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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아를에 온 것은 특별한 계획 때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우연한 결정이었다는 것이 후대 역사가들이 내린 지배적 결론이다. 스쳐 지나가는 카페 모임에서 툴루즈-로트렉이나 드가가 이 지역에 대해 잠깐 언급했을지도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툴루즈-로트렉은 남프랑스 출신이기 때문에 아를을 알고 있었겠지만, 고흐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어쨌든, 고흐는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아를을 거처로 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고흐가 아를로 온 까닭을 따져 묻는다면, 이 지역 풍광이 네덜란드와 비슷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를의 풍경은 고흐를 매료시켰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고흐의 눈에 쏙 드는 자연의 모습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를 역시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습지를 개간해서 만든 넓은 평야 지대를 갖추고 있었다. 배수를 위해 16세기부터 운하를 파면서 형태를 갖춘 아를은 습지로 둘러싸인 지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를이라는 이름 자체가 “습지의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강렬하게 내려쬐는 뜨거운 태양의 고장

광활한 평야에 작열하는 태양은 고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아를의 평야를 “영원함”이라고 표현했다. 고흐는 이 풍경을 배경으로 씨 뿌리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밀레에 깊이 감화를 받은 고흐다운 주제 선택이었다. 고흐가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릴 무렵, 아를의 날씨는 쾌청함 그 자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기후는 온화했다. 이런 날씨가 고흐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씨 뿌리는 사람]이다. 강렬한 태양빛이 인상적이다. 그는 이 그림을 일컬어 “씨 뿌리는 사람과 평야에 대한 연구”라고 지칭했다. 쟁기질되어 있는 밭의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 |
[쟁기질을 끝낸 밭의 풍경] 1889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
[씨 뿌리는 사람] 1889~1890 캔버스에 유채, 80x6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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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고갱이 온 첫날에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고갱의 도착과 더불어 시작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넘쳐 나는 것 같다. 이 밭은 타라스콘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길은 노란 집 옆으로 뻗어 있었다. 이 길 주변의 풍경을 고흐는 1888년에 반복적으로 그렸다. [쟁기질을 끝낸 밭]도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쟁기질을 끝낸 밭]과 [씨 뿌리는 사람]에 나오는 배경은 사실 같은 셈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광경을 담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그림을 선택한 고흐의 인생철학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고흐는 예술행위를 못 다한 목회자의 길과 동격으로 놓았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 씨를 뿌리는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목회자의 마음으로 씨를 뿌리다

그는 유쾌한 심정으로 여름 동안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이 그에게 이 그림은 실패작으로 남았다. 그러나 고흐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을 제대로 그려내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고흐가 본격적으로 고갱의 영향을 받기 전에 내면화하고 있던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결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흐와 고갱을 일방적으로 비교한다면 고갱은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갱은 현실주의자였고, 그런 면에서 고흐를 압도하는 측면이 있었다. 아를 체류 기간 후반에 그린 고흐의 걸작들은 고갱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다. 강렬한 색채와 심적 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분명 고갱의 작품 세계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고흐가 고갱을 만난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이었지만, 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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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풍경에 찬탄했던 고흐와 달리 고갱은 습지로 둘러싸인 저지대의 모습에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고흐는 고갱에게 브르타뉴와 아를의 차이에 대해 물었고, 두 화가는 이 화제를 놓고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고갱은 브르타뉴의 풍경을 훨씬 순수하고 뚜렷하다고 말하면서 남부의 풍경을 주름지고 검게 그을린 것 같다면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고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견해였지만, 그래도 그는 고갱을 신뢰했기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고갱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달라진 환경에 쉽게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갱이 아를의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기대했다. 고흐가 고갱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의 호방한 여성편력도 한몫을 했으니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당시 고갱의 정착을 염려하면서도 새로운 작품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고흐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떠오르는 태양을 새롭게 그리고자 했던 고흐의 실험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열정은 후일 우리에게도 익숙한 걸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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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10.12.16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Bridgeman Art Libra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