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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는 19세기 파리라는 도시에 보내는 화가들의 열렬한 찬사나 다름없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거대한 도시 재건 사업으로, 중세로부터 내려온 비좁은 거리와 옛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말끔하게 포장된 대로가 도심을 관통하고 양 옆으로 고층건물과 눈부신 가로등이 즐비한 근대 도시 파리가 탄생했다. 인상주의자들은 일상을 영위하는 장소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볼거리이자 오락의 장소가 된 화려한 도시를 밤낮으로 누비고 다니며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모네는 쉴새 없이 오고 가는 마차들과 인파가 뒤섞여 북적이는 대로를 활보했고, 르누아르는 새롭게 단장한 강변 유원지의 카페에서 발랄한 오후를 보내곤 했으며, 드가는 한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힌 공연장을 드나들었고, 마네는 다채로운 쇼가 펼쳐지는 바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카사트와 모리조는 바로 그들의 동료 화가였다. 그러나 탁 트인 대로를 걷는 일, 카페에서 한담을 나누는 일, 바에서 술을 마시는 일, 그리고 야간 공연을 즐기는 일은 양갓집 부녀자인 카사트와 모리조에게는 철저하게 금지된 것들이었다.
가정이라는 공간에만 묶여 있었던 인상파 여성화가들

카사트와 모리조가 그나마 미술 교육을 받고 화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카사트의 경우 반드시 결혼으로 생계를 보장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집안에 태어난 덕분이고, 모리조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랬듯이 취미로 그림을 배우다 마네의 동생과 결혼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조류를 가까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권위있는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그나마 그들이 동료 화가들과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곳은 미술관뿐이었다. 결국 여성이자 화가인 그들이 주로 머무는 곳은 여전히 가사와 육아만이 일어나는 곳, 집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카사트와 모리조는 ‘인상주의자’라는 같은 명함을 갖고 있었더라도, 다른 화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시각적인 경험을 가질 수 밖에 없었으니 그들이 다루는 주제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