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미술이야기

테마로보는 미술: 확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 엘 그레코

작성자숲향기|작성시간11.04.19|조회수577 목록 댓글 0

//

거장이라고 불리는 화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한 사람들이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만큼 특이한 개성을 보여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미술은, 베네치아 화파의 미술을 기초로 한 매너리즘(Mannerism) 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표현적인 회화에는 그런 단순한 분류를 넘어서는 부분이 많다.

 

그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훈련을 받고, 스페인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에는 이 세 나라의 역사 문화적 환경과, 1520년대 이후 이미 주류 전통이자 규범이 되어버린 르네상스 미술을 반자연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매너리즘 미술,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가톨릭을 지키려고 했던 개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 운동 등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두의 조합만으로는, 그가 살았던 16세기보다는 낭만주의의 19세기나 표현주의의 20세기초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의 양식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닮는다’는 말이 있지만 엘 그레코의 경우를 보면, 시대의 무엇을 본받아, 어떤 모양의 성과를 만들어내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독특한 유전자의 힘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 비잔틴 양식의 이콘화가

‘엘 그레코’는 ‘그리스인(The Greek)’이라는 뜻으로, 화가가 스페인에서 활동할 때 얻은 별명이다. 이 말은 이탈리아어 ‘그레코’에 스페인어 정관사 ‘엘’이 조합된 말로, 여기에 그와 관계된 세 나라가 다 들어있다. (스페인어로 ‘그리스인’은 엘 그리에고(El Griego)다.) 남들은 엘 그레코라 불렀지만, 화가는 항상 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를 그림에서 잘 보이는 곳에 그리스 문자로 적어 서명했다. 

 

[성모의 죽음] 1567년 이전
패널에 템페라와 금, 61.4×45cm, 도르미션 교회
시로스 섬 에르무폴리스, 그리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하에 있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20대초에 비잔틴 양식이콘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가, 야망을 펼칠 곳을 찾아 26세쯤에 베네치아로 가서 3년 정도, 그후 로마에서 10년 정도 머물다, 35세쯤에 스페인으로 가서 톨레도에 정착, 그곳에서 거의 40년을 살았다.

 

1983년에 서명이 발견되어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확인된 [성모의 죽음 The Dormition of the Virgin]은 크레타에서 화가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사도들 사이에서 잠든 듯 죽음을 맞는 성모의 모습이라는 주제는 그리스 정교 미술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그 도상과 기법에서 비잔틴 양식을 보여준다. 즉 현세를 초월한 종교적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인물에 양감이나 개성을 나타내지 않고, 현실적인 공간감이나 질감이 드러나는 자연색을 사용하지 않는 것 등이 이 양식의 특징인데, 젊은 엘 그레코도 이러한 규범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판화를 통해 접한 것으로 보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도 눈에 띤다. 그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화가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엘 그레코가 그린 사도들의 동작과 자세는 조금 더 다양하고, 몸을 숙인 예수의 모습은 조금 더 자연스러우며, 천사들의 모습도 보다 유연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을 나타내는 비둘기는 단축법(foreshortening)을 사용하여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졌고, 근경 중앙에 있는 촛대를 반라의 여인상이 받치고 있는 것은 고전 미술의 모티브를 도입한 것이다. 그 촛대에 그의 서명이 들어있는데, 비잔틴의 회화에 서명이 들어가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로,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베네치아와 로마, 서유럽 양식 수업

화가가 크레타에서 베네치아로,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한 정확한 경위와 시기는 알 수 없고, 여러 자료를 참고해 추측을 하고 있는데, 1567년에 베네치아, 1570년에 로마, 1576년에는 스페인에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베네치아에 왔을 때 그곳에는 아직 티치아노가 살아있었고 틴토레토, 베로네제가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그를 알레산드로 파르네제(Alessandro Farnese) 추기경에게 소개한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Guilio Clovio)는 그를 ‘티치아노의 제자’라고 했는데, 그가 티치아노의 작업실에서 배우며 활동을 했는지, 그냥 방문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보고 배운 대가 중 끝까지 존경을 표했던 화가가 티치아노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성전 정화] 1570년경
패널에 유채, 65.4×83.2cm,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그가 거듭해서 그렸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전 정화 Christ Cleansing the Temple] 같은 작품처럼 베네치아와 로마 시기 작품에서는 자주 혼란스러운 공간, 부정확한 드로잉, 번잡한 도상 등이 발견된다. 그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토대로, 서유럽의 화풍을 받아들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오는 길에 파도바, 베로나, 파르마, 볼로냐, 피렌체, 시에나에 들렀고, 그 과정에서 본 작품들 중 코레지오의 역동성과 파르미지아니노의 우아함을 높이 평가했다. 로마에 도착한 직후 파르네제 궁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사제이고 사서이자 추기경 소장품의 큐레이터였던 풀비오 오르시니(Fulvio Orsini)를 비롯한 지성인들과 교류하며 인문주의적, 철학적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페인 사람들과의 교류 기회도 갖게 된다.

 

로마에 온지 2년 후에는 도미니코 그레코(Dominico Greco)라는 이름으로 화가 길드에 등록을 하고 작업장을 마련해 조수를 뒀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탈리아 화가들도 주문을 받지 못해 외국으로 나갈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미술계에서, 그리스 출신 화가가 자기 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교황에게 시스틴 채플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위에 자신이 더 나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제안을 했다가, 이탈리아 화가들의 미움을 사서 로마에서 도망쳐야 했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지만 그가 피렌체, 로마의 화가들과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베네치아 전통을 계승한 색채주의자로 보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바자리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원근법과 비례 등에 대한 수학적 이론으로 그림을 구성하는 방법보다, 색채와 빛을 통해 자연을 모방하는 베네치아식 방법을 선호했다. 바자리가 ‘그리스 방식(maniera greca)’이라고 한 비잔틴 양식은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극복의 대상이었고, 이를 시작한 지오토는 회화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 받았지만, 엘 그레코는 지오토의 미술이 오히려 단순하고 그리스적 미술에 심오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톨레도, 스페인 가톨릭의 중심

엘 그레코는 36세가 되는 1577년에, 마드리드를 거쳐 톨레도에 도착했다. 톨레도는 1561년 펠리페 2세가 왕궁을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 왕궁이 있던 스페인의 수도였고, 스페인 가톨릭과 지식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유럽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해서, 스페인어를 거의 몰랐던 엘 그레코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1563년에는 새로운 왕궁이자 수도원인 엘 에스코리알(Real Monasterio de San Lorenzo de El Escorial)이라는 유럽 최대의 건축물 공사가 시작되어, 이의 장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 간 데도 엘 에스코리알의 작업을 통해 펠리페 2세의 궁정 화가가 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주문한 사람은 로마의 파르네제 그룹에서 사귀게 된 친구와 인연이 있던 톨레도 대성당의 사제장이었다. 대성당에서 사제가 의식용 옷을 입는 장소에 걸릴 예정이었던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The Disrobing of Christ (El Espolio)]은 톨레도에서의 첫 작품이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돌며 오랜 수업을 거쳐 만든 엘 그레코만의 양식이 처음으로 나타난 걸작이다.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려는 장면이다. 이는 복음서에 특별히 기록된 순간은 아니고, 비잔틴 미술에 선례는 있지만 서유럽 기독교 미술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이다. 전경 오른쪽에는 십자가에서 못이 박힐 부분에 구멍을 뚫는 사람이 보이고, 이를 보는 세 명의 마리아가 전경 왼쪽에 보인다. 화면 중앙의 예수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조롱을 당하고 있으며, 이들의 모습은 예수의 옷을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 복음서의 기록을 연상시킨다. 중앙 왼쪽 갑옷을 입은 병사는 관람자를 바라보며 관심을 예수 쪽으로 돌리게 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로마군의 백부장, 혹은 [황금 전설]에서 예수의 피로 잘 안보이던 눈을 치료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군인 롱기누스, 혹은 본디오 빌라도 등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1577~1579년
캔버스에 유채, 285×173cm, 톨레도 대성당.

  

예수 손의 밧줄은, 처형장으로 가던 예수가 지쳐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자 군인들이 예수를 밧줄에 묶어 끌고 갔다고 한 성 보나벤투라의 글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엘 그레코의 그림 중에서는 가장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져 고전적 드로잉 수업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많은 인물들로 화면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한 화면에 모아놓고, 공간 묘사가 명확하지 않은 점 등은 피렌체의 폰토르모나 로마의 로소 피오렌티노가 개발한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이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표정은 엘 그레코가 창안한 것으로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예수와 하늘의 소통은 수직의 구름 기둥으로 표시되고, 그의 희생은 화면의 시각적 중심인 붉은 의상에서 강조된다. 주요 인물 의상의 선명한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은 화면 왼쪽 군인의 갑옷에 반사되어 색채의 화음을 들려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교회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성직자들은 군중의 머리가 예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 복음서에 없는 세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점 등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작품 완성 후 화가와 주문자가 합의해서 가격을 결정했는데, 이 작품의 경우 양자가 생각한 금액의 차이가 4배 정도나 되었다. 결국 둘 사이에 분쟁이 났다. 그 결과 화가는 원하는 가격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을 받았고, 교회와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엘 그레코는 그림 값 문제로 분쟁을 자주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화가가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물건을 제작하는 장인이 아니라, 인문적 지식과 독창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는 신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문자의 수정 요구에도 대부분 응하지 않았고, 가끔은 소송 비용이 그림 값보다 더 들더라도 작품 가격을 낮게 매기려는 주문자에 대항해, 예술적 자유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엘 에스코리알, 궁정화가의 꿈을 접다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1580~1582년
캔버스에 유채, 448×301cm, 엘 에스코리알, 마드리드.


당대 스페인의 주요 후원자 둘 중 하나인 교회와 사이가 안 좋아졌지만, 또 하나의 강력한 후원자인 황제는 그를 주목했다. 펠리페 2세가 그에게 엘 에스코리알의 채플 중 하나의 제단화용으로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aint Maurice]를 주문한 것이다.

 

마우리티우스는 3세기 초 로마에서 테베 군대라고 불린 이집트 출신 군인들의 통솔자였는데, 그 군인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이교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다 참수형을 당했다. 화가는 참수형 장면을 화면 왼쪽 중경에 배치하고, 전경에는 장군과 동료 군인들이 토론하고 있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이 그림에서도 여러 시간이 합쳐져 있다. 성인은 전경에서 대화하는 모습으로, 중경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고, 손을 모아 기도하고, 목이 잘려 누워 있는 모습으로 한 화면에 네 번이나 등장한다. 그림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순교의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에 대한 토론이 보여주는 정신적인 측면이다. 순교의 당사자도 사건에서 초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런 비현실성, 초월성은 엘 그레코가 여기서 처음 사용한 창백한 파랑을 중심으로 한 비자연적인 색채로 인해 강화된다.

 

이 그림 역시 주문자인 황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황제는 그림 값을 지불하고 작품을 인수하긴 했으나 이를 계획했던 제단에 걸지 않았고, 제단화는 다른 화가에게 의뢰했다. 순교 장면이 중경으로 밀려난 것과 함께, 전경 군인들 사이에 당대 인물들의 초상이 포함되어 있는 사실도 황제를 불편하게 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왼쪽의 군인 얼굴도 당대인의 초상이고, 그는 당시 톨레도에서 제작된 갑옷을 입고 있다. 이렇게 엘 그레코는 그의 종교화에 당대의 현실 세계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그가 그리는 초월적인 세계가 관람자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물리적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공존

엘 에스코리알 입성의 야심을 가지고 제작했던 작품이 주문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면서, 궁정화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주요한 두 후원자의 눈밖에 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40대에 접어들었고, 1578년에는 아들 호르헤 마누엘(Jorge Manuel)도 얻었다. 아들의 어머니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톨레도에 정착할 결심을 하고 작업장을 마련하여 톨레도와 인근의 작은 교회, 개인들의 주문을 받아 작업을 했다.

 

[십자가의 예수와 두 기증자 The Crucifixion with Two Donors]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제작 연도와 본래 설치된 자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화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예수와, 예수의 희생에 대해 명상을 하고 있는 성직자와 귀족이 보인다. 먹구름이 낀 하늘 외에 배경이 되는 공간의 묘사는 없다. 예수는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기증자가 나타내는 물리적인 세계와, 고통을 초월한 예수가 보여주는 영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아마도 제단 뒤에 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작품은, 그림 속 사제가 제단 앞에서 성찬 예배를 진행하는 실제 사제와 같은 키를 갖게 걸어 두었을 것이다. 그림을 현실의 공간과 연결시켜 종교적인 초월성을 더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려는 이와 같은 시도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Burial of the Count of Orgaz]에도 이어진다.

 

이 그림은 그가 크레타에서 그린 [성모의 죽음]처럼 상하 두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래는 장례식과 입관 장면, 위는 그의 영혼이 올라간 천상의 모습이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14세기에 살았던 오르가스의 백작 곤살로 루이스(Gonzalo Ruiz de Toledo)다. 그는 생전에 선행과 기부를 많이 했고, 장례식 때는 성 스데반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나타나 매장을 도왔다고 한다. 이상적인 기독교 기사로서 갑옷을 입은 백작을, 자신의 순교 장면이 그려진 옷을 입은 스데반과 주교관을 쓴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으로 옮기고 있다. 그의 영혼은 화면 중앙의 천사의 손에 의해, 산도를 닮은 구름 사이의 길을 통해, 천상으로 밀어 올려진다. 그곳에선 심판 때 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탄원을 올리고 있다.


[십자가의 예수와 두 기증자] 1580년경
캔버스에 유채, 260×178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모든 것이 기체로 이루어진 듯한 천상 세계의 성인과 천사가 긴 인체비례를 가진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것과 대조적으로, 현실세계를 그린 그림 하단의 인물들은 사실적인 비례와 디테일로 묘사되어 있다. 하단 장면의 사실성을 높여주는 것은 등장 인물의 얼굴이 당대 톨레도의 생존 인물들의 초상이라는 점이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는 이 그림을 주문하여 백작의 후손들에게 선조가 약속한 교회에 대한 기부를 상기시키려고 한 교회 사제가 있고, 성 스데반의 위쪽에서 관람자쪽을 바라보는 것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년
캔버스에 유채, 480×360cm, 산토 토메 교회, 톨레도.

 

 

이 그림은 산토 토메(Santo Tomé) 교회의 입구 오른쪽, 백작의 실제 무덤 위에 그려져 있어, 그림의 공간과 현실 공간이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실물보다 약간 큰데, 무덤으로 인해 거리가 생기기 때문에 실제로는 실제 사람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백작은 16세기에 톨레도에서 제작된 갑옷을 입고 있어, 관람자가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에 그림 밖 관 속으로 내려지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전경에서 관람자를 그림 속 사건으로 이끄는 아이는 화가의 아들이다. 소년의 손은 사건을 주목하라고 ‘가리키는’ 동시에, 선행을 베풀고 교회에 기부를 하면 이런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대조되는 가톨릭 특유의 것으로, 엘 그레코의 종교화 도상은 대부분 이런 반종교개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초상화가, 지식인 화가.

[안토니오 데 코바루비아스] 1600년경
캔버스에 유채, 67.5×57.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엘 그레코가 종교화 다음으로 많이 그린 것은 초상화다. 베네치아 시절부터 그는 초상화로 이름이 있었고,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성공 후에는 초상화 주문이 더 많아졌다. 그는 사후에 오랫동안 무시되고 잊혀진 작가가 되어서, 그의 작품은 스페인 바로크 미술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스페인 바로크의 대표화가 벨라스케스는 엘 그레코의 초상화, 특히 그 즉흥적인 느낌을 높이 평가했고 몇 점을 소장하고 있기까지 했다. 엘 그레코는 궁정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족이나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 주로 그와 교류가 있었던 예술가나 학자, 성직자 등을 모델로 삼았는데 [안토니오 데 코바루비아스 Antonio de Covarrubias]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사람은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오른쪽에도 옆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시절 톨레도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안토니오는 법학자이자 골동품연구가, 철학자, 시인, 그리스 연구자였다. 그는 펠리페 2세의 고문이었던 형 디에고와 함께 트렌토 공의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580년대에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 고향 톨레도로 돌아와 대학의 학장을 맡았고, 아내가 죽은 후에는 사제 서품을 받고 톨레도 대성당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엘 그레코를 알게 되었는데, 화가는 그를 ‘자연의 기적’, ‘우아한 웅변가’, ‘한없는 친절과 인내를 지닌 자’와 같은 말로 칭찬했고 그와 그리스어로 대화하며 친교를 나누었다. 그는 화가를 주변의 다른 지식인들에게도 소개시켜 주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감정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다. 화가의 성격에도 이런 이중적인 면이 공존했던 듯, 그는 어느 때는 군주같이 화려하게 살다가 또 다른 때는 빚에 쫓기기도 하는 등 생활이 무절제했다고 한다. 그는 극단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는 한편 당시에 주변에서 ‘철학자’로 불릴 만큼 지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미술에 대해 저술도 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지 않고, 가지고 있던 책에 주석을 달아 놓은 것으로 그의 생각을 일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가 소장했던 책들은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씌어진 미술, 신학, 문학, 철학, 역사 관련 도서들이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톨레도에 많았던 종교 단체나 길드에 가입한 기록은 없고, 스페인 문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없다. 그는 미술 일반에 대한 이론화와 자기 작업에만 관심을 가졌던 개인주의자였다.

 

엘 그레코의 초상화는 보통 [안토니오 데 코바루비아스]처럼 무채색의 배경에 가벼운 붓터치로 간소하면서도 섬세하게 인물의 성격을 잡아낸 것이 특징이다. 이 그림 속에서 물기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귀 먼 학자의 모습에서도 그런 효과적인 경제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와 대조되는 [추기경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 A Cardinal (Fernando Niño de Guevara)]은 엘 그레코 초상화에서 여러가지로 이례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높은 위치의 성직자를, 화려한 배경과 색채의 전신상으로 그린 것은 그의 초상화 중 이것이 유일하다.

 

그림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모델의 신원은 확실치 않으나, 다른 초상화 등을 통해, 1599년부터 1602년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이끌었던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사각모(biretta), 번들거리는 실크 망토(mozzetta), 레이스단이 달린 흰 의상(rochet)과 의자 팔걸이를 쥐고 있는 왼손 등이 모두 그를 한 마리의 이국적인 맹금 같아 보이게 한다. 배경이 반은 금빛 문직(brocade), 반은 사각형으로 구획된 닫힌 문으로 나뉜 것, 바닥의 대리석 문양에서 원근법의 왜곡이 있는 것 등도 이 초상화에 기이한 불안감과 긴장감을 주고 있다.

 

이런 인상을 강화하는 것은 그의 시선을 매처럼 강렬하게 만들고 있는 안경이다. 이때는 코 안경 정도를 필요할 때 잠시 사용하던 시절인데, 동그란 테의 안경에 끈을 매달아 귀에 걸은 것과 그런 차림으로 초상화의 모델이 된 것은 진정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 기술 발달을 적극 수용하는 모델의 진취성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무자비하고 잔인한 종교재판관과 관람자 사이의 거리감을 만드는 장치로 보는 이도 있다.

 

티치아노의 [교황 바오로 3세와 그의 조카들]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서 엘 그레코는 티치아노 못지 않은 색채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화가는 자세히 보면 아주 즉흥적이고 경제적인 터치로 표면 질감의 차이와 화면의 호사스러운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성격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추기경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 1600~1601년
캔버스에 유채, 170.8×10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주관적이고 표현주의적인 풍경화

[톨레도 풍경] 1597~159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1.3×108.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엘 그레코는 제작 경위가 확실치 않은 두 점의 풍경화를 남겼는데 모두 톨레도를 그린 것이다. 그 중 하나인 [톨레도 풍경 A View of Toledo]에서 화가는 톨레도의 랜드마크인 대성당과 왕궁이었던 알카사르(Alcázar), 도시를 감싸고 있는 타호(Tajo)강 등을 재배치하여 주관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풍경화는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상징적 도시 풍경(emblematic city view)이나 17세기 네덜란드 등에서 그려지던 풍경화와 완전히 다른 양식으로, 화가의 인상과 기분의 풍경이다. 비슷한 예를 찾자면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 그린 풍경화를 들 수 있는데 그런 작품과 비교해도, 이 작품의 병적인 불안감과 신비감은 독보적이다.

 

이런 느낌을 강화하는 것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인데, 이를 플리니우스가 [자연사]에서 “아펠레스는 천둥, 번개 같이 그림에 담을 수 없는 것도 그렸다”라고 쓴 부분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엘 그레코는 검은 구름이 덮여 있거나 밤하늘 같아 보이는 배경을 자주 사용했는데, 그것이 꼭 흐린 날이나 밤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과 같이 횃불이 등장한 명백한 밤 장면의 경우도, 인물들은 횃불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고 있다. 이러한 인물 자체의 빛은 말기작으로 갈수록 점점 밝아지기 때문에 어두운 배경도 더 자주 등장한다.

 

[라오콘 Laocoön]은 엘 그레코가 고전 신화를 주제로 삼은 유일한 작품으로 역동적인 구성, 회화적이고 유연하며 표현적인 붓터치, 두터운 의미층 등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톨레도 풍경]처럼 제작 경위는 알려진 것이 없고, 화가가 죽을 때까지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의하면 라오콘트로이의 사제로, 시민들에게 그리스인들이 두고 간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가, 그리스를 돕던 미네르바가 보낸 뱀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었다.

 

[라오콘] 1610~4년경, 캔버스에 유채, 137.5×172.5cm,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라오콘을 주제로 한 헬레니즘 시기의 조각은 16세기 초에 로마에서 발굴되어 명성이 자자했는데, 엘 그레코는 이를 자기식으로 다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사건의 배경을 트로이가 아니라 톨레도로 바꿔서, 이 이야기가 당대 톨레도인들에게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려고 했다. 그 목마에서 나온 그리스 군인들 때문에 결국 멸망하고 만 트로이의 유민 중 텔레몬(Telemon)과 브루투스(Brutus)가 톨레도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트로이와 톨레도가 아주 무관한 것도 아니다.

 

라오콘은 사려, 용기, 현명한 조언, 무시당하는 예언자의 목소리 등을 상징하기도 하고,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이교도판 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신의 섭리에 도전하다가 천벌을 받는 자의 실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엘 그레코의 라오콘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관련해서 이단과 부도덕의 위험을 경고하는 톨레도 성직자들을 나타낸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 1558년부터 1576년까지 톨레도 대주교를 지냈던 바르톨로메 카란자(Bartolomé Carranza)는 톨레도 시민들에게 이단의 위험에 대해 경고를 했지만 자신이 종교 재판에 희생되었다.

 

그림의 오른쪽 부분은 미완성인데 현재는 머리가 셋 보이지만 두 명의 남녀로 파리스와 헬렌, 혹은 아폴로와 아르테미스, 포세이돈과 카산드라, 아담과 이브 등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불꽃 같은 인물들, 독보적인 상상력의 장관

[목자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는 화가가 자신의 무덤이 들어갈 톨레도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Santo Domingo el Antiguo) 교회의 가족 채플에 걸어 두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곳에 걸 그림의 주제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선택한 것은 ‘신의 어머니(Theotokos)’를 뜻하는 그의 이름 테오토코풀로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엘 그레코의 작업장은 그의 아들을 포함한 제자들의 손으로 그의 이전 작품들의 복제화를 많이 만들어냈는데, 이 작품은 화가 자신의 손에 의해 그려져 그의 후기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화가 특유의 어두운 배경에 성가족과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목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 위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씌어진 띠를 들고 있는 천사들이 날고 있다. 빛의 원천이자 구성의 중심은 아기 예수이나, 등장 인물 모두가 불꽃처럼 스스로 선명한 색채의 빛을 발하고 있고, 그 점에서는 지상과 천상의 차이가 없다. 같은 주제로 그린 이전 작품에서 발견되는 균형 잡힌 인체 비례, 조화로운 색채, 이해 가능한 공간 표현에 대한 관심이 이 그림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은 육체의 무게나 질감을 갖고 있지 않은, 불타는 기체와도 같은 모습이다. 엘 그레코 회화에 충만한 운동감은 무게를 가진 고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아니라, 흔들리며 타오르는 불꽃이 만들어내는 상승의 느낌이다. 화가는 이로써 완전히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시신이 안치된 채플에 놓인 [피에타]와 비교되곤 한다. 티치아노가, 죽은 예수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은 것처럼, 엘 그레코도, 전경에서 무릎 꿇고 있는 목자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 넣었다. 작품이 설치된 곳과 화가의 관계 또한 유사한데, 티치아노가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각인시킨 [성모의 승천]이 있는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에 묻힌 것처럼, 엘 그레코도 톨레도에서 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제단화가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에 묻히려고 한 것이다.


 

[목자들의 경배] 1612~1614년경
캔버스에 유채, 319×180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바로크 미술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였던 그는 18세기 계몽주의 맥락에서 ‘광기’의 화가로 언급되기도 했다. 19세기 낭만주의와 함께 그의 작품과 천재성이 재발견되었으나, 그의 화풍을 광기나 병적인 상상력과 연결시키는 시도는 여전히 존재했다. 20세기에는 그가 정신적인 질병이 아니라 시각적 질환 즉 난시를 앓고 있었다는 설도 나왔다. 19세기 이후 전위적인 화가들은 그의 독보적인 상상력이 보여주는 장관에 매료되어 그를 자신들의 선구자로 생각했다.

 

그는 당대나 가까운 후대의 어느 누구와도 다른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기 때문에 그 원천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학자들의 연구가 많았다. 그리스인으로서의 엘 그레코에 초점을 맞추는 학자들은 그의 회화가 가진 추상적인 표현성을 비잔틴 미술의 영향으로 설명한다. 스페인 화가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의 종교화를 스페인의 반종교개혁 운동, 특히 아비야의 성 테레사(St. Teresa of Avilla),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등 스페인 가톨릭 신비주의자의 사상과 연관시킨다. 그를 당대의 종교적 이슈에서 한걸음 떨어진 이탈리아적 화가로 보는 입장도 있다. 예술과 지식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철학적인 화가였던 엘 그레코는, 자연을 연구해서 대상의 지각을 그림에 옮기고, 그 작품에서 시각적 아름다움과 생기를 만들어 내는 형식을 찾는데 몰두했다는 것이다.

 

2003~4년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대규모 엘 그레코 전시가 열렸으나, 엘 그레코의 주요작품들은 이동이 불가능한 것이 많고, 그는 자기 작품의 프레임 조각도 함께 만든 경우가 많아 그의 진면모를 보려는 사람들은 마드리드와 톨레도에 갈 수밖에 없다. 특히 톨레도는 도시의 시계가 엘 그레코의 시대에서 멈춘 듯이, 건물과 길은 고풍스럽고 그림은 여전히 선명하게 빛난다.

 

관련링크 : 통합검색 결과 보기

 

 

 

김진희 /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발행일  2010.11.19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그리스 도르미션 교회, 톨레도 대성당, 엘 에스코리알, 산토 토메 교회, 루브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프라도 미술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