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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이야기

테마로 보는 미술 : 카나가와의 큰 파도 / 호쿠사이

작성자숲향기|작성시간11.04.19|조회수1,2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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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친다. 파도 끝의 흰 포말은 마치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악마의 손가락처럼 위협적이다. 사공들은 배바닥에 몸을 납작 붙인 채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지만 어마어마한 폭풍우의 위용 앞에 인간의 운명은 위태롭기만 하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후지산 조차 수그러든 듯 작아 보이는 이 절경은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채색 목판화 시리즈 [후지산 36경] 중, [카나가와의 큰 파도]다. 이는 서구 세계에서는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이자, 마네와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과 반 고흐, 고갱 등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된 미술품이다. 살아 생전 호쿠사이는 그가 19세기의 유럽 미술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서양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


호쿠사이는 채색 목판화, 즉 우키요에(浮世絵) 전문화가였다. ‘둥둥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1603-1867) 말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대중 문화의 대표적인 매체였다. ‘떠다니는 세상’이란 원래 인간의 삶이 유한하고, 물질은 덧없을 뿐이라는 불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우키요에는 오히려 그처럼 덧없는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 가는 가벼운 인생인 바에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하며, 말초적인 향락과 자극을 추구하는 저자 거리의 산물이다.

 

  • 1 [새로 만들어진 거리의 풍경들] 1825
    니시키에 판화, 12.7cmx19cm,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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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목욕 치장을 하는 여인] 1797년
    니시키에 판화, 20.1cmx9.8cm,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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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일본에서는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상공인이 증가하며 고향에 가족을 두고 홀로 상경한 사무라이들이 모여들면서, 그들을 위한 유희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했다. 거리엔 춤과 노래에 능한 게이샤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유곽이 즐비했고, 스모 경기장은 열띤 응원을 하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가부키 극장에서 울고 웃던 청중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밤을 새워 이야기책을 탐독하는 독자들로 변모했다. 처음에 목판화는 바로 그 유흥업계를 사로잡은 관능적인 미인들과 유곽 여인들의 은밀한 일상을 여과 없이 담은 그림이었고, 가부키 배우와 유명 스모 선수들의 초상화이자, 극장의 포스터였으며, 소설 속의 짜릿한 연애담을 감각적으로 다룬 삽화였다. 18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채색이 가능한 다색 목판화, 니시키에(錦絵)가 발달하면서 우키요에는 회화처럼 독립적인 이미지로 생산되어 대중들의 인기를 누렸다.

 

 

우키요에를 예술의 장르로 끌어올린 호쿠사이


우키요에의 제작 방식은 대단히 단순하다. 화가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판각공이 각 색깔 별로 한 장씩의 목판을 파낸 후, 한 장의 종이에 각각의 목판을 순서대로 찍어내면 된다. 그림에 열 가지 색깔이 쓰인다면, 열 장의 목판을 파내면 되는 식이다. 밑그림과 판각, 그리고 찍어내는 공정은 분야별로 전문가가 나뉘어져 있었고, 오늘날의 출판사처럼 화가와 전속 계약을 맺고, 일정한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공정을 관리하여 판화를 찍어내고 판매하는 공방들이 성업을 이루었다. 출판이 전문화한데다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우키요에는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게들에서 저렴한 가격에 팔려, 라면 한 그릇 사 먹을 수도 있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구입하고 수집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제비와 까치] 1834년
판화, 24.5cmx18cm,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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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하다 코헤지의 유령] 1931년
판화, 25.8cmx18.5cm,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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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새와 벚나무] 1834년
판화, 25.3cmx19cm,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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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시적이고 값싼 오락물로 소비되고 버려지기 마련이었던 우키요에를 현대인의 눈까지도 단번에 사로잡는 세련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들 중 하나가 바로 호쿠사이다.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는 도회적인 삶 속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솔직하게 담아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대범하고 호방한 시선으로 일본의 자연풍광을 그려냈고, 꽃과 동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기발한 상상력으로 보는 이를 오싹하게 하는 요괴와 유령들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하고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작품이 바로 1826년, 그가 육십 중반일 때 착수하여 근 십 년에 걸쳐 완성한 판화집 [후지산 36경]이다. 그는 계절의 변화와 기상 상태에 따라 다채롭게 변모하는 후지산을 여러 방향과 거리에서 바라보고 그 모습을 담았으며, 후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이미지로 풀어냈다. [후지산 36경]은 큰 인기를 끌어, 차후에 10경을 더해 실제로는 46점의 판화가 묶여있다.

 

[맑은 아침의 신선한 바람 또는 붉은 후지산] 1830년~1832년경
니시키에 판화, 판화, 25.5cmx37.9cm,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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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기법의 특성상 우키요에는 치밀한 세부 묘사보다는 대범하게 형태를 단순화한 검은 윤곽선의 드로잉이 주가 된다. 목판 하나에 한가지 색을 발라서 찍어내기 때문에 화면은 대부분 명암의 차이가 없는 몇 개의 선명한 색면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키요에는 서양화에서처럼 입체감과 깊이감을 추구하기 보다는 장식적이고 평면적이다. 이국적인 소재뿐 아니라 과감한 색채와 유려한 형태는 유럽의 미술가들에게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직접 우키요에를 수집하며 유화로 유명 작품들을 모사했고, 고갱 역시 진한 원색과 평면적인 구도, 검고 구불구불한 윤곽선이 주는 장식적인 효과를 활용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회화의 양식을 수립했다.


그러나 정작 호쿠사이는 유럽에서 전파된 서양화의 원근법을 일본화의 전통에 도입했던 실험적인 화가로 평가된다. [카나가와의 큰 파도]에서 화면을 가로질러 수평선을 설정하고, 원경에 위치한 후지산을 근경의 파도보다 훨씬 작게 그려서 거리감을 표현한 것은 일본에는 없던 방식이다. 폭풍이 이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기 만은 맑고 건조하게 느껴지는 청량한 푸른 빛은 프러시안 블루다. 이것 또한 일본 미술에서는 낯선 색감이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압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전 까지, 서구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다만 네덜란드와는 17세기부터 상업적인 교류가 있었고, 네덜란드로부터의 수입품과 함께 실려온 판화를 통해 일본화가들은 서양화의 기법을 배우곤 했다. 결국 우키요에와 유럽 회화는 머나먼 거리와 시차를 사이에 두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모했던 것이다.

 

[시바 지방의 초시] 연도미상
니시키에 판화, 18.2cmx19cm,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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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지방의 카지카자와] 1830년~1832년경
니시키에 판화,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소장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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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우키요에와 유럽 회화


호쿠사이는 넓은 시야로 가까운 경치로부터 먼 원경까지를 아우르는 서양의 원근법을 전통적인 일본의 매체, 우키요에에 적용하여 개성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의 개성적인 화풍은 어쩌면 그의 유난한 성품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여든여덟 해를 사는 동안 그는 30여 차례 이름을 바꾸었고, 그 때마다 그림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러 개의 예명을 쓰는 것은 일본의 미술가들 사이에 예사로 있는 일이지만, 서른 개나 되는 이름을 쓰는 일은 흔하지 않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이름 ‘카츠시카’는 그가 태어난 에도의 동네 이름이고 ‘호쿠사이’는 ‘북쪽의 서재’라는 뜻이다. 그는 스승이나 동료들과 무난하게 지낸 적이 없고, 쇼군 앞에서 치러진 그림 경쟁에서는 길게 펼쳐진 종이에 푸른 붓질을 한번 한 후, 빨간 물감에 닭의 발을 담가 그 위에 풀어 놓았다. 단풍의 명소인 나라의 타츠타강에 붉은 단풍잎이 쏟아져 내린 풍경이라는 것이다. 쇼군은 호쿠사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 1  [늙은이 모습을 한 자화상] 1840년~1849년경
    종이, 붉은 연필, 먹,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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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테라스에서 후지산을 감상하는 사람들] 제작연도 미상
    니시키에 판화,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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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중반, 그는 ‘가쿄로진만시(画狂老人卍)’ 즉 그림에 미친 늙은이라는 이름으로 [후지산 100경]을 완성했다. 그 말미에 호쿠사이는 “나는 여섯 살부터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가 되고 나서 쉰 살이 지나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일흔 전에 한 것들은 모두 쓸모 없는 짓이었다. 일흔 셋에서야 나는 날짐승과 들짐승, 벌레와 물고기의 뼈대를 파악했고, 식물이 자라나는 법을 이해했다.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여든 여섯 즈음에 그들을 더 잘 파악할 것이고, 아흔이 되면 자연의 핵심을 꿰뚫을 것이다. 백 살이 되면 신묘하게 통찰할 것이고, 백서른, 백마흔이 되면 아마도 내가 그리는 점 하나와 획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하늘이 내게 장수의 삶을 주셔서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길 바랄 뿐”이라고 썼다.


틀림없이 그는 오래 살고 싶었다. 여든 여덟의 나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하늘이 내게 십 년만 더, 아니 오 년이라도 더 주신다면, 진정한 화가가 될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그가 유난히 후지산에 집착했던 것도 전통적으로 후지산이 일본인들에겐 신앙의 대상이었던 데다, 불로장생의 영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후지산 36경]과 함께 호쿠사이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가 염원했던 대로, 후지산이 그에게 영생을 준 셈이다.

 

관련링크 : 호쿠사이 작품 더 보기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 소장품 보기

 

 

 

우정아 /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주립대학 (UCLA)에서 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발행일  2011.01.24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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