽음의 빛깔인 것이다. 탄크레디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그러나 하늘 곳곳에 푸른 구원의 빛이 희망을 잃지 말 것을 이야기 한다. 그림에는 두 마리 말이 있다 흰색 말이 에르미니아의 순수한 마음의 색감의 말이며 갈색 말은 탄크레디의 말이다. 땅의 색깔과 같은 갈색이고 죽음의 색이며 갈색말은 저편으로 뛰어갈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승으로 가야하는 운명이라는 뜻인 것 같다. 갈색은 흰색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 다. 흰빛에 순종해야 한다는 암시이고 이 두 마리 말이 사랑의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차갑고 냉정한 푸른빛의 에르미니아의 원피스에 비해 탄크레디의 옷의 붉은색은 생명과 행복의 의미인 것, 보색의 대비가 삶과 죽음의 관한 이들의 갈등과 연관 되어 있는 것 같다. 죽음을 능가하는 위대한 사랑의 힘이 바위에서 피어난 꽃으로 상징 되어 있다. 사랑은 어떠한 역경 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뜻이 되는 것 같다. 에르미니아의 필사적 노력으로 탄크레디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한 여인의 정성에 감탄하고, 결혼하여 행복해진다는 해피엔딩 이야기이다 이 작품을 통해 감각적이며 세속적인 사랑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고결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사유의 과정이 엿 보인다. 정서를 순화시키는 카타르시스로서의 예술작품을 구가했던 화가가 바로 푸생이었다. 푸생의 세계가 이성을 지향했던 만큼 그의 화풍은 지성인의 화풍 즉 특권층을 위한 화풍 이라고 말한다. 그림의 내용을 알지 않고는 그림의 참된 가치를 감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림을 보면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작품을 읽는 것 또한 순간적으로 지나치는 시각적 유희물이 아니라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나름대로 작품 해석을 요약해 보았다. 또한 지순한 사랑 이야기여서 선택을 해 보았다. 색감이나 소재를 통해서도 뜻을 전했던 당시의 화가들의 깊이와 철학을 다시금 느끼며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는 것 같아 회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박미량 -도움글 ‘명화로 읽는 서양 미술사’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