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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이야기

인상파 아틀리에 / 고갱의 의자 / 빈센트 반 고흐

작성자숲향기|작성시간11.04.19|조회수73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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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만큼 의자를 많이 그린 화가도 없을 것이다. 야외 풍경도 즐겨 그린 고흐이지만, 노란집의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서 작은 그림들도 많이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노란 집을 꾸밀 때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들을 그렸다. 고갱이 도착할 때까지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서 방의 벽면을 장식했다. 그 다음에 고흐는 집배원이나 농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다음에 고흐는 노란 집 주변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자주 가던 카페나 노란 집의 정경을 그린 작품들도 이렇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노란 방에 걸린 의자, 해바라기, 집배원 그림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는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된 카펫 위에 놓인 고갱의 의자는 가스등으로 불을 밝힌 실내와 어우러져서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고갱은 그 의자에 앉아 있지 않다. 대신 노란 책 두 권과 불을 밝힌 촛대가 놓여 있다. 다소 괴이쩍은 분위기마저 풍긴다. 가스등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초저녁이거나 밤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과감한 붓 터치를 활용해서 고흐는 푸른색으로 의자의 그림자를 표현하는 한편, 팔걸이에 비친 가스등의 불빛을 강렬한 노란색으로 강조했다.


의자에 놓여 있는 촛불은 고갱에 대한 고흐의 경외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갱에 대한 고흐의 마음이 일방적이긴 했지만 고갱 덕분에 고흐의 그림에도 큰 변화가 온 것이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고갱 또한 고흐에게 기본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고갱에게 고흐는 갑자기 나타난 구원의 천사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물론 그 존재는 테오와 빈센트라는 이중성을 띠는 것이긴 했지만, 그림을 유일한 자신의 ‘자본’이라고 생각했던 고갱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드문 사람들이 바로 고흐 형제였던 셈이다.

 

[고흐의 의자] 1888
캔버스에 유채, 93x73.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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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1888
캔버스에 유채, 91x72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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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원 조셉 롤랭] 1889
캔버스에 유채, 64x54.5cm, 뉴욕 현대미술관
©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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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그림을 싸게 넘기는 것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고흐가 충고했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고흐는 고갱에게 그림의 판매에 관한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버거웠던 고흐가 이렇게 고갱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표현한 것은 심리학적으로 연구해볼 만한 일이다. 고흐는 고갱으로 인해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고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갱이 근본적으로 이 관계를 교환의 문제로 보았다면 고흐는 교환할 수 없는 우정의 문제로 판단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자신의 그림이 너무 싸게 팔릴까봐 고갱은 노심초사했다. 그림 시장에서 부르는 호가가 그 화가의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헐값으로 자신의 그림이 팔리는 것은 화가에게 재난상황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고갱의 집념은 테오를 만남으로써 불식될 수 있었다. 테오는 그의 가치를 알아주는 드문 화상이었고, 그 뒤에는 빈센트라는 강력한 추천인이 있었다.


테오로부터 받은 선수금 500프랑으로 고갱은 오래 밀린 부채를 탕감할 수 있었다. 이 돈은 고갱의 도자기를 판돈이었다. 아를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갱의 여독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편지에서 그는 노란 집의 환경에 대체로 만족한다는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고난의 삶을 접고 고갱도 화가들의 공동체라는 일시적 평화에 몸을 맡기는 여유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그 시작은 순조롭게 보였다.

 


홀로 타오르는 촛불의 의미는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는 이런 정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홀로 타오르는 촛불은 고갱과 함께 엮어갈 새로운 화가 조합의 앞날을 위한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실내 장식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매일 이 그림을 보면서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고흐의 마음에 차고 넘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갱 역시 고흐 못지않게 자신의 집을 꾸미기를 좋아했다. 원래 떠도는 영혼을 가진 존재일수록 정착에 대한 갈망도 큰 법이다. 화가의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이 그의 삶을 걷잡을 수 없는 격랑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아내와 함께 살 때 고갱은 손수 가구들을 디자인해서 제작하곤 했다. 브르타뉴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작업실을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소재로 삼은 다양한 벽면 장식을 만들어서 치장하곤 했다. 이렇게 어떤 면에서 ‘가정적인’ 두 사람이 만났으니 노란 집은 한층 더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노란 집을 가득 메운 것은 고흐의 그림이었고, 고갱의 그림은 [자화상, 레미제라블] 한 점이 걸려 있었을 뿐이다. 이 불균형성에서 의기투합했던 두 사람의 불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갱의 의자에 놓여 있는 촛불은 그렇게 언제 꺼질지 모를 위태로움을 감추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부서질 관계를 유지시켰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술적 열정이었다. 그 열정이 타오르는 한 둘의 작업은 서로에게 깊은 공감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11.01.06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Bridgeman Art Library, Wikipedia, York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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