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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 참깨 크래커의 티비 광고를 보고 한참을 웃은 적이 있다. 밀레의 [이삭줍기]가 걸려있는 미술관에서 청춘남녀가 크래커를 먹으며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 속 여인들이 튀어나와 바닥을 기다시피 엎드려 다니며 떨어진 참깨를 일일이 주워 모으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아까운 깨를 흘리지 말자’는 궁상맞은 나레이션이 흐르며 광고가 끝난다. 글자 그대로 ‘깨알 같은’ 먹을 거리를 줍기 위해 상큼한 젊은 커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인들의 진지한 모습이 사람을 웃기는 광고였다. 실제로 [이삭줍기]의 주제는 이처럼 지지리도 가난하고 빈곤한 모양, 즉 ‘궁상’이다. 궁상스럽기 그지없는 그림이 ‘추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크래커의 광고와 그 포장지에 등장했다니 무척 기발한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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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이삭을 주워가도록 허락받은 빈농들
 19세기 프랑스에서 이삭줍기란 농촌의 극빈층에게 부농이 베풀어주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농장주가 빈농으로 하여금 추수를 하고 난 뒤에 들판에 남은 밀이삭을 주워가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이들의 숫자에 비해 남아있는 곡식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삭줍기는 늘 엄격한 관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삭을 줍는 세 여인 뒤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말을 탄 보안관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삭줍기란 그야말로 등골이 빠지게 고된 노동이다. 남보다 한 알갱이라도 더 주워 모으려면 잠시라도 허리를 펼 여유가 없다. 그러나 하루 종일 허리가 휘도록 이삭을 주운 들, 빵 한 덩어리어치의 밀을 얻을까말까 한 정도니, 그림 속 여인들의 처지는 도시로 치자면 행인이 던져주는 동전이나 길거리에 버려진 음식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걸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마치 땅 속으로 푹 꺼져버릴 듯 몸을 낮춘 여인들의 자세가 바로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그녀들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거친 옷에 누덕누덕 기운 자리는 선명하게 눈에 띄지만, 온종일 단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을 것처럼 엎드린 그들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그녀들이 등지고 선 지평선에는 수레가 터져나가도록 풍성하게 밀단을 쌓고 떠날 채비를 하는 마차가 있다. 밀레의 [이삭줍기]는 이처럼 처절한 빈곤과 넘치는 풍요가 잔인하리만치 가깝게 공존하는 농촌의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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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브르통 [이삭줍고 돌아오는 여인들] 1859년
캔버스에 유채, 90cmx176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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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857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살롱이란 기본적으로 도시의 부유한 이들을 위한 여가 공간이다. 당시의 도시민들이 기대했던 농촌의 풍경은 밀레보다는 그 2년 뒤에 발표한 쥘 브르통의 [이삭 줍고 돌아오는 여인들]이 더 잘 보여준다. 브르통은 이삭을 줍고 난 여인들이 표지석에 기대선 채 마감을 알리는 보안관의 구령에 맞추어 들판을 떠나는 장면을 그렸다. 젊은 여인을 중심으로 어린 아이와 노파가 풍성한 곡식을 머리에 이고, 혹은 품에 가득 안고 줄을 지어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는 오히려 들뜬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질 뿐, 처참한 빈곤과 고단한 노동의 흔적은 없다. 세밀한 풍경 묘사와 지방색이 완연한 여인들의 의복 아래에 불편한 진실을 감추어 둔 브르통의 작품에 대해 당대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사실주의의 정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잊혀진 땅의 진실
 풍요로운 들판과 성실한 농부들이 있는 농촌이 바로 당시의 도시 부르주아가 간절히 원했던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당시의 농촌은 이미 거대 자본을 소유한 지주들이 저임금의 인부들을 고용하여 대규모 경작을 경영하는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과거의 농부들은 극빈층 노동자로 전락하여 도시의 부랑자로 떠돌거나 일굴 땅이 없는 빈농이 되어 ‘사회 불안 세력’을 형성했다. 이미 1848년의 2월 혁명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정치의 무대에 드러난 적이 없던 그들,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이 실제로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하나의 권력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회주의는 아직까지 조직적인 운동으로 정착하지는 않았지만, 철학과 종교, 예술계에서는 사회를 동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빈곤’에 대한 인식과 진지한 성찰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 파리와 브뤼셀, 쾰른과 런던 등을 배회하며 [자본론]을 완성한 칼 마르크스가 바로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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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한 농촌의 고단한 일상을 그린 밀레의 그림은 폭력적이었던 혁명에 가슴을 쓸어내린 파리 살롱의 관객들에게는 어딘가 불편한 그림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밀레가 다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 혹은 불안만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실제로 농촌 출신이었던 밀레는 성실한 노동에 정직하게 보답하는 고귀한 자연의 섭리, 산업화의 물결 속에 잊혀진 땅의 진실을 작품 속에 담고자 했다. 들판을 부드러운 황금빛으로 물들인 석양과 이를 등지고 선 여인들의 몸놀림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육중한 존재감이 있고, 묵묵하게 땅을 더듬는 그들의 손길에는 위엄이 배어있다. 이삭줍기는 물론 당대의 처참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밀레는 홀홀단신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이삭을 주워 모았던 구약성서 속의 신실한 여인 룻을 암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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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보다도 더 잘 알려진 [만종] 또한 밀레가 종교를 늘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텃밭에서 감자를 캐던 농부와 아내가 마을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만종의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드린다. 모자를 벗어 양 손에 모아 쥔 남자와 머리를 깊이 숙인 아낙은 시대와 종교를 초월한 의미, 자연을 존중하는 고귀한 노동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밀레의 [이삭줍기]는 누구나 다 아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티비 광고에도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밀레의 인기는 지금보다는 1970-80년대가 전성기였다. 그 즈음, 액자에 고이 모신 [이삭줍기]의 복사본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좀 더 부유한 가정에는 [이삭줍기]가 수놓인 커다란 카펫이나 태피스트리가 거실 한 가운데에 놓여있곤 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뒤에 두고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이들이 많던 시절이다. 고단하기만 했던 농사일이지만 지나고 나면 그리운 고향의 정취를 바로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미묘한 경계 사이에 놓여있던 밀레의 작품이 되살려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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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우정아 /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주립대학 (UCLA)에서 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발행일 2011.03.07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