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몇몇 화가들이 모델을 더이상 상류층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고 하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술에서의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가난한 인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요인물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75)가 가난한 농부를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낯익을 것입니다. 밀레는 시골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1857년에는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을 그려 농부들의 삶에 숭고함이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의 이러한 점은 1830년대와 40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그림과 조각에 반영시킨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1808-79)와 더불어 20세기에 출현한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회화의 선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 1857, 유화, 83-111cm.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므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를 가리켜 ‘농부 화가’라고 불렀습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손을 크고 뭉툭한 형태로 묘사했습니다. 밀레 작품의 특징은 강인한 조각적 형태와 인물의 뚜렷한 윤곽입니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묘사하는 데 밀레를 추종할 화가는 없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들의 자세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리고 일하느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보입니다. 여인들 뒤로 빛을 가득 품은 추수 장면은 흰색이 섞인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경이 보다 어둡고 침침한 색조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무거운 짐이 실린 수레와 커다란 건초더미 그리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앞에 놓인 한 줌의 낟알 사이에도 날카로운 대비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멀리 오른편 농장 건물 앞에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말에 타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줍는 여인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배경의 부유한 농장과 전경의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바르비종파란 명칭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는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가난을 이기지 못해 1846년 루소가 1849년에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했습니다. 많은 풍경화 화가와 동물화 화가들이 그들을 좇아 이 마을에 모여들었습니다. 이 마을에 모여든 화가들 대부분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건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와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풍경화였습니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습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위풍당당한 자연의 풍경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했습니다. 영국 화가 컨스터블이나 터너와는 달리 그들은 빛과 색의 효과나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풍경화가 프랑스의 풍경화보다 훨씬 진보적이었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루소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과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 반면, 밀레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사는 미천한 농부들의 고귀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미술사적 의의는 순수하고 객관적인 풍경화를 프랑스의 정통 장르로 확립하는 데 이바지한 점입니다.
1850년을 전후하여, 쿠르베의 작품에서 보았듯이, 화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주제를 그리는 대신, 일상 주제에서 가져온 다양한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밀레는 가장 빈곤한 계층 사람들이 겪는 고된 노동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막바지에 접어든 추수의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화면의 배경 오른쪽에 보이는 농부들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입니다. 농부들은 말을 탄 감독의 지휘 아래 곡식을 모두 수확했습니다. 짐수레는 일꾼들이 실어놓은 짐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 보이고, 들판에는 몇 개의 건초가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화면 왼쪽의 건초더미 두 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묘사되었으나 보다 멀리 놓인 나머지 건초더미들은 희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추수의 규모가 크다는 걸 암시하며, 올해는 풍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면 앞쪽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풍요로운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농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아 추수가 끝난 후 들에 남아 있는 낟알들을 주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오로지 손으로 일일이 주워야 하는 고된 노동입니다. 게다가 먼저 추수한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곡식을 수확한 뒤 그루터기만 남겼기 때문에 이 가난한 여인들의 현실은 우울하기만 합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곤궁함을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그려진 그 해 1857년 살롱에 전시되면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1857년이라면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의 기억이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184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입헌 군주로 즉위했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성립했습니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진압되었고, 마침내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이삭줍는 사람들>이 전시되었으므로 몇몇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정치적 항의라고 해석했습니다., 2월 혁명에 대한 밀레의 시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복합적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밀레가 1852년과 53년에 그린 그림들에는 이삭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절적으로 묘사되었고, 행복한 표정의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분위기가 밝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에는 선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밀레의 의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실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밀레의 작품은 주제와 양식으로 인해 빗발치는 비난을 초래했는데, 정치적 혼란기에 영웅을 그리는 대형 캔버스에 농부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식적으로 그의 작업이 거칠고 완결되지 않다는 공격을 종종 받았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과장되었으며, 색채는 따듯하고 순박하며 채색은 두텁게 표현되었습니다. 세밀한 부분들을 제거한 그의 양식은 훗날 신인상주의의 리더 조르주 쇠라와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