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생라자르 역>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중에서
모네는 아르장퇴유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궁핍했는데 1876년의 수입이 12,313프랑으로 1873년 이래 가장 수입이 많았지만, 지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 빚은 계속 늘어갔습니다.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후원자가 거액을 선뜻 내놓지 않는 한 우리는 아담하고 멋진 집에서 쫓겨날 것 같습니다. … 이 집에서 참으로 편히 작업해왔는데”(1876. 7. 25)라고 적었습니다. 또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밤만 더 지나면 아르장퇴유를 떠나야 하네. 그러기 전에 빚을 갚아야 할 텐데”(1877. 1. 15)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네는 1877년 초 파리의 몽세이 17번지 아파트로 화실을 옮겼는데, 그곳은 루앙, 노르망디, 아르장퇴유로 가는 기차역 생라자르 근처로서 마네가 1860-70년대에 살았던 지역입니다.
모네의 <생라자르 역, 도착한 기차 Gare Saint-Lazare, Arrival of a Train>, 1877, 유화
생라자르 역은 카페 게르부아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1876년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모네는 이 역을 주제로 여러 점 그렸습니다. 유리로 된 거대한 역 구내, 흰 증기와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기관차, 연신 기차가 들고 나는 역 구내에서 보이는 맑은 하늘과 검은 기관차는 대비를 이룹니다. 모네는 그의 특유의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 이리저리 이젤을 옮겨 세우고 동일한 모티프를 달리 표현했습니다. 아르장퇴유에서 그는 이미 철로와 기차 그리고 기차가 방사하는 연기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기상조건 속에서 바라보는 역의 모습은 각기 다른 한 폭의 그림입니다. 그는 1876-77년 겨울에 그린 시리즈 8점을 1877년 4월에 열린 제3회 인상주의전에서 선보였습니다.
모네의 <유럽의 징검다리 The Pont de l'Europe>, 1877, 유화, 64-81cm.
모네의 <생라자르 역, 바깥 장면 La Gare Saint-Lazare, Vue Exterieure>, 1877, 유화, 64-81cm.
모네의 <생라자르 역 외관, 시그널 La Gare Saint-Lazare, a l'Exterieur, Le Signal>, 1877, 유화, 65-81.5cm.
모네는 그해 1월 생라자르 역 안에 들어가 그려도 좋다는 역장의 허락을 받고 4월까지 12점이나 그렸습니다. 그것들 중 세 점을 카이유보트가 소장했는데, 아파트를 얻어준 대가로 받은 것 같았습니다. 생라자르 역은 에밀 졸라의 소설 『인간이라는 짐승』(1889-90)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서 졸라는 리종이란 명칭의 증기기관차를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모네는 정거장 연작을 그리면서 시간에 따라 빛이 변화를 일으킬 때마다 색을 달리 사용했습니다. 그의 화면에 나타난 빛과 기차가 방사한 연기는 터너의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추상적 색조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역과 역 밖의 두 세계를 병렬했는데, 파란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색으로 역 밖의 세계는 장밋빛과 금빛으로 묘사했습니다. 흩어지는 기차 연기는 도시의 에너지와 동력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생라자르는 모네에게 아주 낯익은 곳으로 그가 르아브르에서 파리로 올 때 이 역에서 내리곤 했습니다.
그해 4월에 개최된 제3회 인상주의전에 모네는 <칠면조>, 몽제롱에서 그린 그림들, 파리의 공공 유원지를 그린 그림들, 생라자르 역을 주제로 한 그림 8점을 포함하여 모두 30점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를 카이유보트가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이 전시를 관람한 평론가 샤를 비고는 모네의 그림에는 “예술가 내면의 느낌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인생의 교묘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영상이 부재하고, 예술가와 인간에 관해 제시할 수 있는 주제의 선택도 없다. 그의 그림에는 혼과 정신이 부재한다”고 평했습니다. 폴 세잔도 <빅토르 쇼케의 초상>244을 포함하여 17점을 출품했는데, 이 역시 『르 샤리바리』의 평론가로부터 혹평을 받았습니다.
“임산부와 함께 전시회에 간다면 세잔 씨의 남자 초상화 앞을 빨리 지나치도록 하십시요. … 머리와 구두색깔은 너무 기괴해서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것이며 태아는 태어나기도 전에 황열병에 걸릴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드가의 친구인 소설가이면서 평론가 루이 에밀 에드몽 뒤랑티, 마네의 친구 테오도르 뒤레, 평론가 조르주 리비에르 등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리비에르는 세잔의 작품을 극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세잔의 <수욕도>를 냉소하는 자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멋대가리 없다고 비판하는 야만인과도 같다.”
평론가들이 주제에 대한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네에 의해서였습니다. 모네는 자신이 본 것을 충실하게 재현했을 뿐 어떤 의미도 그림에 삽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관찰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족했습니다. 그는 누드를 그린 적이 없었으며, 인물을 그리더라도 모델의 심리상태나 얼굴에 나타난 개성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네의 작품이 진전된 사실주의라는 점을 먼저 안 사람은 졸라였고, 조르주 클레망소가 졸라의 의견에 동감했습니다. 졸라는 『마르세유의 신호대』(1877. 4. 19)에 기고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이 그룹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금년 들어 그는 기차역 풍경을 담은 수작을 몇 점 선보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기차의 굉음이 들리는 듯하며 증기가 거대한 역 내부를 뒤덮으며 뭉실뭉실 떠가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여기 이 아름답고 널찍한 현대 캔버스 속에 오늘날의 그림이 담겨 있다.”
모네의 <센 강둑, 라 그랑자트 섬 Les Bords de la Seine, Ile de la Grande Jatte>, 1878, 유화, 54-65cm.
모네의 부채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습니다. 그는 1878년 1월 카미유와 장을 데리고 아르장퇴유를 떠나 파리의 데댕부르 가 26번지에서 몇 달 지내면서 여전히 몽세이의 화실에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그랑자트 섬이 바라보이는 강둑에서 그곳 풍경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그해 봄에 1874년부터 그린 그림 16점을 경매에 붙였는데, 한 점에 2백 프랑 미만에 팔렸으므로 그의 평생 최악의 상태였고, 스스로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이 시기에 카미유의 건강이 몹시 나빴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가 미술품 수집가 에르네스 메에게 보낸 편지는 눈물겹습니다.
“아내가 3월 17일에 둘째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돈이 없어 산모와 아이의 병원비조차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1878. 3. 30)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의 출생등록 증인이 되어 준 마네가 이번에도 앞장서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미셸을 낳은 후 카미유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